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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전진오 全津吾
1986년생.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2학년.
chesarjino@hanmail.net
달로 가요
씨놉시스
차압딱지가 가득 붙은, 엄마 혼자 살고 있는 집에 2년 만에 아들이 나타나 뜬금없이 김밥을 말아달라고 한다. 김밥을 말면서 이유를 묻는 엄마에게 아들은 무중력상태에서 먹기에 가장 간편한 음식이 김밥이라며, 오늘 자정에 달로 가서 얼음을 가져오겠다고 한다. 얼음만 가져오면 성공한 인생이 펼쳐진다고 장담하는 그의 말을 엄마는 믿을 수 없다. 아버지를 찾으러 나간 줄 알았는데, 달에 갈 준비를 해왔다는 것이다. 엄마는 이제부터라도 착실하게 지내면서 취업이나 하라고 말리지만 아들은 막무가내다.
그러더니 2년 동안 타향살이 하면서 결혼을 했다며 엄마에게 여자를 소개한다. 초등부 영재반 수학선생이라는 여자는 알 수 없는 공식을 들먹이며 아들의 말을 믿으라고 설득한다. 아들과 여자는 갖은 고생을 해가면서 우주선을 만들어온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엄마는 그런 허무맹랑한 얘기를 계속 듣느니 죽어버리겠다는 둥 완강하게 저항한다. 한참을 실랑이하다 밖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경적소리에 엄마는 주차장에 세워진 우주선을 보게 되고 두 사람을 조금씩 믿기 시작한다.
모정에 호소하는 아들 때문에 결국 마음이 바뀐 엄마는 아들을 응원하며 다시 김밥을 만다. 오붓하게 서로의 희망에 대해 얘기하는 사이, 견인차가 우주선을 끌고가는 소리가 들리고 아들이 급히 뛰쳐나간다. 겨우 견인차를 무른 후 자정이 다가오자 아들은 곧바로 우주선에 올라탄다. 엄마는 김밥을 놓고 나간 아들을 안타까워한다. 엄마와 여자의 카운트다운 속에 아들은 우주로 향해가는데, 견인차 때문에 궤도가 어긋난 우주선은 인공위성과 충돌한다. 폭발하는 우주선을 보며 여자는 좌절하지만, 엄마는 그것이 아들이 준비한 불꽃놀이라 믿고 예전에 온가족이 불꽃놀이를 하던 순간을 추억하면서 행복에 젖는다.
*지면사정으로 작품의 일부만 싣습니다. 희곡 전문은 대산문화재단 홈페이지(www.daesan.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등장인물
엄마
남자
여자
무대
저가 아파트 거실. 오른편에 현관문과 방문이 있고, 붉은색 차압딱지가 집 안 구석구석 붙어 있다. 객석 전면은 밤하늘이 훤히 보이는 베란다로 별이 총총 빛나고 있다.
거실 한가운데서 김밥을 싸고 있는 엄마.
큰 가방을 구석에 내려놓고 방에 붙은 차압딱지를 살펴보는 남자.
엄마 몇줄.
남자 일주일치.
엄마 그럼 김밥 쉰다.
남자 쉰다고? 그건 생각 못했는데. ……일단 싸줘. (차압딱지를 떼며) 이 새끼들 좀 붙일 거면 이쁘게 붙여놓지. 성의 없게 붙여놓냐 더 기분 나쁘게. 이런 건 뗐다가 이쁘게 다시 붙여.
엄마 냅둬. 근데 왜 하필 김밥이야.
남자 가서 뭘 먹어야 하나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무중력상태에서 먹기엔 그게 제일 낫지 않나 싶어. 국물은 둥둥 떠다닐 거 아냐. 엄마가 제일 잘 만드는 것도 그거잖아.
엄마 뭘 잘 만들어. 만들고 싶어 만들어?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 마는 거지.
남자 분식집에서 만 김밥만 해도 우리나라 고속도로 두번은 깔았겠다.
엄마 ……집에서 마는 것도 오랜만이다. 옛날에 다같이 바닷가로 여행가서 불꽃놀이했던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아. 지금 보니 그때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때 기억나니?
남자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가끔 보면 엄마도 참 궁상맞다니까. 나 갔다가 오면 엄마 더이상 김밥 말 일도 없어.
엄마 언제 가는데.
남자 오늘.
