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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문학의 정치성을 다시 묻는다

 

세계체제의 (반)주변부와 근대소설

식민지근대의 극복을 화두로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평론집으로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이 있음. jatw19@moiza.chonnam.ac.kr

 

 

1. 글머리에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라는 서사의 형식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논의는 지역의 문화적 현실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그중 세계체제 (반)주변부 근대소설의 ‘기원’을 식민지근대로 잡는 논자들의 경우는 이언 와트(Ian Watt) 식의 입론을 일종의 대전제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1 산업혁명으로써 서구의 근대가 출범하고 시민계급이 중산층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실주의에 근거한 장편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태어난바, 18세기부터 성세를 이루기 시작한 소설이 본격 제국주의시대를 맞아 식민지로 수출된 결과 ‘아류의 서사’가 발생했다는 가정이다.2 이 논리가 20세기 식민지조선에 적용되는 경우 그 산파역은 동아시아에서 서양문물의 수입에 가장 적극적이던 일제(日帝)로 설정된다. 이를테면 쯔보우찌 쇼오요오(坪內逍遙, 1859~1935)의 『소설신수』(小說神髓, 1886)라는 소설론을 식민지작가들이 탐독하는 과정에서 ‘노블’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21세기 들어 한층 기세등등해진 탈민족담론과 문화연구의 합작으로 그 가정은 한국의 국문학계에서도 자명한 공리로 승격된 듯한 느낌이다.

김흥규(金興圭)의 「한국 근대문학 연구와 식민주의」(『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이하 「근대문학」으로 표기)가 필자의 흥미를 끈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민족문학운동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한국문학 연구의 패러다임에 대한3 문제제기는 사실 꽤 있어왔다. 하지만 비판의 타당성 자체를 본격적으로 검토한 예는 드문 것으로 안다. 김흥규의 논문이 바로 그 검토에 해당한다. 그는 사뭇 다른 학문적 이력과 경향의 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낸 김철(金哲)과 황종연(黃鍾淵)이 “근대를 식민 기원(紀元)의 시간구획 속에서 보고 그 외래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역사인식”(313면)을 공유한다고 판단하고 그런 역사인식이 “모든 반식민운동과 민족담론들을 제국주의가 발신하는 일방적 회로 속의 반사체(反射體)로, 그리고 대개는 저급한 복제품으로 전제하는 담론틀”(308면)을 전제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논쟁이 예견되는 대목인데, 두 논자가 어떻게 대응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우선은 이 논문이 제출한 쟁점을 제3자가 받아서 발전시켜보는 것도 논쟁에 참여하는 한 방식일 수 있겠다.

이 글에서는 특히 「근대문학」의 3절(‘번역된 근대’와 소설/노블), 즉 “노블이라는 방사체(放射體)가 세계 각지에 침투·적응하여 장르적 식민화를 달성한다는 ‘노블 제국주의’의 보편성에 대한 방법론적 의심”(318면)이 두 논자의 학구에 결여되어 있음을 김흥규가 논박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물론 이때도 “‘노블 제국주의’의 보편성”을 주장해온 서양 근대 장편소설의 독보적 성취는 성취대로 인식해야 하는 숙제는 남는다고 보지만 여기서는 김흥규의 문제의식을 근대문학의 영역, 그중에서도 소설 장르에 집중해 좀더 심화해볼 생각이다. “전근대 소설의 연속적 진화라는 기대와 19세기 서구소설 모델의 이입(移入)·토착화라는 설명방식을 모두 접어놓은 지점”(322면)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가 던진 물음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국내외의 괄목할 만한 사례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브라질의 탁월한 비평가인 호베르뚜 슈바르스(Roberto Schwarz, 1938~)의 문학론을 살펴보고4 그 연장선에서 1930년대 식민지근대를 대표하는 장편소설 가운데 하나인 염상섭의 『삼대』를 읽으면서 이 장편의 현재성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2. 식민주의와 (반)주변부 문학의 대응

 

20세기 초입에 식민지로의 전락이라는 경로를 통해 ‘근대’에 진입한 한반도 지역에서, 한문소설과 국문소설로 이분화된 전근대 서사양식의 연속적 진화를 논제로 삼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조선후기의 국문소설과 갑오경장(1894~95) 이후의 ‘신소설’ 및 1930년대의 장편소설을 일직선상에 놓기는 힘들다.5 다른 한편 전근대와 근대를 가르는 ‘소설사적 단층’이 개화기의 조선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식민통치 또는 반식민통치를 받은 서구 바깥 수많은 나라의 문학에도 단층의 선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어진바, 식민지배의 시공간적 관철 양상이 상이한만큼 그 양상의 소설적 구현도 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대륙 등 지역에 따라 제각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수탈과정에서 식민지와의 직간접적인 문화 간섭 또는 접촉을 피할 수 없었던 ‘본국’도 모종의 ‘감염’은 불가피했을 테니, ‘노블 제국주의’의 본산인 영국에서조차 소설 장르가 돌연변이 없는 진화를 거듭했다는 식의 가설을 세우기는 어려울지 모른다.6

반면에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떨어진 나라에서의 단절이 한층 급격하고 그에 대한 대응도 서구의 문학과는 달랐으리라는 가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통과의 단절이 폭력적으로 관철된 식민지 현실에서 “전근대 소설의 연속적 진화”란 낭만적인 환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서구 서사모델 대 전통 서사라는 이분법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식민지배 과정에서 들어온 서구의 문학(개념)으로 인해 식민지의 서사양식에 어떤 형질변화가 발생했으며, 그 변화는 과연 식민주의에 대한 창의적인 대응에 값하는 것인가가 핵심적인 물음이다. 만약 ‘모든 근대문학은 식민지근대의 문학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다면 더욱이나 그렇다.

