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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문학의 정치성을 다시 묻는다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질식해가는 정치를 위한 소설의 심폐소생술

 

 

권희철 權熙哲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인간쓰레기들을 위한 메시아주의」 「방랑자를 위한 여행안내서: 윤대녕론」 등이 있음. northpoletrain@gmail.com

 

 

1. 냉소주의의 화병

 

문학과 정치. 지난해 이 문제만큼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모으며 다양한 논의를 만들어낸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 오래된 문제를 2009년에 다시 떠오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은 “어떤 시대적 필연성이 당신에게 지금 이 질문을 던지게 했”을까?1

이 논의들을 출발시킨 것은 새삼스럽게 가시화된 문학과 정치 사이의 분열과 거리감이었다. ‘문학과 정치’ 논의의 출발점으로 자주 거론되는 한 시인의 고백에서도 이 점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다.”2(강조는 인용자, 이하 같음) 시인 자신의 정치적 참여는 물론 가능하다. 그리고 시의 경우에도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어떤 분열과 거리가 있으며 그 둘 사이를 좁히는 것은 쉽지 않다. 둘 사이의 연결통로를 만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시는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가? 이러한 판단과 질문들이 ‘문학과 정치’ 논의의 핵심이었다.

언제나 이미 그 자리에 있던 이 분열과 거리가 새삼스럽게 불편함을 호소하며 발화하기 시작한 것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촉발된 촛불항쟁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 시기 우리 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정치적·문화적 이슈가 ‘촛불’이었고 문예지들 역시 이 점에 주목하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창작과비평』 2008년 가을호에 실린 특집 ‘이명박정부, 이대로 5년을 갈 것인가’의 여섯편 글 가운데 다섯편의 글이 ‘촛불’을 다루고 있으며, 같은 계절 『문학과사회』는 특집 ‘촛불’과 미디어의 수사학’을, 『문학동네』는 좌담 「‘촛불’은 질문이다」를 기획했다. 앞서 인용한 시인의 글이 발표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이명박정권의 등장과 함께 민주주의의 후퇴와 정치적 위기감의 고조를 목격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촛불항쟁 속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과 투쟁의 활로를 발견했거나 발견했다고 믿고 싶어했다. 어떤 시인들은 삶 속에 구체적으로 파고드는 촛불의 활력과 생기를 보며, 그것을 시 속으로 옮겨심기를 욕망했다. 예컨대 이런 고백의 경우. “광화문과 종로 거리에서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시는, 문학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촛불들이 독자일 것인데, 이들이 과연 내 시를 읽고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시와 독자, 시와 현실 사이가 아득해 보였습니다.”3 약간의 비약을 감수한다면, ‘문학과 정치’ 논의를 출발시킨 분열과 거리감이란, 촛불로 밝혀진 광화문과 종로 거리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발견된 그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시의 영역에서 주로 논의된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늦게 도착한 어느 소설가에 관한 진술은 약간 다른 시각을 취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전쟁터에서 폭탄을 맞아 내장이 쏟아져나온 시체가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데, 그 방의 방문자들이 다들 책꽂이에 꽂힌 책 이야기라든가 커튼의 색깔이랄지 구석에 서 있는 화병의 무늬랄지 날씨 얘기 따위만 끝없이 하고 있는 상황. 그런데 그 방에서 “그런데요, 여기 시체가 있는데요”라고 한 아이가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응, 그래. 우리도 알고 있단다”라고 한 다음에 다시 날씨 얘기를 한다. 아이의 눈에는 그게 아무래도 이상하다. “여기 시체가 있다니까요!”라고 한번 더 외친다. 그러면 사람들이 조금 성가셔한다. “그래! 여기 시체가 있어! 우리도 다 안단다. 그걸 누가 모르니!” 아이는 화가 났다. “저는 이게 무서워요!”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도 별로 좋지는 않단다. (…) 하지만 우리가 그런 큰 것에 대해 이야기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니. 우린 벌써 이 시체를 수백년 동안 보아왔단다. 그냥 다른 얘기를 하자.” 그러고서 그들은 다시 화병의 무늬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화병을 집어던져 깨뜨린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얼어붙는다.4

