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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노래가 된 시, 노래가 된 시인
조태일의 시세계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평론집 『환각의 칼날』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등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1. ‘노래’의 조건들
이제는 다시 언급하기도 새삼스러운, 지난 시대의 뇌관에 별처럼 박혀 있던 역사·철학적이며 미학적인 강령 하나. 우주의 운행과 인간의 운명을 잇는 루카치(G. Lukács)의 신화적 비전은 오늘의 시대에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말을 필요로 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며,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순정하게‘노래’할 수 있던 시대, 경험하지도 않은 먼 과거를 열렬히 기리고‘추억’할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념과 신념이‘노래’가 될 수 있던 시대, 신화의 세계가 현재의 시공간에 들어와‘추억’이 될 수 있던 시대는 행복했다는 진술은,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이 시대의 시선으로 편집되고 굴절된 것이다. 그렇다면, 무어라 이름붙이든 우리시대의 시적 기율이 지닌 특징은 순정하고 행복한‘노래/기억’과의 거리로써 설명될 수 있겠다. 가령 최근 시에서 고전적 의미의‘노래’가 잦아들고 정체성의 내용물인‘기억’이 현실의 의미체계에서 탈각된 무정형의 형태로 그려지는 것은 전 시대와 차별되는 한 예가 된다. 작고 10주기를 맞는 조태일(趙泰一)의 시가 떠올리는 문학사적 문제 역시 우리 시의‘변화’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조태일의 시를 읽는 일은 세기의 전환과 함께 우리 문학에 발생한 시차(時差/視差)를 한꺼번에 체감하는 일과 통한다. 그의 시는 한국시의 근과거와 현재를 함께 목도하게 하는 거울이자 일종의 충격장치인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그 강도는 사실 낮은 수준은 아니다. 최근 10여년간 우리 문학에 발생한 적지않은 시차는 두가지 변화를 바탕으로 한다. 첫째는 시인-개인의 진정성과 양심 등의 윤리적 덕목이 문학의 동력이 된 1970, 80년대와, 시인/개인에게 부과된 윤리를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문학의 새로운 윤리와 돌파구를 찾는 2000년대 사이의 간극이다. 시인-개인-사회-역사의 방향성이 고결한 윤리의 아우라 속에서 합치될 수 있었고, 현실의 올바른 변화에 대한 엇비슷한 신념과 상상이 문학의 추동력이 되었던 시대란, 그 자체로 (무거운) 축복이자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종말과 문학의 종말에 관한 담론은 이 사건을 정리하는 리포트의 키워드였고, 이‘종말’의 사태 혹은 소동을 거친 2000년대 문학의 시야로 보면, 조태일의 시로 예시되는 종전의 문학은 순정하고 치열하지만 어딘가 평면적인 단순성을 지닌 것이 된다. 가장 큰 이유는 시인 자신과 분리되지 않는 시적 주체와 현실 사이의 저 많은 균열과 거리를 민족과 국가,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 메우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념들이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운명을 성찰하는‘윤리의식’의 발원이 된 점은 종종 간과되고 있다. 2000년대 문학이 전 시대 문학의 발생 토대나 사회·역사적 기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념과 윤리의 양면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듯하다. 문제의 핵심은 2000년대 문학이 이전의 문학적 추진력인 사회·역사적 문제의식과 상상력, 공동체의 행복에 관한 윤리적 문제를 더이상 적극적으로 끌어안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개인과 사회·역사의 현재와 미래에 관해 고뇌하고 모색하는 일은 이제 공동의 움직임을 형성하지 못하고 작가 개인의 선택으로 돌려지고 있다. 전 시대의 문학이 견지한 사회현실에 대한 윤리적 태도는 어느새‘재미없는 낡은 유산’쯤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민중시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조태일의 시 역시 이같은‘낡은’유산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읽는 조태일의 시는, 활발한 미학적·인식론적 모험을 감행한 2000년대 시들과는 확연히 다른 입지에서, 이후의 시들에서 만나기 어려울지도 모를 절박하고 육중한 울림을 전해준다. 문학의 역사적 소명과 시인-개인의 윤리적 삶의 방식을 모태로 한 그 울림은 지난 연대의 시와 오늘의 시의 시차(時差/視差)만큼이나 이질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10여년간 우리 문학에 발생한 시차의 두번째 양상-첫번째와 밀접하게 관련된-은 시의 입장과 정치적 입장이 유기적으로 밀착된 시대의 퇴조에 따른 것이다. 