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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막스 갈로 『장 조레스, 그의 삶』, 당대 2009
장 조레스 기억하기: 사회주의와 평화의 수사학
이용재
전북대 사학과 교수 leeclio@jbnu.ac.kr
장 조레스(Jean Jaurès, 1859~1914)는 누구인가? 프랑스에서 크고작은 도시들을 방문해 지도책을 펼쳐든 여행객은 장 조레스라는 길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것이다. 남쪽 도시들에 들르면 광장이나 시가지 한복판에서 조레스 동상을 흔히 볼 수 있다. 귀퉁이에는 어김없이 ‘프랑스 정치인, 사회주의와 평화의 사도’라는 짤막한 안내문이 달려 있다. 조레스는 우리에게는 아직껏 낯선 인물이지만 프랑스 위인열전에서는 늘 선두를 유지한다. 단지 좌파이자 사회주의자라는 것이 여느 위인들과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조레스는 프랑스 남단에 위치한 작은 도시 까스트르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남다른 재능을 과시한 조레스는 19세에 빠리 고등사범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학업을 마친 후 고향에 돌아와 까스트르 중학교와 뚤루즈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1885년에 고향에서 공화파 후보로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한다. 그러나 1892년에 인근 광산도시 까르모에서 일어난 대규모 광부파업에 개입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며, 까르모를 대표하는 사회주의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좌우파로 나뉘어 격돌하는 제3공화국의 정치현장에서 조레스는 드레퓌스 사건 때 그의 무죄를 옹호하는 진영의 선두에 섰으며, 분열된 사회주의 운동의 통합에 헌신해 1905년에 통합사회당을 탄생시켰다.
사회주의 정치인 조레스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반대파의 증오와 불신의 표적이 된 것은 바로 1차대전을 앞두고 반전평화운동의 기수로 등장하면서였다.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우자 그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진영을 이끌고 반전운동에 나선다. 1913년 5월 빠리 인근 프레 쌩제르베에서 열린 반전집회에는 주먹을 불끈 쥐고 평화를 호소하는 조레스를 보러 15만 군중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세계대전 발발을 하루 앞둔 1914년 7월 31일, 조레스는 빠리 한복판 작은 까페에서 극우 민족주의자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전란을 눈앞에 두고 평화를 부르짖다가 암살당한 사회주의 정치인. 조레스의 죽음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증오와 고통과 환멸을 맞볼 조국 프랑스의, 더 나아가 유럽에 닥칠 어두운 앞날의 예고편이었다. 두차례에 걸친 전쟁과 공멸의 상처를 간직한 프랑스인들이 아직껏 조레스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남긴 평화의 메씨지가 비록 당시로는 적성국 독일에 대한 적개심을 잠재울 정도로 강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은 그의 삶 자체가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레스에 대한 추모의 열정은 사상과 행동이 합치된 삶을 살고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한 인간에 대한 감동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조레스를 흠모하는 프랑스인들이라면 샹송가수 자끄 브렐이 부른 “그들은 왜 조레스를 죽였는가”라는 노랫말을 어느새 읊조릴 것이다.
그러나 조레스에 대한 평가와 기억이 항상 열렬한 찬사로 가득 찬 것은 아니었다. 민족주의적 적개심이 가득하고 계급적 갈등이 첨예화된 20세기 프랑스 사회에서 조레스는 살아서만큼이나 죽어서도 흠모와 모욕의 양극단을 맴돌았다. 1924년 총선에서 승리한 좌파연합 정부는 조레스의 시신을 빵떼옹으로 이장하는 장대한 추념제를 준비했다. 멀리 까르모에서 상경한 광부들이 빵떼옹으로 운구를 하는 동안 대로변에서는 악씨옹 프랑쎄즈를 비롯한 극우단체들이 야유를 퍼부으며 반대시위를 벌였다. 사회당은 운구행렬의 선두에 섰으나, 1920년 말에 기존 통합사회당에서 분당한 공산당은 공식행사에서 제외되었다. 조레스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계급적·정파적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좌파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사회당과 공산당은 그후에도 조레스가 남긴 유산을 독차지하려고 서로 드잡이하면서 조레스의 기억에 덧칠을 했다.