 

문학이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할 수 있고 또 개입하려 한다고 해도 남는 문제는 있다. ‘여기 시체가 있다’는 정치적 발화가 결코 그 자체로 투명하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에 대한 표준적인 응답은 ‘그걸 누가 모르는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화병의 무늬랄지 날씨 얘기 따위만 끝없이 늘어놓는 것은 여기 시체가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우리 역시 그 시체의 존재를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런 큰 것에 대해 이야기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냉소주의가 정치 자체를 질식시키고 있기 때문에, ‘여기 시체가 있다’는 정치적 발화는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문학이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더불어 우리는 어떻게 이 냉소주의를 깨뜨릴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도 함께 감당해야 한다.

문학이 정치와 분열되어 있으며 그 분열상태에서 정치적으로 무력하다는 반성은 오히려 문학 외부에 정치적 활기가 있으리라는 소망을 사실판단인 양 착각하게 만들고 이런 착각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안심시키기까지 한다. 문학이 참여하고자 하는 정치적 공간 자체가 소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요점은, 질식해가는 정치에 문학이 새로운 문제제기의 산소를 주입할 권리가 있으며 그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냉소주의의 시대에 ‘문학과 정치’를 논할 때 함께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니 문학이 촛불항쟁의 열기를 참조하려고 한다면, 참조의 초점은 촛불의 직접적 정치성이 아니라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장(場)의 열림, 즉 어떤 정체성도 귀속의 전제도 없이 여러 독특성들이 현시하게끔 만드는 소통적 텅 빔의 가능성이 되어야 한다. 촛불항쟁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안에 상대적으로 한정된 내용의 특정한 정치적 요구가 없었다는 데 있다. 촛불항쟁에서는 현실적 투쟁의 목표로 삼기에는 너무 일반적인 관념이 지지되거나, 강력하고 집약적인 의제를 설정하기에는 너무 다양한 요구들이 넘쳐났다. 촛불항쟁이 보여준 것은 특정한 계급의 강력한 요구가 아니라, 모든 성적·계급적 귀속이 무화되는 공동체 그 자체, 즉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장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아감벤을 패러디하며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촛불로 밝혀진 광화문에서 국가가 맞닥뜨려야 했던 것은 모든 정체성과 귀속조건을 굴절시키는 독특성의 공동체였다. 그것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굳어진 집단이나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관리하거나 규율할 수 없고, 바로 그 점에서 국가가 전혀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위협이었다. 이 독특성의 공동체, 혹은 소통적 텅 빔의 가능성이야말로 도래하는 정치의 새로운 주인공이다.5

그러므로 ‘여기 시체가 있다’는 문제제기를 어떻게 소설화할 것인가에 대한 실험뿐 아니라, ‘그걸 누가 모르는가’에 맞서 화병을 깨뜨리는 충격요법을 어떻게 소설화할 것인가에 대한 실험 또한 검토되어야 한다.

 

 

2. 입을 먹는 입, 말을 하는 입: 황정은의 경우

 