여기서 이 물음을 환기한 것은, 전근대 소설의 연속적 진화나 서구소설 모델의 이입·토착화라는 “설명방식을 모두 접어놓은 지점”이라는 것 자체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학담론의 진전을 위해 구체적으로 확보해야 할 과제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외국의 많은 비평 사례 가운데 슈바르스를 꼭 집어 논하는 것도, 마샤두(Machado de Assis, 1839~1908)로 대표되는 19세기 브라질 근대소설의 성취를 다각도로 해명한 그의 이론적 탐구야말로 바로 그 지점을 선취하려는 노력인 동시에 그 너머를 향한 창조성의 성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슈바르스와 그가 논하는 작가 모두 국내 독자에게는 낯선만큼 창비 지면에 처음으로 소개된 「주변성의 돌파」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이 평문의 문제의식은 “유럽의 사회사·문학사의 경로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고 내적 필연성을 상실하는 주변부 국가에서는 사실주의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115면)라는 물음으로 집약된다. 슈바르스는 이에 대한 정답이 있을 수 없음을 시인하면서 19세기 후반 서구 중심부에서는 거의 생명력을 상실한 사실주의가 마샤두라는 소설가를 통해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넓게 보면 「주변성의 돌파」는 선배 작가들이 빠져든 서사의 교착상태를 마샤두가 어떻게 타개해나갔는가에 대한 비평적 해명이다. 동시에 오랜 기간 뽀르뚜갈의 식민통치를 받는 과정에서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 서구의 문학양식이 ‘원천담론’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브라질 문학의 주체 형성에 대한 역사적 탐구이기도 하다. 슈바르스는 “근대국가로서의 심각한 약점을 인식하여 유럽문명의 기본요소들을 흡수하고 해외의 새로운 발전을 따라잡는다는 애국적 과제”(120면)가 제기되지만 식민성의 폐습이 그같은 과제의 실행을 가로막는 신생국 브라질 특유의 온갖 (신)식민지적 질곡을 예시하면서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문학의 분투를 기술한다. 최종적인 논점은 마샤두의 걸작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The Posthumous Memoirs of Brás Cubas, 1880, 이하 『사후 회고록』으로 표기)이 식민주의에서 발원한 역사와 문학의 모순이라는 이중 질곡을 어떤 방식으로 돌파했는가를 밝히는 데 놓여 있다.

슈바르스의 해명은 일종의 비교문학적 대비를 통해 이루어진다. 즉 한편으로는 “사실주의를 진지하게 시도한 최초의 브라질 작가”인 알렝까르(José de Alencar, 1829~77)의 문제작 『씨뇨라』(Senhora, 1872)가 여러 미덕에도 불구하고 “발자끄 소설의 위대한 효과 중 하나인 주요 갈등과 부수적 일화 간의 근본적 통일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원인을 따지면서(123면), 그같은 한계가 깨끗하게 극복되는 서사적 성취를 마샤두의 소설에 대한 분석으로써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마샤두 소설의 초기 국면과 원숙기 사이의 단절 양상을 보여주는바, 그는 처음에는 노예제, 가부장제, 봉건적 후견인제 등 전근대 구습이 자유주의 근대와 뒤엉킨 브라질사회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온정주의(〓서구 휴머니즘)를 가동시켰지만 그 한계를 절감하고 전혀 새로운 서사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점을 논증하는 것이다.

슈바르스는 그것을 변절자 서사(turncoat narrative)로 규정한다. 이는 로런스 스턴(Laurence Sterne, 1713~68)이나 디드로(Denis Diderot, 1713~84) 등이 표방하는 18세기 유럽의 메타서사에 대한 혼성모방이라 할 만한 것이다. 마샤두는 서사의 관점을 브라질 지배계급의 한 전형적 표상인-물론 그의 목소리는 모든 세속적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난 망자(亡者)의 것으로 설정된다-상류층으로 바꾸고 그의 내면을 스스로 까발리게 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가진 자의 휴머니즘이 안고 있는 관념성에서도 탈피하게 된다. 이제 망자의 육성은 식민역사가 뿌리내린 국지현실에서 뒤틀린 형상으로 현현되는 서구의 세계관에 대한 신랄한 증언인 동시에 식민지배계급의 자기모순적인 삶의 행로에 대한 고발이 된다. 현학과 재담, 삶의 우수와 희열이 버무려진 1인칭 화자의 독백은 “온정주의적 배려에서 부르주아적 무관심으로 그리고 교양있는 선의의 자유주의에서 대부(代父)/노예소유주의 무한대 권위로 오락가락하는, 의존계층이 겪어내야 하는 부자들의 끝없는 갈지자 걸음의 가장 사악하고 기회주의적인 양상을 실행하도록 계획”(129면)된다. 그 계획이 너무도 철저하게 관철된 나머지 작품의 말미에서 환기되는 거대한 허무로서의 삶조차도 인생의 형이상학적 조건이라기보다는 당대 브라질 “지배계급의 경험이 지닌 무의미함”(128면)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주변성의 돌파」에서 인상적인 것은 브라질 특유의 식민지적 상황에 착목하면서도 (반)주변부 근대소설의 ‘진화’를 세계체제 중심부와의 역학 속에서 파악하는 슈바르스의 유연한 독법이다. 그 자매편에 해당하는 「세계문학에서의 경쟁적인 독법들」에서도 그런 유연성은 여실하다.7 슈바르스는 1950년 이전의 서구 비평계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마샤두의 성취를 상반된 방향으로 해석하는 두 종류의 ‘읽기’를 검토한다. 작품을 민족적·국가적 맥락에 귀속시키려는 독법과 그런 맥락을 초월하여 보편의 지평으로 끌어올리려는 독법이다. 그에 따르면 마샤두를 세계문학체제에 편입시키려는 두 경쟁적인 읽기는 서로를 보완하면서 해체할 수밖에 없는 성격을 띤다. “이런 문제〔반주변부에서 표출되는 작가의 고뇌가 유럽의 모델들과 연관될 때 가치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국지적 현실의 진실의 증언으로서 가치있는 것인가의 문제-인용자〕에서 편들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일방성을 혐오한”8 마샤두 문학이 도달한 진정한 현대적 보편성은 어느 일방의 읽기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마샤두의 작품이 선취한 보편의 지평을 “서구의 근대에 개방되어 있되 제3세계적 의식이 확고하지 않고서는 도달하기 힘든 예술적 성취”로 규정한 바 있지만,9 이런 평가는 슈바르스의 비평작업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마샤두의 문학세계에 대한 가히 총체적인 해석을 내놓은 슈바르스의 작업에서도10 종요로운 것은 브라질 근대문학의 고유한 특색을 브라질이라는 국지적 현실과 라틴아메리카, 세계체제라는 3중의 관계망 속에서 해명하려는 문제의식이다. 이 문제의식만은 우리 비평담론의 전진을 위해 필요한 만큼 전유할 필요가 있겠다. 그런 맥락에서 슈바르스의 비평이 처음부터 세계체제의 중심부와 (반)주변부의 복잡다단한 역학관계를 의식하면서 작품을 읽는 사유의 훈련이었음은 더 강조되어야 한다.11 예컨대 브라질의 걸출한 사회학자인 올리베이라(Francisco de Oliveira)의 「오리너구리」에 대한 논평만 해도 그렇다. 2000년대 브라질의 사회구성체론이라 할 만한 「오리너구리」는 세계체제 중심부·주변부·반주변부의 특색이 뒤엉켜 존재하는 21세기 브라질의 문제에 대해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한 분석으로,12 이 글에 대한 슈바르스의 논평 역시 결코 간단치 않다. 경직된 모든 혁명노선과 거리를 두고 맑스 대 다윈이라는 구도를 해체하면서 전자, 즉 인간의 실천을 통한 의식혁명-이를테면 ‘주인됨’에 대한 브라질 시민들의 각성-의 가능성에 방점을 찍는 올리베이라의 분석적 사유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것만으로 자족하지 않는 그의 지적 탐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13 마샤두의 성취를 브라질문학의 안팎을 넘나들며 규명했듯이 그 탐구는 일국주의라는 틀 자체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자본주의 근대에 대한 체념어린 투항과 낭만적 부정을 모두 넘어서면서 분단시대 이후를 모색하려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정치’의 지평을 발본적으로 다시 사유하는 그의 작업은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세계체제 중심부에 대응하는 (반)주변부 근대소설의 역사적 진화라는 화두를 내걸 때 슈바르스의 그러한 지적 탐구는 특히 시사적인 참조점이 된다. 가령 19세기 초중반 브라질 극작가들이 제각각 구사한, 브라질의 식민지적 배경으로 옮아온 서구 부르주아지의 핵심적인 이념들에 대한 쾌활하고도 냉소적인 서사를 언급하면서 슈바르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렇다면 그들의 상이한 강조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설명한 경향들은 단 하나의 문제를 탐구하고 발전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문제의 기원은 문학의 외부에 있다. 그것은 브라질적 현실의 주요한 특색과 그 현실이 동시대의 세계로 편입됨으로써 제기된다. 그 문제의 실질적인 모형(母型)은 독립기, 즉 세계의 진보와 결부된 근대국가의 목표들과 식민지시대에 만들어진 항구적인 사회구조가 뒤틀린 형태로 결합된 시기에 형성되었다. 이 구조와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구조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새로운 국제 노동분업과 그에 상응하는 세력 분할이라는 틀거리로 귀속된 결과 그런 차이는 부정적인 어감을 풍겼다. 그것은 후진성, 전형적인 눈요깃감, 현대의 쟁점과는 맞지 않는 부적절성, 동시대와는 아무 연관성도 없는 문제에 고착된 것 등을 뜻한다. 이런 혼란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그 혼란은 문자 그대로 소외의 효과를 낸다-예술생산과 역사사회적 성찰의 역할은 그같은 분할을 해체하여 주변적인 것으로 낙인찍히고 부정된 거대한 집단 경험이 갖는 보편적이고 동시대적인 연관성을 발견, 또는 구성하는 것이다.14