민족, 민주, 자유, 평등 등의 정치적 이념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사회·역사·민족의식의 동의어로서의 윤리의식도 함께 스러졌다. 시와 정치를 함께 사유하고 실천했던 관습은 시에서 정치를 분리하고 축출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즉 지난 연대의 특정한 정치의식의 몰락은 보편적인 문제로 확대해석되면서 문학에서 정치의식 자체를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적 담론공간으로서 2000년대 문학의 영토는‘정치(적 공동체)’를‘감각(의 공동체)’으로 대체하면서 넓어진 만큼 다시 좁아졌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외압이 수반되었지만, 1970, 80년대에 문학은 권력과 제도가 용인하지 않는 정치적 사유와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진보적인 동시에 거의 유일한 개인적·사회적 담론공간이었다. 1990년대의‘애도기’를 거쳐 2000년대의 문학은 현실정치에 대해 개입하고 발언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거나 소극적이 되었다. (그동안 논의되어왔듯이 이러한 배경에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한국사회의 〔표면적인〕 민주화가 자리잡고 있다. 더불어, 이전까지 한국사회에서 문학이 해온 정치적 담론공간의 역할을 인터넷이 대대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점도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는 가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시의 경우, 우리시대의 현실에 관한 정치적 입장은 대체로 개별화되고 미시적이며 간접화된 양상으로 드러난다. 특히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세계의 은폐된 구조와 배후에 대한 직관 및 감각적 인식들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문학과 정치, 문학과 현실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대응관계는 희미해졌다. 이 관계가 현실적인 기표들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맥락을 거쳐 재구성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언어가 그 물적 토대인 사회·역사적 의미체계로 환원되는 것을 저지하는 시적 전략이 도달한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할 것이다. 사유와 감각의 근원을 해부하는 태도 역시 문학과 정치가 연동되는 유효한 방식들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학과 정치의 너무 근본적이어서 느슨해 보이는 구도는 오히려 이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를 촉발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여러 문학잡지들이 앞다투어‘정치’를 주제로 특집을 꾸리는 것은 오늘의 문학에 부족한 정치적 사유에 대한 문제의식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텍스트의 틈새를 우선 논의와 이론으로 방어하고자 하는 시도는 2000년대 문학에 대한 반성과 보강을 겨냥하고 있다(『세계의 문학』 2009년 봄호 특집‘회귀하는 감옥들’, 『문학들』 2009년 여름호 특집‘예술과 정치, 그리고 미학적 모험’, 『문학과사회』 2009년 여름호 특집‘마르크스의 귀환?’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조태일의 시가 현재적 운동성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만 하는 이유도 이에 맞닿아 있다.
공동체의 행복과 사회·역사적 책임의식을 골자로 하는 윤리가 문학의 동력이 되는 세계, 시쓰기가 현실에 대한 시인-개인의 정직한 윤리적/정치적 실천을 의미하는 세계, 이 세계들이 조태일의 시를 통해 다시 우리 앞에 귀환한다. 그간 우리 시에서 낡은 의미의 윤리의식과 정치의식의 약화가 함께 진행되면서 적잖은 시차가 형성된 데는 시대적 변화가 일차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 변화가 어떤 단절을 가져온 지금, 조태일의 시는 다른 세계에서 온, 현재의 문학에 대한 타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익숙하고도 낯선 타자는 환대받아야 마땅한데, 그가 바로 오늘의 문학의 전사(前史)이자 기원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2. ‘연가’와 ‘찬가/비가’의 사이
조태일의 시는 민족, 독재, 분단 등 현실의 문제를 다루지만, 그 현장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내기보다는 정서와 풍경, 메씨지로 변환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의 시에서 당대의 정치·사회적 정황을 유추할 수는 있으나 재구성해내기 쉽지 않은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자연’의 풍경을 전면화하는 후기시로 올수록 변환의 강도는 높아지는데, 조태일이 등단 이듬해인 1965년에 스물다섯살 대학생의 신분으로 펴낸 첫 시집 『아침 선박』에서부터 이러한 특징은 뚜렷이 나타난다.
