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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 연속기획 · 한국사 100년 다시 보기 ②
1960년의 마산과 1980년의 광주
분단과 지역대결하의 민주항쟁과 한국정치를 돌아보며
홍석률 洪錫律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 저서로 『통일문제와 정치사회적 갈등: 1953~1961』 『유신과 반유신』(공저) 등이 있음. srhong@sungshin.ac.kr
1. 50년 만에 거행된 김주열의 장례식
2010년은 4월혁명 50주년, 5·18 광주민주항쟁 30주년이 되는 해다. 여러 기념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명박정부하에서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것은 무언가 긴장감과 아쉬움이 감돌기도 한다.
지난 4월 11일, 4월혁명 과정에서 사망한 김주열(金朱烈)의 장례식이 50년 만에 마산에서 치러졌다. 김주열은 1960년 당시 열일곱살의 전라북도 남원 출신 청년이었다. 그는 3월에 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기 위해 이모가 살고 있던 경상남도 마산에 왔다.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날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있었고, 경찰의 발포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김주열은 이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산으로 와서 애타게 아들을 찾아다녔다. 마산시민들도 적극 호응하여 경찰과 관계당국을 압박하면서 김주열을 찾았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끔찍한 모습으로 마산 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마산의 시민들은 분개하여 다시 대대적으로 봉기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10년, 김주열이 참여했던 ‘3·15의거’는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되었다.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와 ‘4·11민주항쟁50주년기념행사준비위원회’는 4월 11일 마산의 중앙부두에서 김주열의 장례식을 ‘범국민장’으로 치렀다. 그런데 언론보도에 따르면 ‘3·15의거’ 국가기념일 지정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경상남도와 마산시는 이 행사를 전혀 지원하지 않았다. 이 지역 국회의원들도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범국민장은 시민들의 성금으로 치러졌다. 행사에는 김주열의 모교 남원 금지중학교와 그가 합격했으나 다닐 수 없었던 용마고등학교(옛 마산상고) 학생들이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행사장에는 “열사정신 계승하여 동서화합 이룩하자”는 플래카드가 붙었다. 이날 마산의 시민대표로 발언에 나선 사람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하다. 동서분열과 민족분단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동서분열’, 즉 영·호남 지역감정 문제와 4·11마산항쟁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호남사람이 죽었는데 영남사람들이 이에 항의해 목숨 걸고 싸웠으니, 동서화합의 모범적 사례가 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김주열의 장례식이 ‘동서화합’과 결부되어 기억되는 방식은 올해 30주년이 되는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기억과 그후 더 악화된 지역대결 정치구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4월혁명과 5·18항쟁의 기억이 서로 겹쳐진 측면이 있다. 이는 과거가 기억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과연 1960년의 마산시민이 지금처럼 김주열을 호남사람, 자신들을 영남사람으로 구분하고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을까?
4월혁명 무렵에는 지금과 같은 영·호남 지역대결은 거의 없었다. 전라도 출신 정치인이 경상도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김주열의 출신지 남원과 전라도는 당시 마산시민에게는 어떤 특별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거나 유달리 의식될 필요도 없는 하나의 지명(地名)에 불과했을 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마산시민들도 지금처럼 자신을 경상도사람이라 규정하는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마산시는 해방 직후에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고, 한국전쟁 후에는 이북과 이남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이 다수 정착한 도시였다. 군수기지, 피난민의 도시였기 때문에 경상도 토박이 외에 다른 지역 출신들도 많았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영·호남 지역감정 및 지역대결 정치구도가 본격화한 것은 박정희 군사정권기부터였다.
4·11마산항쟁이 동서화합과 연결되는 기억의 방식은 그후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민주항쟁과 분단극복은 어떤 연관을 맺고 있을까? 일부 사람들은 이를 민족주의의 기획이라 치부할지 모르겠다. 물론 과거에 대한 기억은 현재적 관점이 투영되고, 이를 통해 재구성된다. 그러나 기억의 형성을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전혀 관련 없이 후대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조되거나 상상된 것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다. 특히 지역감정 문제를 영·호남 대립 같은 현상적 차원이 아니라 더 본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또한 민족분단 문제도 좀더 깊이있게 성찰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지역감정 문제는 과거 독재정권기 한국의 유사 민주주의(pseudo democracy) 체제가 주조한 어떤 파행적 정치행태와 관련이 있다. 특히 이는 과거 개발독재권력이 근대화론, 성장주의 논리로 대중의 의식과 행동을 규율하며 각 지방간의 지역개발 경쟁을 조성해왔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분단문제도 단지 민족주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제약하고 왜곡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한국의 민주항쟁은 또한 이러한 문제들을 넘어서기 위한 실천의 과정이기도 했다.
