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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 연속기획 · 한국사 100년 다시 보기 ①

 

한국전쟁의 기억과 탈냉전

한국전쟁 사진집을 중심으로

 

 

정근식 鄭根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항쟁의 기억과 문화적 재현』 『지역전통과 정체성의 문화정치』 『8·15의 기억과 동아시아적 지평』(공편) 등이 있음. ksjung@snu.ac.kr

 

 

1. 60년이라는 세월

 

2010년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부터 10년 전, 그러니까 한국전쟁 50주년이 되던 2000년에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간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역설적으로 전쟁의 기억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들이 있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최근 부상하는 한반도 평화체제론 역시 전쟁 기억의 문제를 중요한 사회적 쟁점으로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단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국가간 협력은 주로 사회·문화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초기단계를 벗어나 정치·군사적 문제를 다루는 중간단계로 진입하고 있지만, 유럽연합 같은 좀더 수준 높은 공동체적 지역구상을 위해서는 동아시아 지역구성원들의 역사적 기억, 특히 한국전쟁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전쟁이 끝나면 평화가 온다고 생각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전후체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2차대전이 끝난 후 평화가 온 것이 아니라 중국의 내전과 한국전쟁으로 점철되었고, 이후에도 ‘냉전’이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치열한 ‘전쟁도 평화도 아닌’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탈식민과 국가형성, 전쟁이 중첩되는 동아시아적 이행기를 거쳐 형성된 것이 남한/북한 및 중국/대만이라는 두 쌍의 분단국가, 그리고 미군의 오끼나와 점령을 핵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분단체제’다. 이 동아시아의 냉전-분단체제는 1971년 미중회담, 1972년 중일수교와 오끼나와의 일본 복귀, 1979년 미중수교로 제1차 해체를 겪고 1990~92년의 한러, 한중수교로 제2차 해체국면으로 나아갔지만, 여전히 북미 및 북일간 갈등관계는 지속되고 있으며 두차례의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남북한간 평화는 여전히 실현되지 않고 있다. 해체가 지연되는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핵심에는 한국전쟁의 경험과 기억이 자리잡고 있다.

동아시아의 한국전쟁 기억은 교전당사자로서의 경험과 전쟁 당시의 국가주의적 관점들, 그리고 전쟁 이후 약 40년간 지속된 상호경쟁과 대립의 관점들에 의해 재생산되어왔다. 이를 어떻게 미래를 향한 상호소통과 이해의 관점들로 바꾸어낼 수 있는가?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미래적 관점은 국민국가 차원의 상호이해뿐 아니라 시민적 차원의 상호소통을 확장함으로써 가능하지만, 그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기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의 실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기억을 재생산하거나 재구성하는 사회적 장치들에 대한 심도있는 분석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이에 대한 응답이 가능해질 것이다.

전쟁 기억은 사회제도나 일상생활 속에서 작동하는 각종 문자매체나 시각매체, 또는 물질적 재현을 통해 이루어진다. 문학작품이나 영화, 기념물과 기념관, 기념의례 등은 과거의 기억을 재생산하는 핵심적 장치들이다. 그렇지만 기억의 진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사진집과 다큐멘터리 영상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다른 매체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런 맥락에서 한국전쟁을 다룬 사진집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의 기억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변화됐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2. 국민적 기억과 전쟁사진집

 

