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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일본사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
‘한일병합’ 100주년에 즈음하여
미야지마 히로시
宮嶋博史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일본 토오꾜오(東京)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교수 역임. 주요 저서로 『양반』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朝鮮土地調査事業史の硏究』 등이 있음. miyajimah@skku.edu
* 이 글의 원제는 「日本史認識のパラダイム轉換のために- ‘韓國倂合’ 100年にあたって」이며, 일본 잡지 『시소오』(思想) 2010년 1월호에 실린 글에 필자가 한국 독자를 위한 머리말을 추가하고 본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 宮嶋博史 2010/한국어판 ⓒ 창비 2010
머리말
이 글은 ‘한일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일본의 역사인식을 재검토하기 위해 기획된 『시소오』(思想) 2010년 1월호에 게재된 논문을 번역한 것이다. 창비 독자를 위해 『시소오』 특집호와 졸고의 취지, 그리고 특히 이 글에서 비판한 일본 역사학계의 문제점이 결코 한국의 역사학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고 싶다.
주지하듯이 일본에서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근대 일본의 아시아 및 한국 침략의 역사를 직시하고 진심으로 반성하려는 태도가 사회적인 동의를 얻고 있다고 하기 어려운 상태다. 반성은커녕 오히려 근대 일본의 역사를 영광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한국이나 중국 등의 지적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 실상이다. 공영방송인 NHK가 시바 료따로오(司馬遼太郞)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를 2년에 걸쳐 방영하고 있다는 것에서 일본의 현주소가 상징적으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대국 러시아에 승리한 일본 찬가라고 할 수 있는데, 러일전쟁이 한국에 대한 침략전쟁이기도 했음에도 한국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일본에서 지금까지 한국사 연구를 해온 연구자(일본인뿐 아니라 일본에서의 한국사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해온 재일조선인 연구자도 함께)가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하는 것이 『시소오』 특집의 목적이었다. 이 특집을 위해 2년에 걸쳐서 집필 예정자들이 연구회를 꾸리고 서로의 논문 내용에 대한 토론도 진행해왔다. 그러한 노력의 덕분인지 이 특집호는 간행되자마자 품절되어 증쇄하게 되었다. 집필자들에겐 기쁨이자 일본 현실에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게 해준 일로 생각하고 싶다.
이러한 특집 가운데 졸고는 일본 역사인식의 문제점으로서 근대 이후에 대한 것뿐 아니라 일본사 전체에 대한 인식을 문제 삼아 전근대의 역사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함을 주장한다. 여기서 주로 검토대상으로 삼은 연구자들은 실은 일본 역사학계에서 대단히 진보적인 입장에 선 분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분들은 예컨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과는 확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된 비판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분들이야말로 일본 역사학계를 이끌어왔고 지금도 많은 젊은 연구자들이 그 영향을 받고 있어서 여기서부터 바뀌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독자들의 정확한 이해를 바란다.
또한 이 글에서 지적한 일본 역사학계의 문제점이 한국 학계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짧게나마 말해두고 싶다. 필자는 일본 역사학계의 동아시아 인식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유교 혹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국가·사회체제에 관한 인식 부재를 지적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인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주자학과 성리학에 대한 인식이 그 전형적인 경우다. 조선왕조에서 성리학이 국가이념의 지위를 얻게 된 점은 모든 교과서에서 기술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사상이며 왜 조선시대에 와서 이같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은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거의 결여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역사교육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역사연구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유교와 성리학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은 혹시 일본인 학자들이 외쳤던 ‘유교망국론’의 잔재는 아닐까.
1. 일본의 주변화와 패러다임 전환
현재 일본이 거대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바일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 전환의 본질적인 내용은 일본이 다시 동아시아의 주변적 지위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데 있다. ‘한일병합’이 강행되었던 100년 전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뛰어오르려고 하던 시기였다. 그후 2차대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동서냉전의 국제관계 속에서 미국의 종속적 동맹자로서 동아시아에서의 중심적 지위를 계속 점하게 되었던 일본은, 이제 냉전의 종결과 중국의 부활이라는 상황에서 다시 동아시아의 주변국이 될 게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 다시라고 말하는 것은 19세기 중반까지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지위가 주변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병합’을 역사인식의 문제로서 파악하고 그것에 이르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일본의 역사인식을 지배해온 패러다임인 ‘동아시아의 중심으로서의 일본사’라는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자각은 거의 보이지 않고, 종래의 패러다임이 약간 수정된 채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본고의 목적은 ‘동아시아의 주변부로서의 일본사’라는 시각에서 지금까지의 일본사 이해를 비판하고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다.
2. 패러다임 전환의 기축으로서의 유교 인식
일본사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구상한다고 할 때 그 전환의 기축이 되는 것은 유교 혹은 유교모델에 대한 인식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주변적 위치에 처해 있었다고 할 때 그것의 최대 근거는 일본의 유교모델 거부에 있다는 점, 그리고 19세기 후반 이후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뛰어오를 수 있었던 것도 유교모델로부터 일본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 더 나아가 글로벌리즘이 석권하는 오늘날 유교모델 수용의 역사적 경험의 부재라는 조건이 일본의 진로를 크게 제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점 등의 이유에서이다.
여기에서 유교모델이라 함은 유교〓주자학을 이념으로 내걸고 그 이념의 실현을 지향한 국가, 사회체제를 말한다. 그 핵심은 유교에 관해 깊은 지식을 가진 자를 과거를 통해 선발하고 그들이 국가통치를 담당케 하는 것, 그리고 통치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예(禮)’를 위치 짓고 철저한 ‘예치(禮治)’를 꾀한다고 하는 두가지 점에 있었다. 중국 송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이 모델은 중국에서는 명대에 확립되었고, 조선에서는 조선왕조의 성립을 계기로, 또 베트남도 여조(黎朝)시대에 들어 유교모델 수용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류우뀨우(琉球)왕국의 경우에는 약간 늦었는데, 17세기 초에 사쯔마번(薩摩藩)을 통해 토꾸가와(德川)정권의 지배하에 들게 된 이래 유교모델의 의식적 수용이 추진되었다. 이같이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점차 유교모델의 수용을 추진했으나 그중에서 일본만이 이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1) 토꾸가와시기 유학자의 유교모델 인식
일본에서의 유교모델 거부 혹은 부재라는 사태는 일본의 정체성에 복잡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 단서를 보여주는 것으로 토꾸가와시대의 유학자들의 예를 들 수 있다. 주지하듯이 토꾸가와시기의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일본을 중국의 고전에 묘사되어 있는 ‘봉건제’ 사회라고 파악해 ‘군현제’인 동시대의 중국보다도 이상적인 사회라고 보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에서 조선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조선에서도 고전적 봉건제와 군현제를 기준으로 현상을 파악하는 의론이 존재했다. 일본에서의 논의가 정치체제의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데 반해 조선에서는 봉건제를 종법주의(宗法主義)와 정전제(井田制)와 불가분한 것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어서 양자를 비교하면 일본에서의 논의의 자의성이 눈에 띄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뤄보고 싶다.