 

슈바르스의 이러한 분석은 일제 식민지로의 전락이라는 경로를 통해 “새로운 국제 노동분업”에 참여한 식민지조선에도 얼추 들어맞는 인상이다. 물론 라스 까싸스 신부(Bartolomé de las Casas, 1474~1566)가 증언한, 백인정복자들에 의해 초토화된 인디오문명의 일부로서 식민시대(1531~1822)를 거친 브라질은 그 자체로 특수한(sui generis) 사회구성체다. 심지어 20세기만 봐도 어느정도는 그러하지만 그 후반기로 제한할 경우 남한과 함께 세계체제의 반주변부로 격상된 브라질에도 없는 역사, 즉 해방 이후 외세에 의한 한반도의 분단이 결정적인 차이로 부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야말로 ‘오리너구리’에 비유된 브라질사회와도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온 결과 극도로 이질적인 두 정치체제가 한몸에 공존하게 된 한반도의 특수성을 가리키는 핵심적인 요인이다. 우리가 식민지근대를 제대로 철폐하지 못한 것도 온갖 식민성의 온상이 되어온, 최악의 경우 자신의 꼬리를 먹어들어가는 뱀의 운명으로 전락할 분단에서 연유한다. 이렇게 본다면 『삼대』를 읽는 데서도 중요한 것은, ‘문제’의 기원이 문학 바깥에-자본주의 근대의 개시와 함께 발생한 (신)식민지적 현실에-있음을 인지하면서 그 중심부 국가와는 역사적 경험이 다를 수밖에 없는 (반)주변부 문학의 “보편적이고 동시대적인 연관성”을 작품에서 정확히 끌어내는 공부다.

 

 

3. 식민지근대의 질곡과 『삼대』의 ‘성취’

 

“민족이라는 인식단위에 집착한 연구, 근대를 향한 단선적 진보사관, 그리고 이들을 희망적으로 결합시킨 내재적 발전론의 구도”만으로 그런 공부를 감당키 어렵다는 것은 말할 나위없다. 그 점은 마샤두 소설의 현재성을 세계체제의 중심부와 주변부의 역사적 함수관계에 비추어 해명하면서 근대 극복의 비전까지 도출하는 슈바르스의 문학론에서도 거듭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슈바르스의 그러한 비전에 대한 공감을 전제로 염상섭(廉相涉, 1897~1963)의 『삼대』를15 읽어보는 것도 고식적인 비교문학과는 다른 종류의 비평작업이 될 수 있을 법하다.

