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자가면역질환을 앓는 세계화시대의 이방인들
김재영 소설집 『폭식』
이선우 李宣旴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넘어라, 한국문학」 「한국문학의 오래된 미래-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 등이 있음. damdam328@naver.com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최근 한국문학은 탈국경의 서사에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 그러나 ‘월경’이 2000년대 소설의 핵심적인 키워드로 떠들썩하게 자리잡은 데 반해, 실제로 근대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국가와 민족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근대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까지 나아간 작품은 많지 않았다. 2010년을 며칠 앞두고 출간된 김재영(金在瑩)의 『폭식』(창비 2009)은 그래서 더욱 주목을 요한다.
첫 소설집 『코끼리』에서부터 김재영은 우리 안의 타자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이주노동자의 삶을 그리면서도 그는 한국인과 이주노동자를 선악의 선명한 구도로 배치하지 않았고, 성급하게 화해를 시도하거나 어설픈 연대의 포즈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이주노동자들의 타락과 부도덕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다. 돈을 모아 고국에 돌아가기 위해 동료의 죽음까지 외면하고 특근을 하던 ‘노랭이’도, 그 노랭이의 돈을 훔치기 위해 강도로 돌변한 ‘비재 아저씨’도 실은 “뭐든 집어삼킬 태세로 거세게 휘돌아”가는 ‘외’에 빠진 코끼리(「코끼리」)라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김재영은 바로 저 ‘외’와도 같은 우리의 현실을 문제 삼았다. 두번째 소설집 『폭식』은 이러한 현실인식을 한층 심화시킨 수작이다. 특히 자본의 심장부 뉴욕 맨해튼으로 소설의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상설화된 비정규직과 세계화된 이주노동의 흐름이 우리를 그럴듯한 ‘코즈모폴리탄’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잠재적인 ‘호모 싸케르’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더욱 명징하게 드러낸다.
결혼이주민이라는 우리 안의 타자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꽃가마배」는 전작 「코끼리」나 「아홉개의 푸른 쏘냐」의 연장선에 서 있는 작품이다.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국제결혼의 참상은 이제 너무 익숙한 소재고, 태국 여자(능 르타이)와 재혼한 아버지를 못마땅해하던 딸이 미국 남자(‘마이클’이 미국으로 떠나긴 하지만 그가 미국인인지는 확실치 않다)와 연애하다 실패하는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여기에 수로왕과 허황옥의 결혼 이야기까지 겹쳐놓으며 김재영은 우리가 타자를 대하는 방식을 진지하게 질문한다.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은 왕비가 되어 양천 허씨 등의 시조가 될 수 있었지만, 아유타 본국의 식민지였던 아유타야의 가난한 처녀 능 르타이는 반신불수의 늙은 한국인과 결혼하고도 결국에는 한줌의 재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 「꽃가마배」가 허황옥과 능 르타이 이야기를 교차서술하는 것은, 그러므로 단일민족신화를 비판하기 위해서일뿐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우리의 이중잣대를 드러내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매력은 이런 단순한 전언에 있지 않다. 능 르타이와 갈등하는 사람을 남편이 아닌 시누이와 의붓딸로 설정함으로써 「꽃가마배」는 결혼이주여성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다양한 역학관계를 드러내는 한편, 이 타국의 여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만드는 ‘다름의 공포’를 보여준다. ‘나’가 능 르타이를 새엄마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가난하거나 비정상적인 집안의 상징”인 결혼이주여성으로 인해 ‘나’ 역시 평생 “차별의 굴레”를 쓰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다. 공포는 폭력을, 폭력은 다시 공포를 낳으며 차별을 강화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러한 이중잣대로 인해 더 심하게 고통받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꽃가마배」의 ‘나’와 아버지와 고모는 이미 우리 사회의 약소자가 아니었던가. 자신을 향해 찌르는 칼인지도 모르고 능 르타이에게 칼을 겨누는 이들의 모습은 차별과 배제가 구조화된 우리 사회의 암울한 자화상이다.
스스로를 적으로 여기고 결국 자기를 파괴해가는 오늘날의 세태는 「달을 향하여」와 「폭식」에도 잘 드러난다. 박병찬의 앞날이 세입자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듯이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민팀장 역시 최형과 마찬가지로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는 한낱 피고용자에 불과하다. 진짜 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이들은 마치 써바이벌 게임을 하듯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이 야만의 정글에서 최후까지 살아남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혹시 우리는, 제 손에는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사냥감을 거둬들이기만 하는 누군가의 잘 훈련된 사냥개는 아닐까. 열악한 노동조건과 불합리한 임금을 감내하면서도 언제나 실업의 위협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린도우인 미라”(「폭식」)다. 「십오만원 프로젝트」의 해학과 풍자 이면에, 복직투쟁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비정규직의 비애가 진하게 깔려 있는 것은 그래서이다. ‘나’는 비굴한 처가살이까지 하면서 정규직에 목숨을 걸지만 전망은 결코 밝아 보이지 않는다. ‘나’의 해학과 낙관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굳이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며 소설을 끝맺은 것은 몇몇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현실의 저 거대한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일까. 21세기, 위대한 과학의 시대를 살아갈 “축복받은 세대”일 줄 알았던 우리 앞에는 구조화된 실업과 가난, 일상이 되어버린 전쟁과 테러와 학살,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우주. 달마저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잔인한 자본의 논리가 펼쳐져 있을 뿐이다. 누군가의 폭식은 언제나 누군가의 굶주림을 전제로 한다. 이 제로썸 게임에서 나는 언제나 ‘예외상태’가 아닌 주권구성의 경계 안쪽에 속하리라는 생각은 착각이 아니겠는가.
뉴욕의 한국인 이민자들의 삶을 통해, 주체와의 경계를 전제한 ‘타자의 윤리’에 머물지 않고 ‘타자로서의 우리’로 주체의 자리를 아예 옮겨놓는 「앵초」 「롱아일랜드의 꽃게잡이」 「M역의 나비」가 세계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새로운 조국을 위해서는 모국에도 총부리를 겨눌 수 있어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짓으로라도 애국심을 드러내야 하는 이민자들의 삶. 하여 우정도 사랑도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민 2세대들에게는 “한국적인 문화와 정서”를 강요하는 이민 1세대들 역시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광신도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국가고 민족인가. 이 세계의 가공할 속도에 치명타를 입고 속절없이 죽어간 저 ‘M역의 나비’들은 비단 뉴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M역을 향해 날아가는 저 수많은 나비들. 그들의 저 “대책없이 밝기만 한 웃음”에 우리가 차마 축복의 인사를 건네지 못하는 것은 “미처 사람으로 완성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수많은 타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은 아닐까. 국가와 민족의 경계에 대한 질문은 이렇게 인간의 경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모든 인물들이 역사와 시대의 모순을 끌어안고 있는 「앵초」 등에서는 다소 주제의식의 강박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김재영은 생경한 관념을 나열하거나 뻔한 당위를 노출하지 않으면서도 이 어려운 질문들을 문학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다. 그래서 그의 질문은 우리를 오래 괴롭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