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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세 시기
16~21세기의 정치경제와 지정학
마크 쎌던 Mark Selden
미국 코넬대학 동아시아 프로그램 선임연구원, 웹저널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코디네이터. 최근 저서로 War and State Terrorism: The United States, Japan, and the Asia-Pacific in the Long Twentieth Century (공저), China, East Asia and the Global Economy: Regional and historical perspectives (공저) 등이 있음.
- 이 글의 원제는 “East Asian Regionalism and its Enemies in Three Epochs: Political Economy and Geopolitics, 16th to 21st Centuries”이며,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에 2009년 2월 25일 게시된 원문을 저자가 간추려 보내준 축약본의 번역이다. 인용 주를 비롯한 이 글의 원문은 http://japanfocus.org/-Mark_Selden/3061에 게재되어 있다. ⓒ Mark Selden 2009 / 한국어판 ⓒ (주)창비
1. 동아시아 지역주의: 18세기
19세기 내내, 그리고 20세기 들어와서도 한동안 동서양 양측에서는 모두 역동적인 서구의 세계질서를 우위에 놓고 내향적이고 보수적이며 나약한 동아시아가 서구 자본주의와 군사적 우위 앞에 무너졌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귀결이 식민열강과 그 계승자들의 시각을 실체화시키는 유럽중심적인 세계관이었다. 상당수의 논문들에 끈질기게 퍼져 있는 본질주의적 전제는 서구의 우월성이 역사적 불변이어서 한번 정해진 이상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년에 부상한 대안적 패러다임 중 하나는 중국이 경제적·지정학적으로 단지 동아시아 지역질서에서만 지배적인 중심이 아니라1 적어도 16세기에서 18세기, 그리고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서구열강이 총력을 다해 들어오는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전지구적 정치경제에서 주역으로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동아시아와 세계경제를 중국을 중심에 놓고 살피는 시각을 구체화한 작업이 중국학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일본과 미국의 연구자들로부터 먼저 나왔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내가 제안하는 것은 19세기에 유럽식민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되기 전까지는 동아시아가 세계의 하나의 중심이었다는 점과 관련하여 유럽중심적 시각과 중국중심적 시각 두가지 모두를 다시 생각해보고, 19세기 이후의 지역적 재구조화를 살피면서 유럽중심주의와 선을 긋는 대안적 시각이 오늘날 지닌 의미를 고찰해보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중국-일본-한국의 관계와 전지구적 시각에서 동아시아가 차지하는 위치를 염두에 두겠다.
우선 하마시따 타께시(濱下武志), R. 빈 웡(R. Bin Wong), 케너스 포머랜츠(Kenneth Pomeranz), 스기하라 카오루(杉原薰), 앤서니 레이드(Anthony Reid), 안드레 군더 프랑크(Andre Gunder Frank)의 저작을 참조해보면 유럽 자본주의가 동튼 16~18세기에 동아시아는 그 자체로 뚜렷한 특징을 지닌 활기찬 경제적·지정학적 지대의 중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2 동아시아 질서의 두가지 요소가 어울려 뚜렷이 구별되는 지역적이며 전지구적인 특색을 만들어냈다.
첫째, 동아시아 세계의 정치경제와 지정학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 중 하나가 중국 중심의 조공무역 질서인바, 이것이 공식적인 국가적 유대를 통해 협상된 계약에 따라 이뤄지는 한편, 조공사절단의 주변부에서 수행된 비공식적인 교역에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 체계를 추동한 또다른 요소는 넓은 범위에서 이뤄진 합법 및 불법 교역으로, 이 중 상당부분이 중국제국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항구도시들을 이어주었다. 한국, 베트남, 류우뀨우(琉球)열도, 그리고 중앙·동남아시아의 수많은 왕국들이 중국과의 조공무역에 활발히 참여한 반면, 일본은 17~19세기에 조공사절단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이 해적질로 규정한 연안무역 외에도 중국과 일본의 교역은 류우뀨우열도와 홋까이도오(北海道)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졌을 뿐 아니라 나가사끼(長崎)를 통해 직접적으로도 계속되었다. 한마디로 청나라와 토꾸가와(德川)의 통치에 의해 국가간 교역이 규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공무역과 비공식적인 연결망을 통해 동아시아의 교역이 지속되면서 이 지역의 경제적 활력을 떠받쳐주었다.3
둘째, 16세기 이래 은(銀) 교환을 매개로 동아시아가 세계경제와 연결됨으로써 중국과 동아시아지역의 경제는 물론 동서 교역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여타 제품들 가운데에서 차, 비단, 도자기, 아편의 대금을 지불하기 위한 은의 이동은 마닐라를 주요 운송항으로 하여 유럽과 아메리카를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 결속시키는 데 결정적이었다. 실제로 아메리카에서 중국으로의 대규모 은 유입은 16세기에 시작되어 17세기 중반에 정점에 오르면서 세계 주요 지역들을 연결하고 아시아 내의 교역과 중국 경제를 변화시켰다. 하마시따, 포머랜츠, 레이드가 은을 중심으로 상술하는 이야기의 시작은 아편대금으로 인해 은이 빠져나가는 한편 아편전쟁에 패하면서 중국과 아시아가 서구열강이 정한 조건에 따라 억지로 개방하여 조약항을 내주고 그곳의 치외법권을 허용함으로써 중국이 주권을 상실한다는 등의 과정에 얽힌 숱한 재앙들이 아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전지구적 교역에서 중국이 주도하며 아시아 내의 상업이 번성하던 그 이전 시기에서 시작한다. 1450~1680년의 중국과 동남아시아 교역을 전지구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레이드에 따르면, “이 시기 상업의 교역양상을 동남아시아 입장에서 보자면 인도로부터 옷감, 아메리카와 일본으로부터 은, 중국으로부터 동전, 비단, 도자기, 기타 제조품을 수입하고 그 대신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내온 후추, 향료, 방향목, 수지(樹脂), 도료, 별갑(鼈甲), 진주, 사슴가죽, 설탕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아시아의 다른 지역, 유럽, 아메리카로부터 엄청난 양의 은이 비단, 차, 도자기, 기타 제품과 교환되어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은은 유럽 중심의 역사를 해체하고 중국의 경제와 사회의 깊은 내적 변화를 그려보는 수단일 뿐 아니라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의 연결고리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16세기 이래 은의 전세계적 흐름을 추적해보면,‘신대륙’발견에 이어 유럽으로 유입된 은이 다시 아시아로 흘러갔다는 식의 단선적인 세계사 개념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하마시따가 보여주듯, 아시아의 은 시장과 유럽-아메리카의 은의 역학관계가 접목되어 세계금융의 흐름을 형성하고 교역을 촉진하여 16, 17세기의 무역팽창을 낳았다.