여기서는 토꾸가와시기 일본 유학자들이 유교를 정치체제의 문제로 파악하는 한편, 현실의 국가·사회체제의 문제로서 리얼하게 파악하는 데에는 어째서 무관심했던가의 실례를 하나만 들어보려고 한다. 그것은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서적에서 보이는 어떤 일본인 유학자의 유교 인식, 조선 인식이다. 이 책은 15세기에 조선에서 저술된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을 초역(抄譯)한 것으로, 쿄오또(京都)의 저명한 유학자 집안 이또오가(伊藤家) 출신의 세이따 탄소오(淸田澹ᄣᅥᆺ)가 엮었다.1 『표해록』은 1487년에 제주도를 출항했던 최부 일행이 폭풍을 만나 중국의 저장성(浙江省)에 표착(漂着)한 후, 명 정부의 조처로 뻬이징을 경유해 조선에 귀국하기까지의 체험을 기록했던 책이다. 완성된 지 얼마 안된 대운하에 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등 그 사료적 가치가 현재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엔닌(圓仁),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와 함께 중국에 관한 3대 여행기 중 하나라고까지 평가된다.
세이따의 『당토행정기』는 『표해록』을 단지 초역한 것만이 아니라 군데군데에 자신의 감상과 의견 등을 더하고 있는데, 이 추기(追記) 부분에 그의 유교관, 조선관이 잘 나타나 있다. 그중에서 최부가 조선에서는 유교가 얼마나 번창한가를 묻는 명의 중신들에게 조선국왕은 학문을 좋아해 매일 네차례나 유신(儒臣)들과 만난다고 답했던 부분에 관하여, 세이따는 다음과 같은 감상을 드러내고 있다.
생각건대, 최부는 중국에서는 어떠한 거짓을 이야기해도 그 말대로 받아들여질 것이나, 이 책이 최부가 귀국한 후 조선왕의 분부로 지어졌다고 하니, 비록 당연한 일이라고 해도 얼토당토않은 것을 말한다면 조선왕에 대한 불경죄가 되니 도리어 벌을 받을 수도 있다. 만약 조선왕이 학문을 싫어하는데 최부의 말처럼 매일 네차례 유신을 대면한다고 운운한다면, 최부가 당토임을 내세워 자신을 비난하고 조롱한다고 조선왕이 크게 노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왕에게 나쁜 점이 있다면 그것을 감추고 말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좋은 일이라면 근거 없는 것을 반대로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에 네차례까지 유신과 대면한다는 것은 거짓은 아닐 것이다.
국왕이 매일 네차례나 유신들을 만난다는 것은 이른바 경연제도(經筵制度)를 가리키는 것으로, 국왕에게 유교를 교육하고 정책을 논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실시되었다(조선시대에는 신하가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도 존재했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는 유교이념에 입각해 국가를 운영하는 유교모델에 있어 더없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이지만, 세이따는 최부가 사실을 서술한 것으로 해석할 뿐 그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유학자라면 조선의 이러한 제도는 응당 높게 평가해야 하는 것이고 더욱이 그러한 제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일본의 상황을 비판해야 할 터이지만 세이따에게는 그러한 발상이 전무하다. 한편, 토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왕이 의주(義州)로 도망쳤는데, 우리 대일본 병사가 거기까지 쫓아가지 않음은 그 나라의 천행(天幸)이라 할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학자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일본의 무위(武威)에 대한 비판의식도 결여되고 있었다.
세이따의 예로 토꾸가와시기 일본의 유학자들을 대표할 수 있겠는가에는 이론도 있겠지만, 이와나미쇼뗑(岩波書店)에서 출간된 『일본고전문학대계96: 근세수상집(近世隨想集)』에도 세이따의 문장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무명의 유학자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세이따와 마찬가지로 유학자면서도 중국과 조선에서의 현실 유교국가 본연의 모습에 무관심하고, 유교모델을 채용했던 중국·조선과 비교해 일본의 체제를 구상하는 보편적 사고회로를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 당시 대부분의 일본 유학자들의 입장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2) 메이지유신 이후
유교모델에 대한 무관심이 한층 더 결정적으로 강화된 것은 메이지유신 이후에 들어서다. 그 대표적 예로 후꾸자와 유끼찌(福澤諭吉)의 이름을 드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일본의 근대화〓문명화의 가장 뛰어났던 이데올로그였던 후꾸자와는 문명화의 최대 장애가 유교에 있다고 파악하고 유교에 대한 혹닉(惑溺)을 엄중히 비판했다. 즉 일본, 중국, 조선의 구체제를 사상적으로 지배했던 유교에의 혹닉을 극복하지 않고는 서양문명을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아직까지도 그 혹닉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국·조선으로부터의 결별〓탈아(脫亞)를 선언하고 일본의 문명화를 논했던 것이다.
따라서 후꾸자와가 탈아를 주장했던 배경에는 일본의 구체제를 중국·조선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후꾸자와만의 특유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가령 뒤에서도 논의할 쿠메 쿠니따께(久米邦武)의 ‘동양〓도덕정치’라는 이해도 동양을 일체(一體)로 파악했던 것으로 그 기저에는 유교를 공통분모로 간주하는 발상이 존재했는데, 여기에서는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경우를 특별히 언급하고자 한다.