『삼대』는 알다시피 조의관·조상훈·조덕기로 이어지는 3대 부자(父子)의 이야기다. 근대화의 물적 기반이 극소수 지역의 도시에 집중된 농경사회에서 대가족이라는 생활형식이 소설로 반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 형식에서 우세종(優勢種)으로서의 가족사소설이라는 장르가 활발하게 부화되었다는 것인데, 『삼대』의 경우 하나의 풍속도로서 그 원형에 가장 근접한 장편이 아닌가 싶다.16 조·부·손 각각의 인물과 그에 연루된 상황이 조선조 말기, 개화기, 1930년대의 사회사적 전형성을 구현하는만큼 식민지근대의 세태에 대한 전면적 재현이라는 면에서 당대 어느 작품보다 가까이 갔다는 평가도 허언은 아니라고 본다. 염상섭만큼 서울 사대문 안 중산계급의 입말과 복잡다단한 세정(世情)에 통달한 작가도 드물 텐데, 귀신까지 부리는 돈의 근대주의적 지배력에 대한 인식 역시 냉철하다. 『삼대』에서 그런 면모는 특히 도드라진다. 3·1만세운동 이후 출구가 막혀버린 식민지조선의 갑갑한 현실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바, 조씨 가문의 후계자인 지식인 조덕기와 활동가로서의 김병화가 각자의 처지에서 분투하는 삶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도 주목할 점은 역시 1920년대의 염상섭을 대표하는 중편 「만세전」(1924)의 ‘1인칭 고백체’에서 ‘3인칭의 재발견’으로 일컬어지는 30년대 본격 사실주의로의 전환이다. 고백체가 일본의 사소설에 영향받은 것임은 종종 언급되지만, 이것은 근대적 자아의 내성적 성찰 및 자기발견과도 분리해서 논하기 힘든 언술형태다. 그런데 염상섭의 고백체는 좀더 뚜렷한 역사적 맥락을 깔고 있으니, 그것은 국권을 상실한 식민치하 지식인의-울분과 체념이 뒤엉킨-사변(思辨)과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17 「만세전」의 ‘나’ 이인화만큼 저항과 투항의 중간지대에서 흔들리는 식민지 지식인의 내면을 통렬하게 드러낸 예도 드물거니와, 그런 그가 『삼대』에서 작가의 세계관에 가장 근접한 인물인 조덕기로 변모하는 양상은 단순한 서사의 형식변화 이상의 역사적 함의를 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함의는 물론 3·1만세운동의 영향과 연관지어야 분명해진다. 기미년의 독립운동으로 인해 일제가 문화통치로 돌아섰지만 식민성의 뿌리는 한층 깊게 내린 1930년대의 상황에서 1인칭 시점의 고백은 길이 안 보이는 지식인에게 자신의 존재기반마저 부정해버릴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만세전」의 1인칭 여로형(旅路形) 서사형식이 식민성이 내면화되는 30년대에 가서 강제병합 전후 시대를 모두 포괄하는 전지적 3인칭으로 바뀐 것도 시대현실에 대한 하나의 의식적 대응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19세기에 묶여 있는 조의관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에서 선진문물을 배워왔으나 20세기로 온전히 진입하지 못하고 전 시대로 퇴행하고 만 조상훈을 그릴 때조차 작가가 이들의 입장에 서기를 마다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3인칭 시점의 힘이랄 수 있다. 조부의 봉건적 의식까지 아우르면서 3대 가족사를 당대 식민지 현실에 대한 사실주의적 알레고리로 작동케 하는 서사장치인 3인칭 시점은 「만세전」의 1인칭 ‘나’를 (부분적이지만)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세계를 손자와 아들로서 이해할 수는 있어도 결코 거기에 동화될 수 없는 조덕기의 시점이 중심을 이루는 『삼대』의 서사를 염두에 두고 슈바르스의 물음을 다시 환기해보자. “유럽의 사회사·문학사의 경로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고 내적 필연성을 상실하는 주변부 국가에서는 사실주의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염상섭의 사실주의, 특히 서사형식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분명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식민치하에서 봉건적 유제(遺制)와 갈등하는 1인칭 근대의식이 식민지시대의 사회적 현실을 조망하는 3인칭 관찰자의식으로 변모한다. 그런 서술자가 그려내는 ‘현실’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탈구(脫臼)되어 있다. 조선조 지배이념인 조의관의 유교주의는 부손(父孫)에게 실질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봉제사와 접빈객으로 허명(虛名)을 이어가다가 사멸한다. 서구문명의 가장 강력한 수출품 가운데 하나인 기독교 이념 역시 조상훈의 거듭되는 일탈로써 식민지조선의 현실과 겉돌고 있을 뿐이다. 기실 겉도는 것은 조상훈의 예수교만이 아니다. ‘마르크스 보이’로서 장로교도인 부친과 사상적 갈등을 빚으며 가출한 김병화의 맑스주의도 만국 노동자의 단결이라는 노동계급의 전위성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그의 사상은 오히려 민족자본의 가능성을 담지한 부르주아 조덕기와의 관계를 통해 현실성을 획득한다. 그런가 하면 종교지도자로 행세한 조상훈의 성적 유혹을 받으면서 주체적인 근대여성의 싹수를 키운 홍경애의 자유주의는 김병화의 맑스주의와 어정쩡한 동거를 하는 형국이다. 외래의 것이든 토착의 것이든 모든 지배적 이념들이 당대의 현실과 어긋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어긋남이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세계의 진보와 결부된 근대국가의 목표들과 식민지시대에 만들어진 항구적인 사회구조가 뒤틀린 형태로 결합된” 식민지조선의 충실한 재현임을 말해주는 증좌다. 그러나 그같은 재현으로서의 사실주의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안팎 여러 사례와의 비교를 통한 운산이 필요한 문제다. 가령 염상섭의 사실주의는 전술한 『사후 회고록』의 그것과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삼대』의 전지적 3인칭 시점이 마샤두의 1인칭 소설세계에서는 완전히 해체된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대』의 사실주의가 거둔 성취를 평가하는 데는 2절에서 언급한 알렝까르의 『씨뇨라』가 적절한 참고대상이 될 수 있다. 슈바르스도 서구문학의 압도적 영향하에 놓인 19세기 브라질 특유의 소설지형에 이 소설을 정교하게 자리매긴 바 있는데,18 스토리텔링의 솜씨와 활력에도 불구하고 『씨뇨라』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이라는 서구적 주제가 브라질이라는 국지현실에 ‘잘못 적용된’ 결과물이다. 『고리오 영감』에서나 가능할 법한 사회적 주제, 즉 “발자끄 풍의 근대적 갈등”과 그에 상응하는 주인공의 성격을 설정해놓고 플롯을 전개하지만 주제와 성격 모두 주종관계의 후견주의(後見主義)와 시혜의 분배로써 돌아가는 브라질의 토속적 현실과는 따로 놀기 때문이다. 이런 분리는 서구적 이념이 이식되었으되 착근하지 못한 사회적 삶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그 나름으로 브라질 특유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반영이기는 한데 작품으로는 “반쯤 구워진 빵”19이 되고 만 것이다.

적어도 『삼대』에서는 『씨뇨라』처럼 수입한 개념의 인위적인 적용으로 인해 거짓된 화해로 치닫는 양상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식민지조선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벌어지는, 전근대의 토착이념과 근대의 수입된 이념의 갈등과 충돌이 생활 차원에서 벌어지는 양상을 섬세하게 포착한 미덕이 부각된다. 다만 비교대상을 『사후 회고록』을 포함한 마샤두의 3부작으로 잡을 경우20 그런 미덕도 대체로 재현적 사실주의로 국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즉 식민성에 찌든 주인공의 의식·무의식을 통해 마샤두가 발자끄와 스땅달의 주인공, 가령 『고리오 영감』의 라스띠냐끄와 『적과 흑』의 쥘리앙 쏘렐이 과시하는 극적인 자기인식과 낭만적 열망을 재현하는 동시에 해체 또는 풍자하고 있다면, 사실주의적 재현과 그런 재현에 대한 해체적 풍자가 동시에 작동하는 마샤두의 소설세계에서 슈바르스가 읽어낸 ‘주변성의 돌파’에 비견할 창조적인 무엇인가가 『삼대』의 내용과 형식에서 이룩되지는 않았다는 판단이다. 『삼대』의 ‘한계’에 대해서는 기존 평문이 여러 각도로 다뤘지만 마샤두와 그에 관한 슈바르스의 논의에 비추어 『삼대』를 읽을 때 한결 분명해지는 것은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싶다.

어찌되었든 『사후 회고록』은 자국과 서구의 축적된 문학유산을 최대한 활용한 작가의 재능을 떠나서도 1822년에 브라질이 독립되고 무려 60여년이 지난 이후에나 씌어진 소설이기도 하다. 식민주의가 만들어낸 온갖 노예근성을 마음껏 조롱할 만큼의 여유가 주어진 상황에서 태어난 작품인 것이다. 그렇다고 『삼대』를 ‘장르적 식민화’의 결과라거나 서구 장편소설의 ‘저급한 복제품’ 정도로 취급할 수는 없다. 그러면 『삼대』 서사의 행로를 좀더 세심하게 짚어보자.