이명박정부의 등장 이후 과거 독재정권기의 정치행태들이 다시 부활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맞서 촛불시위라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항쟁도 출현했다. 또한 4대강 사업에서 나타나듯 성장주의, 지역개발 논리도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남북관계는 후퇴의 정도를 넘어 최근 천안함 사건에서 나타나듯 남북의 무력충돌이 우려되는 상황으로까지 가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명박정부하에서 민주항쟁을 기념하며 지역대결 정치행태와 분단문제의 극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있는 기억과 기념의 방식일 것이다.
2. 마산의 함성, 그후 20년의 광주
김주열의 죽음으로 촉발된 4·11 제2차 마산항쟁은 4월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3·15 정·부통령 선거는 선거운동 과정부터 각종 부정이 대대적으로 자행되었기 때문에 선거 전부터 이에 대한 항의 시위가 발생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지역 고등학생 시위를 시작으로 중고등학생들의 부정선거 항의 시위가 잇따랐다. 3·15 제1차 마산항쟁 이후 학생들의 시위는 다소 소강상태였다. 3월말에 봄방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4월 11일, 항쟁은 재점화되었다. 이날 학생과 시민의 시위에서 처음으로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도 나왔다. 마산시민들은 1980년 5월의 광주시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처참한 시신을 목격하고 잔인한 국가폭력에 분노하여 일시에 일체감을 이루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위는 12일과 13일에도 이어졌다.
마산의 항쟁은 전국적으로 호응을 얻었다. 중·고등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확산되고, 대학생들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4월 19일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의 도시에서 일제히 시위가 발생했다. 이날 서울의 시위대는 경무대(현 청와대)로 향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처음부터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해 간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당시 학생들은 이대통령을 만나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전달하며, 대화하거나 항의하러 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날 경무대 바로 앞에서 학생대표들이 대통령 및 내무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시위대에 총탄이 날아왔고,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날 부산과 광주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승만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봉쇄하려 했다. 그러나 군은 시위를 거칠게 탄압하고 봉쇄하기보다는 이승만정부와 거리를 두는 중립적 태도를 보였다. 군이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대통령을 내몰고 권력을 잡을 수도 있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항쟁의 초점은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에서 유혈사태를 발생시킨 정부, 특히 최고지도자 이대통령의 책임을 묻고 퇴진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정권퇴진을 명확히 목표로 내건 시위가 처음 시작된 곳도 마산이었다. 4월 24일 마산의 할아버지들은 “책임지고 물러가라 가라치울 때는 왓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그 다음날 25일에 마산의 할머니들이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대통령 물러가라”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나왔다. 이대통령의 실명까지 확실히 언급하며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같은날 서울에서는 대학교수단이 역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시국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에 나섰다. 교수단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에 나갔다. 학생과 시민들이 일제히 호응하면서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일반적으로 4월혁명사 서술에서 교수단 시위가 이승만 퇴진을 선도적으로 요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마산의 할머니 시위가 시간적으로도 약간 앞서고, 플래카드에 직접 이대통령의 실명까지 거론하는 등 훨씬 명확하게 이승만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나 기존의 역사서술, 심지어 마산지역에서 나온 책에서조차 할머니 시위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이는 역사가 얼마나 지식인 중심, 서울 중심, 남성 중심으로 서술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4월 25일 교수단 시위는 결국 철야시위로까지 이어졌고, 4월 26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은 사퇴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최근 공개된 미국 정부문서에서 드러나듯 미국의 개입과 압력이 있었다. 또한 계엄령으로 동원된 한국군이 이대통령을 적극 옹호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 것도 큰 영향을 주었다.