최근 일본에서 진행된 이또오 관련 연구를 보면 이또오가 ‘병합’에 반대했다거나 그나마 나은 제국주의자였다는 견해가 강하게 주장되고 있는 것 같다. 그 대표적 논자 중 한 사람이 이또오 유끼오(伊藤之雄)인데,2 이또오 히로부미가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힘썼다고 보는 그의 주장에는 근대화되어야 할 대상이었던 당시 한국의 상황에 대한 고찰이 결정적으로 빠져 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한편으로는 동아시아 삼국을 “공맹(孔孟)의 도덕에 의해 인심(人心)을 유지하는 나라들”(「日本の目的は韓國の扶植に在り」, 小松綠編 『伊藤公全集』 第2卷, 1928, 488면)이라고 하여 그 공통성을 인정하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고, 따라서 한국에 대한 교육방침에 있어서도 유교교육을 중시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유생(儒生)의 편협하고 시세(時勢)에 우원(迂遠)함은 거의 예상한 바 이상이다”(「日本は韓國の獨立を認承す」, 같은책 460면)라고 하면서 한국 유교의 현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이러한 유교 인식은 더없이 천박한 것이었고, 특히 조선시대 이래의 유교모델의 실태에 관한 인식은 거의 무지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그가 한국의 통감(統監)으로서 추진했던 사법제도 개혁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일이 발생했다. 이또오의 강력한 추천으로 한국에서 근대적인 법제도를 만들기 위해 내한해 있던 우메 켄지로오(梅謙次郞)는 민법 등을 제정하기에 앞서 구관조사(舊慣調査)를 실시했다. 그 조사의 의도는 근대법인 일본의 민법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면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근대법에 적합하지 않은 전통적인 관습을 조사한 후에 한국의 독자적인 민법을 제정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조사해보니 이 예상은 뒤집혀 근대적 소유권과 지극히 유사한 토지소유권이 한국에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토지소유권을 인민에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 따라서 내가 말하는 한국의 토지소유권이 온전히 우리나라의 오늘날의 토지소유권 관념과 일치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의심할 수 있으나, 요컨대 널리 소유권이라고 칭할 수 있는 권리가 한국 인민에게 적어도 수백년 전부터 인정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한참 뒤처져 있어야 할 한국에 근대적 소유권과 유사한 형태의 것이 수백년 전부터 존재해왔음을 우메는 인식했던 것이다. 이러한 토지소유권의 존재는 토지에 대한 지배권이 국가에 집중되어 있어 양반이라고 하더라도 양인, 노비와 마찬가지의 소유권밖에 갖지 못한다고 하는 상황, 바꿔 말하면 토지소유와 신분이 무관하다는 데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이는 유교모델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메의 이러한 인식은 당시의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한국 인식을 뒤엎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었지만, 이또오에게는 이러한 인식이 완전히 결여되었던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의 경우는 시대적 제약 때문이었다고 정리하는 것도 가능할 테지만, 그 당시 한국의 실태에 관한 연구가 비약적으로 진전된 현재에도 그러한 성과는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유교모델에 관한 일본의 인식은 이 100년간 조금의 진보도 없었다고 봐야 한다.
3. 근대화 패러다임의 지배와 유교모델 인식
1) 전후역사학(戰後歷史學)까지
일본에서 근대역사학은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의 연구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근대국민국가를 떠받치는 역사인식으로 기능했던 근대역사학은 서구의 역사발전을 모델로 삼아 서구 이외 지역의 역사도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서구적 근대화〓근대국민국가의 건설이 목표로 설정되었고 그것을 기준으로 과거가 자리매김되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열강의 무리에 진입한 일본에 있어서는 비서구 국가로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근대역사학의 가장 큰 과제로 간주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만이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보는 근대화 패러다임에 입각할 때 토꾸가와시기까지의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주변적 지위는 다른 식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이 과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일본봉건제론’이었다. ‘일본봉건제론’이란 일본사에 서구적 봉건제 개념을 적용해 봉건제의 존재를 근거로 일본사를 중국사·조선사에서 분리(탈아)시키는 동시에, 그것의 차이로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근대화가 가능했다고 보는 담론이다.3
‘일본봉건제론’은 20세기 초부터 등장했지만, 일본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이시모다 쇼오(石母田正)의 『중세적 세계의 형성』이었다. 2차대전 중의 작품인 이 서적은 전후의 일본사 연구를 견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시모다의 연구에 관해서는 이미 비판한 적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상세히 서술하지는 않지만, 그 요점은 송대 이후 형성되어온 중국의 종족(宗族)을 고대적 혈연공동체로 파악하고 혈연을 넘은 결합을 이룬 일본의 무사단(武士團)을 고대세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한 이시모다의 이해를 비판하는 데 있었다. 더 나아가, 다른 글에서도 지적했던 것처럼 그가 1950년대 이후 그러한 중국 인식을 자기비판하긴 하지만, 종족이 새로운 시대의 산물이며 유교모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점은 끝끝내 인식하지 못했다.
이시모다 역시 그 주요 멤버로 활약했던 전후역사학 가운데에는 비참한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근대 일본의 후진성을 강조하는 조류도 존재했다. 이 조류는 언뜻 근대화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입장처럼 보이지만, 일본의 후진성이라고 말할 때의 기준을 서구에 두고 있고, 일본과 아시아의 공통성을 중시하는 경우에도 그 후진성에 있어서의 공통성에 중점을 둔 것이기 때문에 근대화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매우 불충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러한 관점에서는 유교 역시 동아시아의 후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이시모다의 연구가 주로 중세사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토꾸가와시기부터 근대에 걸친 일본사 연구에서 근대화 패러다임을 견인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자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였다. 주지하듯이 마루야마는 『일본정치사상사연구』에서 주자학을 중세적 사상으로 파악하고 오규우 소라이(荻生ª徠)의 ‘작위(作爲)’의 논리에서 주자학적 사유 해체의 맹아를 발견함으로써 일본의 근대를 전망하려고 했다.
이 역시 전형적인 탈아적 일본사 이해라고 볼 수 있는데, 조선 인식의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하고 싶은 것은 마루야마의 다음과 같은 이해이다. 즉 그는 중국문화에 대한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비교하면서 일본을 ‘누수형(漏水型)’, 조선을 ‘홍수형(洪水型)’으로 파악하고, ‘누수형’의 일본은 중국문화의 영향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려고 했던 데 반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선은 선택의 자유 없이 중국문화에 동화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가지 점이 간과되고 있다. 하나는 조선이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수용했다고 볼 경우 수용하는 측의 사회가 고도의 문화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점이다. 예컨대 유교모델의 핵심인 과거제도 도입 문제를 생각해봐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인쇄기술의 발달과 그것에 의한 서적의 보급이라는 조건이 필수적인데,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기란 가령 15세기의 일본에서는 불가능했다. 마루야마는 어디까지나 문화수용의 패턴을 문제삼았던 것이긴 하지만, 그 때문에 현실의 역사과정이 사상(捨象)돼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마루야마에게 결여되어 있는 다른 하나는 ‘홍수형’의 조선에서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수용함으로 인해 어떤 사태가 발생했는가라는 물음이다. 조선은 유교모델의 수용이라고 하는 대단히 곤란한, 그리하여 장시간을 요했던 과정을 겪는 와중에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유교라는 보편적 이념을 수용했고, 그 결과 여러가지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예컨대 18세기 후반에 유교지식인 중에서 가톨릭 교의에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뻬이징에까지 가서 세례를 받는 집단이 등장했다는 것, 19세기가 되면 유교이념이 일반민중에까지 보급되는 가운데 대다수 사람들이 양반을 지향하게 되고 그 움직임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 조선시대의 문과급제자 중에 때로는 한족(漢族), 위구르족, 여진족 등 다양한 출신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 등이 그것이다. 이들 사례는 유교모델 수용과의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생한 현상들이며 일본과 큰 차이를 갖는 것이었지만, 당시 마루야마의 시야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2) 근대화 패러다임의 존속
주지하듯이 전후역사학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비판에 처해져 자기해체를 시작했지만, 근대화 패러다임은 지금도 여전히 존속되고 있다. 그 전형적 예로서 이나바 쯔구하루(稻葉繼陽)와 아다찌 케이지(足立啓二)의 견해를 문제삼고자 한다.