지난겨울 황정은(黃貞殷)은 용산참사와 철거민 문제를 다룬 르뽀를 썼다(「입을 먹는 입」, 『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 황정은은 그 글의 제목이기도 한 ‘입을 먹는 입’의 이미지를 통해 어떠한 정치적 발화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법과 경찰의 폭력을 묘사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러나 「입을 먹는 입」이 단지 국가폭력에 대한 고발과 폭로만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진정 무서운 것”으로 “용산이 참혹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점을 알며 그러한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 그것이 거기 없는 듯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을 지목했다(47면). 작가는 ‘입을 먹는 입’을 지탱하는 것은 법과 경찰의 권력보다 냉소주의 자체가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묻기도 했다. “이 비좁고 딱딱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리에서 몇번이고 ‘국가’를 실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질문을 해보자. 그들의 국가와 당신의 국가와 나의 국가가 다른가. 어떤 대답을 고를까. 같아도 문제, 달라도 문제 아닌가.”(34면)6 어느 쪽으로의 답변도 곤란한 이 질문이 우리에게 가리켜 보이는 것은 두 정체성 사이의 틈새 혹은 균열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망루에서 불타 숨졌거나 그곳에서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기소된 철거민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름인 ‘대한민국 국민’과 우리 스스로를 동일시할 수도 없다. 어떤 정체성 속에도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 그 정체성들의 틈새를 가리켜 보이는 것은 냉소주의적 무관심을 무너뜨린다.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당신들은 어떤 ‘대한민국 국민’인가? 희생당한 (그리고 또 희생당할) 쪽인가 희생시키는 (그리고 또 계속해서 희생시킬) 쪽인가. 바로 그 틈새 혹은 균열 속에서 ‘말하는 입’이, 정치의 숨구멍이 열린다.

‘말하는 입’이 정체성의 틈새와 균열 사이에서 열리는 정치의 숨구멍인 한에서, 그것은 국가폭력을 폭로하거나 그에 맞서 정당한 권리를 내세우는 입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국가권력이 지정하는 정체성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소진하는 삶의 바깥에 있는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입이기도 하다. 황정은의 근작 「百의 그림자」(『세계의 문학』 2009년 가을호)는 그런 점에서 ‘말하는 입’에 대한 조심스러운 실험처럼 보인다.

「百의 그림자」의 세번째 절 제목 또한 ‘입을 먹는 입’이다. 이 절에 삽입된 에피쏘드는 유곤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인데, 그녀는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비참하게 추락사한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차츰 ‘그림자’에 잠식되더니 급기야 입마저 검게 물들어 어떤 의미있는 발화도 수행하지 못한다. 「百의 그림자」에는 이와 유사한 에피쏘드가 수없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들을 단순화해보자면, 황정은은 여기서 그림자에 잠식되어 삶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 ‘입을 먹는 입’에 삼켜지는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은교는 숲속으로 들어가는 어떤 낯익은 뒷모습에 이끌려 그것을 뒤따라가는데, 무재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은교가 따라간 낯익은 뒷모습이 기실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나온 그림자였던 것이다. 이 기이한 체험 이후로 자기의 그림자도 일어섰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과 함께 그 그림자를 따라가면 파멸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경고가 이어진다. 은교는 이 불안한 생의 순간에 무재를 만나고 그와 함께 이 시간들을 통과해낸다.

은교가 그림자에 잠식될 뻔했다가 깨어나는 장면을 보자.

 

어두운 것이 되면 이미 어두우니까, 어두운 것을 어둡다고 생각하거나,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예 그렇지 않을까, 어둡고 무심한 것이 되면 어떨까, 그렇게 되고 나면 그것은 뭘까,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모르도록 어두워지자, 이참에,라고 생각하며 눈을 뜨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 엎드린 채로 받고 보니 무재씨였다. 조금 갈라진 듯한 목소리로 은교씨, 하고 나서 무재씨는 기침을 했다. (263면)

 