4월혁명은 기본적으로 자연발생적인 민주항쟁이었다. 민주항쟁을 실질적인 정치적 변화로 인도할 수 있는 지도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기존 보수정치권의 기득권 수호 논리가 득세하면서 자유당 의원들이 그대로 남은 기존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고, 새로운 총선을 거쳐 정부를 구성하는 방향으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혁명 이후의 정치는 여전히 극우반공 성향의 보수정치인이 주도하는 협소한 틀을 유지했다. 새롭게 등장한 장면(張勉) 민주당정부는 이와같이 협소한 정치적 틀 안에서 4월혁명 직후 터져나온 다양한 사회갈등을 흡수하기 어려웠다. 사회는 요동쳤고, 이를 지켜보는 미국과 군부도 동요했다. 마침내 장면정부가 수립된 지 1년도 안되어 5·16쿠데타가 발생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이 등장했다.
박정희정권은 그후 무려 18년 동안 존속했고, 그동안 급속한 경제성장이 뒤따랐다. 1972년 박대통령은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억압적인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대통령직선제는 폐지되었고, 대통령의 긴급명령(긴급조치)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거의 무제한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등장했다. 유신체제는 1979년에 이미 임계점에 이르렀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대규모 민주항쟁이 발생했고 이후 마산으로 파급되었다. 박정희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를 막았다. 이러한 정국의 동요 속에서 10월 26일 박대통령은 측근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당했다.
사람들은 박대통령이 죽었으니 당연히 유신헌법이 철폐되고 새로운 민주정부가 수립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군사정권 18년 동안 정치화된 군인집단을 대변했던 전두환과 하나회 신군부세력은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를 통해 군을 장악했다. 1980년 4월에 접어들면서 전두환과 신군부의 권력장악 기도는 가시화되었다. 이에 5월부터 대학생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계엄령 철폐와 조속한 민주정부로의 이행을 촉구했다. 한편 정치인들도 5월 20일 국회를 열어 계엄령 철폐 결의안을 통과시키려 했다. 5월 17일 신군부세력은 미리 반격에 나섰다. 5월 18일 0시를 기해 오히려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날, 다른 곳과 달리 광주에는 저항이 일어났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전남대 학생들은 교문 앞에 모여들었고, 학교를 점령한 공수부대와 충돌했다. 학생들은 시내로 나아가 시위를 벌였다. 신군부세력은 이른바 초기단계부터 저항을 철저히 제압한다는 방침에 따라 공수부대를 추가투입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곤봉과 대검을 사용하며 엄청나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당시 광주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상상을 초월하는 공수부대의 폭력적 진압을 보며 이를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 생각했다. 즉 신군부세력이 전라도 광주를 지목해 대대적인 폭력을 동원해 사태를 악화시키고, 이를 통해 집권의 명분을 잡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밝혀진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사전계획설은 근거가 불확실하다. 당시 신군부는 서울에서 저항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여기에 집중적으로 병력을 배치했다. 광주에는 그밖의 도시에 비해 좀더 많은 병력이 배치되었을 따름이다.1 그러나 광주에서 항쟁이 발생했고, 이것이 다른 도시와 광주의 상황을 가른 가장 중요한 차이였다.
4월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광주에서 처음 학생들이 시위를 벌일 때부터 시민들이 폭넓게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을 목격한 뒤론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항쟁 첫날인 5월 18일부터 연일 시민과 공수부대가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공수부대원들이 추가투입되었으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특히 노동자와 빈민층의 치열한 저항이 두드러졌다. 항쟁 나흘째인 5월 21일 공수부대는 전남도청에 고립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공수부대원들은 일제히 시민들에게 사격을 가했고,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계엄군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고 시민군을 구성하여 싸워서 광주를 해방시켰다.
5·18항쟁도 4월혁명과 마찬가지로 자연발생적인 항쟁이었다. 과거 이 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인사들은 대부분 사전에 검거되었거나 항쟁에 참여했다고 해도 어떤 지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계엄군이 물러난 뒤 ‘시민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으나 이들의 지도력과 대표성은 약했다. 광주지역에 나름대로 뿌리를 내리며 활동해오던 ‘송백회’ ‘극단 광대’ ‘들불야학’그룹 등이 나름대로 역할을 하며 항쟁에 방향성을 부여하려 했다. 이들은 23일부터 연일 대중집회를 조직하며 시민의 의사를 결집했고, 윤상원(尹祥源)과 들불야학팀은 「투사회보」를 발행하며 선전활동을 했다. 이들은 기존 수습대책위의 투항주의적 태도를 비판했고, 5월 25일 밤에는 새로운 강경파 지도부로 ‘민주시민투쟁위원회’를 꾸렸다. 그러나 항쟁은 확산되지 못하고 고립되었다. 5월 27일 계엄군이 다시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3. 지역감정: 유사 민주주의 체제의 복병
1960년 마산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호응을 받아 이승만정권을 붕괴시켰으나, 1980년 광주의 항쟁은 그렇지 못하고 고립되었다. 그 원인을 놓고 영·호남 지역감정 문제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현상에만 비춰본 원인 규명이라 할 수 있다. 영남지역만 아무런 호응이 없었다면 그렇다고 할 것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항쟁에 호응한 곳은 호남지역에서도 전라남도 서남부지역뿐이다. 그것도 대부분 5월 21일 시민군이 무기를 획득하고 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이들 지역에 도착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2 전라북도에서도 호응하는 항쟁이 일어나지 못했다.
