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제27회 신동엽창작상 발표

 

신동엽(申東曄) 시인의 문학과 정신을 기리고 역량있는 문인을 지원하기 위해 신동엽 시인의 유족과 창비가 공동제정한 신동엽창작상 제27회 수상작이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정되었습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시상식은 2009년 11월 25일(수) 오후 6시 30분 프레스쎈터 국제회의장에서 만해문학상·백석문학상·창비장편소설상·창비신인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열릴 예정입니다.

 

 

제27회 신동엽창작상 수상작

 

김애란 소설집 『침이 고인다』

 

심사위원

나희덕 성석제 한기욱

 

2009년 7월

신동엽창작상 운영위원회

 

 

 

심사경위

 

2009년 6월 12일 신동엽창작상 운영위원회는 나희덕, 성석제, 한기욱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하여 제27회 신동엽창작상 심사를 시작했다. 신동엽창작상은 등단 10년 이하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작가의 최근 3년간 한국어로 된 문학적 성취들을 심사대상으로 한다. 심사위원들은 추천위원(창비의 시와 소설 분야 기획위원)들의 추천목록을 참조하여 한달간 작품을 검토한 끝에 1차 모임(7월 10일)에서 다음의 시집 3권, 소설집 3권으로 심사대상을 압축했다. 김중일 『국경꽃집』,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황병승 『트랙과 들판의 별』(시), 김애란 『침이 고인다』, 김중혁 『악기들의 도서관』, 황정은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소설).

이상의 6권을 집중적으로 검토한 끝에, 2차 모임(7월 17일)에서 김애란 소설집 『침이 고인다』를 올해 신동엽창작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합의했다.

 

 

 

심사평

나희덕(羅喜德) 시인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신동엽창작상 수상자가 소설가였으니 올해는 시 쪽에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다. 하지만 본심에 오른 소설집들을 읽어나가는 동안 장르의 형평성만을 내세우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에서는 진은영으로 의견이 쉽게 모아졌고, 소설에 대한 평가는 서로 엇갈리는 편이었다. 결국 후보작을 다시 정독하고 2차 모임을 가진 끝에 김애란 소설집 『침이 고인다』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매일』은 조용하면서도 치열한 시정신과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잘 조율된 시집이다. 주체와 세계의 간극을 예민하게 응시하는 이 시인은 멜랑꼴리의 정서를 철학적 사유와 결합시켜‘다정한 품격’을 지닌 시로 빚어낸다. 서정적 온기가 사유의 결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기 때문에 난해하면서도 읽는이에게 스며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나에게는 다섯 명의 시인이 있지”(「앤솔러지」)라고 말하는 시인이 그 다성적(多聲的) 세계를 앞으로도 아름답게 일구어가리라 믿는다.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은 전체가 하나의 연작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음악’을 매개로 하여 소설에 대한 자의식을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우선 이런 문제의식이 한국소설에서는 희귀한 편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주목받아 마땅하다. 자칫 관념적으로 흐를 수 있는 주제를 살아 있는 인물을 통해 형상화하는 능력 또한 탁월하다. 그럼에도 소설에 대한 메타적 인식이나 문화론적 접근이 왠지 핍진한 현실을 향해 직진하는 소설에 비해 인상이 약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러한 판단이 또하나의 편견일지 모른다는 생각 앞에서 오래 망설였다.

황정은의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는 첫 소설집답게 자유롭고 활달하다. 무중력상태에서도 소설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얼굴이 지워지거나 희미해진 화자들이 무심하게 내뱉는 말들은 현실도 환상도 아닌 어떤 세계를 뭉글뭉글 피워낸다. 그런데 그 유쾌하고 몽환적인 세계를 빠져나오고 나면 이상한 공포감과 허무감이 밀려드는 것은 왜일까. 세계의 폭력성을 비목적적으로 일깨우는 이 낯선 감수성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지만, 황정은의 소설이 한국소설에 이종(異種)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임은 분명하다.

김애란의 첫 소설집에 등장하던 당돌한‘아이’는 이제 성인식을 치르고‘여성’이 되었다. 단편들에서 변주되는‘방’은 좁고 내밀한 존재의 공간이자 타인과의 연대를 발견하는 터전이다. 그 방에서 이루어지는 여성들의 동거는 불안과 균열을 동반하지만,‘칼자국’으로 대변되는 모성성은 존재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되어준다. 개인의 서사에 충실하면서도 그의 소설은 현실에 대한 사회학적 보고서로서 뛰어난 관찰력과 실감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김애란의 진정한 매력은 재현능력 자체보다 아무리 누추한 현실도 유쾌하거나 감미로운 고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데 있다. 유별난 장치 없이 담백한 단문으로 삶의 맛을 이렇게 되살려내는 걸 보면,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등단 직후부터 충분한 관심과 격려를 받아온 작가에게 주어지는 이 상이 그의 어깨를 너무 무겁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성석제(成碩濟) 소설가

김애란은 상찬을 받을 만한 작가다. 딛고 있는 땅이 단단하고 그려내는 세상은 허술한 데가 별로 없으며 방심하고 쓴 흔적도 없다. 김애란의 소설을 통해 이 땅 젊은 개인들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그의 소설은 생활의 역사다. 좌절하는 청춘, 참고 살아가다 폭발하고 또 인종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역사다.

김애란을 거쳐 태어나는 삶의 역사에는 절실함이 있다. 장마 때마다 물을 퍼내야 하는 반지하방에서 살아가는 삶이지만 눅눅하지 않다. 청년 백수, 직장 초년병의 무기력하고 소시민적인 모습에도 굴하지 않는 명랑성이 있다. 성탄절에 만난 남녀가 사랑을 나눌 공간을 찾아 서울 시내를 헤매다가 빈방 찾기에 실패하는 이야기도 너절하지 않다. 칼국수집과 지하철과 고시원의 평범한 생활이 보편적인 삶의 조건 가운데 하나로 끌어올려지는 것은 완성도 때문일 것이다.

