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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3대 위기를 넘어, 3대위기론을 넘어

 

경제위기를 넘어 민생위기 해결로

 

 

전병유 田炳裕

한신대 평화공공성쎈터 부소장. 저서로 『통합적 사회정책 대안 연구』(공저) 『한국자본주의 발전모델의 역사와 위기』(공저) 등이 있음. bycheon@hs.ac.kr

 

 

1. 경제위기의 현주소

 

구복지루 구지부득(口腹之累 求之不得). 먹고살기 어렵고, 아무리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한다. 한 취업포털에서 직장인과 구직자들이 2009년을 결산하며 뽑은 사자성어다. ‘일반 국민의 생활과 생계’를 의미하는 민생(民生)이 그만큼 어렵다는 신호다. 한편 지난해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의 이익과 사상 최고의 주가를 경신했다. 자동차의 경우, 한국차의 미국 시장점유율이 7%까지 높아진 한해였지만,1 중소협력업체들은 20%가 넘는 영업이익률 하락을 감수해야 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인해 거의 막장까지 갈 듯했던 세계경제와 한국경제가 회복되고 있다고 한다. 2009년은 2차대전 후 세계경제가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해였다. 그러나 정부와 연구기관들은 올해 세계경제 성장률이 3%대이고 한국경제도 4~5%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출구전략을 어느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취해야 하는가가 쟁점이 되는 것이다. OECD나 IMF는 한국경제가 과감한 유동성공급과 재정투입으로 경제를 수렁에서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한다. G20 정상회의 주요 의제로 ‘한국의 경제개발 및 위기극복 모델’을 포함시키는 방안도 추진한다고 한다.

세계금융위기에 대해 이명박정부는 대규모 유동성공급과 재정투입이라는 위기대응 전략을 펴는 한편, 감세와 규제완화, 민영화, 법질서 확립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MB노믹스(MBnomics)에서 친서민 중도실용노선으로 전환했다. 전자는 어느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2009년 한국의 재정투입은 GDP 대비 3.7%로 OECD 평균 2%에 비해 매우 큰 폭으로 이루어졌다. 2%대의 낮은 금리는 한국경제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재정의 거의 3분의 2를 상반기에 집행했고 그것을 하루 단위로 점검했다는 후문이다. 한 관료의 표현에 따르면, 공무원 생활 20년에 이렇게 원없이 돈을 써본 적이 없을 정도라 한다. 그동안의 내수결핍 경제에 일시적이나마 대규모의 재정투입이 큰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한편 친서민 중도실용노선은 실체가 없는 정치적 수사이고 말과 정책이 다른 거짓말 노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자 감세와 대형 토목공사, 복지의 제도화 거부, 수도권 중심주의 등은 친서민 중도실용노선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분적인 전환은 있었다. 한시적·임시적이지만 대규모의 재정투입 중 일정 부분은 서민의 호주머니를 채워주었다. 많은 문제가 있고 허울뿐일 수 있겠으나 어쨌든 학원시간 규제와 취업후 등록금 상환제 등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교육문제를 정책의제로 설정하고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민생’은 여전히 어렵고 고달프다. 한국경제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위기를 겪었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서민’의 몫으로 남았다. 위기를 거치면서 격차는 더 벌어지고 서민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이번 위기도 마찬가지다. 민생의 위기는 민주정부 10년간 직면했던 위기가 악화되는 형태다. 이명박정부는 양극화에 따른 박탈감의 분출을 몇푼의 쌈짓돈으로 막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사회는 경제위기에서 벗어나 민생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2. 경기회복의 한계와 문제

 

세계경제위기가 끝나 한국경제가 이제 거품을 막기 위해서는 출구전략을 써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금리를 인상해야 하고 재정투입도 원위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위기탈출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을 듯하다.