신대륙에서 은이 발견되기 훨씬 전부터 아시아는 큰 규모의 지역적 은 유통의 중심이었고 대부분 은의 흐름은 18세기초 내내 유럽 및 북미와의 관계에서 중국이 누린 제조업의 우세에 의해 결정되곤 했다. 중국보다는 다소 늦지만 한국, 일본, 베트남에서도 은이 중요한 교역매체가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인식하면 서구의 상인과 교역업자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여 이들을 세계교역 전반, 특히 은 유통의 추진력으로 보는 시각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은은 다섯 세기에 걸쳐 중국, 아시아, 세계경제를 엮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런 해양적 시각은 오랫동안 지배적이던 국가중심, 특히 토지중심의 내향적인 중국 연구와 대조된다.
조공무역 체계와 은의 중요성 그 이상을 보게 해주는 것이 공간적인 통찰력으로, 일국적인 경제와 국가정책보다는 자유항과 그 내륙지방에 더 중점이 놓인다. 그것은 육지와 바다, 연안과 내륙, 항구도시와 그 내륙지방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공간적 이해를 요하는 접근방법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아시아간 교역에 대한 논의를 조공무역 질서라는 공식적인 매개변수에 한정할 수는 없겠다. 예컨대 류우뀨우열도가 중국의 조공무역 관계에 의해 통제된 후추와 기타 생산품을 획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중국과의 조공무역 관계에 참여한 한편, 류우뀨우열도 상인들의 교역은 적어도 15세기 이래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태평양제도 전역에 널리 뻗어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놀라 쿡(Nola Cooke)과 타나 리(Tana Li)가 조명하듯 독자적인 교역 양상이 18세기에 중국의 남부 해안과 인도차이나를 연결하는 “해양 변경”을 낳음으로써 메콩지역의 역내 경제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중국, 베트남, 한국, 류우뀨우열도, 내륙아시아, 도서(島嶼)로 이뤄진 동남아시아 사이에 존재한 조공무역 이외의 연결망을 더 자세히 파악해보면 공식적인 조공사절단과는 독립적으로 혹은 그 가장자리에서 지역의 경제적 연결을 강화해준 광범위한 교역망이 존재했음이 잘 드러날 듯하다. 그런 접근방법이 단지 조공무역 체계에 대해서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장기 20세기(long twentieth century)가 진행되는 과정, 특히 1980년대 이후 중국의 경우에 국가의 중앙통제를 벗어나 상당히 자율성을 띠는 세계도시(global city) 네트워크가 새로운 활력을 띠고 나타나는데 이를 조명하는 현재의 연구에도 위와 같은 접근방법이 새로운 시각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의 한창 때, 대체로 유럽이 지속적인 전쟁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는 동안, 동아시아의 상당수 지역들은 조공무역 질서를 기반으로 오랫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조공무역과 민간무역이 지역질서의 윤활유가 되었다면 일본, 한국, 류우뀨우열도, 베트남의 신유교질서적 공통점들 역시 도움이 되었다. 18, 19세기 유럽의 식민주의와 대조적으로 이러한 중국 중심의 질서는 그 이웃국가들에 동화를 덜 요구했고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착취가 덜했으며 한창 때에는 장기간에 걸쳐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상당 지역에 전반적인 평화를 담보해주었다.
요컨대 이 지역질서의 뚜렷한 특징은 중국이 조공무역질서를 통해 평화와 안정을 장려했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이 직접적인 보조를 통해 이 지역의 우호적인 통치자들이 지속적으로 물자들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여타 국가들 중에서 특히 한국, 베트남, 류우뀨우열도와 수지맞는 교역을 할 수 있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통치체제를 인정해주었음을 의미했다. 토꾸가와 통치기(1600~1868) 내내 중국에 조공사절단을 보내지 않은 일본조차도 류우뀨우왕국을 복속시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조공질서를 구축하는 한편 류우뀨우의 조공사절단을 막후에서 지배하여 중국과의 수지맞는 교역을 확보하기 위해 이 체계에 가담했다. 마찬가지로 베트남 역시 라오스와 하위 조공관계를 수립했다.
장기지속(long durée)의 관점에서 보자면,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동안 세계경제에서 아시아의 다른 지역, 유럽, 북미에 연결되어 번영하던 동아시아에 위의 방식이나 여타 방식을 통해 이 지역 나름의 독특한 정치경제가 나타났다. 쏠(S. B. Saul), 갤러거(J. Gallagher), 로빈슨(R. Robinson), 플랫(D. C. M Platt)이 제기한 제국주의 재평가에서 아시아를 다룰 때 그 역동성을 경시하고 다분히 부정적이거나 배타적으로 반응하며 대개의 서구 동양학자들이 그렇듯 동서양의 이분법 내에서 동양을 처리해버리고 마는 경향에 비춰보면 이러한 시각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띤다.
지금까지 우리의 논의는 장기 18세기 동안 진행된 조공, 교역, 기타 경제와 금융의 메커니즘에 초점을 두었다. 여기에서는 유럽제국주의의 맹습 이전에 이 지역질서가 띠고 있던 다른 특징들에 대해서 간략하게만 열거해보자.
마크 엘빈(Mark Elivn)이 중국이 고수준 평형상태의 덫에 걸려 있다고 보았다면, 스기하라 카오루와 케너스 포머랜츠는 18세기 중국과 일본의 핵심지역의 경우 그 소득과 소비 수준이 서유럽과 북미의 경우에 비견할 만하거나 더 높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하야미 아끼라(速水融)와 얀 더프리스(Jande Vries)가 통찰한 일본과 네덜란드의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에 따르면, 노동집약적 발전에 바탕을 둔 중국과 일본의 독특한 기술적·제도적 경로는 제국의 시대에 국민국가의 진군을 밀어붙이기 위해 18세기 영국에서 출현한 자본집약적 방식과 대조된다.
청 통치 아래의 중국제국을 장기 18세기 동안 동아시아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강국으로 볼 수 있는 이유 세가지를 들라면, 우선 그 지역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지속된 평화를 이끌면서 역내 체제들에 선택적으로 정통성을 부여해준 최강국이었다는 점, 또한 선도적인 제조수출국이자 세계 은의 집결지였다는 점, 그리고 일본, 한국, 베트남, 류우뀨우 및 그밖의 지역에서 신유교적인 사상과 치국책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에서 드러나듯 문화-정치 규범을 전파했다는 점 등이다.