엄마 오늘?
남자 자정에 출발해.
엄마 얼마 남지도 않았네?
남자 그래서 인사하러 왔잖아.
엄마 이년 만에 불쑥 찾아온 놈이 두시간도 안 있다가 가?
남자 일주일 후에 다시 돌아올게. 그때는 어디 안 가고 엄마 옆에 꼭 붙어 있을게.
엄마 가긴 어딜 가!
남자 가야 해. 그리고 햄 좀 많이 넣어줘.
엄마 이게 몸에 뭐가 좋다고. 난 이거 무슨 맛으로 먹는지도 모르겠더라.
남자 나 좋다는 거 좀 먹자.
엄마 하지 말라는 짓은 다하고, 먹지 말라는 건 다 처먹고!
남자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고 그러는 거지.
엄마 와서 개 풀 뜯어먹는 소리나 하고 있는 게 사람답게 사는 거냐?
남자 도시락 싸달라고 하는 게 왜!
엄마 들고 어딜 가는데!
남자 달에!
엄마 이 새끼가!
엄마, 말던 김밥으로 남자를 때린다.
남자 때리지 마! 밥풀 붙잖아. 나도 다 컸다고!
엄마 난 니가 아빠 찾으러 간 줄 알았다.
남자 찾으려고 했어. 근데 없잖아.
엄마 어디까지 가봤는데.
남자 안 가본 데가 없어.
엄마 사업자등록증에 적혀 있는 데는 가봤어?
남자 이름만 적혀 있지 없는 회사래.
엄마 이년 동안 싸돌아다녔으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죽었으면 유품이라도 주워와야 할 거 아냐!
남자 대한민국 땅이 아무리 쪼그맣다고 해도 사람 찾기 쉬운 줄 알아? 개새끼 하나 동네에서 잃어버려도 못 찾는데 떠나버린 사람을 밑도끝도없이 어떻게 찾아!
엄마 그럼 도대체 뭐 했어!
남자 달에 간다고 달에! 달에 갈 준비했어.
사이.
엄마 아들.
남자 왜.
엄마 미쳤어? 무슨 일 있었어?
남자 나 아무 일 없고 멀쩡해!
엄마 근데 왜 그래!
남자 엄마. 내가 갔다 오기만 하면 다시 전처럼 살 수 있어.
엄마 애비나 자식이나 다 똑같애. 니 애비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넌 도대체 왜 그러냐.
남자 엄마. 내 말 좀 들어봐. 이게……
엄마 됐어!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집에 왔으니까 이제 일자리나 알아봐.
남자 요즘 일자리 구하기 쉬운 줄 알아?
엄마 그럼 달에 가는 건 쉽고?
남자 나 이년을 꼬박 준비했어. 매일같이 밤새우면서 준비했다고.
엄마 다른 걸 그렇게 했어봐라.
남자 이게 확실한 길이야.
엄마 너 무슨 꿍꿍이야. 지금 차 없다고 그러는 거지? 그러니까 로켓 몰고 다니겠다고 허풍떨면서 유세부리는 거야? 형편에 맞는 말 좀 해!
남자 아니야! 엄마. 이거 보면서 말해.
남자, 가방에서 천체망원경을 꺼낸다.
엄마 그건 또 어떻게 샀어?
남자 중고로 싸게 샀어. 원래 이게 그 가격에 못 구하는 건데. 진짜 싸게 산 거야.
엄마 누가 그걸 물어? 왜 샀냐고!
남자 아 좀. 조용히 좀 하고 있어봐봐.
남자, 천체망원경을 베란다 앞에 설치하고 조정한다.
남자 엄마 봐봐.
엄마 안 봐!
남자 한번만!
남자, 엄마를 붙들고 억지로 망원경을 보게 한다.
남자 저기야 저기. 이게 카베우스 크레이터야, 엄마. 끄트머리를 잘 봐.
엄마 저게 뭔데.
남자 달에서 태양빛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데야. 저기 얼음이 있을 거라고 난리라고. 내가 그 얼음을 가져올 거야.
엄마 달에 무슨 얼음이 있어.
남자 뭘 모르네. 있다니까? 있어.
엄마 니가 무슨 수로 가져올 건데.
남자 우주선 타고 가져올 거야.
엄마 니가 뭔데 그걸 타.
남자 자꾸 나 무시하지 마. 내 손으로 만들었어.