우선 세계경제의 회복에 여전히 불확실성이 많다. 정부는 빠른 경기회복세를 전제로 2010년 성장률 5%에 일자리 20만개 증가, 민간소비와 설비투자 각각 4.2%, 11.0% 증가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주변환경은 만만치 않다. 미국의 경우 여전히 가계차입이 줄고 저축이 늘고 있다. ‘부채에 기초한 소비’가 쉽게 되살아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경우 2009년의 내수확대정책을 접고 이미 긴축정책으로 방향선회중이다. 원화는 평가절상될 것이고 대기업이 누리던 수출프리미엄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금리가 인상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가계부채의 압박으로 소비가 늘기도 쉽지 않다. 지난해 상대적으로 국내 물가안정에 기여했던 저유가 기조도 언제 바뀔지 모른다. 2009년은 다행히 빠른 경기회복이 가능했지만, 2010년 세계경제에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져나올 수 있다.

다음으로 그간 정부 재정투자로 가능했던 경기회복이 지속가능한 것이냐의 문제도 있다. 재정투입에 의존한 경기회복정책이 댓가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재정악화의 가능성이 있다. 국내 재정수지 적자는 관리대상수지 기준(국민연금이나 고용보험 같은 기금을 제외한 재정수지)으로 2009년에 51조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5.0%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이는 GDP 대비 비율로 외환위기 직후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올해도 재정적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으로 보이고, 그에 따라 적자성 채무는 2007년 127조원 수준에서 2010년 168조원, 2011년 228조원, 2012년에는 247조원으로 급속히 증가할 전망이다. 법인세와 소득세 인하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4대강사업 같은 비합리적 재정지출이 확대되면서 당연히 나올 수 있는 결과다.

재정적자로 늘어나는 국가채무가 아직은 OECD 국가들의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지만, 최근 들어 증가속도가 너무 빠르고 공기업 부채까지 포함하면 규모가 더 커진다. 물론 재정의 규모나 적자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정부재정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집행하고 관리한다면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남북관계 변화 및 통일의 전망이 불확실하고 고령사회로의 진입은 분명해진 상황에서, 세입과 세출에 대한 중장기적 비전 없이 응급처방식으로 재정을 운영할 경우 일본처럼 국가채무의 덫에 빠질 위험이 높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경기회복이 서민의 실감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이제는 ‘고용 없는 성장’과 ‘소득 없는 경기회복’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대부분 이를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경제양극화 현상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이번 위기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는 계속 벌어졌다. 대기업의 생산증가율은 전년 동기 대비로 1분기 -16.7%에서 3분기에는 4%로 회복했으나, 중소기업은 여전히 생산 감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무역의존도는 92.3%로 상승해 사상 처음 90%를 넘었다. 내수를 활성화해 안정성장의 기반을 다진다는 정책방향과는 정반대로 간 셈이다. 수출과 내수의 불균형성장이 지속된다면 그 결과는 고용 없는 성장, 소득 없는 경기회복이 될 것이다. 2009년 고용은 전년 대비 7만 2천명 감소했다. 정부 재정을 통한 일자리사업의 효과가 30만명 가까이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고용감소는 40만명에 육박한다. 고용은 경기에 후행하는 특성을 지닌다지만, 감소의 폭이 과도하고 증가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경기회복에도 불구하고 가계 체감경기는 매우 부진하다. 2인 이상 도시근로자 가구의 소득이 2009년 1분기 -0.7%, 2분기 -2.1%, 3분기 -2.9% 등으로 소득 감소폭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 결과 3·4분기 가계소득 감소폭은 사상 최대이다.

미흡한 고용창출뿐 아니라 가계부채의 증가도 가계소득을 압박하고 있다. 거시경제지표의 상승세에도 국내 가계부채 규모는 3분기에 712조 8천억원을 기록했다. 작년 주택담보대출은 43조 4천억원이 늘어나 잔액이 351억 2천억원을 기록했다. 2008년 증가액 36조원을 훌쩍 뛰어넘는 사상 최대규모다.

또한 거시변수로서의 물가상승률은 2%대로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OECD 평균인 0.1%에 비해서는 높고, 서민가계에 영향을 미치는 식품물가 상승률은 OECD 회원국 중 2위다. 가계소비지출에서 차지하는 식료품비 비중인 엥겔계수가 2009년 1~9월 중 13.0%를 나타내 8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엥겔계수 증가는 곧 가계의 빈곤화를 의미한다.