나는 『역사학연구(歷史學硏究)』 2006년 12월호의 ‘ ‘근세화’를 생각한다’( ‘近世化’を考える) 특집에서 주로 전후역사학에서의 일본 ‘근세사’ 연구를 비판한 적이 있었는데, 그 논문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 이나바에 의해 제기되었다.4 일본사 연구자로부터 별다른 반응이 없음에 실망하고 있던 나로서는 이러한 비판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고, 게다가 비판으로부터 배우는 바도 많았다. 그러나 이나바의 주장은 오늘날 일본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인식 면에서 나와 근본적으로 다르고, 그 일본사 인식도 수긍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재비판하고자 한다.
내 글에 대한 이나바의 최대 비판점은 졸고에서의 일본사 연구 이해가 1980년대까지의 연구성과에 기반해 있어 연구사적 동시대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졸고에서 토요또미·토꾸가와 정권의 집권적 성격을 강조하고 민중에 대한 억압성을 중시해온 1980년까지의 연구를 대상으로 삼아 기존 일본사 연구를 비판했으나, 현재로서는 그러한 ‘근세사’ 이해는 이미 비판받았고 일본의 ‘근세화’를 사회적 측면에서의 내발적 질서화〓규율화의 과정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연구동향이 지배적이라는 게 이나바의 비판이다. 그러고 나서 이나바는 ‘근세화’를 사회의 단체화(團體化)의 진전이라는 각도로부터 검토하는 동시에, 그러한 ‘근세’에서의 단체화가 동아시아 중 가장 진전되었던 일본에서 근대화의 순조로운 전개가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다음 문장에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훗날 일본사회의 기초단위가 된 ‘이에(家)’와 ‘가업(家業)’〓야꾸(役)의 성립을 중시하는 비또오 마사히데(尾藤〔正英-인용자 보충〕)는 14~16세기야말로 일본역사의 가장 큰 획기였다고 보고, 그것과 표리관계에서 고대와 중세, 근세와 근대의 연속성에 주목한 ‘이분법’적 시대구분론을 제기했다. 그것이 바꾸한(幕藩)구조론·국가론에 대한 안티테제임과 동시에,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근대화의 순조롭고 급속한 진전을 가져온 메이지유신의 역사과정을 중세후기 이래 사회의 내발적 전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려는 태도의 표명인 것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본서는 일본사회의 ‘근세화’를 사회적 측면에서의 내발적 질서화와 규율화의 과정으로 파악하려는 연구동향에 입각해, 전체적으로는 대략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더 나아가 종장에서는 18세기부터 메이지유신 이후의 지역사회에까지 시야를 넓혀 근세사회가 산출해낸 근대화의 전제에 대해서도 약간의 고찰을 시도한다. (『日本近世社會形成史論』 18~19면)
이나바의 연구에서는 일본 ‘근세’의 평화가 위로부터 작용하는 힘만이 아니라 매우 강고한 영속적 단체로서 성립해온 촌락〔村〕을 중심으로 한 아래로부터 작용하는 힘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촌락의 성격은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의 경우가 특이했고 오히려 페데(Fehde, 자력구제) 관행을 가진 유럽의 촌락과 공통성을 보인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 개개의 논점과 주장은 납득이 가는 부분도 많지만, 일본사회의 단체적 성격에 대한 평가에 관해서는 의문이 든다.
아래로부터의 질서화를 중시하는 이나바의 입장은 후지끼 히사시(藤木久志)의 연구에 의거하면서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형태라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아래로부터의 질서화를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그의 평가이다. 예컨대 후지끼의 연구에서는 ‘중세’에서의 촌락 간의 분쟁 해결과 관련된 여러 규정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즉 ‘게시닌(解死人)’이라고 하는 대역(代役)을 처벌하는 것으로 분쟁이 해결되는 사례가 많이 보인다는 것, 그리고 게시닌은 많은 경우 촌락의 일원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미리 촌이 ‘부양’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사실 등이 밝혀지고 있다. 이것은 촌락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곳에서 배제된 자의 존재가 필요불가결했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나바의 이해에 따른다면 이러한 ‘내부의 평화〓질서화’와 그 모순을 외부로 전가하는 구조가 ‘근세’에도 지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이나바는 토요또미 정권의 조선침략에 즈음하여 대량의 농민이 진부(陣夫, 전장에서 무기 운반 등의 용무를 담당하는 무사가 아닌 사람)로 동원되었으나 전장에서 도망한 자가 많았고, 대규모의 침략전쟁이 장기화되는 극한상태 속에서 영주층과 백성 간의 모순이 표면화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백성의 저항을 야기한 ‘농민층의 성숙(農の成熟)’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그것이 침략전쟁 이후의 백성 지배의 형태를 규정했음을 밝히고 있다(같은 책 제8장). 그러나 백성 동원의 근거가 된 ‘진부역(陣夫役)’은 촌락의 평화를 지키는 댓가로서 성립했던 것으로, 이나바에 따르면 조선침략에 즈음하여 백성들이 그렇게 강하게 저항했던 것은 그것이 촌의 평화와 무관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이나바는 침략전쟁의 모순을 촌락의 평화와의 연관으로만 파악하고 있지만, 이나바가 많이 기대고 있는 후지끼는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다룬 저서에서 전장에서 암약(暗躍)하는 일본 상인의 모습과 대규모의 항왜(降倭, 조선에 항복한 일본병사)의 존재, 더 나아가 전국영주(戰國領主)들에게 가장 완강하게 저항했던 일향종(一向宗, 불교의 한 종파, 淨土眞宗 혹은 眞宗이라고도 함)이 조선침략에서는 침략의 선봉이 되었던 사실(이것은 근대에도 되풀이되었다) 등 침략전쟁의 체험을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이나바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문제는 시야에서 벗어나 ‘농민층의 성숙’이 구조적으로 품지 않을 수 없었던 모순은 간과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의 결여는 이나바의 현실인식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나바는 책의 결론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세번째로 지역사회론은 이른바 ‘일본형 사회(日本型社會)’의 조직원리를 역사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일본형 사회에 있어서의 법률은 지역커뮤니티에 의한 구성원의 생활·사상관리, 생활보장단체로서의 일본기업(종신고용제와 기업복지)과 중층적인 하청기업 편성, 그리고 품의(稟議)에 의한 조직의사 결정방식 등의 조직원리에 의해 유지되고,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을 계속적으로 지탱하며, 또 한편으로 천황제 파시즘의 생성을 지원했다. 이러한 조직원리는 모두 봉건사회의 지역단체 운영과 자치적 행정에 역사적 근거를 둔 것으로, 그것이 지금 글로벌화에 의해 붕괴에 임박해 있다.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사회적 상황에 ‘위기’를 느끼지 않는 자는 적을 텐데, 지역사회론은 지금의 조직과 법률의 붕괴상황이 갖는 의미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수단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책 396면)