2.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종말: 1840~1970
19세기초 청의 붕괴로 인해 서구 제국주의 강국이 중국과 동아시아에 맹습해 들어올 무대가 마련되는 한편, 동아시아와 내륙아시아를 거쳐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로까지 뻗어 있던 지역질서와 그간 지속된 평화는 끝났다.
중국 내부가 무너지고 외국의 침략자들에게 난타를 당하면서 19세기 후반부터 수천만의 중국이민자들이 아시아와 세계로 펴져갔다. 만주, 동남아시아, 아메리카 등지로의 이주 시점은 청제국이 해체되고 서구와 일본의 식민제국이 건설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해외 이민자와 상인들이 중국 남부의 해안지역으로 은을 송금하기 시작하면서 국내와 해외의 중국인 은행망의 토대가 이주를 통해 창출되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초기의 상품유통에서 은의 유통, 사람의 이동, 상품과 은의 중국 역유입 등으로 순차적으로 전개된 양상이다. 최대 다수의 이주민이 중국인이었다면 상당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역시 아시아의 다른 지역, 그리고 하와이와 아메리카까지 이주해 갔다. 각 집단은 노동, 송금, 자본의 새로운 네트워크와 흐름을 창출했다. 이 지역에 정치경제적으로 발전할 토대가 있었음에도 그 발전은 지정학적인 측면에 의해 밀리고 말았다. 일본의 경제가 솟구치는 동안, 아시아의 많은 지역은 식민강국들에 종속되어 다자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차단당한 채 새로운 양자적 구속에 묶여버렸다.
19세기 후반부터 중국이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반란으로 와해되면서 서구열강과 일본에 의해 분할되었고, 동남아시아의 상당지역이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에 의해 식민화되는 한편, 20세기의 첫 10년이 지날 무렵에는 한국, 대만, 류우뀨우열도가 일본제국에 병합되었다. 이로써 이전에 조공무역질서와 민간교역을 바탕으로 지속되었던 18세기의 평화가 지나가고 한 세기 내내 식민지 내부 갈등과 본국-주변부의 양자적 관계가 이어지면서 긴밀한 지역경제는 다시 부상하지 못했다.
19세기의 마지막 몇십년과 20세기 초에 일본과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으로 팽창해간 것은 훗날 두 제국의 충돌로 귀결될 과정의 서곡이었다. 20세기 초반에 일본은 동아시아의 지배강국으로 부상하면서 19세기에 이 지역을 변화시킨 유럽중심의 식민질서에 도전했다. 1872~1932년에 진행된 류우뀨우열도 장악, 홋까이도오 병합, 대만과 한국 식민화, 러일전쟁 승리, 만주괴뢰국 수립 이후 10년에 걸쳐 마침내 중국과 아시아의 넓은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일본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에서 식민강대국 집단에 진입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일본의 팽창으로 대만, 한국, 만주, 그리고 (일본이 정복을 마무리하지는 못했지만) 중국까지 모두 침략과 점령, 식민지화를 겪었다. 일본으로 인한 아시아의 상황을 ①경제발전과 사회변화 ②전쟁, 민족주의, 반식민주의 ③지역의 역동성 및 지역과 세계경제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서구 식민열강과 마찬가지로 일본은 자국의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자연자원과 인적자원을 파내갔다. 이와 동시에 중국의 조공무역질서나 서구의 식민질서가 아시아의 여타 지역에서 수행한 것보다 훨씬 강도 높게 식민지의 농업과 산업의 발전을 촉진했다. 특히 한국, 대만, 만주국의 경우가 두드러진 예이다. 일본은 1920년대와 1945년 사이에 (한국, 대만, 중국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일본과 그 식민지에서 제국의 가장 먼 변경으로 대규모 이주가 이뤄지도록 통할했고 1931~45년에는 특히 만주국으로의 대규모 이주를 주도했다.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이 보여준 바처럼, 1913~38년에 대만과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 증가는 각각 2.2%, 2.3%였으며 이때 일본은 2.3%였다. 이 수치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다른 모든 식민지들에 비해 상당히 높으며 아마도 라틴아메리카, 카리브해, 아프리카의 식민지들과 비교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놀랍게도 1938년경에 이르면 한국과 대만의 1인당 국민총생산은 각각 제국 본국인 일본의 53%, 60%에 이르렀다. 비교참조를 위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의 아시아 식민지들의 경우를 보자면 10~25%에 머물렀을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 일본 식민지에 대한 개발효과와 본국과의 경제적 통합 수준은 유럽 혹은 미국 식민지들의 경우보다도 훨씬 컸다.
일본과 그 식민지 및 보호령 사이의 교역은 빠르게 확대됐다. 19세기 말에서 1930년대 말 사이에 만주국, 한국, 대만의 교역은 (많은 경우 중국에서 벗어나 일본 쪽으로) 모두 극적으로 재조정되었다. 쌔뮤얼 호(Samuel Ho)가 주목하듯, 쌀과 설탕이 주력 제품인 대만의 대일본 수출은 식민지화가 진행되는 1895년에 수출 총량의 20%에서 1930년대 말에 이르면 88%에 달했다. 1930년대말 일본제국에 대한 무역의존의 사례 중에서 이와 비교가능한 한국의 경우 그 상황은 눈에 띄게 유사하다. 하지만 식민지들 사이의 경제적 유대는 줄곧 미약했는데 이는 상보성이 부족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일본 본국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이 유럽 식민열강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바퀴살들이 중심으로 귀속되는 바퀴살 양상의 교역방식을 아시아에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및 보호령들 사이에 교역의 상보성이나 기타 형태의 경제적 통합의 발전이 애초부터 가로막혔다.
청제국과 대조적으로 제국주의 일본은 식민지의 피정복 민족들, 특히 한국인, 대만인, (중국인, 몽고인, 회교도인 회족回族, 만주인을 포함하는) 만주 지역의 여러 민족, 류우뀨우인을 직접 동화시키려 했다. 식민지인들은 정복자의 언어로 교육되고 일본 (혹은 만주국)의 시민과 신민으로 동화되도록 혹독하게 강제되었는데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지역의 경우에 유난히 그러했다. 이 모든 점들에서 일본은 조공무역질서 시기에 동아시아가 지니던 양상과 완전히 결별했으며 동화의 정도를 보아도 일본의 식민화는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와 구별되었다.