이 시집은 청년 시인 조태일이 진한 비관주의와 낭만적 우울, 치기어린 현란한 표현을 뒤섞어 그려낸 암울한 시대의 음화(陰畵)다.‘흔들리다’‘아프다’등 자주 등장하는 감정 형용어들은 젊은 시인의 고통에 찬 내면을, 비장한 어조와 단호한 명사형의 서술부 등은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단절과 투쟁의 의지를 감지하게 한다. 절망과 패기가 혼재된 가운데 조태일은 자신의 내면과 조국의 산하를‘낭만적인 연가’와‘의지적인 찬가’의 두가지 풍으로 노래한다. “나는 내 방을 슬프게 장악하는 兵丁./내 시간이 흔들리면, 처량하게 흔들리면,/계절의 밑둥이에 앉아 있는 우울.”(「연습1」), “서울의 가로수는/敗地에 울멍이는 나의 戀歌.”(「서울의 가로수는」)는 전자에, “아침 바다는 叡智에 번뜩이는 눈을 뜨고/끈기의 저쪽을 달리면서//시대에 지치지 않고, 처절했던 同伴의 때에/쓰러진 시간들을 하나씩 깨워 일으키고./저, 넘쳐나는 지평의 햇살을 보면/청명한 날에 잠 깨는 출항.”(「아침 선박」)은 후자에 속하는 예이다.
‘낭만적인 연가’와‘의지적인 찬가’는 조태일 시의 두 축을 이루는 시적 스타일이자 화법이며, 세계에 대한 태도이다. 낭만적인 연가의 풍은 그가 현실 속에서 고뇌하는 자신의 내면을 노래할 때 주로 동원되며, 의지적인 찬가의 풍은 민족과 역사의 문제에 관해 각성하고 발언할 때 대체로 활용된다. 이 중 찬가(讚歌)는 찬가의 대상인 민족과 역사가 처한 비극적인 상황으로 인해 많은 경우‘비가(悲歌)’로 변주된다.‘비가’는 그 초점이 노래하는 주체의 내적 상태와 정서에 있기 때문에 다시‘연가’와 깊은 친연성을 보이면서 조태일의 시에 전체적인 일관성을 부여한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조태일의 시세계는 자연인으로서 시인-개인이 부르는 연가와, 민족의 일원이자 역사의 주체로서 시인-공동체의 일원이 부르는 찬가/비가 사이에서 진동하면서, 이 둘이 화음을 달리하며 공존하고 통합되는 형태로 전개된다. “나는 곧잘 내 개인 의식이나 감정을‘우리’와‘역사’의 것으로 비약시켜 보는 데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오늘의 나의 문학을 말한다」, 1978)라는 조태일의 진술은‘연가’와‘찬가/비가’의 융합이 일어나게 된 근거를 확인시켜준다(기질적으로 조태일은‘연가’쪽에 더 큰 애정과 친화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확고한 시적 전략을 갖추기 전인 초기시에서 그는 특히‘연가’라는 제목과 시어를 많이 사용하며, 1985년에 묶은 자신의 문학선집의 제목을‘연가’로 정하기도 했다. 조태일이 1990년대에 쓴 시들이 다시 연가풍으로 회귀하며, 이 시기 그의 시가 미학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것도 그의 기질적인 면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낭만적인 연가풍이 주류를 이루는 초기시(특히 첫 시집 『아침 선박』과 두번째 시집 『식칼론』)에서 조태일은 자신의 시와 삶의 공간을‘산하’로 명시한다. 서울의 거리, 전라도, 바다 등이 산하의 현상적 모습이라면,‘나’의 어둡고 좁은 방은 산하의 내면과 이면의 풍경에 해당하는 것이다. 전남 곡성의 산사(山寺)에서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치하를 거쳐 여덟살 때 여순사건을, 열살 때 한국전쟁을 겪은 조태일에게‘산하’는 폭력적인 역사가 부과한 참혹한 삶의 체험, “아픈 기억”이 “펄럭이”는 “찢어진 地表”의 집합체를 의미했다. 유년기부터 그에게 삶은 민족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으며, 그에게 민족의 이념은 체험에 의해 자연스럽게 내면화된 측면이 컸다.