광주의 항쟁이 봉쇄된 이유는 우선 한국군, 미국, 언론의 태도가 4월혁명 때와는 현저히 달랐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4월혁명기 군은 시민들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의 한국군은 과거 18년 동안 군사정권하에서 혜택을 누리고 성장한 정치군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미국의 경우 4월혁명 때는 시민들의 저항을 “정당한 분노의 표출”이라 이야기하며 이승만정부를 압박했다. 반면 5·18항쟁 전후의 당시 카터 행정부는 인권외교를 표방했음에도 12·12쿠데타를 묵인했으며, 군을 동원해 광주의 저항을 진압하는 것을 방조하고 승인했다. 4월혁명 때 언론은 민주항쟁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는 항쟁의 확산에 기여했다. 하지만 이후 유신체제하에서 비판적 언론인들이 대거 해직된 결과 언론계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5·18항쟁 초기의 언론은 계엄당국의 통제 때문에 항쟁 발생 사실을 전혀 알리지 못했다. 언론매체들은 5월 21일 광주에서 계엄군이 물러간 이후부터 보도를 시작했는데, 항쟁의 목적과 양상을 심각하게 왜곡했다. 이러한 상황의 차이가 1960년 마산과 1980년 광주의 운명을 갈랐던 중요한 원인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지역감정이 원인이 되어 5·18항쟁이 발생하고 봉쇄되었다기보다는, 광주에서만 저항이 발생한 채 결국 고립되었고, 항쟁의 취지와 목적이 왜곡 전달되어 이후 지역감정이 더욱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정치의 고질병을 형성하고 있는 지역대결 정치구도 문제를 영·호남 지역감정이라는 현상적 차원이 아니라 한국의 정치체제가 파생시킨 어떤 파행적인 정치행태의 결과물로 본다면 이는 광주가 고립된 원인과 깊은 연관을 가질 수 있다. 독재정권기 한국의 정치체제는 민주주의 제도와 절차가 형식적으로는 존재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유사 민주주의 체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체제하에서는 정치집단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기존 정치제도하에서 제대로 표출되지 못하고 각 정치집단은 공정히 경쟁하지 못한다. 이는 결국 각 정치·사회집단이 뚜렷한 자기의 정치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샹딸 무페(Chantal Mouffe)가 지적했듯이 정치적 정체성과 경계선이 모호해질수록 정치는 정치이념이 아니라 종교, 민족, 인종 같은 다른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분열적 갈등의 길로 접어드는 양상을 보인다.3 이는 성숙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나타날 수 있지만 억압적 체제하의 나라에서 더욱 흔하게 드러나는 현상일 것이다. 특히 분단상황에서 엄청난 이념적 제약이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지역대결 정치구도는 기본적으로 정치가 각 계층·계급 사이의 이해관계 및 이념적 갈등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지방간 이해관계와 갈등을 중심으로 표출되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이는 대중의 탈정치화, 파편화, 원자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사람들이 정당, 사회단체, 이익단체 등으로 집결해 자신의 정치적 요구와 이해관계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고립되고 원자화된 채 살아가는 것이 문제다.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은 고립되고 원자화된 개인들을 아무런 매개체도 없이 유기체 국가의 부속물로 편입하고 동원하는 지배전략을 구사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내세운 근대화론과 성장주의도 지역대결 정치구도의 형성과 밀접히 관련된다. 성장주의는 외적으로는 국가를 단위로 기존의 불균등한 세계체제 속에서 상승이동을 추구한다. 국가가 후진국에서 중진국, 선진국으로 상승이동하면 국가 내부의 계층·계급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잘살 수 있다고 선전한다. 이러한 논리는 내적으로도 그 힘을 발휘한다. 자신이 사는 지역의 인물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아 지역을 개발해준다면 주민들의 다양한 계층·계급적 차이와 상관없이 모두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지역과 지역이 상승이동 경쟁을 한다. 