미국, 중국, 그리고 유럽의 경제회복이 대규모의 재정투입으로 가능했기 때문에 이것이 경기의 지속적 회복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 대공황 이후의 더블딥(double deep)은 역사적으로 많이 나타난 현상이다. 여전히 세계경제에는 불확실성이 가시지 않은 상태다. 이런 환경에서 대기업 수출과 재정투입에 의존하는 경기회복이 지속가능하느냐의 문제가 한편에 존재하고, 다른 한편에는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민생의 위기는 지속된다는 구조적 문제가 남아 있다.

 

 

3. 문제를 누적시키는 이명박정부

 

세계경제의 불확실성과 서민의 민생위기에 대응해야 할 정부가 감세정책이나 4대강사업 같은 요령부득의 헛발질만 하고 있다.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으로 하겠다지만 고용대책에는 별 내용이 없다. 여전히 이명박정부를 상징하는 정책은 감세와 4대강사업일 것이다. 전자가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이념을 나타낸다면 후자는 개발연대의 패러다임을 대표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두 사업은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다. 청계천 복원이나 서울시 교통체계 개편은 추진방식에서의 문제점은 있었지만 나름대로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감세와 4대강사업은 세계금융위기와 경제사회구조의 양극화에 직면한 한국경제의 새판짜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감세가 성장과 고용을 촉진한다는 주장은 한국경제의 현실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신자유주의라는, 이제는 창고에나 집어넣어야 할 낡은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지난 정부의 정책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면서 나온 해묵은 논리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경제에서 전체 법인의 0.1%인 200여개의 대기업들이 전체 법인세의 60% 이상을 내고 있다. 대기업들이 엄청난 현금을 내부 유보로 쌓아두는 상황에서 법인세를 인하하는 것은 고용 창출로 이어지지 못한다. 저임금 근로자들의 경우 낮은 임금과 각종 소득공제로 소득세를 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소득세 감면은 당연히 부자 감세이고, 이것이 수요를 창출하는 효과 또한 크지 않다. 게다가 감세로 인한 지방정부의 세수 부족이 30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재정이 줄어도 인건비 같은 경상비는 줄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방세수 감소는 대부분 복지와 주민써비스 지출의 감소로 나타날 것이다. 이처럼 감세가 성장과 내수를 촉진할 근거는 대단히 취약하며 민생의 위기를 악화시킬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명박정부도 이같은 위험을 인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0년 재정을 2009년의 본예산 수준으로 동결하고, 법인세와 소득세 감면을 유보했다. 또한 실현가능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2013년에 재정균형의 달성을 목표로 재정을 운영하기로 했다. 사실상의 감세정책 폐기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그럼에도 재정위기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지금처럼 주요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 검토를 제외한다든지, 정부사업 예산을 공기업에게 떠넘긴다든지, 국가재정을 너무나 엉성하고 무계획적이며 비합리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단순히 감세 유보나 재정균형 목표 설정만으로 재정위기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소기업과 지방이 살아야 내수가 살고 양극화가 완화된다. 하지만 이명박정부는 이를 4대강사업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감세는 포기하더라도 4대강사업은 단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4대강사업은 나라살림과 국토를 망칠 가능성이 높은 한반도대운하의 물꼬를 트려는 것인 동시에, 지역건설족에 ‘퍼주기’를 통해 내수를 확대하겠다는 의도도 작용하는 사업이다. 과거에는 도로나 교통 등 사회간접자본의 외부효과와 고용창출효과가 컸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개발도상국이 겪는 사회간접자본의 부족이나 선진국이 직면한 사회간접자본의 노후화를 어디서도 보기 힘들다. 청년실업자들은 건설일자리를 얻기보다는 차라리 백수로 지내면서 다른 직장을 탐색하는 취업준비생이 되고자 할 것이다. 삽질경제의 효율성과 효과는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정책어젠다는 정부가 주도한다. 그 결과 다른 의제들은 다 사라지거나 전면에 제시되지 못하고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이명박정부하에서 중소기업정책은 줄어들고 고용정책은 부재하고 복지정책은 방치돼 있다. 기존에 제도화된 복지정책까지는 아직 손대지 못하고 있지만, 그런 제도의 빈틈을 채우고 있는 많은 정책들이 소리없이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많다. 2010년부터 기초장애연금을 도입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장애’라는 위험을 사회적으로 나누는 씨스템이라기보다 저소득 장애인에게 소액의 수당을 주는 장애수당에 불과한 ‘무늬만 연금’으로 되어버렸다. 한시적 생계급여나 각종 사업들은 경제위기가 공식적으로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내년 예산에서 모두 제외된 상태다. 지역과 현장의 자발성이 핵심인 사회적기업 정책이나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은 관변행정이나 뉴라이트 배불리기로 전락할 전망이 짙어졌다. 현정부하에서 공공정책의 세심한 설계와 기획이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세계경제의 불확실성과 더블딥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교한 정책기획이 부재한 이명박정부의 경제정책은 민생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공산이 크다.