불꺼진 시간 위에서 이제 아픈 기억을 쓰다듬는 나의 산하.
수목들은 이파리에,
찢어진 地表를 펄럭이고 있지만,
피비린 골짜기마다, 젖어 있는 시간은 뒹굴고 있지만
선언을 다한 지상의, 彈雨가 내리던
나의 조그만 산하여.
-「다시 산하에게」 부분, 『아침 선박』
“나의 산하”가 “조그만” 것은 오랫동안 학살과 전쟁에 짓밟혀 상처투성이가 된 까닭이다. 조태일은 비극적 낭만성에 사로잡혀 조국의 산하를 뜨겁게 애도하고 예찬한다. 조태일의 시에서 찬가와 비가가 하나로 결합된 예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이후 조태일의 시는 첫 시집의 감정 과잉을 덜어내고,‘산하’에 대한 사랑의 방법과 자세에 관해 고뇌하면서 진전의 시간을 맞이한다.‘산하’는 시집 『국토』(1975) 이후에는 민족의 삶과 역사의 총체를 의미하는‘국토’로 재명명된다. 이와 함께 조태일의 시는‘의지적인 찬가/비가’의 형식을 전면에 두면서 보다 투철한 민족정신과 역사의식을 확보해간다. 조태일의 시사적 업적으로 꼽히는 「식칼론」과 「국토」 연작은‘찬가/비가’의 형식과 세계관으로‘연가’를 포괄하면서 시와 정치적 상상력을 견고하게 결합해 얻은 산물이다. 「식칼론」이 독재의 현실에 대응하는 시와 삶의 자세에 관한 방법론적 탐구라면, 「국토」는 민족의 오랜 삶의 터전에 축적된 역사를 복원하고 증언하는 기록의 성격을 지닌다. 「식칼론」이‘사랑’의 정치적·윤리적인 실천으로서 현실의 모순에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는 투쟁의 결의문인 반면, 「국토」는 사랑의 존재론이자 삶의 방식 자체로서 민족의 운명에‘나’의 운명을 일치시키는 투쟁의 기록이다. “왜 나는 너희를” “땅속 깊이 아우성으로 흐르는 눈물/저 눈물 같은 물줄기가/물줄기를 만나는 끈기처럼/만나지 못하고 왜 사랑하지 못하는가”(「식칼론 5」)에서 보듯, 「식칼론」은 불의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혁할 수 있는 궁극의 방법을‘사랑’에서 찾는다. 적대적인 관계를‘사랑’으로 끌어안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조태일은‘사랑’을 언제나 자신의 현실인식과 실천방식의 가장 밑바탕에 둔다. 조태일이 1970년대에서 90년대에 걸쳐 쓴 「국토」 연작은 그 사랑의 현실적 증거물일 터이다. 이 연작은 국토와 민족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이는 씌어질 수 없는 역사적이며 시사적인 차원의 역작이다. “타고난 자질에 끈덕진 노력이 따름으로써만 가능해진 성과”(백낙청)인 것이다. 연작의 출발점인,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국토서시」)다는 운명론 역시 국토에 대한 깊은 사랑을 알맹이로 한다. 조태일이 굳게 믿은 바에 따르면, “민족은 시인의 근원”이며, “따라서 시인은 그 시대의 증인이요, 그 민족의 증인으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감수성이 예민하고 어느 누구보다도 생명력이 강해서 그 시대의 핵심을 노래하고 그 민족을 한없이 노래해도 싫증나지 않는 법이다”(「시인의 삶과 민족」, 1977). 이 믿음을 조태일은 끊임없이 즐겁게 실행에 옮겼다.