현대정치사에서 지역대결 정치구도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1971년의 대통령선거를 보면 이러한 양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1971년의 대선은 당시 대통령 박정희 후보와 야당 김대중 후보의 예측불허의 접전 속에서 치러졌다. 도전자 김대중이 ‘4대강국 안전보장론’ ‘남북교류론’ ‘대중경제론’ 등의 정책공약을 내놓아 논쟁이 벌어지면서 선거는 단순한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아니라 정책대결로 갈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박대통령과 여당은 국가적 차원의 정책 문제보다는 개인의 실리, 마을과 지역의 이익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갔다. 당시 여당의 선거운동은 이른바 ‘사랑방 좌담회’라는 모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공화당 지구당 간부들이 주민들과 함께 각종 소모임을 개최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서는 빵과 사이다 등의 먹을거리가 제공되고 격의 없는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진행되었다. 모임의 성격상 국가적 차원의 정책보다는 주로 도로나 교량 같은 지역현안과 일상생활에 관련된 문제를 논의했다. 이와 함께 마을별로 마을문고와 장학회를 만들고 문패달기 운동을 벌이는 등 다양한 생활개선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여당은 실제 주민들의 생활을 개선해줄 수 있는 것은 대중집회에서 남북교류론과 대중경제론 따위를 시끄럽게 떠드는 야당이 아니라, 힘과 능력과 조직을 지닌 여당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박대통령의 유세도 주로 안보위기를 강조하고, 각 지역의 도로와 교량 건설 같은 개발현안을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열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중들은 금권선거에 매수되거나, 우리 고장 후보를 뽑아 지역개발의 이익을 누리겠다는 실리추구적 투표행태를 보였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는 영남지역에서 상대후보에 비해 3배 넘게 득표했고, 김대중은 호남에서 상대후보에 비해 2배 넘게 득표했다.4
1971년의 대선이 나름대로 경쟁적으로 치러졌지만, 이듬해 유신체제가 수립되었고 1987년까지 한국사회에서는 대통령선거가 사라졌다. 유신체제기에 일부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저항했고, 수많은 민주화운동이 있었으나 탈정치화·원자화된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자각과 행동을 끌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때로는 저항의 과정에서 대대적이고 노골적인 국가폭력이 행사되어 1979년 부산·마산 민주항쟁과 이듬해 5·18광주항쟁처럼 대중의 불만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하면서 급속히 일체감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정체성이 약하고, 계층·계급적 결집을 가능하게 해주는 중간집단의 형성이 미흡한 상태에서 항쟁은 지속성을 유지하기 힘들었으며, 실질적인 정치·사회적 변화로 이어지기도 어려웠다.
4. 분단하의 민주주의와 민주항쟁의 딜레마
분단상황은 한국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배제의 정치’가 나타났다. 사실 해방 직후의 상황은 탈정치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양한 정치집단과 이념집단이 등장해 서로 갈등했다. 이러한 갈등과정에서 각 집단마다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서로 폭력적으로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경쟁하는 다원적 정치질서를 형성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미·소 분할점령과 냉전의 대두를 비롯한 여러 조건이 맞물려 이러한 가능성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당시의 갈등은 민족분단과 전쟁의 발발, 또한 그 와중에 무자비한 학살을 동반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한국전쟁 전후 자행된 광범위한 학살은 우익이든 좌익이든, 엘리뜨든 민중이든, 어떤 정치적 정체성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내세웠던 사람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대중은 탈정치화·원자화될 수밖에 없었다.