은교는 정전된 방안에서 두려움을 느끼다가 이제 그 두려움을 견디지 않기로 한다. 은교는 스스로 어두워진다면 더이상 어두워질 수도 없고, 어둠 때문에 두려워질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어두워져서 어둠의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겠다는 은교는, 스스로 그림자가 되어 완전한 체념과 좌절 속으로 침잠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용문의 끝에 울린 전화벨 소리에 비로소 체념과 좌절로부터 깨어난다. 전화기 너머로 ‘은교씨’하고 부르는 무재의 목소리에 은교는 어둠에서 빠져나와 희미한 빛 속에서 무재와 함께 머물기를 원한다. 돌이켜보면 작품의 서두에서 그것이 그림자인 줄도 모르고 맥없이 그림자를 따라가던 은교가 정신을 차리고 돌아온 것도 자신을 부르는 무재에 의해서였다. 반대로 작품의 끝에 가서 ‘무재씨’하고 부르는 은교의 목소리에 무재가 아무런 대답이 없을 때 공포는 되돌아온다(“여기는 어쩌면 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의 입, 언제고 그가 입을 다물면 무재씨고 뭐고 불빛과 더불어 합, 하고 사라질 듯했다”(311면)).

그들이 정확한 정보를 언급할 때가 아니라, 그들이 올바른 의견을 주장할 때가 아니라, 다만 그들이 ‘말하는 입’ 자체를 유지하는 동안에 무엇인가가 구제된다.

 

해보세요, 가마.

가마.

가마.

가마.

가마.

이상하네요.

가마.

가마,라고 말할수록 이 가마가 그 가마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죠. 가마.

가마.

가마가 말이죠,라고 무재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요, 뭐야, 저 ‘가마’라는 녀석은 애초에 나와는 닮은 구석도 없는데, 하고. 그러니까 자꾸 말할수록 들켜서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요.

(…)

가마, 가마, 하면서 탁자 모서리에 달라붙은 마른 파를 바라보았다. 가마는 가마지만 도무지 가마는 아닌 가마라면 가마란 대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는 틈에 살짝 어리둥절해졌다. (229~30면)

 

〔철거가 진행되는 곳에 얽힌 무재의 추억을 말하고 난 뒤-인용자〕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슬럼, 하고.

슬럼.

슬럼.

슬럼.

이상하죠.

이상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라고 말해두고서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278~79면)

 

은교와 무재 커플은 사소하고 별뜻없는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가마는 가마지만 가마는 아닌 가마를, 슬럼은 슬럼이지만 슬럼은 아닌 슬럼을 발견한다. ‘가마’나 ‘슬럼’이라는 이름(혹은 정체성) 속에서 어둠의 입에 삼켜진 어떤 것이 그렇게 반짝이며 어둠 속을 빠져나온다. 만일 정치가 어떤 동일성이나 정체성이나 소명으로도 확정지을 수 없는 순수 잠재성의 존재를 전시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서 다만 생존으로 위축된 우리의 삶이 행복한 삶에 복속될 때 시작되는 것7이라면, 황정은의 ‘말하는 입’이 뱉어놓은, 슬럼은 슬럼이지만 도무지 슬럼은 아닌 슬럼 역시 순수 잠재성의 존재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정치적 삶이 시작되는 출발점을 지시한다.

이것이 정치적 삶의 출발점임은, 무재가 문득 생각해내는 질문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무재는 어느날 종이박스 줍는 일로 연명하는 한 할머니가 고작 박스 하나 때문에 다른 노인과 심하게 싸우고 다음날 숨을 거둔 것을 목격한다. 무재는 본래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고작 박스 하나를 놓고 마치 그것이 삶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는 듯이 싸워대는 일은 우리 삶에 불가피한 공허함이다. 그러나 은교와의 대화 속에서 무재는 묻는다.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297~98면). 무재는 ‘말하는 입’을 통해 생존으로 위축된 삶에 문제제기하고 삶의 형태에 대해 생각한다. ‘그저 살아가는’ 생명에 삶의 형태에 대한 사유를 추가하며 무재가 출발시킨 것은 정치적 사유가 아닌가.