사진은 실제로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보여준다는 특성 때문에 사회적 기억의 형성이나 재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어떤 매체보다도 대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속에 담겨 있는 장면이 진실이라고 믿도록 하는 힘이 강하다. 그러나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항상 특정 시각에서 바라본 것, 전체 현실 중 어느 한 부분을 선택한 것만을 보여준다. 사진은 현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다른 현실은 보여주지 않으려는 성격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사진은 항상 현실을 변형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특히 전쟁사진은 그것을 찍은 주체의 위치가 전선(戰線)에 의해 제약되므로 시각(視角)과 사각(死角)이 구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만, 일상적으로 이런 한계는 감추어지거나 간과되기 쉽다. 전쟁사진은 많은 경우 보도사진으로 활용되는 탓에 사진가의 ‘시각’은 ‘우리의 시각’으로, 사진가의 ‘사각’은 ‘그들의 시각’으로 발전하여 전쟁을 바라보는 두개의 대립된 시각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사진은 심리전의 수단으로도 활용되기 때문에 종종 의도적으로 조작되기도 한다. 사진의 조작은 의도적인 연출, 원래의 사진에 포함된 인물이나 배경의 일부 삭제, 다른 사진과 합성하기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진은 보통 낱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진들과 더불어 연속적으로 배치되면서 특정한 정치적 메씨지를 생산한다. 전쟁을 수행하는 집단이나 국가는 자신의 입장을 담은 일련의 사진들을 대중에 제시하며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내면화하도록 유도한다. 이로써 국가는 자신의 지배영역에 포획된 사람들의 모호한 기억을 선명하게 하고 이질적 기억을 동질화하면서 자발적으로 국가와 자신의 운명을 일치시키는 ‘국민’을 만들어낸다. 국민형성에서 중요한 과제가 의사소통이 가능한 표준어를 만들어내고 동질화된 역사적·지리적 감각을 배양하는 것이므로, 특별전이나 사진집 발간, 상설전시관 건립 등은 이런 과제를 수행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실제로 전쟁을 주제로 한 사진집이 자주 출판되는 것은 그것의 국민형성 효과가 상당함을 말해준다.

개별 사진에 대한 분석이 그것을 생산한 당시 사진 주체의 시각과 사회적 맥락에 초점을 맞춘다면, 사진집에 관한 연구는 과거의 사진을 바라보는 편집자의 시각과 사회적 맥락에 초점을 맞춘다. 사진집은 대부분의 경우 개별 사진들을 특정한 질서에 따라 배치하고 각각에 설명을 추가함으로써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동일한 사진도 어떠한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담게 된다.

전쟁사진에 대한 연구는 선전기능이나 집합적 정체성을 표현하고 재생산하는 역할에 주목한다. 레빈스키는 전쟁사진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전쟁사진가들이 ‘먼 곳의 목격자’(1848~1912), ‘객관적 관찰자’(1차대전~스페인내전), ‘입대한 군인’(2차대전), ‘친밀한 친구’(한국전쟁~북아일랜드전쟁), ‘굉장한 탐험가’(베트남전쟁)로 점차 변화했다고 보았다.1 한국전쟁은 사진가들이 전투하는 군인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사진을 찍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는 것이다.

근래 한국전쟁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사진집이 다수 출간되었다. 특히 개인적 기록사진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40여년이 지난 1990년대 후반부터 개인사진집으로 나오는 추세다. 또한 전쟁 직후 외국에서 나왔던 사진집들이 번역되고,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이 소장한 전쟁사진들도 재발견되어 새로이 출판되고 있다. 전후 분단체제하에서 전쟁 기억은 남북간에 지속된 심리전과 국가보안법체제 그리고 ‘특별국민들’에 대한 통제로써 관리되었다. 한국전쟁 사진들도 이런 거시적 관리체제하에 놓여 있었는데, 2000년 이후 급증하는 한국전쟁 사진집 출간은 기존의 전쟁 기억에 대한 국가주의적 관리체제의 균열을 나타내는 지표이자 탈국민국가적 관점을 확보하려는 시민주의적 현상으로 접근할 수 있다.

 

 

3. ‘우리가 본’ 한국전쟁

 

