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독자의 목소리

 

 

브루스 커밍스-백낙청 대화를 읽고

● 평소 자주 들르던 모 블로그에서 창비 봄호에 브루스 커밍스와 백낙청, 두 지성이 나눈 대담이 실렸다는 소식을 접했고, 이를 계기로 오랜만에 창비를 사서 읽어보았습니다. 공대생이던 학창시절, 실험과 계산으로 뻐근해지는 머리에 뭔가 다른 걸 채워넣고 싶어서,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세상에 대한 좀더 너른 시야를 얻고 싶어서 부지런히 창비를 읽으려고 애쓰던 일이 떠오르더군요.

두분의 대화는 역시 당대의 지성들답게, 작금의 경제상황에서 한국사회 그리고 동아시아가 처한 정치·경제·사회적 문제를 종횡무진하며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정치상황은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이후 ‘잃어버린’ 10년 혹은 20년을 되찾겠다며 역주행하는 데 반해, 미국에서는 8년간의 부시 정권이 막을 내리고 새로 출범한 오바마 정부가 진보적 가치의 실현에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상황을 각자 내국인의 관점에서 풀어나가는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한국의 수많은 유권자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정면으로 반하는 투표행위를 한 데 대한 언론의 역할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상당히 관심이 있어, 시간관계상 혹은 지면상 논의를 안하신 것인지 아니면 이 문제가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읽는 동안, 이렇게 깊이있는 대화를 과연 통역을 두고 진행한 걸까? 백낙청 교수야 영문학자이니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말미에 대담에서 사용한 언어와 이를 번역해 게재한 과정이 간결하게 설명되어 있더군요. 영어 원문을 창비 영문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도록 한 점이 특히 고마웠습니다. 창비가 전통적으로 담아온 내용과 그 가치를 지키면서도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곽원철 vincent.kwak@gmail.com

 

 

동아시아를 변화의 거점으로

● 지난호 특집 가운데 가장 눈여겨 읽은 글은 최태욱의 「동아시아의 지역간 협력체제 추진을 제창한다」였다. 미국과 동아시아 간에 형성된 냉전형 분업체제가 긴밀히 작동해온 만큼, 양 지역의 글로벌 불균형을 해소하지 않으면 동아시아는 미국발 위기에 유독 취약한 지역이 되기 쉽다. EU가 미국과의 대서양 연합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해간 것처럼, 동아시아 또한 냉전시기 구축된 아시아-태평양의 지역 상상과 실천에서 탈피하여 자유의 공간을 확보해감이 관건이다. 지역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강조되어야 할 현실적 근거도 여기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대미 수출과 달러 의존으로부터의 탈피가 동아시아 역내의 내수 창출과 사회안전망 구축으로 선순환될 수 있음을 제시한 대목이 돋보였다. ‘왜 동아시아인가’라는 일각의 회의적 시선에 구체적인 청사진으로 응답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같은 오늘날의 지역구상이 1930년대말 대공황 이후를 고민하며 제국일본의 좌파 지식인들이 구상했던 동아협동체와는 어떻게 다르고, 거기서 얼마나 나아간 것인지도 차후에 차근차근 따져볼 일이겠다.

더불어 패권교체기에 노정되는 자본주의 유형간의 경쟁에 대해서도 토론해보아야 할 것이다. 적잖은 이들이 세계체제의 헤게모니가 중국/동아시아로 이동중이라 진단한다. 동아시아 협력체가 대중화(大中華)의 복원도 대동아의 부활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대안적 자본주의 혹은 비자본주의적 시장질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계체제의 현재를 정밀하게 진단하는 선행작업이 긴요하리라 본다. 우리가 정말로 패권교체기이자 체제이행기를 통과하고 있다면, 미국-EU-동아시아의 천하삼분론에 안주하지 않고 동아시아발(發) 천지창조론으로의 도약을 감행하는 비상한 각오가 필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병한 lbh7826@hanmail.net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김연수 장편연재

