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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연호 趙燕湖
1969년 충남 천안 출생.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이 있음. aleph2100@hanmail.net
벌레를 쥐고 태어난 아이(1983~1986)
오늘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일은 우주가 검은 것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
떠난 버스는 떠나지 않은 버스보다 항상 명징하다는 것
계단에서 떨어질 뻔한 일주일 뒤
작은북의 연주가 시작되기 2초 전
나는 공중목욕탕에서 물에 뜨는 연습을 했다
태양은 나눗셈에게로 꾸준히 가까워지고 0에 더 가까워지고
일제 탁상시계를 들고 아버지가 사우디에서 오시던 길
오늘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일은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 2층에서 여자가 뛰어내렸다는 것
집고양이의 긴 수염 끝에 운좋은 예감이 생겼다는 것
한번도 떠올려보지 않은 생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
정인(情人)께서는 농담을 잘하고
그건 죽기 전의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귀가 시린 겨울은
삭제의 방식으로 광장에 얼마간 서 있어야 했다
옥상은 멈추지 않는 긴 딸꾹질을 시작하고
니르스의 이상한 여행을 읽은 친구들은 날지 않는 오리에 대한 각별한 생각
오늘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일은 탁자 아래 탈탈 털어대는 산만한 너희들의 다리를 생각하며 하늘에서 언젠가는 눈이 내릴 거라는 거
떠오르는 것을 기준으로 모든 바닥이 시작된다는 거
아버지의 낡은 탁상시계는 아직도 재깍이며 0시를 향해 떠오른다는 거
온실에서는 어린 새잎이 자기 머리에 리본을 묶고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한번은 작아지는걸요
이제 곧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손톱이 자라는 시절
부풀 때처럼, 내리는 눈이 운동화 한짝씩일 때처럼, 결빙과 증발에 대한 나의 착각처럼
나는 수형도(樹型圖)의 맨 아래쪽에 있었고
악몽은 가장 꼭대기에
변신 이야기
서로를 향하는 동안만 구름에겐 이별이 생긴다. 사랑한 후에는 작은 꺾쇠로. 차별받은 후에는 농담의 사전으로. 넌 제비를 뽑았다.
향기 많은 꽃들이 네 머리만큼 자라 벌들을 통에서 꺼내기 시작하면 주방 아줌마는 물이 가득한 욕조의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렸다. 첨벙거리며 후회 없이 바닥을 다 훑고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동물로 숲이 가득 채워지는 날. 여름은 당근의 붉은 뿌리처럼 하나씩 뽑히며 사라지고 있었다. 구석에 서서 작은 귀를 흔드는 것으로 나의 은신술은 완성된다. 여기까지는 내 몸이 기생식물이었을 때의 길. 이제부터의 길은 내가 숙주(宿主)일 때를 향해 열린 곳.
아이들은 분말의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렸다. 색종이접기를 가르쳐주었지만 그 애들은 이제야 겨우 시든 튤립을 접기 시작한다. 8자놀이 하는 아이들의 7시, 술래는 강을 건너지 못한다. 여자애는 흡혈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자기 피를 빠는 단꿈을 꾸었다.
하지만 우리는 너를 잊고 싶지 않아. 나 혼자서 바람에게 그렇게 말해 본다. 그날은 왼손잡이용 글러브처럼 오른쪽으로 날아오는 것들과 마주하던 일요일. 우월의 표시로, 연대의 표시로 너는 모자를 벗고 세계관이 없는 제비를 하나 뽑았다. 겨울의 지하에서 여름의 지상으로. 수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