분단과 전쟁을 통해 한국의 정치는 이념적으로 원심분리되는 양상을 보였다. 좌파들은 북으로 우파들은 남으로 집결했고, 그들의 상대방은 자신의 지역에서 반역자로 제거되었으며 중간적인 존재는 허용되지 않았다. 물론 어디에서든 정치적인 것에는 배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분단하의 정치는 그 포용의 범위가 너무나 협소하고 엄격해서 쉽게 제동하기 어려워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이 배제의 동력에 가속도가 붙어 집권세력의 지지기반마저도 협소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이승만정권을 예로 들어보자. 이승만은 정부수립과 전쟁 과정에서 좌익세력은 물론 심지어 민족주의 우파 정치인 김구 정치집단도 기존 정치체제에서 배제했다. 1950년대 중반 협소한 극우반공세력 중심의 정치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조봉암을 중심으로 진보당세력이 결집했다. 그러나 평화통일론을 빌미로 조봉암은 사형을 당했고, 진보당은 해체되었다. 배제의 정치는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이승만은 1950년대 말 보수야당 민주당과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민주당에도 용공적인 세력이 침투하거나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집권세력이 여타의 세력을 극단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제도정치 공간은 더욱 협소해지고, 결국 이는 집권세력의 실질적 정치기반 자체를 잠식하고 정권의 고립을 자초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은 1960년 3·15선거에서 노골적이고 대대적인 선거부정을 저질러 주권자 모두를 정치에서 배제했다. 결국 이러한 상태에서 4월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극단적 배제 탓에 정치의 장이 너무 협소하게 조성되면 대중들은 정치에 관심을 잃고 탈정치화, 원자화된다. 뿔뿔이 흩어진 개인들은 국가권력의 억압에 더욱 취약해지며, 이에 계층·계급·이념적 결집을 이룰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은 더욱 좁아진다. 이것이 다시 탈정치화·원자화를 가속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난다. 이미 분단상황하에서 진행되어온 탈정치화·원자화는 군사정권 등장 이후 정치발전 없는 경제성장이 지속되면서 더욱 악화되었고, 여기에 근대화론과 성장주의가 지역개발논리로 내재화되면서 지역대결 정치구도라는 한국정치의 복병이 출현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역대결 정치구도와 분단문제는 서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분단의 정치는 또한 심각한 정치적 유동성을 끊임없이 발생시킨다. 한반도는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다. 안보 면에서 평시가 아닌만큼 군사적 긴장이 조성되고 여러 위기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남북의 군사적 대치과정에서 각종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심각한 위기국면이 조성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1970년대초 데땅뜨 국제정세와 남북대화 같은 긴장완화의 흐름도 분단체제의 교묘한 작동에 따라 위기감을 고취할 수 있다. 남북의 집권세력은 데땅뜨 국제정세에 나름대로 적응하여 남북대화를 진행하는 국면에서도, 국제정세와 남북관계의 심각한 유동성이 발생했다면서 위기감을 조성했다. 이에 남에서는 유신체제가 수립되고, 북에서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고 유일체제가 제도화·공고화된다. 국내의 정치적 위기도 국제관계와 남북관계의 위기로 쉽게 치환된다. 특히 박정희 집권기의 경우 계엄령과 위수령, 긴급조치 등이 빈번하게 발동되었다. 집권 18년을 돌이켜보면 평상시보다 이러한 비상조치하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항상적 위기상태, 예외상태를 뚫고 나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항쟁에 나선 사람들도 이같은 유동성과 위기상태의 딜레마 때문에 스스로를 제약하고 규율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저항세력은 변화를 창출하기 위해 정치적 유동성을 만들 수밖에 없지만 그들 역시 이러한 유동성이 분단상황에서 상대방에 의해 이용될 가능성을 스스로 의식할 수밖에 없다. 4월혁명 때도, 1980년 5월 학생시위 때도 반독재 구호와 함께 “공산당은 이용 말라”는 반공구호가 함께 나왔다. 5·18항쟁 때는 선전활동을 했던 여성활동가를 시민군이 용공분자로 의심해 계엄군에게 인계하는 일도 있었다. 4월혁명 때 이승만의 사퇴성명이 나오자마자 일부 학생들은 “이젠 됐다”며 계엄군과 함께 수습활동을 전개했다. 5·18항쟁 때도 ‘수습대책위원회’가 등장했다. 