한국전쟁 후의 사회체제는 전쟁 기억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요인이자 조건으로 작용했다. 냉전이란, 물리적 전투와 살육이 없고 또한 지리적 전선의 변화가 없는 대신 심리전이 지속되고 전쟁 가능성을 늘 강조하면서 ‘적대’와 ‘체제경쟁’이 유지되는 상태를 말한다.2 전쟁이 총력전으로 바뀌었듯이 냉전체제도 총력전의 양상을 띠었다.3 한국의 경우 ‘냉전’은 ‘분단’을 동반한 것이어서, 그 강도나 성격이 다른 나라와 매우 달랐다. 헌법 제정 이후 6개월 만에 만들어진 국가보안법과 그에 따라 나온 여러 법률은 ‘분단’이라는 예외상황을 전제로 했으며, 한국전쟁 발발과 더불어 선포된 ‘특별조치령’은 이런 예외상태를 법제화했다. 전쟁이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 되고, 이후 지속된 분단상황에서 한국 시민들은 ‘계엄령과 비상사태’에 자주 노출되었다. 장기간의 분단/냉전하에서 아감벤(G. Agamben)이 말하는 ‘예외상태’는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상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냉전하에서 한국전쟁 사진들은 어떻게 취급되었는가? 한국전쟁 사진집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최근에 와서야 이루어지고 있다. 김형곤(金亨坤)은 한국전쟁에 관한 공식 기억의 변화를 추적하기 위해 1950년대 후반부터 2004년까지 발행된 8개의 사진화보집을 택해 그 변화양상을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냉전시기에 한국전쟁 사진집들은 주로 반공투쟁으로서의 기억, 기념대상으로서의 전쟁, 그리고 수난자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했다.4 1980년대 이후 이런 경향은 남북한 주민 모두가 겪었던 전쟁의 고통을 강조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관한 최초의 공식기록은 전쟁중인 1952년 육군본부 전사감실(戰史監室)이 편찬한 『육군전사』 제1권이다. 해방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의 북한과 남한의 상황, 특히 군의 준비태세를 서술한 이 책은 ‘군사극비’로 관리되었다. 이어서 1963년에는 역시 육군본부에 의해 『유엔군전사』가 편찬된다. 그중 1권은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속표지에 유엔기와 함께 태극기를 비롯한 17개국의 국기가 함께 실려 있어 전쟁 당시 ‘우리’의 범주를 표시할 뿐 아니라 1963년까지 이런 ‘진영’의식이 그대로 재생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군 소속의 전사관(戰史官)이었던 로이 애플먼(R. E. Appleman)이다.

1950~70년대에 출판된 대부분의 한국전쟁 사진들은 전쟁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의 일부로서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 가운데서 한국전쟁을 집중적으로 다룬 사진집 중 하나가 1970년 휘문출판사 편집국이 발행한 『눈으로 보는 한국전쟁』이다. 전사편찬위원장의 추천사가 붙은 이 사진집은 냉전기 한국전쟁 기억의 한 모델을 제시한다. 한국전쟁 20주년을 기념하여 편집·출판된 이 사진집은 “북괴의 극악무도한 만행에 몸서리쳐지고, 조국의 명맥과 자유를 수호하려는 십자군의 의연한 모습에 숙연”해진다는 서문을 달았다.

이후 한국전쟁 사진만을 다룬 화보집은 1985년 출판된 『사진으로 보는 수난의 민족사』다. 이 시기에 이르러 전쟁후 한 세대라는 시간의 경과와 함께 ‘기억의 퇴색’이 거론되기 시작하고 ‘수난사’로서의 한국전쟁관이 부각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범주의 사진집으로는 1987년 한국언론인동우회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본 한국전쟁의 실상』이 있다. 또한 한국전쟁 40주년이 되던 1990년, KBS는 방대한 자료조사를 통해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을 방영하고, 이때 수집된 사진들을 모아 이듬해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으로 출판했다. 여기에는 총 846장의 사진이 실렸는데, ‘분단/남과 북’ ‘미·소군 철수와 38선 충돌’ ‘폭풍’ ‘북진’ ‘또다른 전쟁’ ‘협상의 비화’ ‘후방전쟁’ ‘휴전’ ‘에필로그(반성)’ 등 9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북한 후방지역 주민들의 삶이나 중국측에서 찍은 사진들이 소개되었고, 미국 국립문서보관청의 자료들이 포함되었으며, 김일성의 젊은 시절 사진도 실렸다. 남북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라는 시각이 강조되고 포로들의 제3국행이나 포로수용소 내부의 중국군인들의 생활상도 소개되었다. 전쟁의 상처와 이산가족의 모습도 담겼다. 이 사진집은 남과 북을 적대관계로 바라보는 것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징후를 보여주는데, 이 시기가 세계적으로 냉전 해체기였다는 점에서 시간적 감각의 차이를 면밀히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사진들은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의 사진대나 미국 등 서방언론의 의뢰를 받은 외국인 종군작가들이 남긴 사진, 또는 중국군 소속 종군사진가들이 찍은 사진으로 구별된다. 이 전쟁사진들은 국민적 기억의 창출에 수없이 활용되었지만, 그것을 찍은 사진가나 촬영 일시, 장소에 대한 질문은 별로 제기되지 않았다. 사진을 단순히 이미지로 취급했기 때문이다.5

