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미디어가 바로 재난이다
주류언론의 아이띠 보도 태도
리베커 쏘울닛 Rebecca Solnit
미국의 사회평론가, 시민운동가. 국내에 번역 출간된 저서로 『어둠 속의 희망』 『걷기의 역사』 등이 있으며, 최근작 A Paradise Built in Hell(지옥에 세워진 천국)에서는 재난상황에서 발휘된 인간적인 용기와 연대의 정신을 전해준다
- 이 글은 미국의 진보적 블로그 탐디스패치(www.tomdispatch.com)의 2010년 1월 21일자 기고문으로, 원제는 ‘When the Media Is the Disaster’이다. 원문은 www.tomdispatch.com/post/175194와 창비 영문판 홈페이지(www.changbi.com/english)에서 확인할 수 있다. ⓒ Rebecca Solnit 2010 / 한국어판 ⓒ (주)창비 2010
거의 모든 재난 뒤에는 범죄가 뒤따른다. 무자비하고 이기적이며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훨씬 더 많은 고통을 만들어내는 그런 범죄다. 이 범죄자들은 처벌받지 않고 인간성을 거스르는 범죄를 거듭 저지르며 살아간다. 그들은 인명보다 재산을 더 신경쓴다. 그들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재난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릇되게 전달함으로써 종종 두번째 재난의 물결을 부추기거나 정당화하는 언론매체 종사자들에 관해서다. 사고현장에서나 뉴스에서나 이재민들을 범죄자 취급하는가 하면, 구조활동에서 재산보호 순찰로 자원을 전환할 것을 대놓고 지지하는 행태에 관해서 말이다. 허리케인 카트리나(2005) 때의 피를 여전히 손에 묻힌 채로, 그들은 아이띠에서 또다시 그들 자신을 더럽히는 중이다.
아이띠에서 지진이 발생한 지 채 며칠도 되지 않아, 예컨대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약탈”(loot)이라는 단어가 전략적으로 배치된 캡션의 사진들을 실었다. 그중 하나는 바닥에 엎드린 한 남자의 사진인데, 여기에는 “아이띠 경찰관이 연유(煉乳)가 든 자루를 들고 가던 약탈 혐의자를 포박하고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땀에 젖은 그 남자의 얼굴은 카메라를 애원하듯 올려다보며 괴로워하고 있다.(사진 참조)
또다른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캡션이 붙어 있다. “수도 뽀르또프랭스 중심가에 더 많은 경찰이 배치되었음에도 지진 발생 사흘째인 아이띠에서는 약탈이 계속되고 있다.” 그 사진은 도무지 가져갈 만한 것도 거의 없는 게 분명한 풍경 속에서 산산이 부서진 콘크리트 더미 사이를 배회하는 음울한 군중의 모습을 담고 있다.
세번째 사진에는 “한 약탈자가 지진으로 무너진 가게에서 두루마리 옷감을 메고 도주하고 있다”는 설명이 달려 있다. 한편 또다른 사진의 캡션은 이렇다. “한 경찰관의 시신이 뽀르또프랭스 거리에 놓여 있다. 이 경찰관은 약탈자로 오인받아 동료 경찰관에게 불의의 총격을 받았다.”
이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잔해더미 속에 산 채로 갇혀 있었다. 호주 텔레비전 방송의 한 통역자는 음식도 물도 없이 68시간 동안 생존해 있던 어린아이를 구조해냈다. 이 아이의 부모는 죽었지만 삼촌이 나서서 자기 조카임을 확인해주었다. 그 역시 임신한 아내를 잃은 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처참하게 부상당한 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의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십만명, 아마도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물과 음식, 거처와 응급치료를 필요로 했고 여전히 필요로 하고 있다. 재난의 한가운데에서 언론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쪽은 평상시의 “객관적인” 역할에서 잠시 벗어나 호의와 실질적인 구호로 대응한다. 다른 한쪽은 상투적인 말들과 악성 괴담을 동원해 생존자들을 다시 한번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한다.