항쟁에 나선 사람들이 목표에 도달하기도 전에 수습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런 행동들을 항쟁과정에서 일부 집단들이 변질되고 탈락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5·18항쟁 당시 윤상원 등 시민군 일부는 강경파 지도부를 구성하고 이러한 차원의 수습을 거부했다. 이에 일부 논자들은 5·18의 민중항쟁적 성격을 강조하고 일부는 빠리 꼬뮌과 비교하며 민중 자치권력의 형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부합할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광주에서 끝까지 도청을 사수했던 시민군 중에 하층 민중출신이 많고, 윤상원 등의 지도자가 민중지향적 의식을 품었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된다. 그러나 이들이 당시에 이른바 ‘자유주의세력’을 배제하고 변혁적 민중세력만을 결집하여 민중권력을 창출하려고 의도했을까? 항쟁 당시 윤상원 등의 들불야학 그룹이 발행한 「투사회보」 7호와 5월 26일 시민궐기대회의 결의사항을 보면, 전두환의 사퇴 및 처벌, 최규하정부의 총사퇴 주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민주인사로 구국내각을 구성하라”고 요구했다. 일부는 25일 저녁 윤상원 등이 구성한 새로운 지도부를 민중항쟁 지도부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그 직후 26일에 제작된 「투사회보」는 그 제호를 「민주시민회보」라는 좀더 대중적 명칭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계엄당국과의 협상에 대해 “계엄당국의 일방적 요구가 아닌 우리의 뜻과 이번 사태의 진상을 밝히는 선에서 대등한 협상이 되도록 우리 모두 수습위원회를 믿읍시다”라고 시민들에게 호소했다.5 그들이 배격한 것은 협상 그 자체가 아니라 목적 달성도 없이 투항하는 협상이었던 것이다. 실제 윤상원은 26일 광주를 방문한 외신기자들에게 주한미국 대사와 협상할 뜻을 밝히기도 했다.6
사실상 모든 일에서 그러하지만 타협과 항쟁은 서로 배치되는 것만은 아니다. 굳건한 항쟁이 없다면 대등하고 의미있는 타협은 성사되기 어렵다. 또한 아무런 타협 없는 항쟁도 성공하기 어렵다. 특히 분단체제하에서 작동하는 극단적 배제의 정치 때문에 광범위한 집단들 사이의 연대는 필수불가결하다. 그러지 않고서는 배제의 정치하의 엄청난 난관을 뚫고 나갈 힘이 마련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5. 이명박정부하에서 민주항쟁을 돌아보며
2007년 12월의 대선과 곧바로 치러진 2008년 4월의 총선은 한국사회에서 근대화론과 성장주의의 힘이 아직도 막강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성장과 개발을 내세운 이명박 후보가 여러 도덕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승리했다. 총선에서는 지역개발 문제를 중심으로 유권자들이 지역별로 결집하여 대결하는 양상이 여전했다. ‘뉴타운’ 공약 등이 그토록 위력을 떨치는 모습을 보면 서울에도 지역대결 구도가 스며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당 인사들이 과거 김대중-노무현정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할 때부터 배제의 정치가 심각하게 가동될 조짐을 보였다. 이명박정부의 등장 이후 배제의 정치는 주체할 수 없이 동력을 얻고 있다. 전임 정권이 임명한 인사들에게는 법과 절차도 무시한 채 사임을 강요했다. 과거 정부의 정책들은 제대로 된 논의나 검토도 없이, 심지어는 대책도 없이 뒤집혔다. 야당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중계방송을 하듯 떠들썩한 검찰 수사과정에서 전직 대통령 노무현은 부엉이바위 위로 밀려 올라갔다. 노무현의 장례식에 참석한 김대중은 민주주의, 남북관계, 민생 위기를 개탄하며 휠체어에 앉아 연설을 했다. 그도 뜨거운 여름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거침없는 성장과 개발논리에 용산의 소상인과 빈민들은 옥상으로, 망루로 밀려가 불타죽었다.
정치적 유동성도 심각해졌다. 국회에서 쟁점 법안을 의원들이 앉아서 표결하는 장면은 당분간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세종시 건설계획도 여야 합의로 또한 헌법재판소의 법적 판단까지 거쳐 추진됐고 이명박 대통령도 후보시절 원안대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충분한 토론과 여론 수렴도 없이 갑자기 뒤집혔다. 이 과정에서 여당 내부에도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다. 대운하 건설은 안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충분한 사전 검토와 합의 없이 4대강사업이 강행되고 있다. 앞으로 무엇이 뒤집힐지, 정치가 어디로 갈지 예측불허다. 남북관계의 원칙을 세워가겠다며 강경일변도의 정책으로 나아가더니 남북관계는 위기국면으로 치닫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원자화된 개인으로, 뿔뿔이 흩어져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치열한 경쟁의 소용돌이에 내몰리고 있다.