엄마 못질도 제대로 못하는 애가 뭘…… 너 우주선 만드는 데 취직했니?
남자 아니 내가 거길 어떻게 가.
엄마 그럼?
남자 내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니까.
엄마 너 지금 엄마 놀려?
남자 요 앞 주차구역에 세워놨어. 가서 볼래?
엄마 엄마 지금 어떤지 알아? 이제 당장 집도 경매 붙게 생겼어. 쎄빠지게 김밥 나부랭이 말아봤자 빚이 어떻게 될 것도 아니고. 약값도 없는데! 엄마 지금 죽어야 하나 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고!
남자 더 고민할 거 없어. 이제 한큐에 끝나.
엄마 끝? 내가 널 끝내줄게. 어? 같이 죽자!
엄마, 다시 때리려고 하면 아들이 막는다.
남자 아 좀. 엄마랑은 말이 안 통해.
엄마 그러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란 말이야! 남들은 자식 잘 낳아서 없던 팔자도 편다던데. 넌 왜 이래. 응? 그런 거 바라지도 않을 테니까 좀 혼자라도 잘 살아봐.
남자 내가 엄마 없이 어떻게 살아.
엄마 그래서 이년 동안 전화 한통 없이 싸돌아다녔어?
남자 엄마가 당장 들어오라고 할까봐 그랬지.
엄마 너 없는 사이에 나 혼자 이 집에서 (감정이 솟구친다)……
남자 엄마. 그래서 왔잖아.
엄마 너 군대 갔을 때도 이러진 않았다. 그때는 어디 있는지 알기라도 했지. 너무 먹고살기 힘든데 나라에서 돈이라도 주나 했더니만 니 아빠는 어디서 뭘 하는지 사업자등록인가 뭔가를 해놔서 돈도 못 준다고 하고. 니가 찾아오면 어떻게든 되나 싶었지. 근데 이게 뭐야! 그 양반 죽든 말든 상관없으니까 떠날 거면 이혼이나 하고 떠나지.
남자 ……아빠는 아닌데, 데려온 사람이 있어.
엄마 누군데.
남자 부인.
엄마 뭐?
남자 나 결혼했어.
엄마 누구랑?
남자 여자랑.
엄마 하이구. 남자는 아니라 다행이네. 그러니까 어떤 사람.
남자 보면 알아.
엄마 어디 있는데.
남자 저 밖에 서서 기다려.
엄마 왜 처음부터 안 데려오고?
남자 (맞아서 얼굴에 붙은 밥풀을 떼며) 엄마가 보자마자 이럴까봐. 남편인데 가오 죽잖아. 분위기 봐서 소개하려고 했지.
엄마 얼마나 됐어?
남자 이년.
엄마 이년 동안 참 많은 것도 했다. 왜 애도 낳지 그랬어?
남자 그건 안되던데. 나 아무래도 문제 있나봐 엄마.
엄마 (가슴을 쥐어짠다) 너 나 자꾸 명 줄게 할래?
남자 왜. 좋지. 피임 안해도 되고. 애를 우리가 어떻게 키워. 그럼 부른다!
남자, 베란다 밖에 대고 외친다.
남자 여보! 엄마가 보고 싶대. 빨리 올라와.
엄마 오지 말라고 해.
남자 왜. 좋아서 엄청 뛰어올걸? 안 그래도 엄마 보고 싶어했어.
초인종 소리 울린다.
남자 봐봐. 엄청 빠르지? 애가 됐다니까.
남자, 문을 열어주자 여자가 들어온다. 여자를 보자마자 껴안는 남자.
여자의 신발을 벗겨준다.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엄마.
여자 어머니. 안녕하세요.
엄마 신발은…… 내가 말을 말지.
남자 앉아. 앉아서 얘기해. 너 김밥 먹을래? 엄마 김밥 진짜 맛있어.
여자 어머니. 저 김밥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시고 만들고 계셨어요.
엄마 ……그러게나 말이다.
남자 뭐 마실래? 엄마 뭐 없어? 냉장고가 어디 갔지?
엄마 판 지 오래다.
여자 정말 간편하게 살림하시나 봐요. 딱 제 취향이시다.
엄마 넌 헛짓거리하지 말고 여기 앉아.
여자 이이한테, 쥐뿔도 없는 형편에 근근이 잘살아가신다고, 좋은 얘기 많이 들었어요.