● 내가 일하는 도서관의 잡지서가에는 신간을 전시한다. 그날도 새로 들어온 책들을 훑으며 서 있었는데, 창비 봄호 표지에서 ‘김연수’ 세 글자가 눈에 들었다. 곧장 빼들고 책장을 넘길 때 설레어 콩닥이던 마음,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이 흡족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1990년대 한국현대사의 사건들을 파노라마처럼 겪어내고 『밤은 노래한다』가 1930년대 만주에서 아(我)도 적(敵)도 없이 피범벅이 되더니, 작가는 기어이 기억은커녕 기록조차 성긴 시간으로 거슬러가려나 보다. 『바다 쪽으로 세 걸음』 첫회 연재분에는 임진왜란의 기미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가운데, 여섯살 난 주인공 완(宛)의 평온하던 시절이 그려진다. 어린것이 형과 어른들의 일을 제 식대로 맹랑하게 이야기할 때 그것이 아스라하니 안타까운 건, 그 아이가 자라 나중에 죽음의 상인으로 악명을 떨칠 것이기에…… 도입에서 어른 완이 “마르내로 돌아갈 때는 다시 착하고 순한 완이 되고 싶었다” 할 때는, 안쓰러운 한편 기대로 두근거렸다. 그때 그곳에 수많았을‘완’들의 회한을 작가는 어떤 서사로써 위로할까.

거대한 사건 속에서 불가해한 폭력에 고통받으면서도 악에 받친 듯 살아내는‘김연수의 사람’에 곧잘 위로받는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서도 사랑하고야 마는‘김연수의 사람’에 애정을 갖게 된다. 앞으로 완과 초희는 무슨 연으로 얽혀서 가슴 아리게 할지. 반가운 연재를 만나 이렇게 마음이 들썩인다. 철마다 데이트하듯 기다리게 생겼다.

김경미 9032_what@naver.com

 

 

『게 공선』 붐의 후일담도 기대하며

● 단편적인 뉴스기사만 읽어 『게 공선』과 관련해 일본에서 나타난 현상들은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봄호에 실린 시평 「일본의 사회현실과 『게 공선』의 부활」을 읽으면서 그 안에 담긴 여러 의미를 알게 됐다. 필자 노마 필드는 『게 공선』 붐이 일어났던 과정에서의 크고작은 우연과 일본의 현실을 시간순으로 꼼꼼하게 되짚는데, 그중에서 한 서점의 구매담당자가 『게 공선』을 읽고 그 내용이 3년간 ‘프리터’로 지낸 자신의 삶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아 그 소설을 150권이나 주문했다는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타끼지나 그의 소설에 공감한 이들의 바람처럼 모든 것이 긍정적인 결론으로 마무리될지, 시평 내용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울 듯하다. 일본에 국한하지 않고 변화를 원하는 목소리가 실제로 사회에 발휘하는 영향에 관한 후속 이야기도 들려주길 바란다.

정연욱 idle@naver.com

 

 

늦봄 문익환 방북 20주년 기념 글을 읽고

● 세계적 산성인 명박산성으로 국민과의 소통을 차단했던 현정부하에서 남북한의 대화창구는 더욱더 좁아졌고, 정부차원의 교류와 협력을 기대하기도 어려워졌다. 지난호 이승환의 글을 읽으며 늦봄 문익환 목사가 통일을 향해 걸어온 행적을 돌아보니, 그가 몸을 던져 꽃피운 성과들과 불안한 남북관계를 만들어내는 현정부의 어리석은 감정의 줄다리기가 대조되었다.

으레 통일이라는 거대담론은 정부차원에서만 논의될 수 있다고 믿어온 탓인지 일반시민들은 자신이 통일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민간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10여년간 늦봄이 놓은 징검다리로 남북관계가 진일보되었건만 다시 그 돌다리를 재건축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 무척이나 아쉽다.

아직도 벗어던지지 못하는 대결과 냉전의 외투, 상대방의 콧대를 꺾을 수 있다는 알량한 자존심과 비생산적 발상들을 이제는 집어던졌으면 좋겠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도도한 발걸음에 역행하는 정책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예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던 통일부 직원들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은 나 혼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 20주년을 맞아 불가능해 보이던 일에 자신을 헌신한 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해준 이 글에 고마운 마음이다.

장익수 isjang@jis.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