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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기정 『학교개조론』, 미래인 2007
이기정 『내신을 바꿔야 학교가 산다』, 미래인 2008
전교조를 넘어서
강준만 康俊晩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kjm@chonbuk.ac.kr
서울 창동고 교사 이기정이 쓴 『학교개조론』(이하 『학교』)과 『내신을 바꿔야 학교가 산다』(이하 『내신』)는 뜻밖의 책이다. 우리사회에서 교육 논쟁의 큰 흐름은‘전교조 대 반전교조’의 구도로 짜여 있으며, 교육 관련 책들의 대부분이 그런 구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구도에서 벗어나 좌충우돌 또는 우충좌돌한다. 사실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도 유독 낯설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다 보면 우리 사회의 언로(言路)가 학력 위계질서로 크게 오염돼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우리사회의 최대 현안 중 하나인 입시전쟁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교사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발언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참여는 상징적인 수준에 머무른 채 대학교수들이 사실상 발언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언론의 교수 선호 탓이다. 아니 언론만 탓할 일도 아니다. 교수와 교사가 역할이 다를 뿐인데 교수가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서열주의가 국민 대다수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교육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교수들은 전문 교육학자들을 빼곤 초중등교육의 구체적인 실상에 대해 잘 모른다. 예컨대, 교원평가제에 대해 제대로 아는 교수가 얼마나 있을까? 교수들은 잘 모르면서도 입시전쟁이 전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문제의식 하나로 논쟁에 뛰어든다. 이때 이들에게 초중등교육에 관한 지식을 공급하는 게 바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다. 전교조에 대한 신뢰 하나로 전교조가 반대하면 따라서 반대하고 전교조가 지지하면 따라서 지지하는 게 풍토로 굳어졌다. 구체적인 사례를 위해 실례를 무릅쓰고 한홍구 교수의 최근 저서 『특강』(한겨레출판 2009)의 한구절을 살펴보자.
“교원평가제는 엄청 문제가 많은 제도죠? 그런데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대학교수들도 학생들에게 평가를 받는데 왜 교사들만 평가를 안 받겠다고 그러느냐.’교원평가라는 게 실제 뜯어보면 전혀 사정이 다르다는 걸 국민들은 잘 모르죠. 굉장히 표피화되어 있어요. 전교조가 국민들을 만나 하나하나 설명하면 설득이 가능하겠지만 모든 국민을 만나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 국민들이 여론의 악선전에 쉽게 넘어가고 있습니다.”(336~37면)
과연 국민들이 교원평가제의 실상을 잘 모르고 정부와 보수신문들의 농간에 휘말린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전교조가 국민들을 만나 하나하나 설명하면 설득이 가능할까? 욕만 더 바가지로 먹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 국민들이 교육부의 교사평가 씨스템을 전부 알고 있다면, 전교조도 교육부도 모두 코미디를 한다고 비판할 것”이라는 게 이기정의 생각이다. 중요한 건 수업 능력이나 교육에 대한 열정이 거의 반영되지 않는‘근무평정’이며, “일반 교사들이 학생에 의한 교원평가를 수용하지 못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전교조도 근무평정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도 전교조는 교육부가 미봉책으로 내놓은 교원평가 문제만을 가지고 투쟁한다. 결국 전교조도 보수화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교육을 망쳐온 근무평정제도를 폐기하려는 노력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학생과 학부모의 평가만을 거부하겠다고 투쟁하는 것은 전교조다운 행동이 아니다.”(『학교』 93면)
전교조는 왜 그러는 걸까? 올해로 전교조가 출범한 지 20년이다. 주도세력이 나이를 많이 먹었다. 제도개혁이니 뭐니 하는 걸 떠나서‘나이가 지긋한 교장에게 평가를 받는 것’이‘어린 학생들에게 평가를 받는 것’보다 훨씬 편한 것이다. 나쁜 점수를 받으면‘근무평정보다 자존심에 더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저자는 그런 심정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교조는 노동조합으로서 조합원의 이해와 감정을 충실히 반영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러나 전교조가 대변하는 조합원들의 이해와 감정이 교총 회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면 굳이 전교조가 따로 존재할 필요는 없다.”(『내신』 205면)
전교조가 반대하는‘수준별 수업’은 어떤가? 이건‘형식’대‘내용’의 싸움이다. 형식적으론 수준별 수업을 반대하는 게 평등논리에 가까운 것 같지만, 내용적으론 수준이 떨어지는 학생에게 수업시간 내내 고통을 안겨주고 희망의 출구마저 차단한다는 점에서‘평등’과 더불어‘인권’의 문제다. 저자가 “수준별 수업에 대한 태도에서 전교조는 전형적인 수구주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질타하는 이유다(『내신』 173면).
