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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유진 金柳眞
1981년 서울 출생. 2004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늑대의 문장』이 있음. enenfer@empal.com
희미한 빛
L의 여자친구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몸을 반으로 접고 있었다. 그녀의 두 팔이 원숭이의 것처럼 길게 늘어졌다. 이마가 정강이에 붙었다. 마르고 단단한 등, 튀어나온 목뼈와 척추를 중심으로 잎맥처럼 갈라진 근육이 보였다. 그녀는 등이 깊게 파인 레오타드에 몸매가 드러나는 씰크팬츠를 입고 있었다. 내 발소리를 듣고는 허리를 곧게 펴 몸을 일으키며 좋은 아침,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좋은 아침이 아니었고, 내 거실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신체의 어느 부위에서 나오는지 알 길 없이 거실 전체에 울리는 숨소리도 거슬렸다. 나는 이 모든 적대감을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표정에 영향받지 않았다.
나는 펼쳐져 있는 접이식 쏘파와 그 위에서 잠든 L의 뒤통수를 지나쳤다. 현관 입구에 세워둔 그녀의 자전거 바퀴에서 떨어진 흙먼지로 더러워진 거실바닥을 노려보았다. 어젯밤에 비가 왔거든. 그녀의 목소리는 밝고 친절했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맥주캔 하나를 꺼냈다. 찬장에서 캐슈너트와 아몬드가 든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크고작은 접시들, 찌그러진 맥주캔 네개, 화이트와인과 레드와인 각각 한병, 와인잔 네개, 머그컵 두개, 숟가락과 포크, 티스푼 한쌍이 개수대와 그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먹다 남은 올리브와 감자 부스러기가 배수구를 틀어막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 부엌을 빠져나왔다. L의 여자친구는 바닥에 드러누워 두 다리를 높이 들어올리는 중이었다. 어깨로 몸을 버티고는 허공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바닥과 수평이 된 두 다리의 무릎을 양팔로 받치고는 균형을 잡았다. 통 넓은 바지가 커튼처럼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나는 맥주 한캔으로 지난밤의 불면을 종결짓길 원했다. 블라인드를 쳤으나 햇빛은 틈을 비집고 기어코 방안으로 들이쳤다. 캐슈너트 세개를 한꺼번에 입안에 집어넣었다. 깊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방안까지 퍼졌다. 나는 그녀의 뱃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잠에서 깨어난 L이 곧장 달려간 곳은 화장실이었다. L의 여자친구는 이미 집을 떠나고 없었다. L은 손끝에 물을 묻혀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그는 자신의 방과 면해 있는 부엌으로 가 맥주잔에 우유를 따라 단번에 마셨다. 그것이 그의 숙취해소법이었다. 잔은 여전히 씻지 않은 채 조리대에 올려두었다. 거실로 돌아와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담배를 꺼낸 L은 라이터를 찾아 주변을 뒤적거렸다. 이내 다시 부엌으로 가 가스레인지로 불을 붙이고 돌아왔다. 두대를 연거푸 피웠다. L은 늘 창문 여는 것을 잊었다. 담배연기가 내 방으로 전해졌다. TV에서는 가정식 요리 프로그램이 이어지고 있었다. 진행자는 과일주에 졸인 돼지고기 요리를 배우기 위해 차를 타고 두시간가량 북쪽으로 이동했다. L은 탁자 위에 놓인 누렇게 뜬 금사철 화분에 꽁초를 비볐다. 금사철은 내것이었지만 L은 개의치 않았다. 나는 보지 않아도 L의 행동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각자의 방에는 문이 없었다. 우리는 모든 소음을 공유했다.