첫번째 사진의 “약탈자”는 십중팔구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그 연유를 가져가고 있었을 테지만 뉴스매체에 그것은 가장 절박한 문제가 못 된다. 커다란 두루마리 옷감 두 필을 짊어지고 가던 “약탈자”도 급조된 텐트 아래서 타는 듯한 열대의 태양을 피하는 이재민들에게 그것을 가져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 사진들은 다급하고 필사적인 몸짓을 보여줄지언정 범죄를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동료 경관의 오인 사격은 예외일 텐데, 그의 동료들은 재산권 사수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인명에 대해서는 무신경했고, 그리하여 이미 죽음으로 초토화된 풍경 속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또 한 사람이 죽은 것이다.
최근 며칠 사이에 무장 대치에 관한 기사도 이따금 있었는데, 그 경우는 다른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분유를 들고 간 남자는 어떤가? 그가 정말 범죄자인가? 숨은 사연이 더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본 바로는 그렇게 믿기 어렵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재난으로 산산이 파괴되었다고 생각해보라. 집도 없어지고 주머니에 있던 얼마간의 현금은 며칠 전에 이미 다 써버렸다. 신용카드 사용에 필요한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그 역시 무용지물이다. 사실 더이상 가게 주인이라든가 은행, 상거래는 존재하지 않으며 살 수 있는 물건도 거의 없다. 경제가 사라진 것이다.
사흘째가 되면 당신은 허기가 심해지고 집 나오면서 급히 챙겨온 물도 다 떨어진다. 갈증은 굶주림보다 훨씬 혹독하다. 음식 없이는 며칠도 견딜 수 있지만 물 없이는 안된다. 당신이 들어간 임시 천막숙소에는 사경을 헤매는 한 노인이 곁에 있다. 이 시련이 틀림없이 끝날 거라고 그를 안심시키려 해도 그는 더이상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기들은 이제 쉴새없이 울어대고 엄마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괴로워한다.
그리하여 당신은 혹시 어떤 구호단체가 뭐라도 나눠주러 오지 않았는지 나가 살펴보지만, 밖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배회하는 바로 당신 같은 사람들만이 수없이 많으며 가까운 시일 안에 근처에서 충분한 도움을 받기는 불가능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길모퉁이에서 가게를 하던 사람은 벌써 팔던 물건을 이웃들에게 다 나눠줘버린 상태다. 그쪽에서 나오는 물건은 오래전에 끊겼다. 그때 만약 창문이 깨진 약국 체인점이나 슈퍼마켓이라도 눈에 띈다면, 당신은 망설임 없이 곧장 거기에 들어가 당신의 생명을 지키고 몇몇 이웃의 생명도 살릴 수 있을 파워바(기능성 막대과자) 한 박스와 몇통의 물을 움켜쥐고 나올 것이다. 이는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 노인은 아마 죽지 않을 수도 있고 아기들의 시끄러운 울음이 그칠 수도 있으며 엄마들의 얼굴에서 지친 표정이 사라질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도 가만히 가게에 들어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챙기고 있다. 그들 역시 당신과 같은 처지일 텐데, 당신 옆에 있던 사람이 가져간 우유 몇통은 거기 놔둬봐야 어차피 곧 상하고 말 것이다. 당신은 열네살 이후로 한번도 가게에서 물건을 슬쩍해본 적이 없으며 당신 명의로 된 현금도 많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 물건을 들고 나왔다고 해서 당신이 범죄자인가? 경찰에 의해 두 손이 등 뒤로 묶이고 흙바닥에 엎드려야겠는가? 그리하여 국제적인 언론매체에서 약탈자라고 불려야 한단 말인가? 거의 모든 재난에는 과잉대응이 있기 마련이고 그래서 종종 경미한 절도 용의자에게도 재판 절차 없이 사형(死刑)이 부과될 수 있으니, 당신이 거리에서 총살을 당해도 마땅하단 말인가?