많은 평자들이 분석했다시피 조씨 가문의 운명을 가름할 그 행로는 ‘사당(祠堂)과 열쇠’라는 조부의 엄명에 의해 규정된다. 조덕기는 전자가 고루한 복고주의로의 회귀를 뜻하고 후자가 금고지기로서의 무의미한 삶을 가리키는 한 그에 순응할 생각이 없다. 그는 상속자로서 일단 조부의 유지(遺志)를 거스르지는 않되, 축재와 축첩, 낭비와 위선으로 얼룩진 선대와는 다른 길을 (적어도 의식차원에서는) 지향한다. 조부의 퇴장으로 사당은 이름만 남게 되고 ‘열쇠’가 사실상 서사의 진행을 좌우하게 된다. 조덕기의 행로가 조씨 일가의 재산다툼과 김병화를 비롯한 ‘주의자들’의 지하투쟁이 얽히고설킨 지리멸렬한 구도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덕기, 나아가 김병화의 분투에 공감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염상섭과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 예컨대 “조선어휘의 일대 語海”라는21 홍명희(洪命熹, 1888~1968)의 『임꺽정』을 읽은 실감을 떠올리기도 했다. 구비전설에서부터 무협, 야담, 판소리, 고소설, 야사와 정사 등 온갖 종류의 서사장르들을 버무려 역사소설 특유의 신바람을 빚어낸 『임꺽정』의 흥취에 비한다면 『삼대』의 재미란 개화기 풍물의 빛바랜 사진이 주는 애틋한 느낌에 가깝지 않을지. 내친 김에 한두마디 더 한다면, 30년대의 어느 작가 못지않게 구여성이 겪는 핍박과 애환을 구석구석 살피고 신여성의 뒤틀린 애욕도 날카롭게 포착한 염상섭이지만 그런 여성의 실제에 관한 한 그도 채만식(蔡萬植, 1902~50)이 『탁류』에서 그려낸, 식민지판 테스(Tess)의 운명에 비견할 초봉의 결단(〓살인) 같은 사건을 상상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 살인에 이르기까지의 극적 집중성에 주목한다면 조덕기와 김병화의 엇가는 세계관에 대한 일종의 분열적 승인으로 인해 『삼대』의 서사가 제자리를 맴도는 인상을 주는 것과 달리 『탁류』에서는-“소박한 (타고난) 휴머니즘밖에 없”기에 ‘절망적인 자기인식’에 도달하기도 하는-의학도 남승재로 서사의 흐름과 주제가 통합된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두 작품에는 없는 『삼대』 고유의 미덕도 맞세우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삼대』의 재미를 개화기 풍물의 사진을 보는 애틋한 느낌으로 표현했지만, 조의관으로 표방되는 봉건주의의 양면성을 염상섭만큼 살뜰하게 헤아린 작가가 30년대에 과연 누가 있을까 자문하게 된다.22 『탁류』의 서사가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통합되어 있다면 그것은 일제의 존재를 『삼대』와 달리 일단 작품의 ‘바깥’에 놓고 그런 존재로 인해 직간접으로 빚어지는 식민근성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임꺽정』이나 『탁류』의 실감을 대조하여 거론한 것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삼대』 서사의 실질적인 동력인 조덕기와 김병화의 행보가 봉착하는 난관을 좀더 다각도로 따져보자는 취지에서다.23 그것은 천석꾼 덕기에게는 기껏해야 가문을 건사하면서 김병화나 홍경애, 필순 등의 뒷배를 봐주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심장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고, 무일푼 병화에게는 활동가로서의 여지를 질식하리만큼 막아버린 일제의 그물망이 일상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24 20세기초 세계체제의 (반)주변부 국가에 폭력적으로 작동했던 식민주의 이데올로기가 홍명희와 채만식의 작품세계에 어떤 균열을 일으켰는가도 따져볼 바가 있겠지만, 『삼대』의 마지막 장에서 암시되는 조덕기의 ‘책임과 의무’(단행본) 및 김병화의 ‘무력투쟁’(연재본)이 작품 자체의 서사적 지평에 뿌리를 박고 자연스럽게 자라나온 결론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 문제도 감시와 검열이 무의식에 자리잡은 식민지의 일상을 떠나서는 해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조덕기와 김병화가 각기 다른 처지에서 마주한 질곡이 기본적으로 식민지근대에서 연유하는 한에서는 그런 질곡과의 정면대결이 없는 서사형식의 실험도 일정한 한계가 그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조덕기의 현실주의와 김병화의 저항의식(또는 구여성 필순의 사리분별과 신여성 홍경애의 진취성)을 하나로 통합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 식민통치하에서 염상섭이 선택한, 결국 조덕기의 의식으로 모아지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이 식민지현실의 산문적 재현에 가까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기는 이상(李箱)의 「날개」나 「지주회시」조차 식민지근대의 극복이라는 전망을 서사형식의 혁신으로 확보하는 과정에서 “박제된 천재”의 훼손된 의식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음을 상기해본다면25 상식과 교양을 갖췄으나 그런 것이 전연 통하지 않는 세계에 던져진 조덕기에게 ‘시적 비상’을 요구하는 것은 역시 무리겠다.

그렇다면 식민치하에서는 도대체 걸작이라는 ‘물건’이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아니,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에서 비롯된 민족분단이라는 역사적 난제를 아직껏 붙들고 있는 우리에게 조덕기의 그러한 운명을 좀더 적극적으로 읽어낼 여지는 없는 것인가. 오히려 균형감각을 갖춘 부르주아 덕기의 앞날과, 그와 결코 단순치 않은 우정을 유지하는 사회주의자 병화의 미래까지를 공중에 걸어놓은-말하자면 미지의 가능성으로 남겨둔-것이야말로 현실주의자 염상섭의 탁월함이요 『삼대』와 우리시대의 여전한 연관성을 말해주는 징표로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인가.

그런 여지가 작품에 분명히 있기에 필자도 이렇게 물음을 던지고 있지만 이때 유념할 바는, 그것도 인물 개개인의 면모에 대한 평가보다는26 『삼대』의 두 축을 이루는 현실인식, 즉 ‘점진적 실력양성론’과 ‘급진적 투쟁론’이 이룰 수 있는 접점지대의 성격을 식민지시대의 실상-채만식이 ‘민족의 죄인’이라는 이름으로 증언한 바로 그 현실의 착잡함27-까지 감안하면서 파악할 때 가능하다고 본다. 서사의 형식실험만으로 그런 접점지대를 창조하는 것이 지난했던 식민지근대의 난경을 동시에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해보자는 것이다.