 

 

4. 민생위기의 구조

 

민생위기는 사실 외환위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통계적으로 보면 빈곤, 불평등, 양극화와 관련된 지표들이 1990년대 초부터 전환되기 시작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도 이 시기부터 빠르게 확대되며, 감소하던 임시일용직의 비중이 커지고, 지속적으로 하락하던 대학교육에 대한 투자수익률이 증가한다. 그 결과 지니계수나 상대빈곤율 등도 상승하기 시작한다.

이는 생산물시장에서 수출대기업과 내수중소기업의 격차가 커지면서 노동시장이 양극화되고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으며 고용이 불안해지는 데 따르는 현상이다. 300인 이상 사업체의 일자리는 1990년대초 전체 고용시장의 20% 가까이 되었으나 이제 10%에도 못 미친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격차는 1980년대에는 100:110 정도에서 1990년대에 100:130으로 높아져 2008년 현재 100:170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고용불안이 유발하는 빈곤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규직에 비해 차별받는 비정규직뿐 아니라, 이른바 일을 해도 먹고살기 힘든 ‘근로빈곤’(working poor, in-work poverty)이 나타나고 있다. 근로빈곤은 고용형태 면에서 유연화-불안정화라는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그 하나의 원인이 있고, 다른 하나의 원인은 근대적 고용조건을 보장받지 못하는 영세사업장 취약근로자들의 고용조건 하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정부 시기 복지예산을 매년 20% 정도씩 확대했음에도 서민들이 그 효과를 크게 체감하지 못한 것은 이 구조화되는 빈곤 메커니즘에 정확하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민(庶民)’은 학자나 전문가들에게 참 정의하기 힘든 단어다. 그럼에도 정치적으로는 매우 강력한 힘을 지녔다. 대통령이 말로만이라도 서민을 내세우면 지지율이 오른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서민이란 ‘첫째,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 둘째, 경제적으로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풀이된다. 일부 학자들은 소득이나 재산을 기준으로 중산층 또는 중간층 이하의 계층으로 정의하기도 한다.2 실제로 서민으로 포괄될 수 있는 계층은 비정규직 중하층, 중소영세기업의 취약근로자, 영세자영업자, 그리고 절대빈곤층 등이다. 이러한 계층들은 한국경제의 발전과정에서 각각 역사성과 구체성을 가지는 현실적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서민에게, 부문간 격차의 확대로 나타난 구조화된 빈곤과 민생위기에 대해 단순히 성장보다 분배가 중요하고 국가복지 확장을 위해 정부예산 투입을 증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생활에서 실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들은 아직도 경제성장이 일자리창출과 소득증대를 통해 생활상의 요구를 실현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으며 그동안의 경험으로 재분배와 복지확대가 자신의 생활상의 요구를 해결해주지 못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인식에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장에서의 노동에 대한 직접적 댓가가 아닌 사회보험이나 공적급여, 써비스의 형태로 얻는 수혜인 사회적 임금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주요 선진국들은 이 비중이 최대 50%이고 평균 30~40%는 된다. 이 통계만 놓고 보면, 선진국 수준으로 이 비중을 높이는 것이 당연한 정책과제가 된다. 교육에 대한 공적부담 확대와 공공의료씨스템 구축, 공공주거 확충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교육과 주택 그리고 의료 모두 민간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공급되고 있다. 의료도 재원만 국가가 관리하지 써비스는 민간에서 담당한다. 이른바 공공의료의 비중은 10% 미만이다. 보육이나 직업훈련 같은 사회써비스도 국가로부터 위탁받은 민간사업자에 의해 공급되는 방식이다. 이러한 민간지배적 사회써비스시장에서 서민들은 국가복지보다 이른바 ‘자가복지’ 씨스템에 익숙해 있다. 노후생활을 보장받기 위해 국민연금에 의존하기보다 연금보험이나 연금펀드에 가입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우리 국민들은 민간 생명보험사에 소득세의 2배에 달하는 보험료를 내고 있다. 공공임대주택보다는 작더라도 ‘내집 마련’을 해야 노후가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서민들이 엄청난 사교육비와 주택관련 비용부담을 지고 있는 현실에서, 세금은 현찰이고 국가복지는 어음이다.