엄마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니까. 너무 급작스러워서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들은 어떻게 만났지?
여자 차 밑에서 주웠어요.
남자 분명히 기대서 자고 있었는데 추워서 거기까지 들어갔나봐.
여자 시동을 걸었는데 비명소리가 나더라고요.
남자 나 간호하면서 정들었어.
여자 이이가 얼마나 엄살이 심하고 애기 같던지.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남자 죽을 뻔했지만 그 차 밑으로 들어간 게 얼마나 다행인지.
엄마 너 입 다물어. 아 그래. 뭘 하고 있는지 물어봐도 되나?
여자 수학 가르치고 있어요.
엄마 선생님? 학교?
여자 아뇨. 학원이요.
엄마 요즘은 중고등학생만 가르쳐도 돈 많이 번다고 하던데.
여자 그런 건 아니고요, 초등학생.
엄마 초등학생은 산수 아닌가? 아까 수학이라고.
여자 영재반이에요 어머님.
남자 우리 자기가 이번에 우주선 만들 때 진짜 많이 도와줬어.
엄마 그래. 가진 것도 하나 없는 우리 아들이 어디가 좋아서?
여자 처음엔 천생 애기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참 꿈도 많고 열정적이더라고요. 이런 사람이 요즘 세상에 또 어디 있겠나 싶어서요.
남자 완전 나한테 홀딱 반했다니까?
엄마 아니 그럼 자네도 우주선 얘기를 믿는 거야?
여자 같이 만들었어요 어머님.
남자 아무것도 없는 나한테 비전을 줬어. 우리 자기가 용접도 얼마나 잘하는데.
여자 부끄럽지만 자격증도 있어요. 소싯적에 좀.
엄마 아니 지금 다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여자 예, 어머님. 특수상대성이론과 궤도역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때, 우주로 가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일 뿐이죠. 남편과 저는 이년 동안 정말 착실하게 준비했어요.
남자 엄마가 우주선을 보면 그런 말이 안 나올걸?
여자 페르마의 정리와 유클리드 기하학의 관점에서 설계했어요. 정말 튼튼하다구요 어머니. 믿으세요. 전 수학선생님이니까요.
사이.
여자 어머님. ……웃으세요.
엄마 도대체 어디서 이런 애를 데려온 거야!
남자 엄마!
여자 어머님. 말이 너무 심하세요.
엄마 (가슴을 움켜쥔다) 너네를 보니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약 먹고 올 테니까 그사이에 가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인사는 할 필요 없다.
엄마, 방으로 들어간다.
여자 어머니가 절 싫어하시나 봐요.
남자 차 얘기를 괜히 했나. 헌팅했다고 할 걸 그랬나봐. 엄마는 내가 구차한 걸 싫어하거든. 어렸을 때부터 없어도 당당하게 살라고 했었는데.
여자 정말 그것 때문일까요?
남자 그래. 자기가 그거 빼고는 흠 잡힐 게 어디 있어.
여자 정말 당신이 이렇게 말해줄 때마다 내가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너무 좋아요.
남자 나도 당신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여자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평생 답답한 계산이나 하면서 살았을 거예요. 영악한 영재들한테 무시당하면서 살았겠죠. 그런 녀석들 중에 언젠간 달에 간다는 애가 나오겠죠. 그런 애들만 가는 건 안돼요.
남자 그래서 당신이 나를 보내잖아.
여자 난 내 남자를 우주로 보내는 게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어요. 남자는 자고로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거든요.
남자 우리 아빠도 비슷한 말을 했었어. 살려면 밟고 올라가야 한다고.
여자 왜 모든 아버지들은 그렇게 말을 할까요?
남자 밑바닥에서만 살아서 그래. 원래 엄마도 저렇게 성격이 모나진 않았는데 아버지가 집을 나간 이후로 변해버렸어. 그래서 엄마만 보면 마음이 아파.
여자 괜찮아요. 우린 이제 행복해질 수 있잖아요.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요. 혹시라도 늦으면 안돼요. 일초라도 늦으면 당신은 평생 우주 어딘가를 떠돌게 된다구요.
남자 응. 알람도 맞춰놨어. 다 잘될 거야.
여자 저도 해놨어요. 남편이 우주미아가 돼서 과부가 되는 건 싫어요.
