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이희재 『번역의 탄생』, 교양인 2009

번역의 독립운동: 직역과 의역 논쟁을 넘어서

 

 

송승철 宋承哲

한림대 영문과 교수 scsong@hallym.ac.kr

 

 

번역의탄생-표지

『번역의 탄생』은 몸으로 쓴 책이다. 영어 예문이 많아 힘들어할 독자도 있겠지만, 몸으로 쓴 책답게 웬만한 독자라면 어려운 해석부분은 건너뛰면서 한달음에 끝까지 술술 읽어갈 수 있다. 저자 이희재의 입장도 범박하게 요약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일본어 및 서양어 번역으로 한국어 관행이 크게 변했다는 것, 그것은 그 나름 한국어의 가능성을 넓히는 데 공헌했다는 것, 그러나 왜곡의 정도가 지나쳐 이제는 본래의 한국어가 지닌 개성을 찾아야 할 시점이며, 따라서 이제는 번역할 때 직역보다 의역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작업 의도는 이처럼 번역 분야에서의‘독립운동’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오랜 경험에서 건져올린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면서 번역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기술적 차원의 방안을 제시한다.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이런 사례가 보여주는 설득력이다. 아닌 게 아니라, “He is acting like a child.”는 “그는 아이처럼 행동한다”보다 “애들도 아니고 말이야” 식으로 옮기면 훨씬 감칠맛이 나고, “Aren’t you cold?” 같은 문장에서 주어가 복수일 때는 “춥지 않니?”보다 “춥지들 않니?”처럼 옮기면 단수와 복수의 의미까지 전달할 수 있다.

저자가‘suddenly’의 번역을 놓고‘갑자기’외에‘불쑥, 확, 와락, 덥석, 뚝, 왈칵, 버럭’처럼 대응어휘를 두툼하게 늘릴 때도 나는 쾌재를 불렀다. 최근 몇년간 이런저런 계기로 번역 검토를 여러번 하면서 어휘수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터다. 채만식의 『태평천하』나 염상섭의 『삼대』같이 해학적이고 구수한 어휘들이 종횡무진 등장하는 작품들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어휘수가 급감할 때 원작의 묘미가 절반 이상 잘려나간 느낌을 받았다. 사용된 어휘가 수준 면에서나 수적으로 엇비슷해야 우수한 번역일 것이다.

기존 한영사전 및 영한사전에 대한 설득력있는 비판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가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은 H.G. 언더우드의 『한영자전』처럼 개화기 사전에 우리말의 창조적 활용의 예가 풍성한데도 일본사전의 영향으로 해방후 사전편찬자들이 이를 무시한 점이다. 영미문학연구회에서 발간하는 『안과밖』 1997년 상반기호에 권중휘 교수가 이양하 교수와 함께 전란통에 사전을 만들면서 이찌까와 상끼(市河三喜)의 『포켓용 리틀 딕셔너리』를 베꼈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부분을 읽은 적이 있다. 이희재가 제시한 예를 읽으면 앞서 간 자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우리 죄가 작지 않음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 북한의 『영조사전』이 우리말의 특색을 잘 살려 옮긴 부분을 과감히 예시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최근 한국어 어형이 험악하게 어그러지는 꼴을 자주 보았고, 게다가 나 자신 그런 문체에 상당히 길들어 있는지라 책을 읽는 도중 저자가 강조하는 번역의 기율이나 기술적 조언에 여러번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 따라서 독자들도 크게 도움을 받으리라는 점을 마땅히 지적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런 성과와는 별도로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불만스러운 점도 있었다.

