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독자의 목소리

 

 

인문학, 제도권-비제도권의 공존에서 길 찾아야

● 지난호 특집 중 ‘비제도권 인문학’ 공간에서 활동하는 연구원, 시간강사, 비평가 등의 산문을 잘 읽었다. 이들은 제도권 인문학에 더이상 희망은 없으며, 제도로부터 독립적인 연구공간과 현실에 즉한 실천적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본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들의 분석, 곧 비제도권 인문학 교육의 필요와 희망에 동의하면서도, 제도권 인문학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에 불편함을 느낀다. 이들의 비판은 “대학에는 앎은 있되 삶은 없다”는 것인데, 대학 인문학 교육의 문제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같은 단정은 인문학 전체를 통째로 흔드는 자기파괴적 주장밖에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제도권 인문학과 비제도권 인문학의 공존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최원식·백영서가 나눈 대담은 제도권 인문학에 대한 다소 한가로운 대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미덕은 제도권/비제도권을 적대시하는 그릇된 판단이 유보되어 있다는 점이다. 나는 “비제도권 인문학이 인문학을 세상으로 불러낸다”는 식의 취지에 깃든 위험성을 주지해야 한다고 본다. 비제도권 인문학이 ‘대중종교’의 한 부류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최근 인문학은 심리치료 기능을 하고, 비전을 제시하며, 성공을 위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소비되는 중이다.

비제도권-제도권 인문학은 교회-신학교 모델을 따를 수도 있다. 현장 목회는 신학연구에 영향을 받고, 현장 목회에서 나온 신학이 신학교의 신학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델이 결국 신학교를 교단화하고 자유의 공간을 제약하여 신학에서 ‘학’을 떼어버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대담자 최원식의 말대로 ‘학’의 본질은 ‘실천’ 이전에 ‘자유’이며, 위인지학이기 전에 위기지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권 인문학을 무턱대고 비판하고 존재 당위를 문제시하는 것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대학이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휩쓸려 본분을 잃고 기업화된다는 지적은 전적으로 옳지만 ‘학’에는 자유로운 연구를 통해 발견된 생활세계와의 소통이 따라나와야 하는 것이지, 실천을 위한 ‘학’을 종용하는 것은 기업이 대학에 ‘인재’를 양성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만큼 학문 자체를 도구화하는 일이다. ‘필요한 학문’이 되어야 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학문’이 꼭 불필요한 것은 아니며 때로는 ‘실천’과 ‘삶’을 위한 학문의 조건이 되기도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권영민 http://spermata.egloos.com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인문학을 위하여

● 지난호 특집에서 아쉬웠던 부분은 인문학과 일상적·개인적 차원의 미시담론 영역이 맺는 관계에 다소 무심(?)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지금 운위되는 인문주의가 사회적 실천과 긴밀히 연결되었던 왕년의 운동적 학문의 요구와는 조금 다르다는 지적은 ‘운동성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앞서 말한 그 아쉬움과 일맥상통한다. 대학 바깥, 사회 전반에 걸쳐 ‘보통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인문학이 ‘보통의 삶’을 구체적으로 바꿔놓지 못한다면, 운동성을 잃은 채 교양 차원에 머무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특집에서 비중있게 다뤄진 ‘비제도권 인문학’은 몇몇 연구자에게는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운동성의 영역’일 수 있지만, (적어도 아직까지)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마치 취미생활이 삶의 조건 자체를 바꿀 수 없듯 ‘주지주의적 차원’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의 운동성은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의 미시적 삶도 함께 탐구해가는 데까지 그 지평을 넓혀야 한다. 그리했을 때 위기지학이 개개인의 차원에서 구현됨으로써 인문학을 공부하는 의미를 더 깊이 새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창비는 문학/사회인문학 담론이 공존하는 공간이니, 문학적 상상력과 사회인문학적 분석력을 통해 삶의 미시적 차원에서의 운동성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주기 바란다.

이승훈 zorba.lee@hanmail.net

 

 

대학 인문학 교육에 제안한다

● 특집 대담을 읽으며 크게 공감했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나로서도 오늘날 대학내 인문학의 모습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 하지만 인문학의 이념, 인문정신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굉장히 크다.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그것이 바로 대학의 인문학이 사회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대담자들이 제기한 교양학부 문제에 대해서도 동감한다. 현재 대학에서는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교양과목이 너무 많다. 갖춰야 할 교양이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현실이지만, 그런 수업을 더욱 괴롭게 진행하는 교수진에도 문제가 있다.

여기 내 나름의 대안을 소개해본다. 대학에서 교양과목을 필수/선택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자율선택강좌로 바꾸는 것이다. 교양과목은 학점으로 점수화하지 않고 졸업 때까지 들어야 하는 시수(時數)만 정한다. 학생들은 전공 외에는 쎄미나·문화강좌 형태의 수업에 참석한다. 수업은 학생이 몇명 참가하든 진행되어야 하고, 한달에 한번 정도 강좌 종류나 수업 내용에 변화를 준다. 출석체크는 학생증으로 하되 강의실에 들어왔다 해도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은 ‘시수 미인정’으로 그때그때 강사가 체크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대학 스스로 교육환경 개선에 노력하고, 제도화된 영역에서 먼저 행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실천 인문학’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아 violet9942@hanmail.net

 

 

도시재개발 문제의 구체적 대안 마련해야

● 아파트 키드로 자라 이제는 원룸생활자가 된 나는 평소 도시공간에 관심이 많다. 그런 까닭에 여름호에 실린 김용창의 「물리적 도시재개발에서 도시권으로」를 흥미롭게 보았다. 학교 앞에 우후죽순 생겨나는 커피전문점, 자고 일어나면 훌쩍 자라 있는 오피스텔 건물, 동네 가게들을 밀어내고 들어선 기업형 슈퍼마켓(SSM), 매끈(하기만)한 광장과 유리벽에 눈이 부신 관청건물 사이를 걷다 보면 원래 가려던 곳이 어디였는지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값싼 ‘노크하지 않는 집’(여관식 자취방)들은 재개발에 밀려나고 ‘이 편한세상’이 되어간다. 여기에 끼지 못한 수많은 이들은 변두리 옥탑, 반지하, 허름한 고시원들로 흩어져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이 글은 최근 용산참사의 원인과 도시재개발의 문제를 연결지어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그런데 필자가 지적했던 하비의 ‘도시권’의 한계와 마찬가지로 이 글 역시 구체적인 실천수단을 제시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살 권리’라는 상식을 공유하고 사회적 실현방법을 찾길 바란다.

류지이 cosmos1945@freechal.com

 

 

고교생에게 창비가 준 신선한 충격

● 『창작과비평』이 어떤 잡지인지는 익히 들어왔다. 다만 읽어본 적이 없어 막연하게만 알고 있다가 처음으로 지난 여름호를 읽어보았다.

대입준비에 바쁜 고등학생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먼저, 이번에 처음으로 ‘문학비평’이 심오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수많은 이론과 방법이 존재하고 이를 갖고 서로 논쟁이 벌어진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문학비평들을 정독했고 앞으로도 꾸준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 「즐거운 나의 집」 같은 단편도 좋았다. 집이 농촌에 있는 나로서는 특히 「즐거운 나의 집」을 읽으며 요즘의 농촌 풍경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강준만 교수의 촌평이다. 전교조 문제를 바라보는 문제의식과 예리함에 막힌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창비』가 고교생이 읽기에 얼마나 적합한 잡지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잡지 전체의 논조에 모두 동의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건 『창비』를 읽음으로써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선승범 북일고등학교 2학년 mikuris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