그럴 때, 덕기를 수구와 급진 어느 쪽으로도 투항시키지 않는 한편 민족해방의 꿈을 병화로 하여금 끈질기게 이어가게 한 『삼대』의 서사전략도 그같은 난경에 대한 나름의 대응임을 평가할 수 있는 여지가 좀더 분명해진다. 동일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삼대』의 서사 전개에서 병화 없는 덕기나 덕기 없는 병화는 상상하기 어렵다. 예컨대 ‘편지’와 ‘답장’ 장에서 두 인물이 주고받는 서신은 식민지현실의 극복에 관한 투쟁 및 포용과 감화라는 두가지 ‘처방’을 담는바, 그중 어느 하나가 소거된 처방이라면 진정한 대안에 미달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가로서의 염상섭이 프로문학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소상히 밝혀져 있을 뿐 아니라28 실제로 그 자신의 정치적 선택도 점진적 실력양성론으로 기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급진적 투쟁론 자체를 배격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두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서사의 분열이 끝내 지양되지 못했다는 실감이 남는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삼대』만으로 국한할 수 없다. 가령 후속편 『무화과』까지를 넣는다면 그런 실감을 곱씹어보면서 염상섭의 문학이 그린 ‘불온한’ 궤적에 대한 적극적인 읽기도 가능하다. 비록 지리멸렬한 결말이 다시 반복될지언정 주제의 차원에서도 철공장의 노동자로서 무산자의식이 살아있으면서 덕기와 병화 모두와 거리를 두는, 새로운 삶의 비전을 ‘우리’라는 복수 1인칭으로써 개진하는 완식 같은 인물이 후반부의 사실상의 주역으로 등장하지 않는가.29 식민지현실에의 적응의 안간힘이 암중모색일수록 이를 극복의 비전으로 전화(轉化)해야 할 독자의 의무가 결코 당위적인 것만은 아님이 거기서도 확인된다. 실제로 30년대에 작품으로서의 그런 고투가 있었기에 식민지시대의 종식과 함께 열린 해방공간에서 새로운 통일국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은 『효풍』(曉風, 1948) 같은 장편이 나왔던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염상섭 문학의 그러한 진화는 식민주의에 대한 창의적 대응이자 서구 사실주의 소설의 성공적인 정착사례로 평가 못할 이유가 없다. 20년대의 고백체와 30년대의 3인칭의 발견이라는 염상섭 소설형식의 진화가 기본적으로 식민성 해부의 미학적 과정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그런 진화가 해방 이후에 닥친 민족현실의 위기를 장편소설이라는 형식으로써 재차 타개하는 노력으로 이어졌으니, 『삼대』의 현재성도 일단 그런 대응의 맥락에서 검토해야 할 과제가 된다.

 

 

4. 한국 근대소설 연구와 연관된 몇가지 논점

 

그렇다면 “한국 근대소설에 대한 연구를 가로막는 장애물 가운데 하나는 서양 근대소설의 개념을 먼저 익히고, 그 개념에 맞는 작품을 한국 근대문학 자료에서 찾는 방식에 있다”는 일침도 귓등으로 들어서는 안될 것이다.30 물론 서구의 소설(개념)이 일제를 경유하여 개화기 조선에 도착한 결과 기존 서사양식에 형질변화가 일어나 서양식 장편소설, 즉 ‘노블형 소설’이 발생했다는 주장 자체는 개별 사례연구를 포함해 정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국의 근대문학 연구에 관한 한 “식민지의 역사와 경험이 오늘의 나를 이루었다는 철저한 자기 분석과 비판 없이는 어떠한 ‘과거청산’도 불가능하다는 생각”31 역시 연구자의 양식(良識)에 속한다. 요는, 1880년대 후반에 토오꾜오대학을 비롯한 근대적 교육기관에 유럽어문학부가 설치되고 식민지조선의 청년들이 거기에 가서 배워왔다는-이광수가 「문학이란 何오」(1916)에서 개진했던-바로 그 ‘분가꾸’(文學)라는 ‘신개념’을 제대로 점검하지 않고서는 한국문학 연구의 낡은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도 설득력을 얻기 어렵겠다는 것이다.

쯔보우찌 쇼오요오의 소설이론에 대해서도 일본의 문학사가들이 여러 비판을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광수가 그런 이론을 베끼다시피 하여 도입한 분가꾸의 실체는 사실 분명하다.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제동이 걸렸으나 19세기 중반에 심미적 국가주의로 흡수되어 서구 제국주의의 문화적 확산에 동원된 순문학과 크게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32 소설이나 희곡을 천시하던 유교주의 인습에 대한 정당한 반발이 눈에 띌 뿐이지 ‘문학’을 좁은 의미의 문예(주의)로 축소해버린 것이 「문학이란 何오」 아니던가.33 1910년대 시점에서 그런 문학론에 바탕을 두고 순한글체 장편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공에 대해서는 정당한 평가가 필요하지만, 특정시기 서구 문학개념의 기계적 답습과 조선조 세태소설의 도덕주의를 고스란히 내장한-그런 맥락에서 일제 식민주의에 부역하기 이전에 이미 그 ‘문학적’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난-작가의 문제작이 『무정』(1917)이기도 하다. 한국의 국문학자들이 그 점까지를 자상히 분별하지 않는다면 “근대를 식민 기원(紀元)의 시간으로 규정하고 식민주의를 특권화”한다는(김흥규 「근대문학」 323면) 지적을 받아도 크게 할 말은 없을 듯하다.

따라서 제국의 문학개념이 식민지에 도착해서 일으킨 결코 단순치 않은 변화를 성찰하는 데서도 핵심은, 식민주의의 특권화에 대한 비판보다는 서구근대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서사양식의 형질변화가 과연 식민지근대의 극복의지를 다른 무엇이 아닌 작품으로 구현하는 차원에 이르렀는가이다. 아무리 식민지근대가 흑백논리의 자명성이 통할 수 없는 회색의 시대였다 하더라도 문학비평에서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는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서구문학(개념)의 ‘도착’과 그로 인해 발생한 전통서사의 변화에 관한 논의가 서구의 근대(주의)에 대한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우리의 전통서사를 주변부의 것, 낡은 것으로 치부한다면 당연히 제동을 걸어야겠지만, 여기서도 논점은 그런 제동 자체보다는 1930년대의 어떤 소설적 성취가 우리시대에서 왜 더 중요하며 어떤 현재적 연관성을 갖는가에 대한 비평의 실행이다.

국내 독자에게는 생소한 비평가인 슈바르스의 소설론을 소개하고 『삼대』를 읽어본 취지도 대략 그런 것이다. 서구문학의 창조적 유산은 물론이고 한반도와 유사한 식민통치를 겪은 지역에서 발현된 문학의 창조성을 정당하게 평가하면서 이를 한국문학이 이룩한 것과 견주고 국수주의와 사대주의를 넘어서는 참다운 보편의 지평을 개척하는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환기하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시대 민족공동체의 명운에 대한 사실적 알레고리를 겸하는 가족사소설로서의 『삼대』를 2010년 현재의 시점에서 읽는 의의를 덧붙이고 싶다.