1930년대에 일본은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그 대신 국가자원을 쥐어짜내야 했고 유럽과 미국의 세력으로부터 점차 소외되었으며 중국과 다른 열강들의 유대를 강화해주는 댓가를 치러야 했다. 이 시기의 이정표가 되는 사건들이 1932년 만주국 병합, 1937년 중일전쟁, 1939년 노몬한(Nomonhan) 사건(만주와 몽골의 국경지대에서 일본이 소련군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옮긴이), 미일간의 갈등 심화 등이다. 1940년에 이르러 미국이 석유와 고철의 금수(禁輸)조치를 단행하자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일본은 진주만을 침공했다. 이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에서 유럽과 미국의 식민열강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1940년대 초에 절정에 이른 일본의 거대한 아시아제국과 범아시아 질서추구는, 그전에 일본이 유럽이나 아메리카와 유지하던 강한 경제적·문화적 유대가 제국주의경쟁에 의해 깨어짐에 따라, 독단적 전제정치의 극단적 예로 귀결되고 만다. 과거 메이지 일본이 근대화와 번영의 희망을 서구열강들과의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유대 및 경쟁적 따라잡기에 걸고 있었다면 이제 세계경제의 핵심지역으로부터 격리된 채 여러 전선에서 강력한 적들에 맞서 싸우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더 일찍이 펼쳐져온 조공무역질서 덕분에 18세기의 동아시아가 누린 지속적인 평화와 가장 현저하게 대조되는 것이 아마도 제국주의의 세기 내내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확산되고 2차대전의 여파로 계속 이어진 영구적인 혼란일 것이다. 이같은 상황이 일본이 상승하는 반세기 동안에 유난히 두드러졌는데 우리가 지금 강조하는 것은 이런 혼란이 2차대전 이후 몇십년까지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때 2차대전이 아무리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해도 전쟁의 종결은 동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오기는커녕 새로운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로 가는 길을 닦은 셈이었으며 이 과정은 미국이 아시아로 진출해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고 한 과정과 정확히 궤를 같이했다.
식민지시대가 아시아 민족들에게 남긴 것 중에 우리는 다음 세가지 중요한 유산에 주목한다. 첫째, 식민전쟁과 세계대전이 불러온 대규모의 혼란, 파괴, 인명피해이다. 둘째,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 혁명을 향한 자극이다. 이러한 혁명의 자극은 러일전쟁부터 1942년 동남아시아 점령에 이르기까지 서구열강에 맞선 일본의 승리를 목격하고 이어서 다름아닌 일본의 패배를 보면서 촉발되었다. 이는 이후 여러 민족들의 독립운동, 그리고 태평양전쟁에 뒤이은 새로운 국민국가의 형성을 추동하게 된다. 셋째는 일본의 식민지와 보호령, 특히 한국, 대만, 만주국에 불러일으킨 경제발전과 산업화를 향한 자극으로서 이후 이 지역들의 경제 성장에 기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학파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2차대전을 20세기 아시아와 전지구적 지정학의 주요 분수령으로 여겨왔으며 실제로도 너무나 많은 점에서 그러했다. 2차대전은 일본제국이 패망하고 해체되며, 뒤이어 미국이 아시아 태평양 및 전지구적으로 지배강국이자 주요 군사대국으로 부상하는 분기점을 이뤘다. 그것은 또한 민족주의에 의해 고무된 혁명과 독립운동에 계기를 마련해주거나 활력을 불어넣어 아시아의 정치적 지평을 바꾸어놓았다. 중국, 베트남, 한국의 혁명이 전후 동아시아의 이정표적 사건이라면 필리핀, 말레이시아, 네덜란드령 동인도, 버마, 인도 등의 독립운동은 아시아의 다른 지역들에 큰 변화를 유발하며 고전적인 식민제국의 종말을 알렸다.
그러나 아시아의 지역주의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것이 1945년의 분할에 닿아 있는 연속성들이다. 2차대전의 종결이 평화의 시대를 열기는커녕 새로운 전쟁의 파고를 몰고 온 탓에 이후 25년 내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세계 갈등의 주 무대가 되었다. 한쪽에서는 미국이 일본과 남한을 점령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중국, 한국, 베트남에서 혁명전쟁이 벌어지는 틈바구니에서 독립국가들이 세워졌으며 그 뒤를 이은 전쟁들은 아시아인들의 삶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중국, 한국, 베트남의 전쟁과 혁명은 시종일관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진 갈등의 범위 내에서 전개되어 분단국가들을 만들어냈으며, 2차대전의 여파에 따른 분할을 고착시킨 결정적인 사건들이다. 새로운 국민국가, 아니 국민국가의 파편들은 초강대국 중 하나, 즉 미국 아니면 소련과 주된 관계를 맺었다. 이 두 나라와의 관계가 전쟁 직후의 몇십년 동안 아시아 각국의 국제관계를 규정짓는 데 관건이 되었다. 간략히 말해, 식민지에서 벗어난 아시아는 식민주의의 세기와 마찬가지로 거대 강국 중 하나와 맺은 양자적인 결속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기에 아시아 내의 다자적 유대는 대체로 결여되었다. 이런 전후(戰後)의 혼란은 이전 세기와 다르지 않아서 아시아 국가들 혹은 아시아 사회들 간의 수평적 유대가 실현될 여지는 적었다.
3. 동아시아의 경제적 부활, 상보성, 지역주의의 새싹들
일본과 한국의 급부상에 이어 중국의 빠르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동아시아의 발전을 가장 잘 이해하려면 이를 분리된 국민국가들에 나타나는 일련의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지역적이고 전지구적인 역동성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경제발전뿐 아니라 지정학과 문화교류에도 똑같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970년에 동아시아지역의 새로운 가능성과 전지구적인 권력재구조화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의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열린 미국과 중국의 상호이해 및 경제관계가 2차대전 이후 아시아에서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동서양의 관계를 특징지은 분할을 종식시키는 길을 연 것이다.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들어가고 무엇보다도 미국시장 접근을 통해 재부상하여 마침내 동서 교역과 투자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아시아 전역에서 경제적·정치적 유대가 다시 짜이고 아시아와 세계경제의 연결이 강화되는 길이 열렸다. 뒤이은 몇십년 동안에 이뤄진 중대한 발전들로는 중국이 아시아와 세계경제를 추동하는 작업장이자 동력으로 부상하기 위해 주력하고 있으며, 중일 및 한중 관계가 깊어지거나 열리는가 하면, 교역과 투자에 있어서 중국을 아시아 및 다른 경제권과 연결하는 화교의 역할이 확대됐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베트남(1975)과 독일(1989)의 재통일에 이어 중국이 홍콩(1997) 및 마카오(1999)와 재결합하면서 남북한 분단과 양안 분단만이 2차대전과 이후의 갈등이 국민국가에 남긴 주요한 분열로 남아 있다. 더욱이 이 두 분단상황 역시 1990년대 이래로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전지구적인 (특히 미국과 중국의) 상호연결과 (양안 관계는 물론 한·중·일 관계라는) 지역적 관점에서 볼 때, 이같은 깊은 변화들은 지정학과 정치경제가 맞닿은 경계면을 잘 보여준다.