최근의 한국전쟁 사진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그들이 본 한국전쟁』(전3권) 씨리즈와 이에 대비되는 『우리가 본 한국전쟁』이다.6 ‘그들이 먼저 보고 우리가 나중에 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순서로 출간된 것이 범상치 않은데, 후자는 1950년 당시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 임인식(林寅植)이 남긴 사진들을 모은 것이다.7 총 123장의 사진이 담겨 있는 이 사진집에는 6월 24일부터 10월 21일까지의 임인식의 일기가 부분적으로 수록돼 있어 사진들의 맥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또한 당시 정훈국 사진대가 전선을 따라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잘 알 수 있다. 전쟁 발발부터 1950년 10월 평양 탈환(점령)시까지의 사진들은 최전선의 모습을 매우 생생하게 담고 있으며, 특히 평양의 주민동향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진집에는 1950년 말기, 즉 1·4후퇴로 대변되는 중국군 참전 이후의 전투사진들은 실려 있지 않다. 이것은 1950년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국의 공식 기억을 담은 사진집들의 공통점이기도 한데, 한국전쟁 관련해서는 이념적인 요인에 의해 북진 국면까지의 사진들을 주로 보여주고 2차 후퇴기 이후의 사진들은 생략한다.

 

손수 그린 태극기를 들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학생과 엎드려 있는 북한군 병사 (평양, 1951.10.21)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58면

손수 그린 태극기를 들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학생과 엎드려 있는 북한군 병사 (평양, 1951.10.21)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58면

 

정훈국 보도과의 사진대는 전쟁 발발 이전에 조직되었지만, 개전 직후 거의 해체되어 있었다.8 후퇴기에 한국인 사진가들은 대체로 1,2년 또는 수개월간 종군작가로서 활동하다 임무가 끝난 다음에는 다시 민간 사진가로 돌아왔다. 이들에게 한국전쟁은 자신이 살던 생활세계의 파괴였으므로, 이국적인 매혹이나 전쟁의 공포를 전하는 객관적 전달자의 입장을 넘어 자신을 기록하고 성찰하는 작가로서의 입장을 갖게 되었다. 한국의 사진계에서 1950년대에 전개된 생활주의 리얼리즘은 사진가들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상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한편 한국전쟁에 관한 사진을 논의할 때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검열이다. 한국정부는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 특별조치령을 공포했고, 1950년 7월에는 전국 계엄령과 언론출판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발표했다. 전쟁상황이 급속하게 악화되어 정부가 후퇴하던 시기에는 언론검열을 제대로 실시할 수 없었다. 11월,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는 신문이나 잡지는 물론이고 벽보, 포스터 등 모든 출판물을 사전검열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발표했다. 이로 미루어보면 전쟁 초기에는 비교적 자유롭게 사진을 보도한 셈이다. 당시 신문들은 사진을 게재할 때 촬영자나 장소, 일시 등에 관한 정보를 소홀하게 다루었고, 짧고 공식적인 익명의 출처를 밝히는 경우가 많았다. 1951년 4월 비상계엄이 경비계엄으로 바뀌었으나 검열은 지속되었다. 한국정부는 1951년 7월과 1952년 3월, 기존의 신문지법을 대체할 출판물법을 제정하려고 했으나 야당과 언론의 반대로 실패했다. 그러다가 1952년 5월, 다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사전검열제가 부활하여, 군 관련 기사는 모두 검열을 받도록 했다. 이처럼 한국전쟁기에 보도사진은 엄격한 검열대상이었다.

사진을 포함한 출판물 일반에 대한 군사검열은 군사비밀 유지나 심리전의 차원에서 고려되었다. 당시 언론은 적군의 잔혹행위를 보여주는 학살 관련 사진을 자주 실었다. 이것은 역으로 적군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했다. 당시 국가권력은 언론을 활용해 심리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즉 전선과 후방을 대비시켜 후방의 주민들을 통제하고 미군의 강력한 무기, 곧 우세한 공군력이나 해군력을 보여주는 사진들을 자주 실어서 아군에게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적군에게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도록 유도했다. 종군사진가들이 찍은 사진들은 종종 심리전 삐라에도 활용되었다.