경험에서 나온 허구는 진실한 힘이 있다. 또한 김애란 작품의 힘은 삶의 세부에 지나치게 탐닉하거나 함몰되지 않고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데서, 품위를 잃지 않는 덕성에서 나온다.

김애란은 자신이 잘 아는 이야기를 잘 아는 틀 속에 집어넣고 꿰맨 자국도 보이지 않게 잘 봉합하여 또하나의 세상을 세상에 보여줄 줄 아는 작가다. 신동엽의 젊고 푸른 예술혼을 기려 제정된 이 상이 합당한 작가에게 돌아간 것 같다.

 

한기욱(韓基煜) 문학평론가

논의는 최종적으로 1권의 시집과 3권의 소설집으로 압축됐다.

진은영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은 익숙한 시어와 시문법은 거절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통해 현재적 삶에 발본적으로 반응하려는 분투가 인상적이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감각과 사유를 재가동할 때처럼 낯설고 불편하지만, 종종 매혹적인 시가 도래한다는 느낌이다. 좀더 풍성한 결실을 거둔 소설 쪽으로 논의가 모아졌을 때에도 손에서 놓기가 아쉬웠다.

김중혁 소설집 『악기들의 도서관』은 음악에 관한 이야기들 모음이지만 현대적 삶의 방식과 예술론에 대한 뼈있는 반성적 사유와 유려한 화법이 돋보였다. 이 작가의‘리믹스’예술관에 동의하건 안하건 작금의 문화적 풍속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이야기 솜씨와 그 대안적 발상은 주목할 만하다.

황정은의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는 독특한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아무렇지 않게 유령이 출몰하고 멀쩡한 사람이 모자로 변하거나 오뚝이로 되어가는 등‘터무니없는’설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우리시대 현실의 핵심에 바싹 다가온 듯하다. 보통사람들이 당하는 비참과 굴욕과 폭력을 호들갑 떨지 않고 시큰둥한 유머로 눙치면서 그 안쪽에서 이야기할 줄 아는 재주와 담대함이 돋보인다.

김애란 소설집 『침이 고인다』는 젊은 주체의 목소리와 어법으로 2000년대 한국 현실을 그 미세한 결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포착하는 데 성공한다.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의 수렁에 앞날이 가로막힌 젊은이들의 고단한 삶과 가족사를 핍진하게 들려주는 한편, 적확한 이미지와 풍부한 상징이 이야기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들게 만드는 솜씨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동시대 젊은이들의 고단한 삶을 어떤 관념과 위안에 기대지 않고 비정하게 다루되 그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잃지 않는 성숙한 자세, 상대적 빈곤과 상실감에 시달리는 삶에 호흡을 맞추면서도 그 암담한 전망에 주저앉지 않고 생동하는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예술가적 근성이 「도도한 생활」 「침이 고인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 「칼자국」 등의 수작을 낳았다.

심사위원들은 3권의 소설집을 두고 열띤 논의를 펼쳤고,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로 주목받은 후에도 계속 정진한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를 수상작으로 뽑는데 흔쾌히 합의했다.

 

 

 

수상소감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김애란 金愛爛

1980년 인천 출생. 2002년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을 2003년 계간 『창작과비평』 봄호에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가 있음.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다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자꾸 변한다. 요즘 부쩍 그런 것이 보인다. 갑자기 생겨버린 점, 불현듯 거슬리는 옹이, 기이하게 스스로 모양을 바꿔가는 흉터, 낯설어 자꾸 비벼대다 더 커져버린 얼룩…… 어떤 하루도 똑같은 조도(照度)와 풍향을 갖지 않는 것처럼. 내 몸은 매일매일 다르다.

 

아는 이야기를 다 쓰면, 그 다음엔 어떤 글을 지어야 하나 근심한 적이 있다. 바보같이 몸도 글도 한결같을 거라 생각하던 시절의 일이다. 하나의 단어가 완전히 몸을 통과한 후엔 예전과 다른 의미가 된다는 걸 몰랐다. 안다고 믿었던 말, 쉽게 끄덕인 말, 몰래 치워둔 말…… 쓰러진 푯말을 따라,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갈 때면, 이따금 몹시 늙은 얼굴을 한 서사들이 손짓하며 멀찍이 서 있기도 했다. 불안과 매혹, 의심과 의문 사이에서, 지금도 나는 얼굴을 잃어버린 사람이 바닥을 더듬는 꿈을 꾼다. 육체가 육체인 것이 번번이 난감하고, 육체가 육체인 것이 기껍고 미덥다.

 

글을 쓸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쥐게 된 대답보다 늘어난 질문이 많다. 세상 많은 고통은 사실 무수한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걸, 그 당연한 사실을, 글 쓰는 주제에 이제야 깨달아 간다. 나는 요즘 당연한 것들에 잘 놀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려 한다.

 

서른,

기쁘게 한껏 부풀어 오르고 보니

곁에 선 부모가 바싹 쪼그라든 채 따라 웃고 있다.

 

언젠가 막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저녁에 한여름 불가에서 장사를 하던 엄마가‘누가 와 귀싸대기 때려도 웃을 것 같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노동 후 땀에 전 몸으로, 그해 첫 간절기 바람을 맞으며 선하게 맑아지던 엄마의 옆얼굴. 신동엽 선생님께서 주신 이 상이 부모님께 그런 한줄기 미풍이 돼드렸음 좋겠다.

 

바람이 일어나는 등압선을 보듯,

활자가 돋아나는 손가락 끝, 지문을 물끄러미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