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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심종문 『변성』, 황소자리 2009
자연과 인간을 그려낸 중국 현대소설의 백미
정진배 鄭晋培
연세대 중문과 교수 cjby@yonsei.ac.kr
자연의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바위는 침묵 속에서 육중한 자태로 자신을 나투고, 장미는 그 화려한 빛깔과 향기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말을 건다’는 의미에서는 소설도 예외가 아니다. 단지 소설의 경우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시대와 독자에게 말한다는 사실로 인해, 소설을 읽을 때면 우리는 밤하늘의 별을 무심히 바라보는 것과는 매우 다른 기대를 품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촘촘히 어우러진 인물과 사건의 전경 뒤에 작가가 숨겨놓은 그 어떤 ‘의미’를 발굴하기 위해 독자는 정신을 가다듬고 작품이라는 미궁 속으로 한걸음씩 발을 내딛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변성(邊城)』(1934)의 경우 의미탐구에 대한 우리의 강박관념은 작품의 묘처(妙處)를 공감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인간의 삶이란 강물이 대해(大海)로 흘러가듯 면면히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며, 작가가 주목하고자 했던 것도 향하인(鄕下人)들의 평범한 삶의 궤적이었다. 이처럼 심종문(沈從文 션충원, 1902~88)은 시골사람들의 애환과 함께 삶에 대한 그들의 활력과 순박함을 서정적인 필치로 생동감있게 묘사한다.
『변성』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몇가지 공통된 기질을 갖고 있다. 이들은 모두 시골사람으로 순박하고 융통성이 없으며 보수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활하지 않다. 무엇보다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건강한 생의 에너지를 발산하는데 이는 작품 전반의 전경이 된다. 단오절 용선(龍船)놀이의 흥겨운 분위기와 구경꾼들의 떠들썩한 환호성은 향촌 삶의 활력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지금-여기’에 그들이 무리지어 살고 있음의 방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생의 에너지에 관한 한, 성(性)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기녀와 뱃사람의 원초적 사랑이야기는 도시소설류의 작품에서 흔히 묘사되는 뒤틀리고 퇴영적인 성적 심상과는 거리가 멀다. 작품의 주인공 취취(翠翠)는 문명의 도시로부터 고립되어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성장해간다. (그것이 ‘변성’의 상징적 의미이다.) 이야기의 배경인 다동(茶峒)을 흘러 지나가는 강과 숲과 맑은 공기, 그리고 누렁이는 모두 취취를 에워싼 ‘자연’의 일부이다. 자연에는 끊임없는 순환이 있으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자연의 순환을 거스를 수 없다. 『변성』은 취취의 신체적·정서적 성장의 과정을 시적으로 묘사하면서, 그 속에서 보편적 인간군상의 삶의 궤적을 담아내려 한다.
작품 전반부의 내용에 따르면 취취의 생모는 군인과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생모의 친부인 사공 노인은 취취와 더불어 나루터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후 취취가 사춘기를 경과하면서 인근마을에 사는 선주의 둘째아들 나송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작품 전체의 구도로 보자면 일종의 복선인 셈이다. (취취를 사이에 두고 나송이 자신의 형인 천보와 경쟁을 벌이게 되며, 이러한 애정의 삼각관계를 통해 작가는 부모대의 비극적 사랑이 딸에게서 재현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이를 예감한 사공 노인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손녀의 불행을 막아보려 하지만 그의 의도는 번번이 상대방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이어지는 천보와 사공 노인의 죽음, 나송의 떠남 등은 모두 작품의 비극성을 가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성』을 반드시 비극적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노인이 죽던 날 억세게 뿌린 비에 무너진 벽계저(碧溪匊)의 흰 탑은 그해 겨울 다시 세워지고, 취취는 나송이 다동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부분을 작가는 이렇게 기술한다. “어쩌면 그 사람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바로 ‘내일’ 돌아올지도 모른다.”(198면) 그런데 전술했듯이 무너졌던 마을의 흰 탑은 다시 세워졌으며, 그 복구된 시점이 겨울이다. (흰 탑은 일반적으로 남근 즉 양기를 상징하며, 겨울은 음의 기운이 충만한 시점이다.) 즉 음의 세력이 대지를 짓누를 때 땅밑에서는 양의 기운이 꿈틀대며 올라오기 시작하는, 전형적인 지뢰복(地雷復) 괘의 형상이다. 이렇게 보자면 인간사의 희비는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으며, 자연은 어느 한편의 손도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법이 없다.