요컨대 이나바에 따르면 봉건사회에 기원을 둔 ‘일본형 사회’의 조직원리가 글로벌화에 의해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게 지금 일본이 처한 위기의 본질이라는 것인데, 과연 그러한가? 일본의 조직원리가 천황제 파시즘을(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히데요시의 조선침략과 메이지유신 이후의 아시아침략도) 지원했다 함은, ‘일본형 사회’의 조직원리라는 것이 내부에서의 억압을 동반한 평화와 외부에 대한 차별과 폭력성이라는 양면성을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 없이 단지 ‘일본형 사회’의 원리를 역사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입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사회의 단체화라는 각도에서 역사를 파악하려고 한 이나바의 방법은 그 책에서도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중국사 연구자인 아다찌 케이지에 의거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사회와 일본사회의 이질성, 일본과 서구의 유사성을 강조한 아다찌의 연구에서도 근대 일본의 침략적 성격 문제는 매우 경시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침략성을 배태한 전제적 성격의 연원이 메이지유신에서의 왕정복고라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듯이 고대 율령국가체제에 있었던 것처럼 이해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사회의 단체화의 진전 및 그 자율성에 대한 높은 평가와 국가의 전제적 성격이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가를 묻는 문제의식은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3) 전후역사학 이후
일본의 전후역사학이 해체되지 않을 수 없었던 요인은 여러가지겠지만, 역사연구의 내용 측면에서 본다면 일국사적 방법에 대한 비판, 그리고 전후역사학이 근대국민국가를 떠받치는 역할을 담당해왔던 것에 대한 자각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전후역사학의 해체를 전후하여 새로운 역사연구를 모색하던 와중에 큰 주목을 받게 된 이들이 아미노 요시히꼬(網野善彦),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 니시까와 나가오(西川長夫) 세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내가 말한 동아시아에서의 유교모델 수용과 연관된 역사과정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갖고 있었는가를 묻는 것은 현재 일본에서의 일본사 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있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전후역사학 해체 이후의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앞서 말한 3인의 연구자 가운데, 아미노 요시히꼬의 일본사 이해가 탈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역사학연구』의 논문에서 논했기 때문에 반복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는 야스마루 요시오와 니시까와 나가오의 유교모델 수용 문제에 관한 인식을 다룰 텐데, 야스마루의 연구, 특히 민중의 통속도덕(通俗道德)에 관한 연구는 전후역사학의 전성기라고 해도 좋을 만한 1960, 70년대의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전후역사학 해체 이후로 포함시켜 검토하는 것은 적당치 않은 면도 있지만, 그 연구가 주목받게 된 것이 대체로 1980년대 이후의 일이라고 여겨지므로 여기에서 다루기로 한다.
(1) 야스마루 요시오의 통속적 유교이해와 동아시아적 관심의 부재
야스마루의 민중사상, 통속도덕에 관한 연구는 근대이행기에 민중세계에서 형성된 통속도덕에 주목하여 그 방대한 에너지가 근대사회의 형성을 지지했음을 주장한 것이다. 즉 통속도덕은 원래는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유교의 이념을 민중이 스스로의 것으로 전유하려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며, 그것이 바꾸후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까지의 민중운동의 기반이 되었다는 게 그의 주장의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근세유교는 봉건적 위계질서를 도덕적 위계질서로서 옹호했다. 유교이론이 얼마만큼 내재적으로 이해되고 있었는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봉건적 위계질서를 도덕과 인간성의 위계질서로 실감한다는 것은 봉건사회에서는 피할 수 없는 사회적 통념이었다. 이 통념 하에서는 민중은 도덕적 열등자가 되고, 그 때문에 신념에 기초한 자주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주체가 되는 일이 방해되었다. (『日本の近代化と民衆思想』, 靑木書店 1980, 33면)
근세후기에서 메이지시기에 걸친 민중적 입장으로부터의 사회비판은 유교도덕과 통속도덕의 순수화(純粹化)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매우 일반적으로 말해서, 원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무기인 유교, 기독교 등은 그 교의의 이상주의적 측면을 순수화하여 지배계급의 현실에 적용해보면 광범위한 민중에게 비판의 무기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근대사회 형성기에 나타난 민중투쟁의 세계관적 배경은 대체로 그러한 전(前)근대사상의 순수화라는 형태를 취했다. 광범위한 민중에게 가령 유럽의 시민적 근대사상을 기대한다 해도 거의 의미가 없다. 민중은 자신들이 고심해 만들어낸 자기규율의 논리를 보편화하고 사회를 보는 척도로 삼아 비판의 논리로 전화해간다. 