낮과 밤을 동시에 동등하게 울고
과거와 현재와 까마득한 미래까지를
단 한번에 울고 칼끝이 뛴다.
만나지 않는 내 가슴과 너희들의
벼랑을 건너뛰는 이 무적의 칼빛은
나와 너희들의 가슴과 정신을
단 한번에 꿰뚫어 한 줄로 꿰서 쓰러뜨렸다가
다시 일으키고, 쓰러뜨리고, 다시 일으키고
메마른 땅 위에 누운 나와 너희들의 國家 위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다놓고
더욱 퍼런 빛을 사방에 쏟으면서
천둥보다 번개보다 더 신나게 운다
독재보다도 더 매웁게 운다.
-「식칼론 4」 부분, 『식칼론』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국토서시」 부분, 『국토』
조태일이 투쟁의 도구이자 방법론으로 택한‘식칼’의 상징성은 독특할 뿐 아니라 문제적이다. 식칼은 생계와 사투, 일상과 투쟁, 평화와 전쟁을 넘나드는 삶의 도구이자 죽음의 무기로서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본래 삶과 사랑을 위해 쓰이는 식칼은 위기의 상황에서는 죽음을 위한 폭력의 무기로 돌변한다. 모순에 찬 불합리한 현실 앞에서 식칼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필사적인 저항의 무기로 화하는 것이다. 「식칼론」은‘식칼’의 두가지 효용, 즉 삶과 죽음, 포용과 대결, 화해로운 사랑과 적대적인 저항 사이의 가파른 긴장을 유지하며 시적 주체의 갈등과 의지를 형상화한다. 이 다섯편의 연작에는 싸움의 대상에 대한‘나’의 상반된 태도가 수시로 교차한다. “만나지 않는 내 가슴과 너희들의/벼랑을 건너뛰는 이 무적의 칼빛”에서는 폭력을 감싸안는 사랑을 갈망하고, “너희의 녹슨 여러 칼을/꺾어버리며” “늘 뜬눈으로 있”고 “날카로움으로 있”는 “내 단 한칼”(「식칼론 2-허약한 시인의 턱 밑에다가」)에서는 적에 대한 궤멸의 의지를 다짐하는 식이다. 사랑과 저항의 가능성을 함께 내포한‘식칼’의 이중성은, “무적의 칼빛”이 “나와 너희들의 가슴과 정신을/단 한번에 꿰뚫어 한 줄로 꿰서 쓰러뜨렸다가/다시 일으키”는 행위를 되풀이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식칼론」의 중심은 “독재보다도 더 매웁게 우”는 저항의지를 폭발적으로 충전하는 쪽에 좀더 기울어 있다. 조태일이 당대의 현실을‘화해’보다는‘저항’을 요구하는 것으로 파악한 데 따른 선택일 것이다.
대표작인 「국토」 연작은‘나’의 싸움을‘우리’의 역사적 문제로 넓히면서 서사적 스케일을 확보한다. 국토에 속한 사람과 자연물, 사건을 다양하게 노래하면서‘우리’를 역사의 주체로 호명하고 독려하는 것이 이 연작의 중심 의도이다. 국토의 현실에 관해 제재와 시공간을 자유로이 확장하는 이 연작은 1990년에 발표된 「청산이 울거든」에서 총 80편으로 완성된다. 48~80편의 후반부는 시집 『산속에서 꽃속에서』(1991)에 실려 있는데, 『가거도』(1983)와 『자유가 시인더러』(1987)의 시편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국토」 연작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 시들에는 공통적으로 폭압의 현실에 대한 저항과 개혁의지, 민족과 역사의 올바른 방향성에 대한 열망과 실천,‘우리’의 자유롭고 행복한 삶에 대한 갈망,‘사랑’의 “쉴새없는” 이행으로서 치열한 시쓰기에 대한 집념이 내장되어 있다.