남자 그럴 일 없어. 우리가 해온 걸 생각해봐.
여자 힘든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어요.
남자 이제야 내가 사람답게 산다는 생각이 들어. 늘 남들만큼 못했는데 남보다 더한 일을 하고 있잖아.
여자 노력해서 안되는 게 어디 있어요.
남자 그래. 노력해서 안되면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야? 우리, 행복하자.
여자 지금도 행복해요.
남자 부탁 하나만 할게.
여자 뭔데요?
남자 나 없는 사이에 엄마 좀 봐줘.
여자 네?
남자 그동안 내 걱정에 미쳐버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계속 옆에 있어줘.
여자 싫어요.
남자 왜!
여자 ……어머님이 무섭다고요.
엄마, 목에 올가미를 걸고 나온다.
(후략)
희곡 | 심사평
2009년 희곡 부문의 응모작에 나타난 현상은 (실질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부재하는 아비’로 인한 희비극적 서사가 많다는 점 외에도, 잘 쓴 2인극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는 점이다.
유독 2인극이 많이 투고된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소극장연극에 익숙한 세대의 희곡에 대한 제한적인 이해 때문일까. 아니면 삶의 세부와 미시적인 데 대한 관심, 최소단위와 파편으로 존재하는 현대인의 관계맺기의 규모 탓인가. 아니면 영상매체의 확장적인 속성을 배제하고 집중을 선택하는 희곡의 글쓰기 기본전략 속에서 대화 형식을 배우기에 2인극이 적합하기 때문일까.
2인극은 극적 정보와 사건을 축적해가는 방법에서 두 사람의 대사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높은 밀도를 요한다. 특히 과거를 다루는 데 3자의 개입과 도움이 차단되므로 한층 세련된 대사 처리가 필요하다. 여하튼 ‘극적’이라는 것의 기본을 이해하고 희곡의 구조에 대한 인식과 감각 없이는 2인극의 응축과 집중을 성취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응모작 중에는 내용과 형식 간의 긴장감있는 대결을 놓치지 않는 2인극이 여러편 눈에 띄었다.
손녀와 할머니가 벌이는 엎치락뒤치락 자살소동을 희극적 솜씨로 엮어낸 「미치지 않았어」는 나름의 풋풋한 매력을 담고 있다. 자본주의의 소비욕망을 패러디한 「타히티에서 브런치를」도 욕망하는 주체와 욕망하는 대상의 다양한 기호들을 등장인물 2인으로 압축해 선보였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을 고민하게 한 완성도 높은 2인극으로는 중년남녀의 극진한 사랑이야기 「다시 삽시다」가 있다. 이 작품은 특히 군내 나는 묵은 생을 풀어내는 말솜씨가 일품이다.
「달로 가요」는 사회적 빈곤에 처한 한 청년의 독특한 사고와 행위를 다루고 있다. 녹록지 않은 현실이지만, 발상을 비틀어 자연스레 판타지 요소를 끼워넣고 꿈의 출구마저 봉쇄된 소시민적 삶의 추락과 찬란한 몰락을 페이소스있게 보여준다. 삶도 꿈도 차압당한 오늘날 소위 ‘88만원세대’의 ‘리얼 판타지극’이라 이름 붙일 수 있겠다. 현실을 다루되 일상성에 매몰되지 않은 신선한 발상, 이를 구현하는 간결하고 위트있는 대사, 여러 방향에서 무대연출을 할 수 있는 여지 등을 높이 샀다. 감각에 사유가 더해져 대성하기를 바란다.
이윤택 장성희
희곡 | 수상소감
이런 좋은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입으로 상을 받았다는 말을 하는 건 왜 이렇게 쑥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가 자신의 한계를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 건 작품의 질보다도 상을 원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컸기 때문일 겁니다. 욕심만 많은 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욕심을 부렸던, 그래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2009년이었습니다. 이 해의 마지막에 이렇게 특별한 마침표를 찍게 되어 다행입니다. 물론 기쁜 일이지만 더 커지는 욕심을 2009년을 반복하며 채워야 한다는 게 무섭기도 합니다.
부모님과, 희곡을 가르쳐주신 이만희 이종대 박노현 홍석진 선생님, 학과장이신 장영우 선생님 그리고 박성원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수요일을 반납한 채 살고 있는 희곡 분과원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전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