나는 L의 인기척에 잠에서 깬 뒤에도 침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L은 음량을 잔뜩 올렸다. 여자 아나운서의 격앙된 목소리가 집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L은 그 청량한 목소리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그것은 L이 규칙적으로 시청하는 유일한 TV프로그램이었으므로, 나는 싫은 내색을 하지 못했다. 6층짜리 아파트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집은 6층에 있었다. 아파트는 이 골목의 유일한 고층건물이었다. 창문을 열면 이웃 건물들의 정수리가 고스란히 내려다 보였다. 송전탑과 새집, 물탱크, 너저분한 살림살이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것은 이 집의 몇 안되는 장점 중 하나였다. 요리 프로그램이 끝나자 L은 TV를 끄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곧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렸다. L은 아르바이트로 관광가이드를 하고 있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나는 지하철 승강장에서 망연자실 서 있었다. 목적지와 반대방향으로 갈아탄 것이 벌써 세번째였다. 마지막으로 깨달았을 때에는 무려 열다섯 정거장을 지나친 후였다. 철로가 여섯개나 되는 야외승강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시의 중심부에서 다소 벗어난 역은 공기가 차가웠다. 매점에서 어묵국물의 비린내와 즉석빵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역명이 낯설었다. 나는 왼손에 들린 잡지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 모든 허무맹랑한 실수를 잡지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지하철 노선도를 재차 확인하고 승강장 계단을 빠져나왔다.
반대쪽 승강장은 개찰구로 가로막혀 있었다. 교통카드를 인식기에 갖다대기 직전, 잠시 망설였다. 약속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모든 번잡함이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고용지원쎈터 직원은 약속시간에 늦을 경우 번호표를 뽑고 무한정 기다려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았었다. 약속 날짜를 다른 날로 미루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교통카드를 든 손의 팔꿈치를 앞으로 밀었다. 떠밀리듯 교통카드를 찍고 나자 개찰구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뒤돌아볼 틈도 없이 거구의 중년여자가 내 몸을 밀치고 지하철 계단으로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열차가 역사 안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그러자 좀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지하철 계단 바로 앞까지 떠밀렸을 때, 난간을 잡고 간신히 무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피가 정수리로 쏠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하철 안은 수신상태가 나빴다. 고용쎈터 직원은 재차 이유를 물었다. 나는 몸이 아프다고 대답했다. 한번은 허리가 아프다고 했고, 나중에는 감기몸살이라고 둘러댔다. 직원은 짜증이 나 있었다. 그는 서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창구 안을 우왕좌왕하는 실업자들과 번호표를 뽑지 않고 자신의 차례인 양 찾아오는 무례한 대기자들 사이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나에게 적절한 결석사유를 묻고 있었다. 그는 다음번 실업급여 교육일자와 준비서류를 빠르게 내뱉었다. 2주 뒤였다. 실직 후 6개월 이내에 신청하지 않으면, 이후 실업급여는 받을 수 없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단순한 정보가 내 귀엔 게으름에 대한 질책과 협박으로 들렸다. 그는 내게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통화종료를 알리는 메씨지가 휴대폰 액정화면에 깜박였다. 우리가 나눈 곤혹스러운 대화 시간은 1분 35초였다. 나는 불이 저절로 꺼질 때까지 가만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지하철은 빛을 가로지르며 달렸다. 사방에서 쏟아진 미적지근한 햇빛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내 스며들었다. 수명을 다한 빛은 무거웠고, 눅눅했다. 빛은, 찌들어 보였고, 먼지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열차는 다리를 건넜다. 모호한 색의 강물, 멀리 오물처럼 물 위에 둥둥 떠밀려오는 노을, 구름 너머 V자 모양으로 일렁이는 철새 무리가 있었다.
오늘은 출장 온 아저씨들을 데리고 그 숲에 갔었어. 너도 이름은 들어봤잖아. 거긴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하니까. 그런 델 가야 비로소 돈을 만지는 거야. 물론 위험하지. 너도 알다시피, 가슴도 달렸고 여자처럼 몸매도 끝내주지만, 아무튼 남자인데다 거칠거든. 약 하는 애들도 많고. 내가 분명히 주의를 줬어. 절대 창문을 열지 말라고. 우린 차 안에서 구경만 하는 거라고. 차를 몰고 길을 따라가는데, 음 처음엔 별로 없어. 숲의 3분의 1 지점을 지나야 비로소 진짜들이 나타나지. 근데 이 아저씨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창문에 다 달라붙어 있는 거야. 왠지 느낌이 좋질 않아서 빨리 지나가려고 속도를 내려는데, 일이 난 거지. 아저씨 한명이 몰래 창문을 열었어. 내가 그걸 발견하고 창문 닫으라고 주의를 주는데, 그 순간 흑인 녀석 하나가 창틈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차 문을 열어버린 거야. 잽싸게 차 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제일 덩치 작은 아저씨를 골라 아랫도리를 붙잡고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어. 하, 상상이 가? 차 안에 말 한마리가 뛰어들어온 것 같았어. 야광 비키니를 입은 흑마 말이야. 그때 카메라를 가져갔어야 했는데! 그 좁은 차 안에서 날뛰는데 불곰한테 습격당한 인간이랑 다를 바 없었어. 아비규환이었거든. 바지춤을 잡힌 아저씨는 자기보다 덩치 큰 놈이 위에 올라타니까 기겁을 했지만, 반항도 못했어. 무서웠을 거야. 가슴이 아저씨 머리통만 했거든. 그 아저씨 완전히 포기했는지 넋 놓고 그놈 가슴이랑 얼굴만 번갈아 보더라. 아무튼, 그 녀석 내 얼굴 보니까 그제야 멈추더라고. 그러곤 바지 벗기면서 슬쩍한 지갑을 보여주면서 돈을 좀 달라고 했어. 어쨌거나 일을 약간 했으니까. 그런데 그 아저씨, 얼굴이 시뻘게져서 지갑에 든 돈을 통째로 줘버렸어. 완전히 오버였지. 그 흑인 애가 엄청 고마워하면서 내리는 거야. 우리 차가 멀어질 때까지 내린 곳에 서서 손을 흔드는데, 눈을 못 떼더라, 그 아저씨. 커진 게 가라앉질 않더라고.