전쟁사진은 그것이 담고 있는 현실의 일부를 포착한 것으로, 현실의 반영이자 변형일 뿐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현실 그 자체를 재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전쟁사진이나 전단은 강력하고 중요한 심리전의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이 사진들은 종종 아군과 적군을 용맹함과 비굴함, 승리와 패배, 풍족함과 비참함, 휴머니즘과 비정함 등 각종 이원적 대비에 적용시킴으로써, 아군의 정당함과 적군의 비열함을 강조하여 내부적 단합과 외부적 교란이라는 이중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

 

 

4. ‘그들이 본’ 한국전쟁

 

『그들이 본 한국전쟁』의 2권과 3권은 미국 참전용사회가 1951년과 1954년에 간행한 사진집, 그리고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매카서와 그의 후임 리지웨이와 클라크 장군의 보고서를 한데 편집하여 출판한 것이다. 제2권은 1945년 해방부터 1950년 말 북한지역에서의 후퇴장면까지를 담고 있고, 제3권은 1951년부터 1953년까지의 미군과 유엔군의 활동을 담고 있다. 이 책의 한국어판 편집자는 대부분 미군 사진병과 군속사진가들이 찍은 이 사진들이 전쟁의 실제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고 썼다. 즉 미군이 기록한 사진들을 통해 한국인들의 희생과 고통을 읽어내려는 것이 이 사진집 재출간의 목표라고 판단된다.

우선 미군측 사진집을 한국에서 ‘그들이 본’ 것으로 분류한 것에 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한국에서 미국을 ‘그들’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전쟁 발발과 더불어 유엔군이 참전하자 이를 환영하기 위해 1950년 9월 16일, 유엔데이(10월 24일, 국제연합창설일)를 법정공휴일로 지정했다가 1976년 9월 3일 ‘각종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법정공휴일에서 제외했다.9 베트남전쟁의 결과에 충격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국방’ 노선을 추구하면서 미국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후 한국인의 역사인식에서 미국이나 유엔은 ‘우리’와 ‘그들’ 사이를 오가는 존재가 되었다.

 

중국군 포로들이 장 제스 총통의 초상화와 청천백일기를 들고 본국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1954.1.20)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 240면 

중국군 포로들이 장 제스 총통의 초상화와 청천백일기를 들고 본국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1954.1.20)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 240면

 

한국전쟁에서 사진을 통한 이미지 형성력은 오늘날의 텔레비전과 비견될 정도로 큰 것이었다. 당시의 선전삐라가 전장을 중심으로 뿌려졌다면, 사진은 신문과 잡지를 통해 훨씬 널리 그리고 국제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세계적인 통신사와 언론사는 많은 사진기자들을 파견했다. 한국전쟁 3년간 취재에 참여한 서방의 종군기자는 600여명에 이르렀는데, 175~250명 정도의 종군기자가 일본 토요꾜오와 한국에 상주했으며, 평균 40~60명의 기자가 전선의 전황을 보도했다. 널리 알려진 사진가로는 타임/라이프의 토오꾜오 지국장 칼 마이던스, AP통신 사진기자 막스 데스퍼가 꼽힌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시각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온 대표적 사례는 1951년 간행된 던컨(D. D. Duncan)의 『이것이 전쟁이다』(This is War)와, 그를 포함하여 『라이프』지 종군기자들이 찍은 사진을 기초로 1975년 발간된 『전쟁에서의 삶』(Life at War)이라는 사진집이다. 『라이프』지에서 활동한 더글러스 던컨은 전쟁사진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고 평가되는 작가로, 그의 사진집에 실린 미군의 이미지가 이후 워싱턴D.C. 국립박물관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물의 모델이 되었다. 매그넘 소속의 사진가 워너 비숍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사진을 많이 찍었고 그의 사진들 역시 『라이프』지에 실렸다.