다른 주요 이슈들에서도 전교조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 저자는 7차 교육과정 반대, 중등교사자격증 소지자의 초등학교 교사임용 반대, 교육행정정보씨스템(NEIS) 반대 등 합법화 이후 대부분의 투쟁에서 돈 끼호떼를 떠올렸다고 말한다(『학교』 143면).
이런 일련의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저자가 차라리 보수적 교사라면 마음이 편하리라. 우리는 늘 해오던 대로‘이념적 편가르기’논리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저자가 전교조보다 훨씬 진보적인 걸 어이하랴.
문제는 전교조에만 있는 게 아니라‘이념적 편가르기’에 중독된 우리 모두에게 있다. 개혁·진보진영의 도처에서 “이명박이 교육 망친다”고 아우성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그건 결코 진실이 아니다.‘교육 망치기’는 이미 지난 10년간 충분히 겪어왔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도 매년 200명이 넘는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땐 상대적으로 같은 편이라는 이유로 침묵하거나 목소리를 낮췄던 이들이 이제 와서 이명박정권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들면, 우리 마음이 조금 편해질지 몰라도 문제 해결은 더욱 어려워진다.
저자는 『인물과사상』(2009년 5월호) 인터뷰에서도 “이명박정권 들어 학교가 크게 변한 것은 없다고 봅니다”“공정택이 서울시 교육감에 당선되었다고 해서 커다란 고통이 새로 생긴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더 심해진 건 있다고 했지만, 현체제의 진짜 문제는‘정권’차원이 아니라 전교조와 우리 모두가 알게 모르게 공범으로 가세했음에도 그걸 깨닫지 못하는‘무감각’에 있음을 지적한 셈이다.
두권의 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이념적 편가르기’에서 벗어나 문자 그대로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전교조에 대한 맹목적 신뢰와 추종은 사실상의‘전교조 죽이기’다. 개혁·진보진영 내부에서 전교조와 경쟁할 수 있는 주장이 왕성하게 쏟아져 나와야 한다. 또한 전교조는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이 78년 전에 개탄한 바 있는‘최대형의 의도와 최전선적 논리’에서 탈출해야 한다. 이기정이 지적한 대로‘신자유주의를 주적으로 삼는 관성적 이데올로기’를 행동패턴으로 삼는 관행에서 탈피해 먼저 학생들을 바라봐야 한다. 반대와 저항뿐 아니라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고 이를 관철시키는 데 주력해야 한다. 여전히 전교조를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명박정권의‘평준화 깨기’에 대한 제대로 된 대처법은‘평준화 고수’가 아니다. 평준화정책을 마치 전적으로 옳은 대안인 것처럼 과장하는 건 올바르지 않다. 평준화는 부작용이 적지 않아 60% 정도의 정당성을 갖는 제도일 뿐이다. 40%의 정당성을 갖고 있는‘평준화 깨기’가 해결책인 양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무책임이 가증스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반대하는 게 어떻게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그 와중에 죽어나는 건 어린 학생들일 뿐이다. 그 중간의 답을 찾아내려는 노력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제발‘몸’은 그만 쓰고‘머리’를 쓰자.
지식계에서 교수의 공공커뮤니케이션 독점 현상을 전분야에 걸쳐 교사·교수 공존체제로 변화시키는 것도 생각해보자. 교육분야만 놓고 보더라도 40만 교사의 목소리를 사장시킨 우리의 공공담론이 실사구시를 희생시킨 채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흐르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는 좀더 현장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현장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게끔 출구를 열고, 그걸 관행과 풍토로 정착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