아무튼, 그 아저씨 돈 뺏긴 것 때문에 난 팁 한푼도 못 건졌어. 오늘 하루 공쳤어.
나는 저녁 대신 치킨너깃과 맥주를 마셨다. 지하철에서 겪은 일련의 일들 때문에 진이 빠졌다. L은 시무룩해져서 우유 한컵만을 마시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L은 여자친구 때문이 아니면 거실에서 자는 일이 없었다. 거실의 접이식 쏘파는 펼치면 세명이 눕고도 남을 만큼 넓었지만, 매트리스가 단단해 자고 나면 허리가 아팠다. L의 방은 현관 바로 앞에 마주해 있어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집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L의 일인용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지구본과 세계지도가 프린트된 이불과 침대커버는 밝은 하늘색이었다. 붉은색의 ‘Bon voyage’라는 문구가 작고 규칙적으로 인쇄되어 있었는데, 언뜻 피칠갑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L이 없을 때 종종 그 방에 들어갔다. L의 책장이나 서랍을 뒤적이거나 컴퓨터를 켜고 문서를 열어보기도 했다. L의 책장엔 책이랄 것이 별로 없었다. 몇권의 컴퓨터 프로그램 매뉴얼북과 게임 공략집,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집 몇권과 씨나리오 작법책이 전부였다. L의 포부는 언제나 상투적이었고 모호했다. 그 방에서 나의 관심사는 L이 찍은 사진이 저장된 컴퓨터 폴더와 앨범뿐이었다. L은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의 모습을 담아 간직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별히 잘 나온 사진은 인화하여 앨범에 따로 보관했다. 그것은 그가 느끼는 여자들에 대한 감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사진은 객관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것들로만 추려져 있었다. 그곳엔 나도 있었다. 우리는 3년 전, 두달간 만났었다. 사진 속의 모습은 6년 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어려 보였다. 시골처녀인 양 뺨이 홍조를 띠었다. 3년 전의 나는 흉물스러운 단발 파마머리에 바다색 민소매 시폰 원피스를 입고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치마를 팬티 근처까지 걷어 훤히 드러난 두 다리와 맨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나는 사진을 가져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나이되, 사진의 주인은 L이기 때문이었다. 두 다리는 게처럼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몇달 전, B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곳을 ‘고국’이라고 부르는 게 맞았다. B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정착하려 6년간 애를 썼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를 모두 그곳에서 보냈다. 그곳의 물을 먹고 자라고, 말을 하고, 고등교육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받은 양질의 교육에 자긍심이 있었다. B가 6년간의 생활에서 얻어가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익혔던 이곳의 언어뿐이었다. 그는 모호한 이곳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했다. 논리로 무장한 그는 자주 오해받았다.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늘 전쟁터의 군인처럼 긴장상태였고, 말 속에 숨어 있는 좋지 않은 의도를 파악하는 데 능했으며, 부당한 처사에 분연히 일어났다. 그는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았다. 문제라면, 자신만을 보호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B가 고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나는 그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를 걸었고, 2주에 한번씩 메일을 보냈다. 나는 ‘사랑하는 B에게’라는 문장을 아끼지 않았다. 메일에 그간 내가 저지른 과오들, 그의 고독에 대한 몰이해와 의심들을 구구절절이 적으며 용서받고 싶다고 썼다. 그러나 기실, 그가 돌아오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도 부담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독선적이었고 타협하지 않았다. B는 처음 한달간 메일에 답장을 보내주었고, 두달간 가끔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지난달부터는 연락이 닿질 않았다.