조레스에 대한 엇갈린 기억들이 합의점을 찾아 프랑스의 국민 정체성으로 수렴되기 위해서는 전쟁의 기억과 이념적 대립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시작한 1980년대를 기다려야 했다. 1981년 5월, 프랑스가 낳은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프랑쑤아 미떼랑은 임기 첫날 아침 빵떼옹을 찾아 “생애 자체가 곧 화합의 정신”이었던 조레스의 무덤에 장미를 바쳤다. 조레스는 이제 당파적 편견과 계급적 적의를 넘어 ‘화합과 평화의 상징’으로 되돌아왔다. 사회주의가 혁명의 전망을 포기하고 국가를 경영하는 정치적 대안 중 하나로 범속화되었을 때, 사회주의자 조레스는 국민 모두의 공감을 얻는 위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막스 갈로(Max Gallo)의 평전 『장 조레스』(Le Grand Jaurès, 1984)가 미떼랑 집권기에 첫선을 보였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미떼랑이 집권한 1980년대는 이념과 혁명의 깃발이 빛을 바랜 실용의 시대이며 전쟁의 참상에서 멀어진 평화의 시대이고 유럽연합 건설에 매진하던 화합의 시대였다.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난 실용시대의 사회주의는 계급투쟁과 혁명이 주는 긴장감보다 연대와 공영이라는 개혁모드에 더 잘 어울린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면서 화합과 평화를 외친 조레스야말로 달라진 현실에 걸맞은 시대정신이 아닌가. 막스 갈로와 조레스의 만남, 그리고 그 밑거름이 된 막스 갈로와 미떼랑의 만남은 나른한 늦여름 어느 오후를 연상시키는 1980년대 프랑스 사회주의의 풍경화에 담긴 적막한 풍광 중 하나다.
막스 갈로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프랑스 최고의 문필가이자 엄청난 다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지금까지 무려 100여편에 달하는 역사소설과 평전 따위를 내놓았으며, 2008년 한해에만 전세계에서 400만권의 책을 팔아냈다. 청년기에 공산주의자였던 갈로가 사회당 간판을 걸고 정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1979년 한 텔레비전 책거리 프로그램에서 미떼랑을 처음 만나면서였다. 그때부터 갈로는 미떼랑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미떼랑이 1981년에 공화국 대통령이 된 것과 나란히 고향 니스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1980년대에 줄곧 그와 한배를 탔다. 『로베스삐에르』(1968), 『가리발디』(1982), 『쥘 발레스』(1988) 등 주로 좌파 인물들에 대한 평전을 쓴 갈로가 프랑스 사회당 창건자 조레스에게 눈을 돌린 것은 사회주의 대통령 시대에 어울리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루이 쑬레의 『조레스의 생애』(1917)에서 장삐에르 리우의 『장 조레스』(2005)에 이르기까지 조레스 평전은 10여권에 달하지만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단연 막스 갈로의 『장 조레스』(한국어판 제목 ‘장 조레스, 그의 삶’, 노서경 옮김)다. 갈로가 이 책에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노동운동 투사로서의 그의 영향력도, 그의 화려한 정치수사도, 그의 독특한 사회주의 사상도 아니다. 조레스에 대한 상충된 평가와 기억들을 넘어 갈로가 주목한 것은 바로 생각과 행동, 이념과 정치를 합일시키려 했던 그의 남다른 삶 자체이다. 사실 조레스는 사회당 통합의 산파 역할을 했으면서도 당권을 강경파에게 내주었고, 당선과 낙선을 거듭하면서 하원 부의장직에 오른 것이 정치경력의 전부였으며, ‘사회주의’와 ‘평화’라는 두가지 목표를 다 놓친 채 숨진, 현실에서는 ‘실패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엄격한 학문적 소양을 쌓은 지식인이었으며 창조적 사상가이자 풍부한 고전교양을 지닌 휴머니스트였다. 조레스는 자신의 사상과 정치활동을 일치시키고자 애쓴 흔치 않은 정치인이었으며, 이로 인해 성공과 좌절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갈로는 이 한권의 평전에서 마치 조레스의 삶을 추체험하듯이 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일생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되살려내고자 한다. 조레스의 죽음을 신화화하는 것은 그의 생애를 잘 다듬어진 조각상처럼 박제화하는 일이다. 갈로가 되살리려 한 것은 조각상 뒤에 숨은 “생생한 조레스, 살아있는 조레스, 프랑스 사회주의의 진정한 얼굴”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계급투쟁의 함성보다 평화와 화합의 소박한 소망을 담은 사회주의, 국제주의 철학보다 프랑스 고유의 역사와 전통에 더 친숙한 사회주의이다.
역사는 반전의 연속인가. 1990년대에 들어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프랑스에서는 자끄 시라끄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우파집권시대를 열었다. 조레스와 미떼랑에 대한 친근감을 숨기지 않던 좌파 작가 갈로는 어느새 우파 위인들에 눈을 돌려 『나뽈레옹』(1997)과 『드골』(1998)을 연달아 내놓아 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더구나 갈로는 2007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뜻밖에도 사회당 편에 서지 않고 현 대통령 니꼴라 싸르꼬지 진영에 가담했다. 신자유주의 보수우파 정객 싸르꼬지가 사회당의 창건자 조레스의 후광을 들먹이며 유세를 펼치는 장면은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조레스가 죽은 지 한 세기 만에 이념과 계급의 장벽을 넘어 프랑스인 모두의 국민적 자산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