1930년대 소설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낸, 한 개별 가족의 부침이 당대의 민족현실과 조응하는 가족사소설은 우리 근대문학의 중요한 자산이다. 일제식민통치를 거쳐 민족이 분단된 현실 자체가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에도 파괴적으로 작용했다면, 그렇게 파괴된 가족사를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재구성해보려는 작품이 계속 나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혜경(李惠敬)의 『길 위의 집』(1995)이나 신경숙(申京淑)의 『엄마를 부탁해』(2008), 더 최근의 예로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2010) 등이 말해주는 것처럼 ‘가족’이 여전히 우리 작가들에게 상상력의 핵심적인 영토로 남아 있긴 하지만 장르로서의 가족사소설은 사실상 멸종 상태라는 판정을 내려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로서의 가족소설이 우리 당대에 씌어질 수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필자는 예컨대 『엄마를 부탁해』를 두고 “개인이라는 이름이 모든 집합적 가치와 대등해지고 심지어 그보다 우월해진 우리시대의 개인주의적 정서를 거스르”는 작품으로 규정한 바 있는데, 작가는 한 여자의 일생을 조명함으로써 여성들에게 특히 억압적이었던 20세기 한국근대사의 어두운 일면까지 포착하기도 했다. 결말을 비롯한 몇몇 문제는 남지만 그런 거스름의 과정에서 “한 형식이 또다른 자기형식을 찾아가는” 서술의 다중시각을 인상적으로 선보였다는 점에서34 『삼대』의 사실주의적 재현과는 다른 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여지마저 있다.