아니면 당신은 구원자인가? 재난 희생자의 생존이 일상적 소유관계들보다 더 중요한가? 당신이나 우는 아이들, 혹은 여전히 건물 잔해에 갇혀 조만간 죽어갈 수천명의 사람들보다 약국 체인점이 더 위태롭고 더 큰 희생자이며 주 방위군의 도움을 더 절실히 필요로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내 대답이 무엇일지는 아주 명백하지만, 언론매체에는 그렇지가 않다. 재난을 하나둘 겪어가는 사이, 적어도 1906년의 쌘프란씨스코 지진이 있었던 이래로, 권력을 쥔 사람들, 총과 법의 힘을 배후에 둔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인명보다 재산권에 더 관심을 기울여왔다. 비상사태 속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우선순위에 밀려 죽을 수도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죽는다. 혹은 사소한 절도나 절도 오해로 총에 맞아 죽기도 한다. 언론은 이런 결과를 승인할 뿐 아니라 이러한 반응이 일어날 기회를 조성하는 데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조하고, 또 그런 반응을 부추긴다.
만약 말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면
우리는 “약탈”이라는 말을 영어에서 추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광기를 자극하고 현실을 흐릿하게 만든다. 명사나 동사로 쓰이는 “약탈”은 북인도어 어원을 지닌 단어로서 전리품 혹은 강제로 빼앗은 물품을 뜻한다.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우(Peter Linebaugh)가 지적하듯 “한때 약탈품은 병사가 받는 보수였다.” 이 말이 영어에 들어온 것은 인도에서 온 수많은 약탈품이 병사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거나 대영제국의 획득물이 되는 식으로 영국 경제에 유입되면서부터다.
재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수년간 인터뷰하고 그들의 수기를 읽는 한편 2차대전기 런던 대공습이나 1985년 멕시코씨티 지진 같은 재난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들을 접하면서 나는 약탈을 믿지 않게 되었다. 재난에는 두가지 일이 일어난다. 그중 일어나는 사건의 대부분은 비상시의 불가피한 징발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당신일 수도 있는 누군가가, 내가 앞서 그려보인 절망적인 상황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누군가가 어떤 다른 대안이 없을 경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생필품을 챙겨드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약탈이라고도, 심지어 절도라고도 부르지 않겠다.
미국이나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 불가피성(necessity)이라는 것은-대체로 배고픈 아이를 먹이는 일보다는 예컨대 음주운전자의 차 열쇠를 몰수하는 경우에 더 많이 적용되기는 하지만-위법에 대한 변론이 된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가져가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나 절도다. 그런데 반세기 넘게 이 주제를 연구해온 재난 사회학자 엔리꼬 꽈란뗄리(Enrico Quarantelli)에 따르면 절도는 대부분의 재난에서 지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재난 직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이득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 단계에서 생존자들은 대체로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이타적이고, 자기 재산에 덜 집착하며, 재화를 취득한다든가 지위나 부를 쌓고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것 같은 장기적인 문제들에 신경쓰지 않는다.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적은 것이나마 나누려 얼마나 끈기있게 애쓰고, 자기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얼마나 애썼는가에 관해 아이띠로부터 들려오는 훌륭한 이야기들은 재난 속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명백하게 말해주는 예다.) 재난이 일어나면 범죄율은 흔히 급락한다.
언론매체는 또다른 문제다. 그들은 재산권(그리고 재산권에 대한 공격을 부각하는 헤드라인들)에만 골몰한 채 도착하곤 한다. 언론은 종종 모든 것을 약탈이라 부르고, 그리하여 무장한 당국자들의 발작적인 과잉대응뿐 아니라 이재민들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가끔은 현장의 취재기자들은 소임을 다하고 있는데 안전한 방송국 사무실에 있는 데스크들이 말도 안되는 사진 캡션과 왜곡된 해석과 강조점들을 버무려낸다.
그들은 또한 “공황”(panic)이라는 단어를 부당하게 사용하곤 한다. 위기에 처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공황이란 지극히 드문 일이다. 언론은 죽음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의 무리를 두고, 그런 상황이라면 달아나는 것만이 유일하게 상식적인 행위임에도, 분명히 그들을 공황에 빠진 군중이라 부를 것이다. 아이띠에서 언론매체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는 떼거리들”이 무서워서 식량 보급이 보류되고 있다는 보도를 계속한다. 그들은 아이띠 국민을 소떼로 여기고 있는가?
