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팩트 너머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을 바라며 외
언론매체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사실’(fact) 너머 ‘진실’(truth)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스스로 직업윤리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다. 손쉽게 접한 ‘팩트’에 안주한 채 적당한 ‘초’를 쳐 이것이 ‘진실’인 양 보도한다. 때론 자신의 선입견이나 가치관에 부합한 ‘팩트’만을 골라 기사를 쓰거나 혹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자 교묘하게 ‘팩트’를 배열하고 왜곡하기도 하는 게 언론계의 팩트이자 진실이다.
리베커 쏘울닛은 「미디어가 바로 재난이다」에서 아이띠 지진현장 언론보도에 나타나는 이런 문제점을 지적했다. 재난을 곧 혼란으로 손쉽게 등치시키고 재난현장에서 이재민의 행동을 패닉에 빠진 군중의 일탈로 묘사하곤 한다. 그건 기자나 독자가 가진 ‘상식’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쏘울닛은 더 나아가 언론이 이재민의 생명권보다 사유재산권을 더 중시하는 태도를 꼬집고 있다. 이재민의 절도를 불가피성(necessity)에 따른 자구행위로 이해하지 않고 재산권 침탈이 횡행하는 아노미 상황의 약탈로 몰아가는 보도태도를 그는 ‘인간성을 거스르는 범죄’라고 규정짓는다. 사유재산권을 신성불가침의 권리로 삼는 미국 주류미디어에 대한 비판이긴 하지만 우리 언론도 그 비판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의문이다.
쏘울닛의 글에서 한가지 아쉬운 것은 이재민의 불가피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공권력의 노력을 폄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의 사진 캡션은 이렇게 바뀌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한 경찰이 연유를 가져간 이재민을 약탈 혐의로 포박하고 있다. 굶주린 수백만의 아이띠인들에게 적절한 식량배급책이 마련되지 않아 일부 이재민들은 체포를 무릅쓰고 먹을거리 구하기에 나서고 있다.”
구정모 pseudojm@yna.co.kr
‘포용정책 2.0’이 시민사회운동에 던진 문제
● 지난호에 백낙청의 「포용정책 2.0을 향하여」가 발표되었을 때, 언론은 이 글의 합리적 핵심으로 다음의 표현을 따 옮겼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북미관계가 정상화되며 외부의 경제지원이 증대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분단국가의 체제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나로서도 이 표현이 백낙청식 국가연합의 배경을 잘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시민단체 종사자들은 이 글의 다른 표현에도 흥미가 있다. “올해로 66년째에 접어든 한반도의 분단은 그동안 시민참여를 통해 극복되지 못한 것도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정부 주도로 통일이 달성되지 못한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민참여 통일론’의 과학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시민사회운동에 용기를 북돋는 정서적 호소에 ‘환호’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어느 순간엔가 우리가 자초한 함정이 있었다. 통일문제라는 게 시민사회의 역할은 늘 있긴 해도 국가가 적극 나서게 된 다음에야 얼마나 큰 할일이 있을까, 게다가 국가가 민간의 노력을 막아나서는 요즘에야 어디 할일이 그리 많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국가 주도성에 대해, 인정을 넘어선 의존 경향이다. 이것은 통일문제의 또다른 축인 북한 국가에 대한 답답함이 겹치면서 증폭되었다. 그래서 주저앉아 있는데, 말하자면 ‘포용정책 2.0’이 우리 뒤통수를 한대 때린 셈이다.
내가 느끼기에 ‘포용정책 2.0’이 제기한 핵심은 북한변화론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북한변화론은 이 글 ‘포용정책 2.0’을 주제로 한 시민사회단체 집중토론 모임(4월 23일)에서도 중요한 논점이었다. 다들 ‘버전 1.0’이나 ‘버전 2.0’을 막론하고 포용정책에 제기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포용정책이 북한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켰고 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는 데 이견이 없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남북이 이미 6·15선언을 통해 국가연합에 대한 최소수준의 합의를 도출한 바가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국가연합은 심지어 주한미군이 존재하는 조건에서조차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국가연합을 흡수통일이라는 위협의 제거 위에서 합의 가능한 최소한의 제도로 보았다는 이해가 가능해진다. 실제로 우리는 10·4남북정상선언에서 국가연합의 현실태를 볼 수 있다.