1970년 미국과 중국의 상호개방 이후에 가능해진 주목할 변화들 가운데에는 중국과 대한민국의 관계가 열리고 깊어졌다는 점이 있다. 한국전과 베트남전에서 중국과 싸운 남한은 반공주의의 메카에서 벗어나 중국의 가장 중요한 교역과 투자 상대국 중의 하나로 부상했으며 1980년대에 시작된 교역과 투자는 이후 눈덩이처럼 커져가고 있다. 앞으로 몇십년 안에 중국, 남한, 일본은 서로 주도적인 교역과 투자의 상대가 될 것이며 심지어 미국과의 유대마저 의미심장하게 넘어설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의 통계에 따르면, 이 나라들은 2007년에 각각 세계 2위, 4위, 14위의 경제강국이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지역발전은 대만과 중국을 잇는 교역, 투자, 기술의 협력이다. 20년도 못되어 대만의 첨단기술 생산은 해협을 건너갔다. 노동자, 기술자, 관리자와 그 가족 등 대략 100만명의 대만인이 현재 중국 본토에서 일하며 살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꽝뚱(廣東), 푸젠(福建)과 특히 대만사업의 중심지인 샹하이(上海)-쑤저우(蘇州) 회랑(回廊)지대에 몰려 있다. 대만의 자본과 기술은 중국의 산업화와 수출촉진 정책에 중추적이다. 이같은 양안 유대는 2008년 총통선거에서 국민당의 마 잉주(馬英九)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그 예들은 직항운송과 우편연계가 개시되고, 석유개발 협약이 조인되었으며, 중국이 국내의 대만 기업들에 190억 달러 상당의 종합적인 융자 편익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항공기 정기편까지 취항된 데서 잘 드러난다. 이 모든 요소들은 경제·사회·정치 통합의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음을 암시한다.
북미와 유럽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국인들의 중요한 역할을 포함하여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중국의 자본, 기술, 노동의 역할은 크고 다각적이어서 이를테면 투자, 기술이전, 네트워크 구축뿐 아니라 태평양을 가로지르고 아시아 전역을 오가는 노동력의 이주 등 그야말로 모든 영역의 활동들에 걸쳐 있다. 미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중국도시들을 드나드는 이동을 상호연결하는 지점에 해당한다.
훨씬 더디지만 이와 비교할 만한 진전이 이루어진 덕에 남북한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렇지 않아도 쉽지 않은 이 과정이 훨씬 더 어려웠던 것은 미국이 한국전을 종결지을 평화조약에 서명하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북한을 격리시키려고 한데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2000년에 성사된 김대중과 김정일의 정상회담이 중대한 변곡점으로 작용함으로써 남북간의 격렬한 적대감은 수그러들고 화해와 경제통합의 노력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2008년 남한의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고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뇌졸중을 앓는 바람에 화해가 더뎌지다가 급기야 멈추고 말았다. 이는 한반도 정치에서 양측의 관계가 매우 취약하고 분단의 골이 깊다는 것을 말해준다.
1970년대 이래 아시아 내부의 다자간 무역과 투자가 증가하면서 이 지역이 유럽 및 미국과 맺는 유대도 커졌다. 동아시아의 무역수지 흑자국들과 세계의 일등 적자국인 미국 사이의 무역은 오늘날 세계경제질서의 특징적인 양상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 일본, 한국이 일군 엄청난 흑자는 미국 무역의 대규모 적자의 가장 큰 부분이 어디서 생겼는지를 설명해주는 한편, 이 나라들은 이 나라들대로 미국이 계속 분에 넘치게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왜냐하면 잉여 달러(2008년 12월 기준 중국의 경우 2조달러 이상, 일본의 경우는 훨씬 더 큰 규모)가 주로는 미국 재무부가 발행하는 장기채권의 형식이지만 직·간접 투자의 형식으로도 미국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미 재무부에 따르면 2008년 11월 기준 6820억달러를 보유한 중국과 5770억달러를 보유한 일본이 달러보유국 세계 1, 2위를 차지하는데 둘을 합치면 전세계 총 달러량인 3조 1000억달러의 40%에 육박한다. 중국과 일본이 지난 5년 동안 미국의 장기채권을 사들인 덕분에 미국의 이자율과 위안-달러 환율, 엔-달러 환율을 붙잡아둔 채 세 나라 모두 무역과 경제를 끌어올릴 수 있었고, 미국의 경우는 제조업 일자리가 가차없이 계속 중국으로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이라크전과 아프간전의 비용을 댈 수 있었다.
중국이 세계경제에 재진입하고 동아시아가 1970년대 이래 상호연결되며 역동적인 경제권을 형성하게 된 과정은 전지구적 중요성을 지닌 두개의 주요한 발전과 일치하며 또 그것들로 인해 가능했다. 첫째, 1940년대 이래 필리핀, 말레이시아,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지에서 벌어진 독립투쟁과 함께 태평양전쟁 이후 중국, 한국, 인도차이나에서 혁명전쟁이 줄줄이 발발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초고강도로 형성된 전지구적인 규모의 주요 교전지역이 중동과 중앙아시아로 옮겨갔다.4 아시아 내의 정치는 여전히 분란이 많지만 아시아권의 경제는 1970년대 이래 전반적인 평화 속에서 성장하면서 문화와 경제의 교류를 넓히고 동아시아 전역의 긴장을 완화했다.5 둘째, 중국이 세계경제에 완전히 진입하게 된 시점은 전후 전지구적인 경제팽창이 종결되고 꼰드라띠예프(Kondratiev) 파동의 B단계가 시작되면서 미국이 세계경제의 팽창을 통해 경제 붕괴를 막을 방법을 강구하던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 세계경제에는 비록 산업의 활력과 경제성장률이 곤두박질치고 경제가 금융과 써비스 부문에 전례없이 더 의존적이 되기는 했으나 중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식민지시대 일반, 그리고 1930~45년 당시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과 비교하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선, 유럽과 미국, 일본의 식민지들을 본국과 연결하고 2차대전 전과 종전 초기에 의존적 관계를 형성한 압도적인 양자적 경제관계를 최근 몇십년 동안 중국, 일본, 한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을 포괄하며 빠르게 성장한 다자간 교역 및 투자의 흐름과 대조해볼 수 있다. 세계교역이 연 9.5% 팽창한 1988~2004년에 유럽연합의 성장률이 9%였던 데 비해 동아시아내 교역은 연 14% 성장했다. 이 기간에 세계교역에서 유럽연합이 차지하는 비중이 3% 감소한 반면, 동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6% 증가했다.