너만 하나냐? 우리도 하나다
바람더러 보라고 숨결 합치고
너만 하나냐? 우리도 하나다
물더러 보라고 핏줄 출렁이며
모두 보라고 모두 보라고
더덩실 더덩덩실 더어더엉실 춤춘다.
-「너만 하나냐 우리도 하나다-국토 13」 부분, 『국토』
다시 사랑을 말한다.
이 넉넉한 마음과 튼튼한 육체에서
끊임없이 솟아 넘쳤으나
우리들은 슬프게도 마음이 죽어
끝내 거절했던
우리들의 사랑을 말한다.
다시
너는 번쩍이는 펜이 되고
너는 뜨거운 심장이 되고
다시
너는 폭포의 사랑이 되고
너는 쉴새없는 시가 되어라.
-「다시 펜을 든다」 부분, 『가거도』
어쩐 일로
헐벗은 우리의 사랑은 이리 더디 올꼬?
어쩐 일로 검은 먹구름은
한 세대를 저리 어둡게 할꼬?
(…)
타는 가슴으로 문지르면
어느덧 그들도 봄을 피워대누나.
사랑아, 모든 이의 사랑아,
타는 그리움아, 타는 그리움아.
-「타는 가슴으로」 부분, 『자유가 시인더러』
그의 싯구를 빌리면,조태일의 시적 목표는‘우리’가 하나 되어 “숨결 합치고” “핏줄 출렁이며” 신명나게 화합하는 세상, 어떠한 사랑도 소외되지 않으며 “모든 이의 사랑”이 만개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있다. 이러한 이념적 지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본적이며 역사적인 근거가 바로‘국토’이다. 조태일의‘국토’는 민족 구성원 전체의 자유와 행복이 실현될 수 있고 실현되어야 하는, 민족사적 희망과 당위가 서린 삶의 터전이다.‘국토’는‘우리’가 사랑하고 가꾸어야 할 대상이자 생명의 근간으로서‘우리’의 존재와 주체성을 일부 대행하기도 한다. 이처럼 분명한 목표 아래 조태일은, 시인의‘진실’과 세계의‘현실’이 사회·역사적 책무와 역사의식의 좌표 아래 만나는 지점들을 찾아 시로 빚는다. “시인과 현실의 최선의 거리는 유리가 아니라 밀착”이며, “내 시의 진실은 바로 현실입니다. 현실 속에 모든 시의 싹이 움트고 있습니다”(「오늘의 나의 문학을 말한다」)라는 조태일의 진술은 이를 뒷받침한다. 같은 메씨지를 조태일은 시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산과 하늘이 마주 닿는/저 파아란 地平의 저 넘치는 뜨락에는/마음놓고 뿌릴 수 있는 品種이란/내 혼의 씨앗이어라”(「내가 뿌리는 씨앗은-국토 42」, 『국토』).