B는 자주 꿈속에 나타났다. 어느날은 청부살인에 실패한 나의 남편이었다가, 실족사한 아들이 되기도 했고, 나의 선생님이자 강간범이 되기도 했다. 나는 돌아가기 전 1년간 B와 함께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L은 며칠째 컴퓨터 앞에 붙어 있었다. 집은 L의 것이었다. 나는 L에게 매달 방세를 냈다. 시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돈이었다. 공과금은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었고, 매달 1일 얼마간의 돈을 갹출해 공동생활비로 썼다. 우리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끼니를 각자 해결했다. 냉장고와 찬장에는 각종 냉동식품, 반조리식품, 술과 안주가 구비되어 있었다. 안주는 주로 장기저장이 가능한 건조식품들이었다. 둘 다 과일이나 야채를 좋아하지 않았다. 커피나 차 대신 유제품을 즐기는 점도 같았다. 우리의 공통점은 식성뿐이었지만, 대체로 관계는 원만한 편이었다. L은 부엌으로 향하는 나를 방으로 불렀다. 그는 성인용품 쇼핑몰을 뒤지는 중이었다. 침대 위 이불은 둘둘 말려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머리칼에서 땀냄새가 났다. L은 망사로 된 전신 스타킹과 밧줄 사이에서 고민중이라고 했다. 인터넷 페이지를 넘기며 수십장의 전신 스타킹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걔, 너보다 열살은 많아 보여,라고 말하곤 부엌으로 돌아갔다. 찬장에서 술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사랑하는 B에게’로 시작하는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저 문장이 얼마나 상투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내가 하는 행동 역시 질리도록 지지부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L의 여자친구는 건강하고 독립심이 강해 보였다. 그녀는 일정한 수입이 보장된 일이 있었고, 5년간 요가를 했으며, 지난 4년 동안 매년 두차례씩 각각 한달간 단식을 해왔다고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화장기가 없었고, 파마나 염색 따위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고정된 생활방식을 L에게 권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3일 이상 우리 집을 찾았는데, 늘 자전거를 타고 왔다. 그리고 자전거를 어깨에 들쳐 메고 6층까지 올라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전거 도둑이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L이 복사해준 현관열쇠를 갖고 있었지만, 언제나 초인종을 눌렀다.
현관문을 열자, L의 여자친구는 여느 때처럼 어깨에 자전거를 얹고 서 있었다. 씽긋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나는 한손에 요구르트병을 든 채, 그녀를 맞았다. L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배낭에서 신문지를 덮은 타르트 그릇을 꺼냈다. 배낭은 어깨끈을 여러차례 덧대어 꿰맨 흔적이 있었다. 시금치와 가지, 말린 토마토가 들어간 키쉬였다. 거실에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는 처음 보는 낡은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분홍색과 검은색, 연두색이 뒤섞여 전체적으로 잿빛에 가까운 스웨터는 엉덩이를 덮을 정도로 펑퍼짐했다. 목 부분의 실밥이 뜯어져 있었다. 나는 L에게서 그녀가 종종 재활용 수거함을 뒤져 사람들이 입다 버린 옷이나 양말 따위를 가져다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녀는 스웨터 속에 몸에 완전히 달라붙는 일체형 싸이클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요구르트병을 들어 보이며, 키쉬를 정중히 거절했다. 그녀는 무엇이든 두번 묻는 법이 없었다.
나는 방 창가에 놓아둔 작은 나무의자에 앉아 요구르트를 떠먹었다. 바닥에 남은 요구르트를 남김없이 긁어먹었다. 티스푼이 유리용기에 닿아 요란한 소리를 내었으나, 나는 더욱 거칠게 바닥을 긁어댔다. L의 인기척이 들렸다. 다 먹은 유리용기는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 용도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건조하고 맑은 날이 계속됐다. 아침부터 먼지가 풀풀 날렸다. 오늘은 고용쎈터와의 약속이 잡혀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카펫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뜯어냈다. 얇고 긴 머리칼은 섬유 깊숙이 묻혀 있기 일쑤여서 소형 청소기로는 도통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L과 그녀의 대화를 엿들으며, 나는 머리칼을 뜯어내고 청소기로 먼지 제거하는 짓을 수없이 반복했다.