북한변화론 논의에서 국가연합을 먼저 상기하는 이유는 이러한 새로운 체제가 북에 작용하는 영향력 때문이다. ‘포용정책 2.0’은 국가연합 단계에서 국가와 사회의 분리를 보고 있다. 다시 말해 북한 변화는 이 단계에 와서 온전히 북한 자체로 감당할 몫이 되는 셈이다. 더구나 국가연합의 작용은 북쪽으로만 향해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연합은 남쪽에는 분단의 온갖 장애요인을 넘는 개혁운동의 공간을 열어준다고 기대된다. 그런 점에서 국가연합은 제도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운동의 장으로 존재하는 실체라고도 할 수 있다.
시민사회운동을 향해, 할일이 있다고 알게 하고 또 할일을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포용정책 2.0’은 고무적이다.
민화협 정책연구위원 정현곤 jhkpeace@empas.com
탈민족주의 문학논쟁에 관하여
● 김흥규의 「한국 근대문학 연구와 식민주의」를 흥미롭게 읽었다. 90년대 후반 이후로 탈민족주의 담론 혹은 민족주의 문학론 비판이 주류담론으로 떠오른 듯한데, 김흥규의 글은 이들 담론에 대해 원로학자다운 예리하고 정치한 비판을 보여주는 평론이었다. 나 같은 아마추어 독자로서는 전시대의 주류 문학담론에 대한 비판이 지나쳐 민족주의 문학담론의 합리적 핵심마저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원로학자의 우려와 질책으로 읽히기도 했다.
이 글에서 김흥규가 비판하는 것은 탈민족주의 문학담론의 주요 비평가라 할 황종연과 김철의 논리다. 그는 이들 담론이 ‘식민주의’와 ‘번역된 근대’를 과도하게 특권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김철 등의 탈민족주의 문학담론은 전래의 민족주의 문학담론이 ‘타자의 계기’를 용납하지 않는 자기동일성의 논리였다는 데에서 출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김흥규의 비판을 읽으니 ‘제국’이라는 타자를 특권화한 나머지 거기에 내재한 ‘주체화’의 계기(가령, 김흥규가 강조하는 자강운동기의 담론들)마저 내다버린 형국이다. 탈민족주의 담론이 가진 허점과 빈틈을 적절하게 지적한 대목이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문학담론 외부에서 아주 활발하게 전개돼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문학담론 내부로 보자면 김흥규의 문제제기는 오히려 뒤늦은 감마저 있다. 최근 몇년 동안 문학담론은 논쟁다운 논쟁이 부재한 채 지리멸렬을 거듭해왔는데, 창비 지면이 오랜만에 논쟁의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는 것 같다. 두 중견학자가 어떻게 응전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김재환 weibliche@hotmail.com
모두이며 하나인 청년의 목소리를 들어라
● 「20대 얘기, 들어는 봤어?」는 간담회 주제와 멤버 모두 ‘20대가 하는 20대 이야기’라는 컨鴉트에 잘 어울린다. 그런데 소설가, 인터넷 논객, 총학생회장이라는 ‘상징’이 동원되는 이 좌담이 과연 ‘평범한 20대’를 담아내고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지금 20대의 의견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하나로 대동단결’하는 시대가, 세대가 결코 아닌 것이다. ‘청년세대의 문화와 정치’라는 소주제와는 조금 다르게, “20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고민이 더 도드라진다.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대담자마다 조금씩 결의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민주당 주도의 정치연합에 대한 회의가 공통분모로 자리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른바 진보정당이든 언론이든 “대다수의 20대가 어떻게 무슨 고민을 하는지를 끌어내려는 노력이 없다”는 한윤형의 지적은 그 점에서 유효하다. 다만 그 노력을 진보정당과 언론에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20대 스스로 뽑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게다. 천민자본주의 이명박시대에는 아직 ‘더 많은 계몽’이 필요하다. ‘청년’의 역할(변화를 요구하고 강제할 잠재력)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점에서 어떻게 ‘청년’ 스스로의 목소리를 담아낼 것이냐는 화두가 간담회 이후로 끊임없이 제기되고 또 해소되길 바란다.
김주원 leopord.eglo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