우선 저자가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 산발적으로나마 이루어진 성과를 좀더 찾아볼 필요가 있지 않았나 싶다. 예를 들면, 7장 「죽은 문장을 살려내는 부사: 추상에 강한 영어, 구체성에 강한 한국어」는 한국어의 의성어, 의태어의 활용에 대해 아주 잘 쓴 부분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문용 교수가 『한국어의 발상·영어의 발상』(1999)에서 이미 잘 정리한 바 있으며 예문도 훨씬 풍부하다. 저자가 묻혀 있던 자료를 많이 발굴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부분적으로 진실이지만 일반화하기 어려운 것을 무리하게 일반화한 경우도 보인다. 저자는 최인훈의 『광장』 영역본이 원작의 「서문」을 누락한 사실을 두고, 번역자가 서문 형식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독자를 고려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봐서는 동양이냐 서양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의 기율이 덜 잡힌 탓으로 보인다. 국내 문학작품의 영역본을 검토하면서 느낀 점인데, 열에 아홉은 원작에 대한 서지목록을 누락하고 있었다. 『광장』의 경우, 원작자가 워낙 여러차례 개고했음에도 번역자가 서지정보를 밝히지 않아서 번역을 검토하면서 끝내 해당 원본을 찾지 못했다. 거꾸로 한국의 번역자들도 서구작품의 서문을 생략하는 경우가 종종 목격된다. 『주홍글자』의 경우, 서문에 해당하는 「세관」은 작품의 핵심적 부분이지만 지금 유통되는 상당수 번역본에서 빠져 있다.

또한 저자는 구체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일반적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을 서구적 문체의 일반형으로, 일반적 결론에서 구체적 사례로 내려오는 것을 한국형 문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문학비평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작고 구체적인 사례를 먼저 언급하고 여기서 큰 사회적 함의를 유추하는 방식은 20세기 후반부터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수사학이다.

저자의 주장 가운데 통찰력있는 지적이 많지만, 일부 주장은 언어학적 논의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작은 예를 들면, “나의 살던 고향은”을 일본어 소유격‘の’의 영향으로 한국어 어형이 망가진 예로 들고 있다. 아마 “내가 살던 고향은”으로 적어야 한다는 지적에 동의하는 독자들이 많으리라. 그러나 중세 한국어에도 이런 예가 적지 않으며, 국어학계에는 이를 두고‘주어적 속격’이라는 명칭까지 있다. 주어적 속격은 점차 없어지는 추세였지만 앞에 든 예가 일본어투의 영향인지는 좀더 논의가 필요한 실정이다. 좀더 큰 예는 정관사‘the’는 이미 알고 있는 정보이므로 “은/는”으로, 부정관사‘a’는 미지의 정보이므로 “이/가”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 번역에 도움이 되는 통찰인데, 문제는 일반화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에서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라고 읊조린다. 여기서‘눈은 푹푹 날리고’는‘눈이 푹푹 날리고’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질감이 상당히 다르다.‘이’대신‘은’을 써야 하는 이유는‘눈〔雪〕’이 이미 알려진 정보여서라기보다 다른 미묘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실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 시인이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국어의 고유한 언어적 특징을 만들어냈고, 이는 영어로 번역이 불가능할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직역보다 의역이 번역의 독립운동이라는 저자의 주장과 관련하여 두가지만 지적하자. 하나는 “The police dismissed her with a caution”을 “경찰은 여자에게 주의를 주어서 내보냈다”보다 “경찰은 여자를 훈방했다”로 하는 것이 간결하고 자연스럽다는 주장이다. 간결한 건 맞지만, 두번째 번역은 권위주의적 어감이 강하기 때문에 나는 첫번째 번역이 한국사회의 강고한 위계질서를 뒤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낫다고 생각한다. 즉, 직역이나 의역이냐의 택일보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가치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번역과정에서 역자가 개입하여 해설하는 문제이다. 이 관행을 따르는 번역자들이 적지 않은데, 이들은 저자와 마찬가지로‘독자를 위하여’라는 단서를 붙인다. 그러나 이 독자가 누군지는 말하는 법이 없는데, 내 생각으로는 독자가 누군지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번역자의 친절한 개입을 원하는 독자도 있지만 이를 혐오하는 독자도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저렇게 딴지를 걸었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설명에 탄복한 부분이 많았다. 번역론 과목을 곧 맡게 될 것 같은데 좋은 교과서 하나 얻었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