L이 사진 찍어준대. 너도 찍을래?
단화 끈을 묶는 나에게, L의 여자친구가 물었다. 거실 탁자에는 흰색과 붉은색의 밧줄이 두께별로 늘어놓여 있었다. 괜찮아, 난 이미 찍었어. 나는 그녀의 습관처럼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래로 처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싱긋 웃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지난여름 우리는 지방의 한 소도시로 짧은 여행을 떠났었다. 버스터미널에 나타난 B는 한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엔 담배 한상자와 요구르트 두병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버스 안에서 나란히 요구르트를 나눠 먹었다. 그곳은 B의 고향이긴 했지만, 연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곳이 진짜 자신이 태어난 곳인지, 아니면 서류상의 고향일 뿐인지 B 역시 알지 못했다. B는 이동하는 내내 잠을 잤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여름산과 싱싱한 벼, 야생화, 드물게 남아 있는 흙집이나 차양을 친 인삼밭은 그가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일 것이었다. 나는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싶었으나, 그는 관심이 없었다.
역에 도착한 그는 매표소 위에 걸려 있는 50호짜리 유화그림을 올려다 보았다. 그림은 마을의 풍광을 담은 것이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과 녹음이 우거진 산의 아름다움은 다소 과장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는 구도와 명암이 엉망인 형편없는 그림이라고 평했다. 색이 유치하고 촌스럽기 이를 데 없다면서, 벽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상아색 인조가죽 의자를 가리키며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비아냥거렸다. 의자 시트는 모서리가 갈라져 누런 스펀지가 곳곳에 드러났다. 출구엔 마을 뒤쪽으로 연결된 수목원의 상세지도가 걸려 있었다. 역사 안에는 몇몇 노인들과 매표소 직원 한명이 있었다. 직원은 껍질을 벗긴 메추리알을 소금에 찍어 입에 넣으며 그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는 다소 예민해져 있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넜다. 난간에 길게 늘어놓은 나팔꽃에서 오줌 지린내가 났다.
고용지원쎈터의 직원은 열명가량 되었다. 대기실은 약속을 잡고 온 사람들과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태반이 50대 이상의 남성이었다. 젊은 여자는 나를 포함해 3명에 불과했다. 담당자는 퉁명스럽던 목소리와는 달리 인상이 서글서글했다. 제출한 서류를 훑어보며, 그는 해직사유를 재차 확인했다. 나는 구차하리만큼 자세히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겉표지에 내 이름이 적힌 작은 수첩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돈을 받기 위해서, 2주에 한번씩 구직활동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각종 명함과 이력서, 이메일자료 출력분 등 증빙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했다. 그는 첫번째 칸에 오늘 날짜를 적어넣고 도장을 찍었다. 돈은 월급의 절반가량이 두번에 나뉘어 계좌로 지급된다고 했다. 그는 수첩을 돌려주며, 쎄미나실을 가리켰다.
강의실 안에는 50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다. 파워포인트로 만든 조악한 그래프가 대형 화면에 떠 있었다. 강사는 실업급여가 재취업 의지를 고취하기 위한 제도라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대다수는 강의가 끝나기만을 바라는 듯 엉덩이를 들썩댔으나, 몇몇 열성적인 수강자의 끊임없는 질문공세로 교육은 한정없이 늘어지고 있었다. 파워포인트의 끊임없는 효과음이 신경에 거슬렸다. 나는 이어폰을 꺼내 한쪽 귀에 꽂고 MP3 플레이어의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최대치로 올려놓은 음량을 재빨리 줄였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음악 좀 같이 들어도 될까요. 그는 머리숱이 유난히 많았다. 구레나룻까지 촘촘했다. 그는 나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는데, L의 여자친구의 경우가 그러하듯, 나에게는 위선과 비웃음으로 느껴졌다. 이어폰을 나눠 낀 그는 몸을 내 쪽으로 완전히 틀었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내 허벅지를 검지로 살짝 누르며 속삭였다. 허벅지에 점이 하나 있네요. 난 세개나 있는데. 그는 조금 전보다 더 활짝 미소 지었다. 그의 작고 촘촘한 이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니코틴에 전 누런 이가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나는 이어폰을 낚아채 쎄미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교육을 끝마치지 못한 뒷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시장 입구로 들어섰다. 허기가 졌다. 식당은 대부분 민물고기를 이용한 음식들을 팔았다. 강을 낀 마을은 은어가 특산물이라고 했다. 그는 비린내를 견디지 못했다. 시장 전체에 풍기는 생선 고는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노점에서 생선살에 밀가루와 계란을 입혀 튀긴 것을 한봉지 샀다. 튀김은 고소하고 비린내가 없었다. 그에게 권했으나, B는 미안하지만 역겹다고 했다. 나는 손에 든 튀김을 다시 종이봉투에 집어넣었다. 입구를 접었다.