둘째, 1942~45년에 동아시아가 자급자족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1970년대 이래 이 지역은 전지구적인 교역, 금융, 투자의 연결망으로 완전히 엮여들게 되었다. 물론 다른 많은 지역들 역시 그렇기는 마찬가지다. 아시아 내부의 요소들이 일차적인 중요성을 띠기는 하지만 동아시아가 하나의 지역으로 떠오른 것은 전지구적 요소들, 특히 아시아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역할 때문이다. 대전 직후 몇십년 동안 미국이 맡은 주요 역할은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국제연합 등과 같은 세계기구의 형성에 국한되지 않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분할 조직하고 이 지역을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빠져들게 하며 다자간 관계보다는 양자적 관계를 우선시하도록 다잡는 데서도 핵심적이었다. 1970년대 이래 변화된 미국의 역할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소생을 촉진했을 뿐 아니라 이전 시기의 동서 갈등에 내재한 분열 가운데 적어도 어떤 것은 좀더 용이하게 넘어서게 하였다.
두 세기에 걸쳐 다자적 유대가 실제적으로 부재한 상태에서 불평등한 양자적 관계가 가장 우선시된 양상에 비춰볼 때 최근에 선도적으로 치고나오는 수많은 다자적 관계는 동아시아지역의 지정학적 변화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8세기 이래 두세번, 그리고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중국은 지역적인, 심지어 전지구적인 중요성을 띤 지정학적 주도권을 쥐고 앞서가고 있다.6 중국이 주최국이자 어쩌면 주도적인 강국으로서 참여하고 있는 6자회담은 마침내 돌파구를 마련하여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내고 북한과 미국, 그리고 북한과 남한 사이에서 반세기에 걸쳐 진행된 전쟁을 종결짓는 길을 열지 모른다.
최근 몇십년 동안 세력을 키워온 중국은 앞장서서 지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여기에는 중국, 일본, 남한을 포함한 ASEAN+3를 이끌어내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통합하려는 노력, 그리고 2010년에 발효할 ASEAN-중국 자유무역지대(ACFTA)에 관한 합의의 노력이 포함된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18세기의 조공무역질서에서 중국이 중심에 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자유무역지대를 기획하는 과정에서처럼 새 천년에 떠오르는 지역주의에서도 ASEAN을 통해 주도적이고 혁신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중국이란 별이 지역과 전세계의 형세에서 밝게 불타오르는 한편, 세계 2위의 경제강국이자 1960,70년대에 지역 전반에 걸쳐 경제성장을 끌고간 동력이던 일본은 아시아 지역주의와 전지구적 지정학에 대한 수많은 분석들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 이렇게 된 데는 세가지 주요한 요인이 있다. 우선 중국의 경제와 금융이 지난 20년간 놀라운 활력을 보인 반면 일본경제는 10년에 걸친 경기침체로 거품이 꺼지고 1990년에 주식시장과 부동산 가치가 붕괴한 뒤로 탄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는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일본이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자기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 지역이 중국의 재기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작지 않은 자리를 차지한다. 끝으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인이자 둘째 요인과 직접 연결된 것일 텐데, 일본이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미국의 품 안에 머물면서 미국과 일본의 동맹이란 관점에서 미래를 보려고 할 뿐 아시아를 향해서는 기껏해야 모호한 태도만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것이 미일관계에서 하위에 머물면서 거기에 의존하는 것인바, 이를 개번 매코맥(Gavan McCormack)은 논쟁적으로‘종속국가의 사슬’(Client State bond)이라고 부른다(개번 매코맥 『종속국가 일본』, 창비 2008 참조-편집자). 여기에서 최우선적인 것이 미국-일본의 경제적·안보적 관계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미국이 일본에 핵우산을 제공하고 (일본의 비용으로) 일본 본토와 오끼나와(沖繩)에 미군이 주둔하며 미국이 계속 벌이는 전쟁들을 위해 일본이 충분한 재정과 병참을 지원한다는 것 등이다. 최근에는 미국의 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이 이라크와 페르시아만에 육·해·공군을 직접 급파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금융과 경제에 있어 지역 내의 유대가 점차 힘을 받고 있는 반면 미국의 세력은 아시아에서는 물론 전지구적으로 대체로 쇠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아시아 전역에서 일본의 문화적 영향력이 확대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다 세계 2위의 해군력과 첨단 공군력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계속해서 미합중국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고려할 뿐 다시 부상하는 동아시아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는 꾸물거리고 있다.7
최근 몇년 동안 동아시아는 경제와 금융의 안전, 핵확산 금지, 자원관리, 어업, 테러방지, 마약 밀수 해적행위 인신매매와 조직범죄 통제, 재난구호, 환경보존, 컨테이너 보안 등 수많은 영역에서 지역 상호협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뎌왔다.
세계의 경기침체에 공동 대응할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2008년 12월 13일 일본 후꾸오까(福岡)에서 열린 동아시아 3개국의 첫 정상회담은 동아시아지역이 오늘날의 금융과 경제 위기에 공동으로 대처할 가능성을 예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짧은 회담은 또한 세계의 경기침체에 따른 심각한 도전으로 인해 그간 수출시장과 외국투자에 크게 의존하여 고공비행해온 자신들의 경제마저, 아니 바로 그 경제가 탈선할지도 모르는 때에 공동의 정책을 내놓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는 점도 보여준다.