그밖에도 『변성』에 깃든 서정성과 풍부한 시적 이미지는 작품을 읽어가면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성과 사랑’이라는 작품의 주제 또한 이같은 시적 상징을 통해 축약적으로 드러난다. 가령 ‘대나무 피리’라든가 ‘큰 물고기가 너를 삼킨다’는 등의 모티프는 모두 성적 상징으로 해석될 소지를 내포하는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처녀성의 상실과 이에 따른 두려움, 그리고 사춘기를 겪는 소녀의 성적 자각 등의 다층적 의미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작품의 후미에서 사공 노인의 죽음은 등장인물들 사이에 뒤얽힌 오해와 반감을 종식시키는 계기가 된다. 『변성』의 인물들은 종종 고집스럽게 행동하고 이로 인해 서로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 속 갈등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즉 사건의 결과와는 무관하게 그들 행위의 동기나 의도는 무구한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돈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태도이다. 특히 사공 노인의 돈에 대한 무관심은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나는 돈이 필요 없거든.”(67면) 여기서 돈에 대한 거부는 어떤 의미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이며, 작가는 이같은 인물군상을 통해 자본주의로 대변되는 현대화의 시대적 조류에 대한 일종의 저항담론을 전개하고 있는 셈이다.
이쯤에서 작품의 문학사적 위치를 작가의 삶과 연관지어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주지하다시피 심종문은 1930년대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변성』을 집필했지만, 그의 작품은 비정치적·초역사적인 주제로 일관한다. 이로 인해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좌련(左聯)계열로부터 지주계급의 하수인이라는 비난을 들었고, 국민당으로부터는 무산계급 작가로 분류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회고해보건대 어쩌면 심종문은 역사를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를 통해 독자를 계도하려던 당시 문단의 풍토에 환멸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로 인해 작가는 반복되는 일상사적인 소재를 통해 단절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는 진정한 역사의 흐름을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자면 심종문의 이러한 작가의식은 비역사적이면서 역사적이요, 반이데올로기적이면서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중국 현대사의 오랜 핍박을 견뎌내고 개혁개방 시기를 거쳐 이제는 명실공히 중국 현대소설의 백미로 우뚝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번역과 관련하여 한마디만 덧붙이고자 한다. 정재서(鄭在書) 교수는 역자서문에서 ‘변성’이라는 제목의 번역을 두고 고심하다가 종국에는 원래의 제목을 고수하였다고 실토한다. 그런데 제목을 이처럼 우리말 한자음으로 음역할 경우 원래의 문학적 아우라는 잘 보존되겠으나 의미 차원에서 독자에게 얼마큼 그 함의가 전달될지는 미지수다. 여담이지만 문화권이 다른 서양어 번역에서는 이런 고민 자체가 불필요하다. 가령 영어에서 ‘변성’을 ‘Biancheng’으로 음역 처리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따라서 ‘Frontier Town’ 혹은 ‘Border Town’ 등으로 의역할 수밖에 없으나, 우리말 번역에 있어서는 음역과 의역의 가능성을 앞에 두고 언제나 고민할 수밖에 없다. 각설하고 정재서 교수의 이번 번역은 전반적으로 『변성』의 감춰진 미와 멋을 잘 드러낸 수작이며, 이를 통해 국내 중국 현대문학의 독자층이 좀더 공고해질 수 있기를 내심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