B는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우리는 트레이닝복이 즐비하게 널린 옷가게로 들어섰다. 그는 눈으로 물건을 훑어보고는 면티 두장을 골랐다. B는 가게주인에게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주인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카드는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시골장에서 누가 카드를 씁니까. 만원도 안하는데. 그는 볼멘소리로 덧붙였다. B는 계산기 옆에 버젓이 놓인 카드 단말기를 확인했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카드로 계산하고 싶다고 재차 말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B가 한번 고집을 부리면 스스로 꺾는 일이 없었다. 지갑을 열고 현금을 내보였으나, 그는 나를 밀쳐냈다. 카드를 쓸 수 없는 이유를 명확히 대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다. 이건 불법이잖아. B는 분개했다. 남자는 물건을 팔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주인 남자의 신통치 못한 태도에 급기야는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 옷은 내가 고른 것이니 내가 반드시 가져가겠어요. 카드로 계산해주십시오. 아니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제가 우습게 보입니까?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에요. 경찰 부르세요!
그는 거친 말을 쓸 줄 몰랐다. 속어나 욕도 배우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태도를 취했다. 공손한 말투와는 달리 이글거리는 B의 눈빛을 본 남자는 싸움을 피했다. 목숨을 거는 듯한 B의 태도가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B는 티셔츠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당당히 시장을 빠져나왔다. 나는 B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B는 종종 자신이 정의의 투사라도 된 양 굴었다.
생선튀김이 든 종이봉투는 기름에 절어 눅눅해져 있었다. 생선이 식자 비린내가 올라왔다. 아무리 입구를 접어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B의 탐탁지 않은 시선이 느껴졌으나 버리지 않았다. 버리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마을은 고적했으나 평화로웠다. 볕이 잘 드는 담장과 지붕 위에는 어김없이 고양이들이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건조하고 시원한 바람, 푸른 활엽수들, 잎 사이로 산산이 부서지며 쏟아지는 햇빛 냄새와 뒤섞인 나무줄기의 풋내를, 나는 무감하게 받아들였다. B를 어디까지 이해하고 용인해야 할지 감당할 수 없었다.
아스팔트 바닥으로 햇빛이 곤두박질쳤다. 빛은 덜 여물었으나, 한낮의 것과 다를 바 없이 매섭고 따가웠다. 요즘은 어째서 이렇게 날이 맑은 것인지, 짜증이 일었다. 빨라진 걸음 때문에 숨이 찼다. 고용쎈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왔으나, 조금 전에 느꼈던 역겨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오늘 하루를 끝마치고 싶었다. 가로수 없는 인도를 끝없이 걸었다. 지하철역은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단지의 시든 장미넝쿨을 지났다. 고가도로 아래 주차된 자동차들, 폐휴지 리어카 사이를 걸었다. 지하철은 아파트단지의 끝자락에 있었다. 외벽공사 중인 상가건물을 지나 지하철 입구에 다다른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높고, 날카로우며, 연속적인 소리는 자동차 경적을 압도할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고함이 뒤따랐다. 엄청난 양의 먼지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외벽공사에 쓰이는 철조구조물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린 것이었다. 철조구조물은 인도와 도로의 한쪽 차선을 완전히 덮었다. 떨어져나간 철골이 도로를 굴렀고, 차에 부딪쳤다. 경적소리는 비명과 닮았다. 엄청난 소음 때문에 일순 정신이 아득해졌다. 점차 가라앉는 먼지 사이로, 나는 철골에 깔린 인부 한명을 보았다. 찌그러진 철골 발판 아래로 피범벅이 된 두 다리가 있었다. 왼발의 운동화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오른쪽은 그나마도 없었다. 나는 지하철역으로 몸을 돌렸다. 입구에선 노인 하나가 깐 완두와 말린 호박을 팔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번호를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용쎈터일 것이었다. 혹은 B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내 짐작이 틀렸을 수도 있었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졌다. 지리멸렬했다.