이처럼 민생의 위기는 단순히 성장이나 재분배만으로 해결되기는 어려운 구조다. 우선적으로 시장의 분배구조를 개선하고, 이를 재분배와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는 정책이 요구된다. 즉 시장에서의 불평등하고 불균등한 소득발생 기제를 완화하고 시장에서 복지영역으로 탈락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생계를 위한 소득을 보장해줄 수 있는 제대로 된 일자리가 중요하다.3

 

 

5. 경제위기와 민생위기,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이명박정부는 언제 다시 닥쳐올지 모를 경제위기와 더블딥 그리고 구조적인 민생위기에 대한 정교한 정책적 기획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에 대한 대응과는 무관해 보이는 부자 감세와 4대강사업 그리고 그에 따른 재정위기가 이명박정부의 아킬레스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부자 감세와 4대강사업을 중단하고 정부예산을 복지와 교육 중심으로 재편성해야 한다는 주장과 대안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세계금융위기가 100년에 한번 오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주기적 위기이고, 이는 금융자본주의 씨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현재 민주개혁진영의 대응은 이 지점에 머물러 있다. 부자 감세와 4대강사업을 중단하고 국가재정을 확대하여 복지예산을 획기적으로 늘리거나, 금융자본주의 씨스템을 전복하면 정말로 민생위기가 해결될 것이라고 국민들이 생각할 것인가?

한국경제의 위기와 이에 따른 민생의 위기에 대한 정책대안은 생활현장에 파고드는 방식으로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민생위기를 불러온 경제구조의 개혁과 정책패러다임의 변화를 좀더 구체적으로 가다듬고, 이를 서민들이 실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시해야 한다. 민생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세가지 영역에서 메씨지가 분명한 대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순위대로 열거하자면 첫째, 경제의 불안전성과 양극화를 초래하는 금융씨스템과 생산물시장의 구조를 바꾸는 것. 둘째,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소득만으로도 서민들의 생계와 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 셋째, 재분배정책과 복지정책을 정교하게 설계하고 집행하는 것이다.

시장에서 적절한 소득이 보장되는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양극화된 산업·무역구조가 재편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무역의존도는 외환위기 직전 50% 수준이던 것이 지난해에는 90%까지 상승했다. 20%대인 일본이나 미국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고 중국의 70%보다도 높으며 거의 싱가포르나 홍콩 같은 도시국가 수준에 육박한다. 그 결과 산업·무역구조에서 도시국가적인 특성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대기업-수도권’이라는 범주에 포괄되지 않는 부문과 공간은 낙후된 영역으로 남고 만다. 지금 같은 수출대기업-내수중소기업의 양극화 구조와 과도한 무역의존도를 낮추지 않고서는 민생위기가 해결되기 어렵다.