농민봉기, 자유민권운동, 곤민당(困民黨)과 빈민당(貧民黨) 등에는 그러한 사상적 특질이 있었다고 본다. (같은 책 53면)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야스마루는 유교를 봉건적인 위계질서를 옹호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서구에서의 기독교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유교 이해는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지금 보면 매우 통속적이고 일면적이다. 한대 이후의 유교는 ‘봉건제’(중국의 고전적 의미에서의)를 부정하고 집권적 국가체제를 옹호하는 것이었고, 송대 이후의 과거제도 확립과 함께 지배층의 신분적 세습제를 이념적으로 부정한 사상이었다. 그것이 토꾸가와시대에 일본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신분적 위계질서를 지탱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본의 유교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경위에 관해 야스마루가 전혀 무관심했던 이유로, 여기에서도 역시 근대화 패러다임에 의한 구속이라는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결과, 유교이념의 하강화(下降化)가 민중의 체제비판의 무기가 된다고 하는 상황은 중국과 조선에서도 발생했던 일임에도,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의 민중사상, 통속도덕을 동아시아 차원에서 비교하는, 서구와의 비교보다 성과가 많을 터인 작업도 시도되지 않는다.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야스마루의 연구가 시작되었던 1960년대의 시점에서는 유교에 대한 이해와 동아시아적 관점의 미약함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되지만, 그의 최근 저작인 『문명화의 경험(文明化の經驗)』(岩波書店 2007)에 수록되어 있는 글에서도 동아시아와의 비교라는 시각은 전무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초기 입장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 니시까와 나가오의 국민국가론과 서구모델의 특권화
니시까와 나가오가 전후역사학 이후의 일본근대사 연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해온 국민국가론의 대표적 논자라는 것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프랑스문학 연구자로서 출발했던 니시까와는 프랑스혁명을 비교기준으로 삼아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근대사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해왔다. 니시까와의 논점은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그의 핵심적인 주장인 국민국가론은 니시까와도 참가했던 토론회에서 야스다 히로시(安田浩)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니시까와씨는 일찍이 국민국가의 특징을 다섯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 국민주권과 국가주권의 존재, 둘째, 국민통합 장치와 국민통합 이데올로기, 셋째, 세계체제 혹은 국가간체제가 국민국가를 만들어낸다, 전제로서는 국가간체제가 먼저 존재한다, 넷째, 국민국가는 본래 모순적 존재이며 그 모순적 성격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다섯째, 국민국가는 모듈성을 지닌다(국민국가는 여러 요소로 구성되며 그 각 요소를 개별적으로 모방·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의미-인용자). (牧原憲夫編 『 ‘私’にとっての國民國家論-歷史硏究者の井戶端談義』, 日本經濟評論社 2003, 181면)
그리고 나시까와는 19, 20세기를 비서구세계가 이러한 국민국가를 만들도록 강제되었던 시대라고 파악하고, 게다가 그 과정을 ‘문명화’의 과정이라고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식민지였던 국가, 지역이 독립한 후에 형성된 국민국가도 그것이 국민국가인 한은 같은 속성을 갖는다는 주장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니시까와는 이러한 국민국가론에 입각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의 국민국가 형성과정을 특수성이 아닌 그 보편성에 역점을 두고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꾸후말기·메이지시기의 국민국가 형성이 적어도 국가장치와 국민통합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경우 전형적으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 내가 지금 여기에서 답할 수 있는 바는 토꾸가와시기에 아마도 프랑스의 절대왕정에 가까운 체제가 확립되어 있었고, 모종의 근대성이 성숙해 있었다는 것, 또한 메이지혁명 이후 선진국의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를 이입(移入)했고(게다가 모듈로서 이입했고) 그것을 단기간에 정착시킬 만큼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제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것도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日本型國民國家の形成」, 『幕末·明治期の國民國家形成と文化變容』, 新曜社 1995, 24~25면)
토꾸가와시대에 ‘근대성의 성숙’이라고 하는 표현을 적용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가설’이므로 그것은 일단 제쳐두려고 한다. 문제는 니시까와에게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일본만이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인식이 전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꾸라사절단岩倉使節團이 파견되었던-인용자〕 메이지 4년은 유럽에서는 빠리꼬뮌과 독일제국이 성립한 해인데, 메이지정부가 잇달아 내세운 개화정책을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보자. 1871년-호적법 제정, 신화조례(新貨條例) 공포, 폐번치현(廢藩置縣), 산발(散髮)·제복(制服)·폐도(廢刀) 허가, ‘에타(穢多)·히닌(非人)’의 폐칭(廢稱), 전답의 경작물 선택의 자유화(田畑勝手作) 허가, 종문인별장(宗門人別帳) 폐지, 견구(遣歐)(이와꾸라)사절단 파견 등. 1872년-토지영대매매(土地永代賣買) 해금, 학제 반포, 직업이주의 자유, 철도 개통, 토미오까(富岡) 제사공장 개업, 인신매매 금지, 태양력 채용 등. 1873년-징병령 공포, 지조개정조례 포고 등. 프랑스혁명의 처음 5년간에 필적하는 급격하고 근본적인 개혁이 이 3, 4년간 시행되었던 것인데, 메이지유신의 경우는 그것이 ‘문명개화’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그렇지만 이 시기의 메이지정부에 충분히 심화된 명확한 문명개념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위정자 측에서 세계의 현상에 대한 인식과 결부되어 문명의 명확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던 것은 역시 이와꾸라사절단 파견 이후일 것이다. (『增補 國境の越え方』, 平凡社 2001, 234면, 강조는 인용자).