황정은은 이러한 변화와 발견이 무재와 은교의 저 수다스러운 입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저 살아가는 삶 바깥의 희미한 존재들(예컨대 공산품을 쓰면 “강이 더러워진다든지, 대금이 너무 저렴하게 지불되는 노동력이라든지.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217면) 점을 생각할 때 비로소 떠오르는, 계산되지 않는 ‘빚’. 또는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이 있을 수도 있으니 손님이 먼길을 되짚어 찾아올까 염려하는 마음에 덤으로 넣어주는, “20개를 사면 21개, 40개를 사면 41개, 50개를 사면 51개, 100개를 사면 101개, 하며 매번 살 때마다 한개가 더 들어 있는”(266면) 오무사의 잘(못) 계산된 전구 하나)은 오로지 무의미하고 대화 자체를 이어가는 대화처럼 보이는 그들의 ‘말하는 입’을 통해서만 떠오른다.

‘입을 먹는 입’에 맞서서 ‘말을 하는 입’을 열게 만드는 것, 주어진 정체성에 자신을 완전히 소진하는 삶8 바깥에 남겨진 희미한 잠재성을 떠올리는 것, 그것이 「百의 그림자」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3. 쥐인간과 공중전화: 편혜영의 경우

 

정치 자체가 질식해가는 현실에 대한 환기라면 편혜영(片惠英)의 『재와 빨강』(창비 2010) 쪽이 좀더 강력하다. 차미령이 『재와 빨강』의 해설에서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이 작품은 “전염병과 쓰레기가 만연하는 생명정치 시대”9의 생존기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행복이라는 관념으로 방향 맞춰진 형태 속으로 응집되는 삶, 즉 정치적 삶10이 제거되어 단순히 살아남는 생존의 문제만이 남은 벌거벗은 생명, 그것에 대한 관찰과 기록이 『재와 빨강』의 등뼈를 이루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한 외국계 방역업체 직원이 본사 파견근무자로 선발되어 C국으로 가게 된다. 본사 파견근무는 승진의 기회처럼 보였지만, C국에 도착하자마자 상황은 점점 복잡해진다. 사내는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전염병에 감염된 것으로 의심받은 탓에 공항에 억류되고 근무 시작일이 연기된다. 또 그의 숙소가 있는 4구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더미의 미로로 되어 있으며 그의 숙소는 전염병 때문에 격리조치된다. 사내는 격리된 숙소에서 이혼한 아내가 잔혹하게 살해되었으며 자신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체포하러 온 형사라고 판단해서 쓰레기더미 속으로 뛰어내려 도망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이제 쥐들과 경쟁하며 쓰레기더미를 뒤져 간신히 연명한다. “쓰레기를 뒤지고 있노라면 한마리 쥐가 된 느낌이었다.”(118면)

쥐를 잘 잡을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본사 파견근무가 결정된 사내는 이제 ‘쥐인간’이 되어 굶주림, 전염병과 싸워야 한다. C국에서 “그가 전력을 기울여야 할 일은 살아남는 것이었다.”(87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금의 세계가 과거가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것이었다.”(131면) 행복을 향한 삶의 형태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버린, 단순히 살아가는 삶 속에서 그는 좌절한다. “마침 비어 있는 벤치에 몸을 누이면서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역병에 전염되거나 심장이 단칼에 찔리거나 해서가 아니라 공원에 숨어 지내는 동안 방심하여 함부로 찔린 녹슨 못 때문에 파상풍에 걸려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렇게 사소하고 볼품없이 서서히 죽어가는 게 마땅했다.”(122~23면) 그것이 단순히 살아가는 삶에 어울리는 처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C국의 특수한 상황일 뿐일까. 혹은 사내의 얄궂은 운명이 인도하는 예외적인 어둠일 뿐일까. 사내가 후반부에 다시 쥐를 잡는 능력을 인정받아 부랑자 생활을 청산하고 C국의 임시방역원이 되었을 때를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방역복을 애지중지했다. 그에게 방역복은 안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 방역복을 입었다는 것은 남들과 똑같은 존재가 된다는 의미였다. 남들과 같아진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또한 감염되어 일상이 다치는 것 말고는 두려울 게 없다는 뜻이었다. (195면)

 

병에 걸리지 않는 게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병 때문에 일을 망치지 않는 거죠.(202면)