한국전쟁 관련 사진집은 또다른 당사자인 중국에서도 출판되었다. 북한측 사진집은 아직까지 알려진 바 없지만, 중국에서는 1959년 해방군화보사에서 출판된 이래, 1990년에는 『항미원조전쟁 화권(抗美援朝戰爭 畵券)』이라는 만화집이, 전쟁 50주년이던 2000년에 동명의 사진집과 『응고의 역사순간(凝固的歷史瞬間)』이라는 사진집이 출간되었다.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간 후, 중국인민지원군은 바로 귀환하지 않고 북한의 전후재건사업에 동원되었다가 1958년에야 돌아갔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의 시각은 중국해방군화보사에서 1959년에 발간한 『영광스러운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사진집에 잘 나타나 있다.10 이 책은 1950년 중국 지원군 모집과정에서부터 한국전쟁에 참여해 활동하는 장면, 휴전 후 북한 재건에 참여하는 장면, 1958년 중국으로 귀환하기까지의 장면을 담은 연대기적 활동보고서의 성격을 띤다. 여기에는 중국과 북한의 우정 또는 ‘혈맹관계’가 강조되어 있다. 이들의 우정은 국가간 관계뿐 아니라 군민관계를 가로지르는 것이다. 이 책의 사진 중에는 중국군이 북한과의 국경선인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인상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미군의 비인도적 전쟁수행을 ‘세균전’ 관련 사진을 통해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이 사진집 역시 중국의 국민국가적 시각에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사진을 찍은 주체는 밝혀져 있지 않다. 또한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가 중국으로의 귀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돌아간 포로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11 우리 입장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 사진집이 2005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어 많은 독자들이 읽었다는 점이다. 이 사진집의 한국어 출판은 몇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 책의 한국어판 편집자는 출간과정에서 사진의 선정과 배열, 편집, 사진설명 등이 원자료에 충실해야 하므로 “잘못하면 편향된 시각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민주화했고, 독자들이 어느 한 관점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을 만큼 성숙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비록 민주정부라 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전쟁당사국이었던 중국의 입장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편집자가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동아시아의 탈냉전과 그에 따른 전쟁 기억의 재구성에서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텍스트를 인정하고 이를 통해 ‘과거’와 ‘적대적 관점’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사진들은 전선으로 양분된 지역에서 상대방 진영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생산되었으므로, 명백히 시각과 사각이 구분된다. 인식주체 면에서 보면 ‘상대방에게 비친 나’나 ‘그들 내부’는 사각에 속하므로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공포와 불안이 대개 무지에서 발생한다면, 최소한의 오해는 관점의 교차로써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런 관점의 교차를 통해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문제점들에 대한 성찰이 가능해진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과 중국의 경제교류는 매우 급속하고 대규모로 진행됐으며 최근에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전후의 동북아 국제관계사를 돌이켜볼 때, 한중관계는 동북아의 적대와 완화를 반영하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참여에 관한 중국측 연구는 크게 진전되었으나,12 그에 비해 대중적 기억은 해결하기 어려운 영역에 놓여 있다. 한국전쟁 개입에 대한 지금까지의 정치적 정당화 방식을 스스로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우리’와 ‘그들’의 범주가 많이 달라졌다.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은 ‘우리’에서 벗어나 ‘그들’의 일부가 되었고, 국내에서 접할 수 없었던 중국인들의 시각을 드러내는 사진집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써 ‘그들’은 서로 이질적이면서 복합적인 범주가 되었다.

 

 

5. 전쟁 기억의 성찰과 재구성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여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함으로써 한국의 탈냉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무렵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변했다. 예컨대 김동춘(金東椿)은 한국전쟁을 피란, 점령, 학살이라는 세가지 키워드로 보는 시각을 제시했다.13 이런 관점의 변화는 이후의 한국전쟁 사진집에도 나타난다. 이와 관련된 것이 박도(朴鍍)의 일련의 사진집이다.14

박도는 김구 암살사건에 얽힌 정보를 얻으려 2004년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 갔다가, 한국전쟁에 관한 사진들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거기서 480여장의 사진을 스캔해 귀국한 후 이를 인터넷 오마이뉴스에 공개하고 2004년 6월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냈다. 이 책은 사진을 시간 순서에 따라 배열하지 않고 주제별·대상별로 분류하고 있다. 각 장의 소제목은 ‘1945~1949’‘미군과 유엔군’‘국방군과 인민군’‘전화에 휩싸인 한반도’‘학살’‘피란민과 전쟁고아’‘포로’‘정전회담과 휴전’ 등이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사진들도 많이 포함되었기에 호응이 매우 컸다. 그는 2005년에 다시 미국에 가서 770장의 사진을 수집해, 2006년에 후속편을 출간했다. 이 책은 소제목의 구분 없이 ‘한국전쟁에 휩싸인 사람들’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와 더불어 그는 자신이 수집한 가장 충격적인 사진 100장을 골라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이라는 사진집도 출간했다.