이것은 1871년에서 73년에 걸쳐 실시되었던 개혁을 열거한 부분인데, 인용문에서 강조하여 표시한 제반 개혁은 중국과 조선에서는 원래부터 실시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즉 호적제와 징병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토지매매와 직업이주의 자유도 인정되고 있었다. 군현제도 옛날부터 실시되고 있었던 것이며, 지배층의 대도(帶刀)와 종교 조사를 위한 종문인별제도(宗門人別制度) 등은 폐지할 필요도 없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국민국가의 제요소를 모듈로서 옮겨오려고 할 때 일본에서는 필요했던 개혁의 상당부분이 중국과 조선에서는 필요 없는 것들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했던 가장 큰 원인은 중국·조선에서는 집권적 관료제 국가체제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바에서 구할 수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유교모델 수용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던져야 할 질문은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의 상당부분을 이미 실현하고 있었던 중국과 조선의 ‘구사회(舊社會)’의 내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그리고 그것과 비교했을 경우 일본의 위치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시까와의 논의에서는 이러한 부분은 완전히 사상되어 있다. 방금 서술했듯이 서구화를 ‘문명화’라고 파악할 때 서구와 일본에서 근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실현되었던 것들의 상당부분이 중국·조선에서는 훨씬 이전에 실현되어 있었고, 이러한 조건은 중국과 조선의 근대적 변혁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했다. 즉 한편으로는 근대적 변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과제인지가 불분명해져 서구모델의 수용이라는 과제를 절실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곤란하게 만드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전통을 문명으로 인식하고 서구문명을 상대화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니시까와는 앞의 인용문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이와꾸라사절단에 대해 이러한 사절단 파견은 일본만이 했다고 단언하면서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와꾸라사절단의 파견에서 보이듯이 독자적인 세계인식 방법과 국제사회에의 참여 방법이다. 새로운 국가건설을 지향하는 신흥국이 여러 선진국에 시찰단을 파견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다수의 국가들(구미 12개국이라 함은 당시의 선진국의 전부이다)에 대규모의 사절단을 보내고 게다가 각각의 나라를 철저하게 시찰한다고 하는 것은 전례가 없다. 사절단이 가져온 것, 즉 그들이 무엇을 보고 보지 않았는가는 일본의 장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그 이전에 사절단이 이러한 형태를 취할 수 있었던 대목에 일본의 국민국가 형성의 독자성이 이미 드러나 있다. 그것은 근대화에 임하여 중국과 조선 혹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취한 태도와 비교하면 분명할 것이다. (「日本型國民國家の形成」, 앞의 책 26면)
여기에서 보이는 니시까와의 논의는 우선 사실에 반한다. 청국에서 이와꾸라사절단이 파견된 4년 전 즈음인 1867년에 이미 구미 여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했기 때문이다(푸안천蒲安臣사절단). 이 사절단은 이와꾸라사절단과 거의 같은 코스를 거쳤으며 게다가 2년 이상의 장기간에 걸쳐 시찰을 행했다. 하지만 푸안천사절단의 존재는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해 개설서 등에서 간단하게 언급되는 정도였고, 본격적인 연구로는 사까모또 히데끼(阪本英樹)의 『달을 끄는 뱃사공: 청말 중국지식인의 미구회람(月を曳く船方-淸末中國知識人の米歐回覽)』(成文堂 2002)이 유일하다. 다만 사까모또의 연구는 중국의 사절단이 유교적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데 반해 이와꾸라사절단의 기록이 담긴 쿠메 쿠니따께(久米邦武)의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特命全權大使 米歐回覽實記)』는 훨씬 자유로운 시각으로 구미를 관찰했다고 보면서 높은 평가를 내리는 등, 지금까지의 연구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그래서 나는 푸안천사절단의 수행원이었던 장떠이(張德彛)의 상세한 기록인 『구미환유기(歐米環游記)』와 『회람실기』를 비교한 논문을 「 ‘화혼양재’와 ‘중체서용’ 재고: 일본·중국과 구미와의 만남」(백영서 엮음 『동아시아 근대이행의 세 갈래』, 창비 2009)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바 있다. 이 논문에서 나는 장떠이가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서구문명을 주체적·비판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쿠메도 ‘동양도덕·서양예술’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서구와 동아시아를 대비적으로 파악하려고 했지만 ‘동양도덕’이라는 것의 내용이 추상적·이념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며 결국은 서구문명에 매료되게 되었음을 논했다.
물론 당시 장떠이가 취한 이러한 입장은 자기가 속한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의식의 결여, 그것과 표리를 이루는 서구문명에 대한 과소평가라는 점에서 커다란 문제를 내포하는 것이었고, 서구문명에 대한 쿠메의 날카로운 관찰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현재적 관점에서 되돌아보면, 양자에서 관측되는 이러한 차이는 이후의 중일 양국의 다른 행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장떠이와 같이 자기 문명을 기준으로 서구를 비판하는 입장은 머지않아 자기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전화되어, ‘서구화〓문명화’라고 하는 코스를 따라간 일본과는 달리, 자기 문명의 재생이라는 중국에서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방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양자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지 않을 수 없는데, 니시까와에게 이러한 문제들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조선에서도 중국과 비슷한 현상이 존재했다. 나는 최근 발표한 「민족주의와 문명주의: 3·1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하여」(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66집, 2009)라는 논문에서 종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만 이해되어왔던 3·1운동을 문명주의라는 관점에서 다시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환기하면서, 그러한 문명주의는 유교모델의 수용에 따라 형성되었다는 점, 조선시대에 성립되어 있던 문명주의의 입장은 서구문명과 직면했을 때 재빠른 대응을 곤란하게 했고 문명주의와 민족주의의 갈등이라는 사태를 발생시켰음을 논했다.
이를 니시까와의 국민국가론과 연관시켜 본다면, 중국과 조선에서는 일본에 비해 국민국가 형성이 곤란했고 그것의 가장 큰 요인으로 유교적 문명주의의 존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일본의 역사학계에서는 유교적 문명주의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파악해왔으나 21세기의 현시점에서 이러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니시까와의 국민국가론이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에 머물러 있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만큼, 국민국가를 일본처럼 급속하게 형성하는 게 매우 어려웠던 중국·조선의 근현대사를 그 어려움 때문에 일본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고 재인식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4) 새로운 동향
위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 일본의 역사학계에서는 14세기에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유교모델의 확립과 그 보급이라는 사태를 간과하거나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경향을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 일단을 소개하면서 이후의 논의 방향을 전망해보고자 한다.
2009년에 열린 일본의 역사학연구회 대회에서 조경달(趙景達)이 발표한 「정치문화의 변용과 민중운동: 조선민중운동사연구의 입장에서(政治文化の變容と民衆運動-朝鮮民衆運動史硏究の立場から)」(『歷史學硏究』 第89號, 2009)는 전통적 정치문화와 그것의 근대에서의 의미를 묻는 입장에서 조선과 일본을 비교한 글이었다. 그는 현재 한국에서의 시민운동 등의 에너지에 주목하면서 그 연원을 조선시대의 정치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찰했는데, 이러한 조선시대의 정치문화는 유교모델 수용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민중운동·시민운동의 정체(停滯)를 바라보면서 유교모델 수용 경험의 유무에 따라 근대화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현재적인 의미 자체를 물어야 한다는 생각을 떠오르게 해준다.
야마다 에이꼬(山田央子)도 「율곡 이이의 붕당론: 비교붕당론사를 위한 하나의 시론」(栗谷李珥の朋黨論-比較朋黨論史への一試論, 渡邊浩·朴忠錫編 『韓國·日本· ‘西洋’-その交錯と思想變容』, 慶應義塾大學出版會 2005)5에서 조선시대 정치문화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공론’정치 문제에 주목하여 토꾸가와시대의 공론정치 부재와 조선시대의 정착을 비교했는데, 이 역시 종래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의 한일비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내가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후까야 카쯔미(深谷克己)가 최근 제창하고 있는 동아시아 정치문화론이다. 그의 주장과 의도는 다음의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근세 일본은 일반적으로는 무력을 점유했던 영주(무가武家·무위武威)권력의 지배체제라고 여겨져왔고, 지금도 그러한 견해가 부정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때는 근세가 임전태세(臨戰態勢)의 사회라고 이야기되거나 때로는 군국주의의 시대라고 평가되는 일조차 있었다. 이러한 견해들은 크게 정리한다면 근세 일본의 지배체제에서의 ‘무위’의 역할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소도(大小刀)를 일상적으로 휴대한 무사의 무력독점 양상과 카따나까리(刀狩, 무기 몰수)로 상징되는 피지배민중의 무장해제 양상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을 반영하는 견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관점은 영주제론(領主制論)을 핵심으로 한 봉건제론과 결부되어 있다. 일본은 아시아적이라고 말하는 경우에는 유럽의 여러 사회에 대한 일본의 후진성이 강조되었지만, 영주제·봉건제의 체제론에 있어서는 일본만이 동아시아 여러 국가와 사회와는 이질적이었고 유럽 봉건제(영주제 지배체제) 같은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견해와 결부되어 있었다. 아시아적이란 정체성, 후진성을 가리키는 말이며,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의 논의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영주제·봉건제 자체이던 유럽에 대한 억압성, 후진성이 아시아적 봉건제라는 말로 논의되고는 했다.