 

사내가 쥐처럼 살아가기를 그만두었다고 안도하는 그 삶의 형식이란 무엇인가. 거기에는 어떤 성격의 행복이 있는가. 거기에는 행복도 삶의 형식도 없다. 부랑자 생활을 청산한 뒤 사내가 복귀한 일상(日常)이란 문자 그대로 매일 반복되는 단순한 삶의 유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일상이 진정으로 일상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서 독특한 분기점이나 재현 불가능한 특이성을 제거해야 한다. 일상은 그저 “남들과 같아진다”는 것이고, 일상에서 두려운 것은 이 반복되는 단순한 삶을 망치고 이탈하는 것뿐이다. 일상은 언제나 일상 바깥과 스스로를 분할하면서 성립하고 현재상태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이 일상의 안에는 되새길 만한 어떤 형식도 행복도 없다. 일상은 다만 분할의 형식일 뿐이다. 남들과 같아지면서, 그러니까 특이성을 버리고 고유하지 않은 정체성으로 귀속되면서 일상 안에서 연명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일상에서 벗어나 비참하게 쥐로서 연명할 것인가를 분할하는 형식. 이것은 C국이나 사내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정치가 질식한 오늘날의 사회에서 생명정치가 강요하는 폭력적인 양자택일의 선택지다. 이런 상황에서 쥐인간과 일상의 인간은 서로의 뒷면을 가리키지만 결국 정치적 삶이 제거된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렇기에 쥐처럼 살아가기를 그만둔 것이라고 안도하는 그 일상의 삶 또한 실상 쥐인간의 삶과 다를 바 없다.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이 날카로운 관찰이자 통찰이, 그러나 『재와 빨강』의 본령은 아니다. 일상의 쥐와 쓰레기장의 쥐 가운데 무엇이 되겠느냐고 묻는 양자택일의 참담함 속에서, 칼을 휘둘러 전처를 잔혹하게 살해한 범인이 바로 자신임을 확인하는 공포스런 모험담이야말로 『재와 빨강』의 긴박한 호흡을 지탱하는 핵심이다. 이 모험담의 마지막 부분인 2부의 끝에서 사내는 한 여자를 충동적으로 살해하면서, 자신이 전처의 살인범임을 깨닫는다. 그 순간 사내는 ‘꿈’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꿈에 대한 상념과 함께 C국에서 겪은 자신의 모험담에 대한 이해도 도착한다.

 

그는 잠깐 마음이 흔들렸으나 이내 어두컴컴한 집 안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쥐나 잡는 인생을 꿈꾸어본 적이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쥐나 잡는 일을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는 인생을 꿈꾸었을 리도 없었다. (…) 그는 여자를 부둥켜안은 몸에 힘을 주면서 과연 자신이 꿈꾼 인생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했다. 오래전의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나 꿈을 꾸었던 것 같고 한번도 꿈을 꾸어보지 않은 것도 같았다. (216면)

 

〔칼로 여자를 찌르는-인용자〕 그 낯익은 감각 때문에 그는 오래전 쓰레기더미로 투신한 자신의 행동을 기꺼이 이해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안도감이었다. 이 안도감을 얻기 위해 C국에서 긴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았다. (217면)

 

쥐인간의 모험담이 마무리되는 이 장면에 이르러, 쥐인간의 모험 속에서 사내가 잃어버린 것이 아주 오래전에 꾸었거나 한번도 꾸어보지 않았을 어떤 ‘꿈’이었음을, 그는 희미하게 감지한다. 사내는 당시에는 미처 몰랐지만 삶이라고 할 만한 거의 유일한 것이 담겨 있던 전처와의 관계를 자기 손으로 망쳐버리고 잃어버린 꿈으로 만들어놓았다는 것, 그 때문에 스스로 쓰레기이자 쥐인간이 되어야 했다는 것, 쥐인간으로의 전락이 어떤 오해나 불운한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꿈을 분실하고 삶을 망쳐버린 자신에게 합당하게 주어진 결과라는 것을 깨달으며 안도했다.