내가 『국토』를 쓸 전후의 내 마음속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던 핵심적인 관심들은 자유·민주·헌법·노동·민중·언론 등등 실로 내 못난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말이었고, 그 말들이 빚어내는 참담한 정서들이었습니다. (…) 내‘개인’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개인을 서로 연결하여‘우리’를 확인해보는 것도 시인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임무입니다. 이‘우리’는 바로 역사의 실체이며 주체이며 문학의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나의 문학을 말한다」 부분
폭력적인 상황에 내몰린 “개인을 서로 연결하여‘우리’를 확인”하고,‘우리’가 “역사의 실체이며 주체이며 문학의 주체”임을 선포하는 것. 마땅히 지켜져야 할 인간적이며 민주적인 가치들이 말살되는 현실에서 조태일에게 시쓰기란 역사가 내리는 윤리적 정언명령을 듣고 실천하는 일이며,‘우리’의 손과 발이 되어 황폐한 현실에 “혼의 씨앗”을 뿌리는 일을 의미했다. “우리의 길 우리가 걸어/불타는 가슴 가슴 멀리 비추면/이 꽃 저 꽃도 함께 한껏 피어서/열매를 맺을지니 형제들이여/이것이 우리의 할일 아니더냐”(「우리들의 노래-국토 53」, 『산속에서 꽃속에서』). 더 나은 삶과 세계의 비전을 제시하고 그를 선도하는 역할은 시련의 현대사 속에서 한국시와 시인이 희생을 감수하며 자발적으로 감당해온 바로 그 윤리적 몫이기도 하다.
3. ‘노래’가 된 시인, ‘더 나은 다른 것’에 대한 꿈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신념을 꺾지 않은 “강골의 시인이자 반골의 시인”(염무웅) 조태일은 90년대에는 “서정적 진실의 일품(逸品)”(유종호)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시집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1995)와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1999)가 이러한 평가의 근거가 된다.‘강골과 반골’의‘신념’이‘서정적 진실의 일품’으로 화하기까지 조태일이 겪은 내면의 경로는 90년대 초입에 많은 시인들이 경험했던 것과 대체로 흡사한 양상을 보인다. 자성, 회한, 상실감, 현실의 결여를 대체하는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 등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토」 연작의 후반부는 조태일이 유년기에 체험한 비극적인 가족사에 대한 기억, 고뇌에 휩싸인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는 일에 집중된다. “개 짖는 소리도 얼어붙은 골목길을 거쳐/저녁내 쌓인 눈을 밟으며/나는 어디로 가는가.”(「새벽녘-국토 70」, 『산속에서 꽃속에서』) 이렇듯 길을 잃은 조태일은‘국토’에서 민족의 이념을 후경화하고‘자연’의 생명력을 전경화함으로써 활로를 마련한다. 조태일이 변화를 모색하고 이행한 장소 역시‘국토’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공간의 이동이 아닌 시각의 변화를 통해 조태일은 변함없이‘국토’에 거주하면서‘국토’에서 살아가는 법을 탐색한다. 이때 다시 도드라지는 시적 주체는‘나’인데, 이‘나’는 자연으로서의 국토와 거리감 없이 합일하는 존재로 상정된다. “나는 쓰러지는 법을 잊어버렸다./나는 사라지는 법을 잊어버렸다.//높푸른 하늘 속으로 빨려가는 새./물가에 어른거리는 꿈//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가을 앞에서」,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개복숭아꽃 저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연등」,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이 부분에서 조태일에게‘자연’은 관념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의 존재와 삶의 근원을 이루는 실체라는 점을 살펴둘 필요가 있다. “보이는 것이란 대나무숲을 포함한 수림(樹林)이며, 그곳엔 원없이 날고 뛰는 날짐승 산짐승이며 하늘뿐이고, 들리는 소리란 밤낮으로 울부짖는 짐승소리며 흐르는 계곡 물소리”뿐인 “그야말로 첩첩산골”(「버들개지 밑으로 물이 흐르면」, 1982)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에게‘자연’은 삶의 위기를 해결할 힘과 존재적 안정감을 공급해주는 실체를 뜻했다. 무엇보다 90년대 조태일의 시에 기입된‘자연’의 의미와 지위는 그의 이전 시들, 특히 「국토」 연작이 구축해온 역사적이며 현실적인 맥락에 의해 지지된다. 하지만 이 시기 조태일의 시에서 현실에 대한 세분화된 문제의식과 정치적 상상력이 약화되어 있는 것은 분명 아쉬운 점이다.