아시아 내의 갈등에는 일본을 둘러싼 역사기억에서 생기는 갈등이 포함되어 있는데도 일본정부와 신국가주의 집단들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및 식민지배와 연관된 기억을 가라앉히기는커녕 거듭 상기시키면서 불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같은 아시아 내의 갈등들이 이 지역에서 싹트는 전망을 무너뜨리거나 더디게 할 공산이 있고 실제로 코이즈미(小泉) 총리가 재임한 2001~2006년이 그러했다. 그러나 아시아가 맞닥뜨린 도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동아시아 또는 아시아 태평양의 지정학적인 귀추와 관련해 미국 및 그 역할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는데, 이 문제들은 2008년 이래 모든 나라와 지역이 봉착한 경제적 파국으로 인해 악화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나 전지구적으로 미국의 세력이 약화되는 조짐들은 널려 있다. 소련의 붕괴로 미국이 심각한 지정학적 구속에서 놓여난 상황에서 펜타곤의 입안자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사람의 눈에는 예컨대 일본 오끼나와, 한국, 대만, 괌 등에 미군을 영구 주둔할 명분 역시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전쟁을 오래 끌며 실패한데다 그 비용이나 군사적 지원을 다른 나라들에 억지로 부과하려드는 바람에 국제적 신뢰를 상실했다.
마크 비슨(Mark Beeson)이 지적하듯 “부시 행정부가 남긴 유산은, 미국의 해외정책이 해당 지역에서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하기 위해 지역에 기반을 둔 집단의 창설을 독려했다가 역설적으로 미국의 권력이 기반한 다자적이고 다국적인 기초를 사실상 무너뜨린 것일지 모른다.” 세계경제의 추락으로 말미암아 지난 30년에 걸쳐 워싱턴이 세계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펼 때 깔고 있던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의 핵심원칙들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시기에 동아시아는 많은 문제점들을 마주하고 있다. ASEAN+3와 (인도, 이란, 파키스탄, 몽골을 참관국으로 하여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4개국인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으로 구성된) 샹하이협력기구(SCO)를 포함, 부상하는 여타의 지역적 구성체가 미약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더욱이 새로운 지역적 유대는 세계경제가 대공황과 세계대전으로 점철된 1930~40년대 이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진입함에 따라 더 까다로운 시험을 마주하고 있는바, 수십년 동안 지속적으로 팽창하며 고공비행하던 수출지향적 경제들이 이제 경제와 금융의 반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보나 경제적으로 보나 아시아 태평양의 성공 여부에는 미국의 역할이 상당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지정학과 정치경제를 좌우하던 미국의 능력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어쩌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약화되었다.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세계대전 이래 가장 심각한 경기후퇴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지역적 해결책을 고안해낼 것인지 예측하기는 너무 이르다. 하물며 아시아, 무엇보다도 중국의 급성장 개발에 내재한 구조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이 경쟁적 발전에 늘 수반되기 마련인 막중한 환경적·사회적 난제들까지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될 수 있을지의 여부를 여기서 말할 계제는 더욱 아니다. 분명한 것은 전후세계에는 너무도 자명했던 것들이 물러가고 이제 새로운 질서 혹은 혼란이 도래하고 있으며 이 속에서 동아시아가 점차 의미심장한 역할을 떠맡는 반면 미국의 일차적 중요성에는 이의가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4. 맺는 말
지금까지 이 글이 집중적으로 살펴본 것은 동아시아가 수세기에 걸친 식민지배 및 전후 미국-소련 분할에서 비롯된 파편화를 극복하고 자신의 위치를 되찾아 세계의 주요지역으로서 나서기 위해 거쳐온 중요한 단계들이었다. 세계의 가장 역동적인 경제지대에서 점차 결합의 깊이를 더해가는 지역내 경제적 유대, 그리고 이와 더불어 다급해진 환경·영토·안전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 지역 전체에서 시작된 노력들을 볼 때, 미국 및 미국-일본 주도의 역학과 동력이 실제적으로 축소되는 대신 지역공조가 확산되어가면서 이룩될 수 있을 미래들이 떠오른다.
이 지역에서 증대하는 경제적 활력은 최근에 자치와 다자간 공조를 향해 나아간 행보들의 기반이다. 계속 중요한 패를 쥐고 있다고 해도 미국이 약세라는 점은 분명하며 미국에나 전지구적 경제에나 동아시아가 지닌 중요성이 자명하다는 것도 금방 알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아시아 내에서 마찰이 빚어지고 있음도 확연하다. 미국이 벌이는 전쟁들 및 테러와의 전쟁과 관련된 미국의 요구와 그 일방적 조치들에 대응하는 데서도 그렇거니와 중국이 지역의 맹주로 부상하는 것에 잠재된 또는 그로 인해 악화되는 무수한 갈등들, 미해결로 남아 있는 (한반도와 중국/대만의) 분단국들과 2차대전에 뿌리를 둔 여타 영토분쟁들, 식민주의와 전쟁의 시대가 남긴 미해결의 문제를 놓고 일본과 이웃나라들을 서로 척지게 만드는 역사기억의 문제 등 갈등의 소지는 숱하게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환경에 끔찍스러운 피해를 끼치는 경제성장 패턴이 과연 지속가능할 것인가의 문제와 물, 에너지, 오염물질 배출 등을 둘러싼 인근국가들 사이의 갈등이다. 이 사안들은 전지구적 경제와 금융 문제 및 중국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걷잡을 수 없는 사회적 불평등 문제와 뒤섞여 이 지역의 고성장 경제를 엇나가게 할 수도 있다.
우리가 간략히 살펴본바, 동아시아를 조직한 세개의 역사적 모델은 첫째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중국 중심의 질서인 일종의 팍스씨니카(Pax Sinica) 시기, 둘째 (1840년에서 1970년 사이의) 분단과 갈등의 시기로, 중국의 해체 그리고 일본에 이어 미국이 우위를 차지한 식민주의와 전쟁 및 혁명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시기, 셋째 1970년대 이래 아시아가 부상하고 역동적 지역주의가 싹트는 시기이다.