이들 사진집은 군인보다는 일반 시민들의 모습에 훨씬 큰 비중을 두며, 주제별로 보면 포로, 학살, 폐허 속의 희망 등을 새로운 의제로 삼고 있다. 아울러 이념적 분단을 넘어 국가폭력에 자신의 몸을 드러내야 했던 인간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국민’보다는 ‘시민’ 또는 ‘개인’을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진집들은 최근 한국사회의 변화된 전쟁 기억을 드러내는 지표로 간주할 수 있다.

2000년 이후에 출간된 한국전쟁 사진집이 새로운 성찰을 담고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상황을 여전히 국민국가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과거의 경험이 희석되는 것을 염려하는 관점도 강하게 남아 있다. 예컨대 길광준(吉光駿)은 1600여장의 사진과 당시 연합군의 작전 및 상황 요도(要圖)를 묶어 『사진으로 읽는 한국전쟁』을 출간했는데, 그는 서문에서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말하기 쉽지 않은 예민한 진실들”이 존재하고 “이를 글로 쓰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기에” 사진으로 대신 말한다고 썼다.15 이처럼 사진집은 때로 의견과 입장을 표명하는 완곡하고도 간접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2009년 10월 21일 이명박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하여 응웬 밍 찌엣 주석과 함께, 한국과 베트남이 앞으로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맺을 것을 합의했다. 2001년 맺은 ‘포괄적 동반자관계’를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로 격상시킨다는 것인데, 이는 경제적 협력을 넘어 군사적·정치적 협력을 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부 당국자는 설명했다. 이것은 한국군이 베트남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 지 한 세대가 지난 시점에서 양국 관계가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대통령은, 한국과 베트남이 싸웠던 ‘과거사’를 미래지향적으로 극복하자는 의미에서 베트남의 국부로 불리는 호찌민의 묘소를 참배하고 헌화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호찌민의 묘소를 참배한 것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세번째였다.16

그러나 이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전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 10월 12일, 한국의 유명환 외교통상부장관이 베트남을 전격 방문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국가유공자예우법 개정안’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안은 ‘세계평화 유지에 공헌한 월남전쟁 유공자와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을 예우 대상에 추가하려는 것이었다. 베트남 정부는 “세계평화 유지에 공헌한 월남전쟁”이라는 표현을 문제삼았다. 한국과 베트남이 1992년 수교할 때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에 관한 ‘과거사’를 문제삼지 않기로 했는데,17 이 법안이 그 ‘합의정신’을 어겼다고 해석하여 항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는 이 표현을 수정할 것을 약속해야 했다.

거의 같은 시기인 2009년 10월초, 북한 핵실험과 관련하여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약간 긴장된 상황에서 중국의 원 자빠오(溫家寶) 총리가 북한을 방문했다. 이때 그는 평양에 주재하는 중국인들과 함께 약 두시간 거리의 ‘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을 방문하여 한국전쟁 참전 중 사망한 중국인들을 상기시켰다. 이를 통해 북한과 중국이 ‘혈맹관계’임을 과시함으로써, 북한과 중국의 긴장관계를 완전히 해소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중국군은 18만 3108명에 이르는데, 일부는 평남 회창군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에 묻혀 있고,18 전사자 명단은 랴오닝성(遼寧省) 딴뚱(丹東)의 항미원조(抗美援朝)기념관 ‘열사의 벽면’에 새겨져 있다.19

이 두가지 에피쏘드는 ‘과거사’가 현재의 동아시아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장소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과 중국, 일본은 ‘하나의 공동체’ 또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논의할 만큼 엄청난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와 함께 공동으로 회피하고 있는 의제가 남아 있다.