재난을 당한 사람들(특히 가난한 유색인종들)은 소떼나 짐승 같다는, 혹은 완전히 정신이 나갔거나 도무지 신뢰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에 상황을 구제하기보다 통제-미군은 이를 “보안”(security)이라 부른다-하는 일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쓰는 것이 으레 정당화된다. 영국식 억양을 지닌 CNN의 한 해설자는 헬리콥터에서 보급품이 던져진 장소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을 “우르르 몰려다니는 떼거리”로 표현하면서 이 보급품 전달은 “혼돈을 촉발할 위험을 무릅쓰고” 행해진다고 덧붙인다. 혼돈은 이미 존재하며, 이것을 필사적으로 음식과 물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이는 곧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 사람들이 무가치하고 신뢰할 수 없는 이들이라고 믿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셈이다.
약탈이라는 문제로 돌아가보자. 물론 당신은 아이띠의 비참한 가난과 실패한 사회제도들이, 게임의 법칙을 바꾸는 장기적인 재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장의 며칠을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예전이라면 결코 넘볼 수 없었던 것이라든가 혹은 다음달에 필요한 물건들에 관심있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법률상으로 그것은 절도지만 나는 그런 일에 특별히 놀라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 정말 마음 아픈 것은 그 끔찍한 지진 이전에도 그들은 박탈과 절망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평범한 시기라면 사소한 절도는 종종 경범죄로 간주된다. 다치는 사람은 없다. 물론 제지하지 않으면 사소한 절도는 아마 좀더 큰 절도나 범죄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그 흐름을 막을 필요가 있다는 것도 유효한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끔찍한 고통과 대형참사의 광경 속에서 이 주장이 특별히 중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라디오 진행자와 여타 언론매체 종사자들은 2005년 8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즈를 강타한 뒤 주민들이 공공연히 텔레비전 수상기를 탈취해 갔다는 사실에 아직도 분개하고 있다. 내가 재난이 미치는 영향에 관해 생각하고 그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한 이래로 그 망할놈의 텔레비전 수상기에 대한 말을 숱하게 들어왔다. 과연 지금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텔레비전 수상기인가 인명인가? 사람들이 지붕 위나 엄청나게 뜨거운 다락방 안, 혹은 간선도로 고가차로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2005년 미국 걸프 연안에서 벌어진 온갖 종류의 끔찍한 상황 속에서 꼼짝 못하고 갇혀 있을 때도 주류언론은 약탈이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고 뉴올리언즈 시장과 루이지애너 주지사는 인명이 아닌 재산권 보호에 역점을 두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뉴올리언즈의 강 저쪽 편에서는 백인들 한 패거리가 재산범죄에 단단히 열받았는지 자기들 손으로 제재를 가하기로 마음먹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든 흑인을 범죄자나 도둑으로 간주하듯 마구 총질을 해댔다. 실제로 사망자가 발생했다. 범람지대에서 멀리 떨어진 유역에서 9월의 태양 아래 시체가 떠다녔고, 폐허가 된 도시에서 사람들을 피난시키려 애쓰던 한 선량한 남자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언론은 이 사례를 외면했다. 내가 몇달 동안 성가시게 따지고 나서야 겨우 그 이야기가 보도되었다. 이 자경단원들 중 누구도 재산권이 실제로 위협받았다는 것을 전혀 증명하지 못했지만 자신들은 재산권을 보호하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흑인을 죽인 것을 자랑했다. 그들은 주류언론과 루이지애너의 권력집단이 지향하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다.
부시 행정부가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 피난용 버스 제공 같은 비상 써비스를 자신들과 연고있는 업자들에게 하청 주고, 그들이 가장 긴급한 순간에 처해 쓸모없고 과도하게 비싸며 한없이 지연되는 써비스를 제공하면서도 이윤을 남겼을 때도 우리는 그것을 약탈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또 월가의 수많은 부유한 금융기관들이 주거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 요구를 놓고 장난질을 할 때도…… 아무튼, 내 말의 취지가 뭔지 짐작하시리라.