민박집에 도착하자, B는 기분이 한결 나아 보였다. 기역 모양의 흙집이었다. 햇볕은 작은 마당에 고르게 내리쬐었다. 마당 한편에는 고추, 오이, 깻잎 따위를 기르는 텃밭이 있었다. 그 옆으로 장독 세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 돗자리가 깔린 평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호박이며 토란대, 가지, 고사리 따위의 나물들이 바짝 말라,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았다. 풍경 대신 메주 한덩이가 처마 밑에서 흔들렸다. B는 감나무 아래 그루터기에 앉았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감잎은 덜 여물어 얇고 부드러웠다. 감잎 그늘에 숨은 작고 단단한 열매를 보았다. 감나무 아래엔 1.5kg짜리 아령 두개가 있었다. B는 아령을 과장된 몸짓으로 들어 보이며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억울한 일을 겪으면 참을 수가 없어. 그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외톨이였다. 그를 이해하는 것은 자신 말고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대청마루 위 놋쇠그릇에 담긴 보리차에 하루살이들이 둥둥 떠다녔다. B는 이 집을 고향으로 삼아야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L의 여자친구는 나체로 거실벽 가까이에 서 있었다. 쏘파는 구석으로 밀려나 내 방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카메라를 이리저리 움직이던 L은 잡지를 펼쳐 보이며, 이런 자세도 할 수 있어?라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볍게 허리를 뒤로 꺾어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몸을 뒤집어 팔다리로 지탱하는 모습은 거미 같기도 했고,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녀의 몸은 지방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단단한 뼈와 최소한의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은 성적 감흥과는 거리가 멀었다. 음모가 없는 그녀의 성기는 어린아이의 것 같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엉덩이 근육이 도드라졌다. 골반 뒤쪽이 움푹 들어갔다. 그녀가 취하는 자세 하나하나는 특정 부위의 근육을 단련시키기 위한 것 같았다. 가부좌를 틀고 두 팔로 몸 전체를 들어 버티는 동작은, 그녀를 한마리 들소처럼 보이게 했다. 그녀가 고개를 치켜들자, 빗장뼈가 금방이라도 몸 밖으로 빠져나올 듯 튀어나왔다. 목 근육과 가슴, 세 부분으로 갈라진 어깨 근육이 빗장뼈 주변을 감싸며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나는 보기 드문 광경에 넋을 놓고 있다가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L에게 내 방 입구를 가로막은 쏘파를 치워달라고 요구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듯 힘이 없었다. 한시간 전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아 손이 덜덜 떨렸다. L은 대답 대신 탁자 위의 붉은 밧줄을 가져왔다. 좀 도와줘, 라고 내게 말했다.