‘국토/자연’과‘나’가 거리감 없이 합일하는 자리에서 조태일이 도달한 것은 “나는 노래가 되었다”(「노래가 되었다」,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는 시적이며 존재론적인 선언이다. 시 「노래가 되었다」는 조태일의 90년대 이전과 이후의 시세계를 잇는 역할을 하면서 조태일 시의 정수이자 궁극의 귀결점을 펼쳐 보인다. 이 시에 형상화된‘국토’는 인위적인 이념과 “거침없이 흐르고 아무데나 스미는” 자유자재한 자연 사이의 거리를 최소화하고 있다.
거침없이 흐르고 아무데나 스미는 물,
(…)
이런 것들과 함께 어우러져 친하다가
나는 노래가 되었다.
마른 강을 적셔주고
박힌 바위, 엎드린 돌멩이들 흔들어주고
어둠이 더욱 어둠이게 하고,
달이 더욱 달이게 하고,
별들이 더욱 별들이게 하고,
전국토의 아스팔트를 뚫고 샘물 솟도록,
너와 나, 우리들 사이를 좁히는 음계가 되도록,
토라져 누운 국토 바로 눕도록,
남녘과 북녘을 동시에 울리도록,
굳을 대로 굳은 역사 풀리도록,
오오, 이승과 저승의 거리를 좁혀주는
노래가 되었다.
-「노래가 되었다」 부분
순정하고 열렬한‘노래’로서 시가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극점, 사회·역사를 위한 윤리의식과 신념이 노래가 될 수 있는 시대의 귀결점(혹은 소실점)은 시인 자신이 “노래가 되”는 경지일 것이다.‘노래가 되었다’는 간결한 문장은 수사적 차원을 넘어‘존재 전환’의 상태를 그대로 지시하면서 조태일이 거쳐온 시와 삶의 궤적을 수렴한다. 시 「노래가 되었다」는 현실과 문학, 신념과 실천, 시와 시인이 한몸을 이루고 있(다고 믿었)던 시대에 바치는 조태일의, 혹은 조태일을 통해 발화된 그 이후의 시대의 헌시이자 조시(弔詩)인 것이다(이 점에서 조태일 타계 5주기에 신경림과 이시영이 엄선한 시선집의 제목이‘나는 노래가 되었다’가 된 것은 적절한 동시에 필연적인 일이었다). 조태일의 시가 스스로를 갱신하는 위기의 지점에서 높은 미학적 완성도에 이르고 있는 것은 그의 시세계의 아이러니이자 우리 시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시와 문학이 본질적으로 위기를 통해 성장하는 아이러니의 양식이라고 할 때, 현실의 위기보다는 시 자체의 위기가 훨씬 강도 높은 추진력이 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조태일의 시는 민족과 국토의 이념이 노래가 될 수 있었고 그 이념을 시인의 존재 자체로 육화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시대의 산물에 속한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우리 시는 그로부터 멀어져 조금 혹은 전혀 다른 것을 상상하고 이야기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 문학이 그 시대와 동일한 신념과 상상의 체계로 되돌아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귀환이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은 다른 형태와 방식이 될 것이다. 그런데 차이란 단순히‘다른’영역을 가리킬 때보다는‘더 나은 다른’세계를 열어보일 때 가치를 갖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치, 현실, 민주, 분단, 자유 등이 우리시대 문학의 타자가 되는 일은 정당한가. “그 시대에 있어서 양질의 시대의식과 양질의 민중의식이 다른 시대에까지 의미를 부여하는 문학이라야 진짜 문학”(「민중과 70년대 시의 한 주류」)이라고 조태일은 말한 바 있다. 당연히 조태일과는 다른 화법으로, 앞으로 우리 시는 더 나은 다른 것을 상상하고 실현해야 할 소임을 갖고 있다. 조태일의 시에 대한 논의의 결론을 우리 시의 미래와 함께 여전히, 계속 열어두어야 할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정치와 윤리를 다른, 더 나은 방식으로 사유하고 상상하는 문학을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