그간의 편혜영 소설과 달리 『재와 빨강』에 이르러 새롭게 등장한 요소라고 복도훈이 날카롭게 지적한 것, “사소하고도 사소한 일로 채워진 현실의 시간” 또는 “사소하고도 미세한 생활의 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면들의 출현11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새롭게 출현한 저 사소한 시간들과 미세한 생활의 결이란, 일상의 쥐와 쓰레기장의 쥐,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것, 잃어버리기 전의 꿈, 망쳐지고 나서야 기억 속에서 복원되는 구원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사내가 전처와의 관계를 그리워하며 그 관계를 통해 온전히 경험할 수 있었던 시간과 삶의 결을 추억하는 한에서, 사내는 벌거벗은 생명 너머의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와 빨강』은 C국의 낯선 여인을 살해하면서 쥐인간이 스스로 전처의 살인범임을 확신하는 2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실상 끝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편혜영은 굳이 여기에 짤막한 3부를 추가해놓았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 뒤에 남겨진 이야기 속에서 사내는 여전히 쥐인간이지만, ‘공중전화’라는 별명을 얻는다. 쥐인간이 강박적으로 공중전화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는 틈만 나면 공중전화로 달려가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전처와의 전화가 연결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 공중전화는 단지, 우발적인 살인에 대한 후회나 전처에 대한 그리움을 압축하는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다. 독자들은 절박하게 전처의 이름을 대는 사내를 보면서, 『재와 빨강』의 1부와 2부의 도처에 깔려 있는 “사소하고도 사소한 일로 채워진 현실의 시간” 또는 “사소하고도 미세한 생활의 결”, 벌거벗은 삶만을 남겨두고 떨어져나간, 우리가 잃어버린 바로 그것, 일상의 쥐와 쓰레기장의 쥐 너머의 삶에 대한 호소를 볼 수 있다. 이야기 끝에 남겨진 이 이야기로 인해 『재와 빨강』의 등뼈,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관찰이자 통찰에, 잃어버린 삶의 형식에 대한 눈물겨운 요구, 즉 정치적 삶에 대한 요구가 살로 덧붙여진다.

 

 

4. 오로지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황정은의 ‘입을 먹는 입’과 편혜영의 ‘쥐인간’은 각각 불가능한 동일시(우리는 망루에서 죽은 한국인도 아니지만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한국인도 아니다)로부터의 회피에 문제제기하거나, 생명정치의 참담한 양자택일의 선택지(일상의 쥐인가 쓰레기장의 쥐인가)에 문제제기한다. 그리고 황정은의 ‘말하는 입’과 편혜영의 ‘공중전화’는 사소하고도 희미하며 어떤 정체성으로도 귀속되지 않는 존재들과 삶의 결을 불러낸다. 그것은 철거와 가난, 쓰레기장의 삶을 폭로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돌아보지 않으며 주어진 정체성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소진하는 냉소주의자들의 화병에 두 정체성 사이의 균열과 틈새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百의 그림자」와 『재와 빨강』은 정치가 제거된 삶, 행복을 향한 삶의 형태로부터 분리되고 남은 벌거벗은 삶, 단순히 살아가는 삶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이 두 작품은 오늘날 질식해가는 정치에 새로운 문제제기의 산소를 주입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읽어도 좋을 것이다.

이런 독해에 어떤 정당성이 있다면, 이 두편의 소설이 우리에게 어떤 상위의 질서나 권력으로도 회수되지 않고 ‘스스로의 몰락을 순수하게 추구할 것’을 권한다고 읽을 수도 있다. 우리는 항상 이미 현실태일 뿐인 존재들, 항상 이미 이런저런 정체성일 뿐인 존재들, 그것들에 완전히 자신의 역량을 탕진해버린 존재들의 자리에서 몰락해야 한다. 이 몰락의 추구가 벤야민의 정치이다.