한국전쟁의 기억 문제는 단지 국내의 진보 대 보수의 대립과 갈등의 영역뿐 아니라,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 간에 존재하는 경쟁과 갈등의 영역 속에도 존재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한국전쟁의 기억은 근래에 많이 바뀌었다. 과거에 ‘적’의 시각에서 생산된 사진들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관점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관점의 교환은 한편으로 그들의 관점을 이해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전쟁 자체를 넘어 평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한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평화나 공동체적 인식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내부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를 시야에 넣고 서로의 전쟁 기억 재생산장치들을 비교·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과거’에 대한 관점의 교환은 학문의 영역뿐 아니라 대중적 기억의 영역에서도 좀더 진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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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 Lewinski, The Camera at War: A History of War Photography from 1848 to the Present Day, NY: Simon and Schuster 1978.
  2. Ron T. Robin, The Making of the Cold War Enem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3. K. Osgood, Total Cold War: Eisenhower’s Secret Propaganda Battle at Home and Abroad, University of Kansas Press 2006.
  4. 김형곤 『한국전쟁의 기억과 사진』, 한국학술정보 2007.
  5. 이들이 촬영한 사진은 한국군의 ‘정훈(政訓)’ 업무를 위한 것이다. 정훈이란 군인들에 대한 공보(troop information), 대민공보(public information), 군일반교육(troop education), 심리전을 포함한다.
  6. 『그들이 본 한국전쟁』 1권 중국인민지원군 편, 2·3권 미국과 유엔군 편, 눈빛 2005; 『우리가 본 한국전쟁』 눈빛 2008. 이 출판사가 처음부터 한국전쟁 사진들을 ‘우리가 본’ 것과 ‘그들이 본’ 것으로 구분하여 출판할 것을 기획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시선의 교차를 통해 한국인들이 가진 한국전쟁의 경험이나 이미지를 객관화하려는 노력이 드러난다 하겠다.
  7. 이 사진집 이전에 임인식의 또다른 사진집이 1995년에 출간된 적이 있다. 임정의 엮음 『그때 그 모습』, 발언 1995.
  8. 정훈국 사진대에 관해서는 김윤정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9 참조.
  9. 유엔데이는 1945년 10월 24일 미국 쌘프란씨스코에서 국제연합이 조직된 것을 세계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유엔데이를 법정공휴일에서 해제한 조치가 ‘총력안보’를 내세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 시기였다는 점이 흥미롭지만,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였는지 경제적인 이유였는지는 불명확하다.
  10. 『光榮的中國人民志願軍』, 중국해방군화보사 1959. 국역본 『그들이 본 한국전쟁 1: 항미원조-중국인민지원군』, 노동환 외 옮김, 눈빛 2005.
  11. 대만으로 간 중국군 반공포로에 관해서는 周琇環 編 『戰後外交史料彙編: 韓戰與反共義士篇 1-2』, 臺北: 國史館 2005.
  12. 주 젠룽(朱建榮)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서각수 옮김, 역사넷 2005; 沈志華 『韓國戰爭揭秘』, 香港: 天地圖書 1995; 沈志華 『中蘇同盟與朝鮮戰爭硏究』, 廣西師範大學出版社 1999 등 참조.
  13. 김동춘 『전쟁과 사회: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는가?』, 돌베개 2000.
  14. 『지울 수 없는 이미지: 8·15해방에서 한국전쟁 종전까지』, 눈빛 2004;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 한국전쟁에 휩싸인 사람들』, 눈빛 2006;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눈빛 2006.
  15. 길광준 『사진으로 읽는 한국전쟁』, 예영 2005.
  16. 그동안 한국에서는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과 전쟁중 수행한 비인도적 행위를 둘러싸고, 사과 및 보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럴 필요가 없다는 입장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진보적 입장을 대표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베트남 방문시 베트남 국민들에게 사과했고, 2001년 8월 23일 베트남의 쩐 득 르엉 국가주석이 방한했을 때 다시 한번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공식 사과했다.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그 이상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리도 있었다. 이에 대해 베트남참전전우회 등 참전 유공단체 및 유공자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17. 1992년 양국 수교 때 과거 전쟁 관련 ‘배상문제’는 거론하지 않기로 했고, 베트남측은 “우리가 승전국이기 때문에 한국측으로부터 사과 등은 받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18. 이들의 묘지는 개성과 평강 등지와 중국 심양에도 있다.
  19. 이 전시관의 건설 및 전시내용에 관한 설명은 石善福 外 編 『抗美援朝紀念館』, 台海出版社 2000. 이 기념관은 우리의 전쟁기념관과 좋은 대비가 된다. 전쟁기념관 편 『전쟁기념관』, 전쟁기념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