심지어 대표적인 보수언론조차 대기업중심 정책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조선·해운업으로 고속성장한 STX그룹의 임직원은 대략 4만 7천명이다. 그중 중국인이 2만 7천명, 유럽인이 1만 6천명이다. 나머지 4천명 안팎이 한국인이다. 일자리 10개 중 1개가 한국인 몫이다. 정부가 반도체회사의 연구개발에 혜택을 주면 그 떡고물은 인도 방갈로르 현지 연구소의 인도인 박사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한국정부가 이 기업을 위해 세금을 감면해주고 금융혜택까지 주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사정권 시절의 친기업적 발명품들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 정말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명박정부는 일부 대기업만 혜택을 보는 법인세 인하를 추진하고 중소기업특별위원회를 없앴으며, 지방중소기업청의 폐지도 추진하고 있다. 중소기업에 대한 올해 예산은 오히려 30%나 줄었다. 4대강사업 등에 쏟아붓느라 지원액이 대폭 삭감된 것이다. 중소기업은 이명박정부의 경제 밑그림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개혁진영은 중소기업, 혁신, 클러스터 개념을 바탕으로 혁신형 성장에 기초한 고용창출 모델과, 교육·의료·주거 등 사회써비스 영역에서 중산층과 서민의 부담을 줄이면서 동시에 고용도 창출되도록 하는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경우 고용이 불안정하며 기업간 네트워크도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 혁신과 경쟁력의 원천인 사람과 네트워크가 약한 것이다. 혁신은 사람들 사이의 지식 이전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득보장이 가능한 일자리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혁신형 중소기업 경제영역을 확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소기업 노동시장의 안전성과 근로조건을 향상시키는 정책과, 중소기업들을 업종이나 지역 단위에서 네트워크와 협력의 클러스터로 묶어주는 전략이 기본이다. 여기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시장 정비가 필요하다. 금산분리와 자본시장통합법 통과도 중요하지만 불공정 하도급거래를 개선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제기되어야 한다.

