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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유용주
1960년 전북 장수 출생. 199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가장 가벼운 짐』『크나큰 침묵』 『은근살짝』 등이 있음. yyj510@hanmail.net
제삿날
환갑을 바라보는 중늙은이 옌네와 지천명을 앞둔 반백의 사내가 정답게 마주앉아 전을 부치고 꼬치를 꿰고 나물을 무치고 탕을 끓인다
밖은 황사 뿌옇고 산벚꽃은 바람에 흩날리고
글쎄 명철이 양반 방앗간에서 그 잘난 쌀방아를 찧는데 우리는 양이 너무 적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받아서 뛰어오면 또 어느새 비어 있고…, 발동기는 기차화통처럼 돌아가지요, 아부지는 빨리 안 받아온다고 퉁방울눈 부라리지요…, 보다 못한 명철이 양반이 아, 유세완, 어린 딸이 무슨 죄가 있다고……
조기는 찌고 고기는 양념장에 재워두고
누나만 그랬간? 누나가 품앗이로 기석이네 밭 매러 갔을 때 안다랭이 대현이 할아버지 무덤 뒤 감자밭 일구는 데 따라간 적이 있었거든 푸나무를 베어 불을 놓고 나무뿌리를 캐어내고 고랑을 만드는데…, 그러니까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까 고작해야…, 잔돌 골라내는 정도…, 한 두어 고랑 만들고 아부지가 쉬어, 참 아부지처럼 맛나게 담배 잡숫는 분이 없었지 병아리 새끼처럼 아부지 옆에 슬그머니 앉으면 불같이 일어나서 담뱃불을 내던지는 거여 어린 것이…, 싸가지 없이, 어른 쉬면 꼭 따라 쉰다고…, 어찌나 매몰차던지…… 지금 생각하면 자기 스스로에게 화를 낸 것 같지만……
아이와 아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고 멀리 수원에서 동생 내외와 조카가 내려오고 불을 밝힌다 술 그득 따라 올린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여, 살아계실 때 따뜻한 밥이라도…, 그예 누님은 한쪽 눈두덩을 훔치고……
그해 쌀 몇가마니에 나를 장계 북동 어떤 남자한테 팔았는디 그 남자 나이를 속인 거여 알고 보니 서른일곱, 스무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 겨 밤마다 부엌칼을 이불 속에 숨겨두고 잤제 벗은 남자 몸이 얼마나 징그럽던지 밤새 오들오들 떨면서 잠도 못 자고 도망갈 궁리만 했당게 반찬 산다고 속이고 장판 밑에다 몰래 돈을 모은 겨 첫눈이 내릴려고 그랬나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대전행 막차를 무조건 타버렸지 옷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신발 벗어지는 줄 모르고 뛴 생각을 하면… 흐이구, 벌써 사십년 세월이 흘러가버렸구먼 어이, 동상, 음복혀
부끄러움에 대하여
실핏줄 하나만 잘못 건드려도 대폭발이 일어나는 저 활화산 같았던 80년대 후반, 思寅선생과 나는 하룻밤을 같이 보낸 적 있었다 작은 공부방 비슷한 인사동 낡은 미술관 2층 잡지사 사무실 창문 너머에는 가을바람 소슬하고 이따금 취객들의 고함소리가 밤하늘에 낙엽처럼 굴러다니기도 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더듬고 더듬은 나머지 췌장 근처에서 간신히 꺼내오는 말 때문에 기다리는 사람 혈압 터지게 만드는 충청도 양반인데다 원고 펑크내기로 이미 한양땅 선비들 사이에 소문 또한 요란뻑적한 분이라 쇠고랑과 몽둥이만 없었지 하룻밤 정치범 수용하는 교도소 교도관 노릇을 한 셈이었다
80년대 시인 특집원고를 쓰는 내내 교정용 탁자에서 思寅선생은 꼿꼿했다 가끔 어색한 공기 때문에 헛기침을 하며 눈이 마주치면 내 고향 물뿌랭이〔水分里〕에서 발원하는 금강처럼 휘어진 눈꼬리로 비지긋 눈웃음 한잔 건네준다 잔이 넘치지도 않는데 나는 그저 한생애 내장 모두 끄집어내어 속죄하고 싶었고 자수하고 싶었고 무릎 꿇고 잘못을 빌고 싶은 마음으로 안절부절, 명치끝 타들어가는데 선생은 아무 일 없는 듯 가방에서 서울우유 500ml와 삼립 단팥빵을 꺼내 우리 야식이나 들고 합시다 하면서 수줍게 왼손바닥 위에 턱을 받치며 딴청을 부렸다 저 수줍은 미소 뒤에는 천만마리의 이무기가 웅크리고 있다는 것을 강산이 몇번 바뀐 뒤에야 깨달았지만, 무심하게도 거, 결혼하고 한강 근처에 집을 하나 마련했는데 아무 이유 없이 자고 나면 집값이 오르는 겁니다 이걸 어떡하나,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 생각하면 미안해서 큰 걱정입니다 단팥빵을 덥석 베어물고 목울대를 크게 흔들며 남은 우유를 달게 마시는 게 아닌가
그 하룻밤 풋사랑 인연도 모진 인연인지라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착각한 어리석은 짐승은, 『노동해방문학』 창간호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는 신촌시장까지 찾아갔다 사무실은 전쟁터였다 지금은 전설로 남아 있는 백○○, 조○○, 김○○ 씨와 함께, 편집회의와 표지, 본문, 인쇄, 출력, 교정 같은 단어가 구호처럼 쏟아지는 사무실에서 나와 막걸리를 마시면서 무작정 선생님 저, 박노해나 백무산보다 훨씬 더 밑바닥 생활을 많이 했거든요 노동문학 하면 저 같은 놈 아닙니까? 제 작품을 실어주십시오 그때 나는 보고 말았다 막 집어든 순대가 덜덜 떨리는 것을, 납작 찌그러진 머릿고기가, 뻥뻥 뚫린 염통이, 푸석푸석한 간이, 두근 반 세근 반 벌떡벌떡 일어서는 것을, 저 일생일대의 思寅선생 난감한 표정이라니! 그, 그…, 그러니까, 유선생, 일단, 작품을 하, 한번 보, 보여주시고…, 작품? 그거 보나마나입니다 박영근보다 훨씬 더 잘 쓸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술잔을 높이 든 나는 콧구멍에 힘을 주며 큰소리를 쾅쾅 쳐댔다
불이 꺼지고 물뿌랭이 같은 강물도 잔주름과 반백의 머리칼로 말라붙어 19년이나 흐른 뒤에, 19년 만에 약속을 지킨 思寅선생 시집을 읽어보니 시 쓰는 일이 목숨 지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철없이 짓까불던 20대의 혈기방장이 한없이 부끄러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빨갛게 달아오른 귓불이를 새벽 찬물로 거듭거듭 씻어낼 수밖에 없는데, 가만히, 가만히 암소 잔등 같은 크고 부드러운 손이 다가와 괜찮다, 으음, 다 괜찮다1 쓰다듬고 또 어루만져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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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상병 산문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제목에서 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