배제된 사람들은 참으로 일찍부터 촛불을 들고 나섰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외쳤다. 이 구호는 공교롭게도 4월혁명 때인 1960년 3월 14일 서울의 야간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밤중에 시위를 하며 외친 구호였다. 촛불시위대는 5·18항쟁을 상징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도 다시 불렀다.
과거 4월혁명 때 십대들은 야당집회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에도 등교하라는 방침에 분노했다. 이명박정부하의 십대들은 갑작스런 미국산 쇠고기 수입허용 소식을 듣고, 급식을 먹어야 하는 자신들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않는 정부의 조치와 일제고사에 분노했다. 촛불시위에서 사람들은 “이명박 물러가라”를 외쳤다. 물론 이는 경고의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1960년의 이대통령은 경고를 무시했다. 아이들이 왜 저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학생들의 시위를 불순분자의 사주, 장면과 가톨릭의 음모로 폄하했다. 4월 19일 학생과 시민들은 그에게 항의하고자 경무대로 갔으나 대화는커녕 총탄이 날아왔다.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한 후에도 이대통령은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답게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4월 23일 이승만은 총에 맞아 부상당한 학생들을 방문해서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학생들을 위로했다. 여전히 그는 학생들의 불만 정도는 쉽게 무마하며 타고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50년이 지난 지금의 이대통령도 경고를 무시하고 남의 탓을 한다. 그에게 경고하고 소통을 촉구하려고 촛불을 들었던 단순가담자들조차 거액의 벌금 고지서를 받는다. 주위에서 아무리 비판하고 항의해도 이대통령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거침없이 실행하면서도 시장의 소상인들은 자주 찾아간다. 떡볶이를 먹는 모습을 보이며 상인들의 손을 잡는다. 소상인들을 보호할 정책을 제대로 제시하지는 않은 채 무조건 열심히 일하자고 한다.
촛불시위는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민주항쟁의 힘이 살아있으며 그 잠재력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지금 권력은 거리에 나타난 촛불을 화재의 위험이 있다고 빼앗는다. 그러나 사람들의 가슴속에 있는 촛불, 마음속에서 더 크게 번지고 있는 불길은 어찌할까? 이게 진짜 심각한 화재의 위험이 아닐까?
또한 촛불시위는 그동안 민주화를 추구해왔던 사람들에게도 경고하는 바가 있다. 억압과 배제가 심해지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특정한 일을 계기로 순식간에 일체감을 형성해 들고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거침없이 분출된 힘이 실질적인 변화를 산출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동력화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명확한 답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지만 민주주의야말로 어떤 목표점이라기보다는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끊임없이 그 내용과 가치, 그것을 달성할 방법에 대해 질문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민주주의는 그 본래의 뜻을 잃는다.
민주항쟁에 대한 기념행사가 있을 때마다 기억이 ‘박제화’되는 방식을 놓고 언제나 문제가 제기된다. 성취한 어떤 것을 자부하고 자랑하는 방식으로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순간 그 성과는 딱딱하게 굳어져 진열장에 갇힌다. 4월혁명을 미완의 혁명으로 기억하듯이 5·18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추구했지만 아직도 우리가 이룩하지 못한 것들을 되새겨야 한다. 또한 항쟁의 결과로 원했던 것을 얻은 사람도 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사람들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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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구 「군 작전의 전개과정」, 광주광역시 5·18사료편찬위원회 『5·18민중항쟁사』, 2001, 266~70면.↩
- 오유석 「외곽지역의 항쟁으로 본 5·18민중항쟁」, 5·18기념재단 엮음 『5·18민중항쟁과 정치·역사·사회』 3권, 심미안 2007.↩
- 샹탈 무페 『민주주의의 역설』, 이행 옮김, 인간사랑 2006, 173~74면.↩
- 졸고 「1971년 대통령선거의 양상: 근대화 정치의 가능성과 위험성」, 『역사비평』 2009년 여름호.↩
- 윤동수 『윤상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193~99면; 정재호 「5·18항쟁의 전개과정」, 『5·18 그리고 역사』, 길 2008, 114면 수록.↩
- 한국기자협회 외 엮음 『5·18 특파원 리포트』, 풀빛 1997, 41면, 71면, 13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