새천년 평화의 시기에 아시아가 지역의 화합을 이루거나 주도권을 쥘 가능성을 살펴보는 일에 팍스씨니카가 어떤 깊은 통찰을 제공하는가? 물론 그것은 중국 중심의 질서에 입각하여 아시아 국가들과 중국의 유대를 우선시한 위계적인 모델이었다. 그 질서가 정점에 이른 18세기에 동아시아가 지속적인 평화와 상대적인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동아시아의 주변 민족들을 비교적 간섭하지 않는 방식으로 주도권을 펼치는 정치를 구사했을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조공무역의 유대를 통한 교역과 세계 교역망에서 차지한 유리한 위치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과 미국 중심의 모델은 그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만연해 있는 전쟁을 끝내거나 효과적인 지역적 유대를 일구지도 못했다. 두 나라 모두 지배열강인 자신과의 양자적 관계를 우선시하고 끊임없는 무력충돌의 시기 동안 자신의 군사적 우위와 안전을 먼저 챙기느라 바빴다. 중국과 그 디아스포라(화교·화인)를 포함한 더 큰 집합체로서의 중국을 포괄하면서도 거기에 한정되지는 않는 상태에서 동아시아 전역에 광범위하고도 깊은 상호적 경제관계가 나타나 새로운 지역질서의 토대를 마련한다면 틀림없이 중국이 그 중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와는 반대로 중국은 몇십년에 걸친 초고속 성장이 끝나고 나면 구매력 평가지수에 따른 계산을 포함하여 인구 1인당 소득으로 평가한 발전수준을 놓고 볼 때 일본과 미국 같은 주요 경쟁자들에 뒤처질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중국의 극적인 상승이 지속되리라고 결코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중국의 개발주의가 땅, 물, 공기에 끼친 엄청난 피해에서 보듯 개발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고 종교, 인종, 계급의 내부 분열에다 향후 몇년 내에 다가올 경제침체가 증폭시킬 난제들까지 중국체제가 안고 있는 부담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특히 일본과 미국이 이 지역의 주요 열강으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향후 몇십년 안에 중국이 이전 시기만큼의, 아니 주도권 문제라면 그후 일본과 미국이 우위에 섰던 시기에 비견할 만한 헤게모니적 역할을 행사할 것 같지는 않다. 국제관계에 있어 존 미어셰이머(John Mearsheimer) 같은 현실주의자는 중국의 경제성장을 전제하고 중국이 부상하여 동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쥐리라고 전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와 반대로 개발의 속도가 완만해지고 어느 한 국가가 최고로 군림하지 않는 지역질서가 나오리라고 보는 것이 더 그럼직한 전망이다. 그런 한편, 국가발전의 궤도와 지역의 조화가 봉착한 당장의 난제는 경제후퇴, 분단된 한반도가 가장 커다란 위험으로 남아 있는 지정학적 갈등, 아시아 지역주의에 대한 미국의 도전, 그리고 한·중·일을 계속 갈라놓고 있는 역사기억의 문제로부터 나올 것이다.
우리는 아시아 지역주의의 문제를 세 시기로 나누어 논의했다. 그러나 현재의 국면은 중국 주도의 18세기 팍스씨니카와 일본 주도의 20세기 초반의 팍스니뽀니카(Pax Nipponica) 둘 다로부터 현재의 시기를 구별짓는 다른 중요한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 과거 두 시기 모두에 동아시아는 전지구적 경제에 끼어 있으면서도 그 지배열강의 지정학적 범위는 여전히 동아시아에 중심을 두었다. 하지만 중국이 아프리카에 개입하고 중국과 일본이 중동과 아프리카 연안으로 해군력을 확장하는가 하면 두 나라 모두 위기에 처한 에너지원을 전지구적으로 찾아나서고 미국과 유럽의 경제에 막중한 이해관계를 걸어놓고 있는 것에서 보듯, 새천년에는 중국과 일본 모두 자신의 경제를 펼칠 전지구적 범위를 조심스럽게 저울질하고 있다. 그러면서 중국과 일본은 또한 그들 나름대로 더 확장된 전지구적 역할도 눈여겨보고 있다. 특히 지금은 모든 나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경제적 침체기인 까닭에 지역적이고 전지구적인 재편성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번역 신현욱│한국방송통신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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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이 18세기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중심이었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이전 몽골제국의 통치 때와 마찬가지로 18세기 당시에도 대초원지대의 민족인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뚜렷한 특징이 청제국에 더해져서 이를테면 청제국이 국경지대의 민족들, 특히 몽골인, 티베트인, 위구르인들과 맺은 관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민족들과 맺은 관계에서도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는 점이다.↩
- Takeshi Hamashita, ed. by M. Selden and L. Grove, China, East Asia and the Global Economy, Routledge 2008; R. Bin Wong, China Transformed, Cornell Univ. Press 1997; Kenneth Pomeranz, The Great Divergence, Princeton Univ. Press 2000; Sugihara Kaorued., Japan, China and the Growth of the Asian International Economy, 1850-1949, Oxford Univ. Press 2005; Anthony Reid, Southeast Asia in the Age of Commerce, 1450-1680, Yale Univ. Press 1988 and 1993; Andre Gunder Frank, ReORIENT, Univ. of California Press 1998.↩
- 청제국기인 18세기에 중국이 평화의 정점에 올라 상대적으로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된 이유가 만주족의 통치력 때문이라는 사실은 중국의 국가와 민족이 띠는 다민족적 성격, 그리고 중국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와 맺는 관계는 물론 중앙아시아 및 대초원 지역과 맺는 전반적 관계에 관해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았다.↩
- 미국이 벌이는 전쟁과 관련해서 보자면 중앙아시아와 중동으로 그 중심이 옮겨간 것이 맞으나 여타 군사적 분쟁들이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카리브해에서 지속되었음은 물론이다.↩
- 그렇다고 해서 빠른 경제적 성장이 단지 평화로운 분위기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2차대전 이후 일본의 복구와 경제성장은 어느정도는 미국이 한국전과 베트남전을 지원할 수단으로 육성한 산업화의 산물이었다. 일본의 이익은 한국과 인도차이나의 파괴라는 댓가를 치르고 얻어졌다.↩
- 비교분석할 만한 다른 예들이 인도차이나 문제에 대한 제네바회의(1954)와 같은 해에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회의이다. 두 회의 모두 탈식민세계에서 새로 부상하는 국민국가의 중요성을 선언했다.↩
- 일본의 군사력과 신국가주의 정치인들의 열망이 결합되면 다른 결과들이 발생할 수도 있다. 2003년 이래 일본의 해상자위대가 인도양에 진출하게 된 것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의 전함들에 연료를 공급하는 임무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아예 영구 주둔할 태세이다. 이는 일본의 해군이 중동의 석유를 확보하는 데 핵심적인 자리를 깔고 앉아 내놓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일본은 소말리아가 자국의 선박을 납치한 것에 대응하여 적극적인 군사적 역할을 계획, 검토하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