그렇다고 『삼대』의 현재성이 퇴색한 것은 물론 아니다. 『삼대』를 읽는 시간은 역사의 차원이 거의 희석되어 가족성원들과의 관계망으로 흡수되는 일부 가족소설의 협소해진 지평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도 작품의 의의가 새로이 확인되는 바 있다. 그 의의는 철저하게 현재적인 성격의 것이다. 이를테면 타율적으로 해방을 맞은 한반도 식민지근대의 업이 분단체제라는 ‘괴물’을 만들어냈고 그런 괴물이 이젠 우리의 마음에까지 똬리를 틀고 있기에 『삼대』의 서사를 분열적으로 지탱하는 두 현실인식을 하나의 상보적(相補的) 관계로 종합할 ‘방도’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처럼 남한과 북한의 민중 모두에게 귀속되는 문학유산으로서 식민지현실에 대한 뜻깊은 증언을 담은 『삼대』, 나아가 1930년대의 장편소설을 우리 자신의 시대로 이월시키는 읽기는 한반도와 동아시아 차원으로 시야를 넓히면서 한국소설의 새로운 상상력과 지적 모색을 북돋는 일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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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an Watt, The Rise of the Novel: Studies in Defoe, Richardson and Fieldin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7, 국역본 『소설의 발생』, 강유나·고경하 옮김, 강 2009.
  2. 영미 학계에서도 이런 가설의 문제점을 반박한 저서는 이미 여럿 나와 있는 것으로 안다. 그중 Margaret Anne Doody, The True Story of the Novel, Rutgers UP 1997, 특히 11장과 12장 참조.
  3. 김흥규는 그 패러다임을 “‘민족이라는 인식단위에 집착한 연구, 근대를 향한 단선적 진보사관, 그리고 이들을 희망적으로 결합시킨 내재적 발전론의 구도’”(300면)로 정리했다. 이에 대해서는 4절에서 다시 거론하겠다.
  4. 슈바르스의 평문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불과 2년 전이다(「주변성의 돌파: 마샤두와 19세기 브라질 문학의 성취」, 황정아 옮김,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원제는 “A Brazilian Breakthrough,” New Left Review 2005년 11-12월호).
  5. 이에 대해서는 특히 『흔들리는 언어들: 언어의 근대와 국민국가』(성균관대출판부 2008)에 실린 임형택의 「소설에서 근대어문의 실현 경로」 외 몇몇 논문 참조.
  6. 프랑꼬 모레띠에 따르면 1740~1900년에 이르는 기간에 영국소설에는 무려 44개의 소장르가 존재했다고 한다. 그는 이들 장르의 부침이 “여섯 차례의 주요한 창조성의 분출”에 따라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 제시하는데, 아무튼 ‘노블’(Novel)의 본고장에서도 연속적 진화는 하나의 관념일 뿐임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Franco Moretti, Graphs, Maps, Trees: Abstract Models For a Literary Theory, Verso 2005, 18면.
  7. Roberto Schwarz, “Competing Readings in World Literature,” New Left Review 2007년 11-12월호.
  8. 같은 글 106면, 번역은 인용자. 이하 같음.
  9. 졸고 「세계문학의 개념들: 한반도적 시각의 확보를 위하여」, 『영미문학연구』 2009년 하반기호 참조.
  10. Roberto Schwarz, A Master on the Periphery of Capitalism: Machado De Assis, trans. John Gledson, Duke UP 2001 참조.
  11. 동시대 한국의 민족문학론과도 강한 친화성이 있는 슈바르스의 1970~80년대 비평에 대해서는 Roberto Schwarz, Misplaced Ideas: Essays on Brazilian Culture, Verso 1992 참조.
  12. 이에 대해서는 Francisco de Oliveira, “The Duckbilled Platypus”; Roberto Schwarz, “Preface With Question,” New Left Review 2003년 11-12월호 참조. ‘오리너구리’는 반수중 포유류지만 난생(卵生)이고 독침이 있으며 오리주둥이에 비버의 꼬리, 수달의 발이 조합된 기괴한 모습 때문에 동물학자 및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된 동물이다. 올리베이라는 전근대와 근대, 저개발과 개발, 고도의 금융씨스템과 야만적 약탈자본주의 등의 사회적 특색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브라질사회의 특성을 이 동물에 빗대어 분석했다.
  13. 슈바르스의 그러한 기획이 일국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근대의 적응과 극복을 동시에 지향하는 이중과제론과 통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논평을 보라.“올리베이라의 사유는 브라질적 초강대국이라는 꿈이나 이웃나라보다 우월하고자 하는 바람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럼에도 그의 예리한 분석이 그려내는 그림은 승화된 형태로이긴 해도 개발주의의 경쟁적 측면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어떻게 그렇지 않겠는가?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하는 세계체제에서 더 나은 자리, 덜 손상되고 승리자들에게 더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을 불리하게 만들지 않고서 어떻게 자신이 유리한 입지를 차지할 수 있겠는가? 패배자가 없는 경쟁은 불가능하다는 사실-또는 그와 똑같이 불가능한 ‘정상(頂上)에서부터의 평등화’(정확히 어디에서부터 정상이라는 건가?)-에 대한 성찰은 그런 딜레마를 만들어내는 질서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 여기서 변증법적 사유가 국가를 상대적인 지평 정도로 간주하는 새로운 종류의 정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국가의 영역 내에서 정치적 의지를 불러일으키고도 정치적 의지의 마비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Roberto Schwarz, “Preface With Question,” 38~39면. 근대의 적응·극복론에 관해서는 이남주 엮음 『이중과제론』, 창비 2009 참조.
  14. Roberto Schwarz, A Master on the Periphery of Capitalism, 161면.
  15. 텍스트는 신문 연재본(조선일보 1931.1.1~9.17) 『삼대』(실천문학사 2000)를 기본으로 하되 창비판 『삼대』(2007)를 참조했다.
  16. 『삼대』를 가족사소설로 보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주장하는 논자도 없지 않다. 김경수(金慶洙)는 『염상섭 장편소설 연구』(일조각 1999)의 98면 각주 11에서 “『삼대』의 이야기시간은 고작 1년에 불과하며, 『무화과』까지 합친다 해도 채 5년이 넘지 않”고 “횡보의 관심사는 각 세대가 어떤 다른 역사적 삶을 살았는가 하는 데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점(時點)에서의 각 세대의 적응방식 자체에 놓여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염상섭 문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김경수의 학문적 공헌과는 별개로 이야기의 시간대를 기준으로 삼아 『삼대』를 가족사소설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17. 이에 관한 연구는 주로 우정권 『한국 근대 고백소설의 형성과 서사양식』, 소명출판 2004 참조. 저자는 1910~20년대의 고백체 소설이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지적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영향도 하나의 요인에 지나지 않음을 덧붙이고 있다.
  18. Roberto Schwarz, “The Importing of the Novel to Brazil and Its Contradictions in the Work of Alencar,” Misplaced Ideas: Essays on Brazilian Culture, 41~77면 참조. 이 글의 개략적인 논지는 「주변성의 돌파」 121~25면에 요약되어 있다.
  19. Roberto Schwarz, “The Importing of the Novel to Brazil and Its Contradictions in the Work of Alencar,” 65면.
  20. The Posthumous Memoirs of Brás Cubas (1880); Quincas Borba (1891); Dom Casmurro (1899). 모두 영역본으로 읽을 수 있다.
  21. 임형택·강영주 엮음 『林巨正의 재조명』, 사계절 1988, 190면. 이효석의 촌평.
  22. ‘입원’ 장에서 재산분배 내력을 담은 조의관의 유서와 유언을 읽고서 젖어드는 조덕기의 상념을 두고 하는 말이다.
  23. 일찍이 김윤식은 “‘돈과 성격’ 사이에서 방향성을 잃고 있는 것이 『삼대』의 최대 함정”으로 규정한 바 있다. 금력을 성격이 우유부단한 덕기의 힘으로 보고 그런 힘을 총독부의 권력과 연관지으면서 “그런 주제에, 심파다이즈를 한다는 것〔김병화의 ‘주의’에 동조한다는 것-인용자〕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다른 표현에 따르자면 “아직 책상물림 상태에 있는 손주 세대인 덕기·병화”가 감당할 수 없는 고뇌를 안겨준 것이 『삼대』의 최대 약점이 된다. 김윤식 『염상섭 연구』, 서울대출판부 1986, 572~73면. 그러나 바로 그 감당할 수 없는 고뇌조차 식민지시대 현실의 정직한 반영이라면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4. 어쩌면 주인공들의 역할을 그런 식으로 제한하면서 염상섭이 견지한, 일제의 검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주의’가 더 근본적인 원인인지도 모른다.
  25. 이에 대해서는 졸고 「이상과 식민지근대」,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 창비 2007 참조.
  26. 가령 이주형의 경우 여러 중요한 통찰과 온당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작품 결말에서 “덕기가 무엇을 얻을 것인지 아무런 암시도, 전망도 나타나지 않는다”면서 이를 염상섭의 실력양성론 및 작품 자체의 한계로 연결하는데, 주인공 개인에 대한 평가를 작품 전체에 적용한 인상이다. 이주형 『한국 현대소설과 민족현실의 인식』, 역락 2007, 3장 참조.
  27. 채만식 「민족의 죄인」, 『채만식 중·단편 대표소설 선집』, 방민호 엮음, 다빈치 2000.
  28. 염상섭과 프로문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특히 김경수 『염상섭과 현대소설의 형성』, 일조각 2008, 5장 참조.
  29. 『무화과』에서 이원영(『삼대』의 조덕기)의 한계가 조정애(『삼대』의 필순)에게 보내는 완식의 편지를 통해 좀더 분명하게 지적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나는 재산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나 자연히 그 아저씨(이원영-인용자)와 가까운 점이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이와도 또 다른 것은 그이는 몰락해가는 중산계급이요, 무력한 인텔리가 아닙니까. (…) 통틀어 그이네들은 두가지 방면을 앞서가는 이들이나, 우리는 그 뒤에서 가야 할 새 사람이 아닌가요? 그리고 우리의 길은 그들이 걷지 않은 새 길이 아닌가-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염상섭 『무화과』, 동아출판사 1995, 819면.
  30. 김영민 『한국 근대소설의 형성 과정』, 소명출판 2005, 53면. 그러나 이어지는 “서양 근대소설과 한국 근대문학 사이의 우열 관계를 비교 판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그의 주장은 진정한 보편성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31. 김철 『식민지를 안고서』, 역락 2009, 저자의 머리말.
  32. 영국문학의 경우 문학(개념)이 제국주의에 복무하게 되는 역사적 궤적을 낭만주의 문학을 통해 추적한 논의로는 유명숙 『역사로서의 영문학: 탈문학을 넘어서』, 창비 2009 참조.
  33. 서양의 ‘선진’ 소설(개념)을 소개하면서도 자신의 그러한 작업이 일본 ‘모노가따리’ 전통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했던 쯔보우찌 쇼오요오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조차 이광수가 편협하게 ‘번역’했다는 점에서 그간 한국 평단에서 논의된 「문학이란 何오」의 문학적 의의도 과대평가된 느낌이다. 사실 「문학이란 何오」에 대한 동시대의 적실한 비판으로는 만해의 「文藝 小言」만큼 정곡을 찌른 글도 없을 것이다. “근래에 문학을 말하는 사람으로는 일반적으로 문학, 즉 문예로 보고, 심하면 문학 즉 예술로 보아서 문학과 문예를 가리지 아니하고 동일시하여, 문학이라면 시·희곡·소설 등의 예술적 문예 작품 이외에는 문학이 아니라고까지 하게 되었는데, 조선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한용운 작품선집』, 서준섭 편역, 강원대출판부 2001, 242면.
  34. 졸고 「‘엄마’의 시대적 진실을 찾아서」, 『창작과비평』 2009년 여름호 참조. 서술의 다중시각에 관한 논의는 272~7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