한편 남북경협과 개성공단 프로젝트가 이명박정부에 의해 거의 무력화되면서 중소기업의 활로와 새로운 성장동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고립된 ‘섬 경제’를 넘어서 ‘남북합작경제’로 확장하는 것은 한국경제의 병목현상을 해소하는 동시에 ‘양극화경제’를 넘어서는 지평을 창출할 수 있다. 오직 대규모 연구개발 투자에서만 혁신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남북합작경제가 단순히 원시적 축적모델이 아니며 세계경제와 첨단 기술혁신에서 소외된 부문에 새로운 실험과 상상력의 ‘공간’을 제공하는 모델로 설계하는 정책기획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민생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삽질경제’에서 ‘사회써비스경제’로 전환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사회써비스는 고용을 창출하여 시장소득을 높이는 효과를 내면서 또한 서민들의 시장소득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 정책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명박정부조차 간병써비스를 공식 의료써비스로 제도화하여 보건복지분야에서 15만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써비스 영역에 정부예산을 많이 투입한다고 해서 서민들의 지출 부담이 줄고 양질의 고용이 창출되는 것은 아니다. 민간 지배의 사회써비스 시장이 제대로 된 시장으로 기능할 수 있는 제도의 수립이 필요하다. 정부예산을 투입하기 전에 사학재단, 사설학원, 비영리병원재단, 각종 복지법인 등이 장악하고 있는 사회써비스 시장의 법과 제도를 재정비해야 한다. 제대로 된 간병써비스 공급을 확대하려 해도 기존의 이해관계를 보장하는 각종 제도와 법에 묶여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여전히 사회써비스 공급은 정부가 예산을 민간에 나누어주는 식으로만 확대되고 있다. 민주개혁진영은 교육·의료·주거·복지 등 사회써비스 부문에서 정부예산을 투입하여 공공부문을 확대하자는 플랜에서 나아가 어떻게 민간이 지배하는 사회써비스 시장을 개혁해서 서민의 부담을 덜어주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지를 제시해야 한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노무현정부가 이러한 문제를 한미FTA를 통해서 빅뱅 식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민주개혁진영은 사회써비스 부문의 정교한 개혁플랜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고용을 통한 시장소득만 가지고서 민생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시장과 경쟁은 기본적으로 불평등을 불러일으키고, 시장에서 탈락하는 빈곤층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재분배정책은 자본주의경제의 기본 구성요소와 같다. 사회보험이 확충되고 고령사회로 진입할수록 재분배와 복지관련 예산 및 정책의 비중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재분배와 복지지출은 대부분 법정지출로, 자연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한번 확대된 사업은 축소나 폐지가 어렵다. 또한 복지정책의 경우 정책들 간의 정합성이 잘 계산되어야 하고 사회적 자본의 역할도 중요하다. 따라서 재분배와 복지정책이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인쎈티브 구조와 관련된 주체들의 행위양식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해야 하고 정교한 사회공학적 정책능력이 따라주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부분적이고 단계적으로나마 사회정책능력을 확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교한 정책설계를 무시하는 이명박정부가 이러한 공공부문의 사회정책능력의 발전을 크게 훼손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민주개혁진영은 이러한 정교한 사회정책 설계능력을 ‘실력’으로 보여주고 재분배와 복지정책에서 성공적인 사례를 창출해야 한다. 그래야만 서민들이 민간복지에서 국가복지와 공공복지의 영역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해관계자간 타협과 조정의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정교한 공공정책에 무관심하며 재정파탄과 민생위기를 초래하는 이명박정부를 심판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지난해 추가경정예산을 제외하는 방식으로 복지예산을 부풀리고 4대강 예산을 수자원공사 예산 속에 감추어두며, ‘서민’과 ‘중산층’의 정의를 과세표준 8800만원 이하로 계산하는5 이명박정부의 기만적인 수사와 계산법은 당연히 비판되어야 한다. 그러나 비판은 쉽고 대안은 어렵다. 민주개혁진영은 서민들에게 민생의 대안을 제시하는 좀더 어려운 일에 시간과 자원을 더 할당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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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럽 차 전체의 미국시장 점유율은 8%대에 머물러 있다.
  2. “하위 21%에서 50%까지의 소득계층을 서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류정순 한국빈곤문제연구소장). “경제활동인구가 2380만명이라고 한다면 중산층 이상과 빈민층을 제외한 약 1000만명이 서민에 속한다”(위평량 경실련 사무국장). “사회계층을 상류-중산-빈민층으로 구분하고, 중산층을 다시 중상층과 중하층으로 분류하면 서민은 중하층에 속한다. 소득분포로 보면 11%에서 40%에 속한 가구가 서민이다”(유경준 KDI 연구위원). “중산층 이상을 상위 30%로, 빈민층을 하위 20%로 보면 나머지 50%를 서민으로 분류할 수 있다”(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 “상위 5%와 하위 5%를 제외한 90%가 서민이다. 상위 10%에 속한 사람들도 근로소득이 없으면 생활이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김장희 국민은행연구소장).
  3. 한국은행 장동구 박사는 우리나라가 이제 성장이 고용을 창출하는 효과보다 고용이 성장을 촉진하는 효과가 더 커졌으며, 노동시간을 증가시키는 것보다 취업자 수를 늘리는 것이 성장을 촉진한다는 계량분석 결과를 제출했다. 또한 노동의 분배몫이 커져야 성장이 촉진된다는 실증연구도 제시되어 있다. 조선대 홍태희 교수는 1970~2008년간 분석한 결과, 노동소득분배율이 1% 감소할수록 성장은 0.33%, 소비는 0.33%, 투자는 0.003% 감소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4. 조선일보 송희영 논설위원 칼럼 「기업의 이익, 국가의 이익」 2009.10.24.
  5. 이명박정부는 과세표준(각종 공제를 뺀 과세대상 소득) 8800만원 이하를 중산·서민층으로 분류했다. 이 경우 감세효과의 65.4%가 중산·서민층과 중소기업에 돌아가니 ‘부자 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표 8800만원은 연간소득으로 환산하면 1억 2000만원 수준이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고소득층은 7만 891명(2007년 소득신고 기준)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