필자는 이전에 ‘교유성(敎諭性) 강한 인정덕치(仁政德治)’를 ‘동아시아의 초지역적(超域的) 정치문화’로 지적했다. 이것은 현단계에서는 아직 직관적이기는 하지만 여러 분야에 걸친 연구사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동아시아 세계의 정치문화와 관계된 10항목가량의 공통분모적 특징 중 하나다. 이것들을 일단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한자와 지역의 문자를 혼교병용(混交倂用)한 의사전달
② 불교·유교·도교의 보편적 토속적 초월관념(諸天·諸佛·諸神)
③ 교유성 강한 인정덕치의 정도론(政道論)
④ 노장(老莊)에서 유래한 심법(心法) 존중
⑤ 관료제(영주관료화)왕조(국가)와 대비되는 ‘백성’이라고 하는 ‘국민’ 신분의 설정
⑥ 균전평균의 평등주의적 백성안민론
⑦ 오상자애공과(五常慈愛功過)의 윤리론
⑧ 부귀여경富貴餘慶(고복격양형鼓腹擊壤型)의 지복론(至福論)
⑨ 사농공상의 양민과 구별되는 천민 신분의 설정
⑩ 태평무사의 평화론
⑪ 화이사대(華夷事大)의 신분제적 국제관계론
(「東アジア法文明と敎諭支配」, 『アジア地域文化學の發展』, 雄山閣 2006, 179면)
후까야의 이러한 주장은 탈아적 일본 ‘근세사’상(像)으로부터의 탈각을 목표로 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다만 여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공통항에 관해서는 의문스러운 부분도 많다. 정치문화의 비교만이 아니라 ‘인정덕치’를 떠받친 제도적인 면(과거제도는 그것의 핵심적인 부분이다)까지 포함할 경우 일본의 자리매김이 역시 문제가 될 것이며 신분제의 존재 양태도 동아시아 삼국 간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6 더욱이 유교적 통치의 가장 핵심이 되는 ‘예치’와 관련해서도 일본은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는데, 그 역시 정치문화를 비교하는 데 있어 불가결의 문제일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다양한 논의를 진척시킬 필요가 있을 터인데, 탈아적 ‘근세사’상을 비판하는 그 문제의식은 본고와 근본적으로 통하는 면이 있다.
4. 일본의 출구를 찾아서
현재의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어떤지 모르지만(그 역시 상당히 의심스러워졌지만)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주변 국가들에 뒤쳐지고 있다. 아직까지도 군주제가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성 천황을 인정할지 말지라는, 나에게는 만화적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보아도 한국에서는 2008년부터 호적(그것은 늦어도 고려시대 이래 천년 이상 지속되어왔던 것이었다)이 폐지되고 가족관계등록부로 전환되었다. 그에 반해 일본에서는 남녀별성(男女別姓) 논의조차 여전히 답보상태에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처음에 언급한 일본의 주변화의 발로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주변화 자체가 문제라고는 보지 않는다. 주변화라고 하는 미래에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종래대로의 중심주의 패러다임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문제이다. 21세기에 일본이 어떠한 관계를 구축할 것인가의 선택은 차치하고라도, 한국·북조선·중국 더 나아가서는 베트남 등의 여러 나라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은 자명하다. 그때에 이들 국가들이 유교모델을 수용했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현재에도 그 역사적인 경험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은 21세기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구상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역사인식의 문제로서 ‘한일병합’ 100년을 생각하는 오늘날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번역│김영아·한성대 언어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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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해록』과 『당토행정기』에 관해서는, 졸고 「최부 『표해록(漂海錄)』의 일역(日譯)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에 대하여: 강호시대(江戶時代) 일본 유학자의 동아시아관과 그 딜레마」(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56집, 2006)에서 상세히 논한 바 있다.↩
- 이또오 유끼오가 중심이 되어 진행된 한일 연구자들의 이또오 히로부미 연구성과는 伊藤之雄·李盛煥編 『伊藤博文と韓國統治-初代韓國統監をめぐる100年目の檢證』(ミネルバァ書房 2009), 이성환·이토 유키오 엮음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선인 2009)라는 제목으로 한일 양국에서 동시 출판되었다. 일본어판을 입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한국어판을 이용했다.↩
- ‘일본봉건제’론의 형성, 성립과정과 현재의 역사교육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는 다음의 졸고를 참조하기 바란다. 「일본 ‘국사’의 성립과 한국사에 대한 인식: 봉건제론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김용덕·미야지마 히로시 엮음 『근대교류사와 상호인식 I』, 아연출판부 2001), 「일본사·조선사 연구에서의 ‘봉건제’론(1910~1945)」(김용덕·미야지마 히로시 엮음 『근대교류사와 상호인식 II: 일제 지배기』, 아연출판부 2007), 「고등학교 역사교육의 세계사인식과 ‘봉건제’론」(김용덕·미야지마 히로시 엮음 『근대교류사와 상호인식 III: 1945년을 전후해서』, 아연출판부 2008).↩
- 宮嶋博史 「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日本の ‘近世化’」(『歷史學硏究』 第821號, 2006), 稻葉繼陽 『日本近世社會形成史論-戰國社會論の射程』(校倉書房 2009)의 서장.↩
- 한국어판은 와타나베 히로시·박충석 공편 『한국·일본· ‘서양’』, 아연출판부 2008.↩
- 조선시대 신분제의 존재양태를 동시대의 중국·일본과 비교한 연구로 졸고 「조선시대의 신분, 신분제 개념에 대하여」(『대동문화연구』 42집, 2003) 참조. 덧붙이자면 신분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고 근대가 되어 일본에서 수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