예전에 〔미국의 민요가수〕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는 “누군가 6연발 권총으로 당신을 강탈한다면 다른 누구는 만년필로 그럴 테지”라고 노래한 바 있다. 6연발 권총(혹은 칼자루나 날카로운 작대기일 수도 있다)을 지닌 이들은 더 그럴듯한 사진을 만드는 데나 쓰인다. 그러나 만년필을 쥔 이들은 일생을 감옥에서 썩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차를 네대나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차고가 딸린 대저택에서, 그리고 때로는 선출된-혹은 임명된-관리가 되어 평생을 보낸다.
위기 속에서 제대로 보는 법 배우기
지난 성탄절 영국 요크의 팀 존스(Tim Jones)라는 신부가 설교에서, 곤궁에 처한 절박한 사람이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것이 용납할 만한 행동일 수도 있다고 말함으로써 영국에서 논쟁을 일으켰다. 당연히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존스 신부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내 발언의 핵심은 우리가 곤궁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사회적으로 용납할 만한 모든 길을 차단해버린다면 남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길뿐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도를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일이 왜 나쁜지에 거의 전적으로 모아졌지만, 그런 행위가 도움될 게 없다는 주장 또한 반복되었다. 그런데 사실, 음식은 분명 굶주림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사실은 너무나 뻔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별스럽다. 음식을 얻는 수단은 별개의 문제다. 영국의 푸르고 쾌적한 지역에서, 훔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인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도무지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불필요한 인간적 고통 그 자체가 곧 범죄가 아닐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초점은 여전히 가게에서 훔치는 일에만 맞춰지는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아이띠 사람들에게는 음식이 필요하고 또 그런 상황이 널리 알려졌음에도 국제적인 물자전달 씨스템이 현재까지는 한눈에도 먹통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의 식량저장고-당연히 재앙에 처한 아이띠의 빈민들을 위한-에 대한 침입은 “폭력”이나 “약탈” 혹은 “불법”이 아닐 수도 있다. 이 행위는 논리적일뿐더러 절박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그런데 지진 이전에도 아이띠에서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을까? 사실상 인류 전체를 위한 충분한 음식을 생산해내는 이 지구상에서 왜 십억명도 넘는 사람들이 그 풍요로운 산물 중 적당한 자기 몫을 받지 못하게 하는 분배 씨스템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들을 오래 미루어서는 안된다.
그보다 더욱 다급하게는 아이띠의 이재민들에 대한 온정과 그들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언론이 필요하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재난을 위한 하나의 모델로서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에 실린 사진들에 대안적인 캡션을 제시하고 싶다.
경찰관이 고통에 가득 찬 얼굴을 한 어떤 남자의 손을 묶고 있는 사진부터 시작해보자. “여전히 잔해더미에 갇힌 수천명의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경찰이 연유를 가져간 한 이재민을 붙든다. 굶주리는 수백만의 아이띠인들에게 적절한 식량 배급책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두루마리 옷감을 짊어진 남자의 사진은 어떤가? “어느 재난에서나 그렇듯이 평범한 사람이라도 위급할 때는 범상치 않은 대처능력을 발휘한다. 이 옷감들은 아이띠 곳곳에서 땡볕을 가릴 거처를 만드는 데 사용되고 있다.”
살해된 경찰관에 대해서는 “위기의 순간에는 때때로 재산권 보호에 대한 공권력의 과도한 의욕이 불필요한 희생으로 이어진다. 그러는 사이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 아래 갇혀 있다.”
그럼 약탈자라고 불리는 잔해 속의 그 군중은? “수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한 도구들을 찾아내고자 무너져버린 자신들의 터전에서 폐품을 건져내고 있다” 같은 캡션은 어떨까?
이런 설명이 전적으로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현재 붙여진 것보다는 정확할 듯하다. 그리고 지금 아이띠에서든 혹은 언제 어느때든 지구상에서 절대적으로 옳은 사실은 인간의 생명이 재산권보다 중요하며 재앙의 희생자들은 우리의 온정과 이해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 아울러 죽고 사는 일이 우리의 말과 생각에 달려 있으며 그만큼 그것을 올바로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번역│최선령·이화여대 영문과 BK21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