L은 매듭짓는 것에 서툴렀다. 그는 인터넷에서 출력한 각종 매듭의 이미지를 가져와 그대로 따라했다. L은 발목과 팔목, 목에 부피감을 주고 싶어했고, 명치에서부터 배꼽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세개의 매듭으로 장식하려 했다. 유두와 성기는 의식적으로 배제했다. 그녀의 밋밋한 몸에 적합한 방식이었다. 밧줄은 방사선처럼 몸통 한가운데에서 팔과 다리로 퍼져나갔다. 다리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는데, 높게 들어올려야 하기 때문이라고, L은 말했다. 내 손엔 어느새 밧줄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몸에 힘을 풀고 척추를 바닥에 바싹 붙이고 누워 있었다. 두 손바닥이 하늘을 향했다. 생각보다 단단하게 몸을 결박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매듭의 모양새가 틀어지거나, 중심이 어긋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신체에 부담을 더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나와 눈이 마주쳤으나, 웃지 않았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거무죽죽해진 몸은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불에 그슬린 원숭이의 팔다리를 떠올리게 했다. 혈색이 없었다. 나는 긴장한 그녀의 눈과 일자로 다문 입술을 보았다. 팔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천천히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L의 지시에 따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거실 한가운데에 두 발을 나란히 모으고 서서, 몸을 반으로 접었다. 두 손바닥이 발 옆의 바닥을 짚었다.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지탱하고, 왼쪽다리를 천장 쪽으로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지탱하고 있는 오른쪽 다리의 정강이에 이마가 닿았다. 왼쪽다리는 거의 몸과 일자가 될 정도로 들어올려졌으나, 완벽하진 않았다. L은 왼쪽 다리에 연결된 밧줄을 천장 한가운데 박아놓은 고리에 끼워넣고 반대쪽으로 넘겨 나에게 주었다. 잡아당겨, 힘껏. 나는 L의 지시에 따라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은 완벽히 일자가 되었다가, 활처럼 미세하게 휘었다. 그녀의 시선은 정강이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을 향했다. L은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갑자기 큰 소리로 멋지다!고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만 밧줄을 놓치고 말았다. 밧줄에 지탱되던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와 L은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L의 여자친구는 대자로 누웠다. 우리를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웃었다. 땀이 들어가는지 눈을 쉴 새 없이 깜박이면서도 닦아내지 않았다.
나는 메일함에 저장해놓은 B의 편지를 모두 지웠다. 나는 B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것이 내가 아님을 후회했다. 이곳에서 너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노라, 말해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더불어, 돌아간 고국에서도 너를 받아줄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꼭 말해주고 싶었다. 그가 나에게 하듯, 그에게 진심을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가 고국에 돌아가고 나서도 나는 끝까지 진심을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침묵할 때라고 생각했다. 내가 B에게 보냈던 편지 중 그가 수신확인을 하지 않은 몇통의 편지들을 찾아 지워버렸다. 그가 편지를 읽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B가 가진 주소에는 집 대신 작은 연못만이 남아 있었다. 물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탁했다. B는 오랫동안 연못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표정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마을 너머로 보이는 수목원의 입구를 가리켰다.
L은 말린 쏘시지를 불에 살짝 구웠다. 돼지고기 비린내가 식욕을 자극했다. 냉장고에서 맥주캔 세개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을 때, L의 여자친구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녀는 전신타이츠 대신 L의 티셔츠를 입었다. 옷에는 거대한 성기 그림과 함께 Suce-moi!라고 휘갈겨 쓴 문장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그림과 그녀의 납작한 가슴은 묘하게 잘 어울렸다. L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TV를 틀었다. 아나운서는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삭힌생선 요리법을 전수받고 있었다. 남부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라는 소개를 거친 중년의 여성은, 삭힌생선 요리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하나하나가 다 다른 맛을 지닌 음식이며, 그 맛으로 그것을 담근 사람과 그 집안의 내력을 이해할 수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나는 이해라는 말이 참으로 재미있는 말이라는 생각을 문득 했다. 우리는 생선의 숙성과정을 보며 맥주를 들이켰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빼드는 L을 위해 창문을 조금 열었다. 죽은 화분을 그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늙은 공작은 구애중이었다. 우리는 수목원에서 그를 보았다. 공작은 인도공작의 변종으로 전신이 백색이었다. 부리와 다리는 연한 분홍빛이 돌았다. 날개깃의 가장자리와 정수리 부분이 누렇게 변색돼가는 중이었다. 공작은 깃털을 빳빳이 세우고 울었다. 코를 푼 휴지를 뭉쳐놓은 듯, 불규칙한 크기의 무늬들이 앞뒤로 파르르 떨렸다. 구애는 약 15분간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 안의 암컷들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여행하는 내내 날이 흐렸다. 흐린 날을 기다려 구애를 하는 것이 공작의 습성이라고 했다. 공작은 체념한 듯 깃털을 천천히 접었다. 가지런히 접힌 날개의 길이는 족히 1미터가 넘었다. 날개 때문에, 방향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듯했다. 땅에 끌린 깃털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좀더 누레졌다. 둥지로 돌아가는 공작의 엉덩이와 뒤뚱거리는 걸음새는 오리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공작의 생태에 관한 안내문과 경고문구가 적힌 표지판을 단 원형철조망, 그 주변을 에워싼 개화한 모감주나무, 나뭇잎과 닮은 모양새의 비늘구름 사이로 이제 막 들이치기 시작한 희미한 빛을, 나는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