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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고성만 高成萬
1963년 전북 부안 출생. 1998년 『동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올해 처음 본 나비』가 있음. kobupoet@hanmail.net
흘레
우리 마을에서는 씹할 놈 씹도 못할 놈과 같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 대신 흘레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교미처럼 점잖은 말과는 달리 하다보다는 붙다를 결합시키는 게 보통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 돌아보면 붕어는 강물을 흘려 수정하고 닭은 벼슬을 쥐어뜯으며 잠자리는 공중전을, 사람은 방구석에서 일을 치른다
열일곱 겨울, 그애와 내가 눈 내려 구죽죽 물 녹아 흐르는 강변 제방에서 행여 빨아 신은 운동화를 더럽히지 않을까 조바심치다가 발견한 개 샴쌍둥이처럼 뒤로 붙어 있는 몸과 몸 사이 막대기가 걸쳐 있었다 얼굴이 붉어져 멀리 돌아가는 그애를 따라 걷던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바람 마르는 소리 들리는 늦가을 오후
사촌누이와 나는 뒤안 장독간에 박혀서 흘레붙는 뱀을 보았다 친친 뒤엉킨 얼룩무늬를 뚫고 유난히 빨갛게 부풀어오른 부위
사랑은 그렇게 춥고 외로운 일인가
가을
1
우리는 그가 무서웠다 치안대원일 당시 빨치산 여럿 때려잡으면서 실명해버린 한쪽 눈 때문에 어디를 쳐다보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뻘건 돼지고기를 으적으적 씹으며 고개를 넘어가는 중턱에서 종주먹을 날렸다가 어떤 아이는 고막이 터지도록 얻어맞았고 어떤 아이는 오두막 헛간에 갇혔다 애초부터 없던 아내와 자식들은 종무소식 벙어리 여자를 끌고와서 아랫도리를 홀딱 벗겨놓은 뒤 달을 보고 울부짖는 짐승, 소리 내지 않는 도랑 옆 억새밭을 따라 성묘 가는데 불쑥 솟아오른 귀면에서 새어나온 목소리 “어른들 다 무고하신가”기절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가뭇가뭇 사라지고 없었다
2
지천으로 코스모스 핀 언덕 만장을 휘날리며 바다로 가는 꽃상여 왼손으로는 소방울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상여머리를 잡아쥔 채 그 많은 울음을 경영하는 바보 용완이 아재 살아서 천대받던 사람이 죽어서 호강하는 법이여 빨치산 군당위원장 아들이라고 숨죽이던 방씨가 벌떡 일어나 춤을 추고 중풍 삼년 치매 삼년 수발하던 며느리가 혼절한다 어노 어노 어화리 넘자 어화노…… 저승의 강을 거슬러 이승의 벼랑을 휘어져 넘던 그날
3
새로 짠 베에 은구슬 펼쳐놓고 종일 먹이를 기다리는 포식자의 숲에선 사타구니가 가려웠다 먼저 털이 자라기 시작했는지 꼬리 달린 씨앗을 풀풀 풀어 날리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구불구불 뻗은 억새능선을 따라가다보면 여자의 벗은 뒷등을 밟는 것같이 어지러웠다 강물에 나뭇잎배를 띄우는 손 대지를 물들이는 손 기쁨을 경작하는 손 슬픔을 위로하는 손들은 대체 어디로 가고 잘 벼린 칼날 집어드니 쓰윽 피가 배는 바람 가슴에 두개 배에 하나 거미를 붙인 채 줄에 걸려 파닥거리는 나비에게로 다가간다 잔뜩 침을 묻힌 다음 맛나게 먹어치운다
4
여자의 고추는 고치이다 그 속에 아기의 방이 있고 그 많은 씨앗을 꼭꼭 숨기고 있으므로 들여다보고 싶어 당골네 수양딸 연이를 데려다 고치 안에 눕혔다 허옇게 까뒤집은 눈 사방을 날아다니는 나방 아직 부화하지 못한 누에들은 누렇게 여물어 뒤룩뒤룩 천장 바닥 벽을 기어다녔다 자꾸 비 내리는 절기에 아직 여물도 들지 않은 나락방아를 찧다가 그만 까무라쳐버린 연이와 나는 한 천년 잠을 깨어보니 고치에 든 번데기였다 그후 자주 고추가 너무 작아 큰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치가 누에 되고 누에가 다시 고치 속으로 들어가는 동안 당골은 죽고 무너져버린 잠실 안쪽 구석에 연이의 허연 허벅지가 감기지 못한 실처럼 흐트러진 빈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