벤야민의 정치가 우리의 신체 위에 자리잡는 곳을 가리켜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얼굴이 될 것이다. 그것은 ‘안면(顔面)’과 구분되는 ‘얼굴’이다. 얼굴 전체의 윤곽선이나 눈, 코, 입의 크기와 위치, 모양새를 지각하면서 우리는 상대방을 식별할 수 있다. 그러한 식별, 정체성의 확인은 ‘안면’이 우리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것이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얼굴’은 안면이 아니다. 얼굴은 수시로 안면의 정체성을 지우고 미세하게 차이나는 감각과 정서가 새로운 표정으로 돋아나오는 열림, 드러냄, 소통의 장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굴은 모든 양태와 성질을 탈고유화하고 탈정체화하는 문턱이다. 이딸리아어 얼굴(volto)의 어원은 “A에서 B로 변한다”는 뜻의 라틴어 ‘volgere’의 과거분사와 철자가 동일하다. 얼굴은 차라리 고갈되지 않는 잠재태에 가깝다.12

그림자에 물들어 검게 변해 어딘가 인상이 희미해지고 결국 열림의 기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百의 그림자」의 인물들, 그리고 가면을 쓴 듯한 인상이거나 방진마스크로 완전히 가려진 얼굴을 하고 있는 『재와 빨강』의 인물들, 그러니까 결국 우리 자신인 이 인물들을 위해 이 두 소설이 마련한 조언은 아마도 이런 식으로 요약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문턱으로 가라. 당신의 고유성이나 능력의 주체로 머물지 말라. 그것들 아래 안주하지도 말라. 오히려 그것들과 함께, 그것들 속에서, 그것들을 넘어서 가라. 문턱을 향해, 도취상태에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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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심보선·서동욱·김행숙·신형철 좌담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서」, 『문학동네』 2009년 봄호 368면.
  2.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69면.
  3. 심보선·이현우·오은·이문재 좌담 「‘촛불’은 질문이다」 중 이문재의 말, 『문학동네』 2008년 가을호 42면.
  4. 남궁선 「끝없이 쏟아내는 아이」(김사과 작가초상), 『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 135~36면.
  5. 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김상운·양창렬 옮김, 난장 2009, 100~101면 참조.
  6. 황정은의 이 답변불가능한 질문을 랑씨에르가 제시하는 불가능한 동일시와 비교해볼 만하다. “우리는 우리를 이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프랑스 경찰에게 맞아 죽고 쎄느강으로 던져진-인용자〕 알제리인들과 동일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름인 ‘프랑스 국민’과 우리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두 정체성 사이의 틈새 혹은 균열 속에서 정치적 주체들로서 행동할 수 있었다.”(자크 랑시에르 「정치, 동일시, 주체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08, 142면)
  7. 조르조 아감벤, 앞의 책 1장과 10장 참조.
  8. 이러한 삶의 방식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노골적으로 권장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 2009)가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9. 차미령 해설 「재와 피로 덮인 얼굴」, 240면. 아감벤을 참조하면서 이 해설을 조금 보충해서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생명정치는 쓰레기와 전염병을 관리하면서 우리의 삶을 규율하려 들지만, 기실 쓰레기와 전염병을 만들고 또 그에 기반해서 존재하는 것이 생명정치의 주권이며, 생명정치의 주권이 작동하는 한에서 그곳에 정치적인 삶은 없고 다만 생존의 문제만이 남는다. 『재와 빨강』의 주인공 사내가 경험하는 것이 이 기묘한 역설이다.
  10. 조르조 아감벤, 앞의 책 20면.
  11. 복도훈 「K」,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418면.
  12. 안면과 구별되는 얼굴에 대해서는 조르조 아감벤, 앞의 책 8장 참조.
  13. 같은 책 110~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