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탈근대적 목소리들을 향한 근대적 글쓰기

심진경 평론집 『떠도는 목소리들』

 

 

정혜경 鄭惠瓊

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 저서로 『매혹과 곤혹』 『한국 현대소설의 서사와 서술』 등이 있음. kornovel21@hanmail.net

 

 

혹자는 비평이 ‘번역’이어서는 곤란하다고 하지만, 작품 속의 잠재적 가능성(벤야민의 ‘순수언어’, 「번역가의 과제」)을 다른 언어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평은 일종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언어를 비평적 언어로 번역하면서 작품의 잠재성을 개별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이로써 비평은 작품을 거치되 종속적이지 않은 독자적 행위가 된다. 물론 벤야민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순수언어’라고 불렀던 ‘표상될 수 없는 이념’을 번역행위를 통해 해방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최근 각종 이론이 작품에 앞서 내달리는 경향을 상기할 때, 먼저 비평적 번역의 ‘충실성’에 주목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심진경(沈眞卿) 두번째 평론집 『떠도는 목소리들』(자음과모음 2009)은 소중한 비평적 자산이라 하겠다. 그녀는 새로운 문학적 경향을 포착하고 끊임없이 아젠다를 탐색하여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정치한 텍스트 분석과 유려하고도 적확한 패러프레이즈(paraphrase)를 시도한다. 심진경의 글이 비평 읽는 즐거움을 안겨줌은 물론, 공감력과 설득력을 갖춘 것도 동시대 문학의 생생한 현장에 밀착해 있는 것도 모두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윤성희 김애란 표명희 소설의 왜소한 개인주의에서 어떻게 긍정의 태도가 현현하고 타자에게로 길이 열리는지 그 과정을 밝힌 「미저러블 개인주의, 단자윤리의 생태학」, 배수아 김태용 김숨 소설에 나타나는 기이한 목소리들 혹은 침묵이 자아를 탈중심화하고 타자화하는 반성적 경향이라고 분석한 「떠도는 목소리들」, 강영숙과 한유주에게서 공통적으로 ‘허공에서의 글쓰기’를 발견하고 거기서 출발해 두 작가의 소설이 어떻게 다른 길을 걷는지를 추적한 「새로운 거짓말과 진부한 거짓말」 등은 그 제목에서부터 비평가의 신선하고도 신뢰할 만한 명명(命名)을 보여주는 이 비평집의 성과라 하겠다.

심진경이 끊임없이 비평적 리비도를 발산하는 대상은 2000년대 문학, 그 가운데서도 “불투명하고 불확정적인, 전혀 보편적이지 않은 존재들”, 이른바 “떠도는 목소리들”, “포스트모던한 나르시시스트”(7면)이다. 이는 2000년대 문학현상을 지적한 것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비평가가 2000년대 문학의 잠재적 가능성을 번역하고 구성한 담론적 특징이다. 그녀가 이러한 목소리들로 향하는 것은 그 작품들이 새로운 문학의 윤리를 생성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심진경에게 문학과 현실의 관계는 줄곧 포기되지 않는 기본항목이었다. 전도된 방식이라도 소설은 현실적 맥락과 관계하는 것이며, 현실을 성찰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한유주 박형서 이기호의 소설이 불투명하고 불확정적인 형상이나 글쓰기를 보여주더라도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현실의 절망을 수락하고 통념을 반복한다고 보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처럼 이 비평집에서 대상 텍스트의 목록은 비평적 호오(好惡)가 아닌 비평적 시비(是非)의 차원에서 작성되고 있다.

『떠도는 목소리들』에서 옹호되는 텍스트 분석에는 유독 ‘역설적이게도’라는 말이 자주 나타난다. 저자가 말하는 문학의 윤리는 구체적으로 ‘역설’의 미학에서 발견되는 셈이다. 첫 평론집(『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에서부터 이번 책에 이르기까지 그 역설의 미학을 담당할 가능성은 주로 ‘여성문학’에서 탐색되고 있다. 이는 저자가 서문에서 현재 페미니즘이 처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제시하면서 “이번 평론집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듯 보이는 이런 얘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유는, 비록 여성문학을 전면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이번 평론집에 실린 글 역시 여성문학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성문학에 대한 지론을 보여준다거나, 2부에서 여성성에 대한 이론을 개진하면서 권여선 김혜순 강영숙의 작품을 적극 천명하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강영숙 소설 분석에서 보듯 서로 모순된 속성이 축적되어 나타나는 불투명한 성적 정체성(복수적 젠더 ‘들’ 혹은 탈젠더적 존재)이 세계와 조응하면서 타자에 이르는 길을 새로운 여성성의 미학으로 제시한다. 여성성이란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끝을 알 수 없는, 늘 새로운, 그래서 모호한 문학의 본질 그 자체”(149면)이며 ‘떠도는 목소리들’ 혹은 ‘탈근대적 목소리’를 상징한다.

여기서 두가지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부정성을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150면)는다는 점에서 여성성을 문학의 본질 그 자체로 확장하거나 “주변화된 모든 것”(149면)으로 규정할 때, 여성문학은 여전히 ‘여성’ 문학일 수 있는가? 저자가 이분법적 구도의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시도한 방향은 여성문학의 자기부정이 되거나 주변부 타자들의 타자화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곤경은 여성성에 대한 이론적 진술들 간의 모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페미니즘문학을 이론적으로 개괄하고 그 전망을 밝힌 글(「여성성 혹은 문학적 상상의 원천」)에서 여성성을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가 아닌 절대적 타자성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듯하지만, 여성성을 “규범적이기보다는 기술적이며, 고정적이기보다는 유동적이고, 단선적이기보다는 다면적인 성격을 갖는 개념”(139면)으로 설명할 때는 다시 남성성과의 관계 구도를 전제한다. 또 “ ‘여성적 글쓰기’, ‘몸으로 글쓰기’와 같은 여성성의 시학 또한 여성문학에 활력을 가져다주기보다는 공허한 동어반복에만 머물렀”(148면)다고 평가했지만 저자가 줄곧 새로운 여성성의 미학으로 거론한 김혜순의 시와 시론(『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이야말로 ‘여성의 몸이 시적 방법’이 된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둘째, 탈근대적 미학에 접근하는 비평적 번역이 인과성을 촘촘히 밝히는 근대적 글쓰기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특히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내는 하성란 소설(「무심결에 쓰는 소설」)이나 “자아해체적이고 자아증식적인 유체(流體)”를 토해내는 김혜순 시를 분석하는 글(「김혜순 시의 미로에서 길을 읽다, 잃다, 앓다」)에서 문장 간의 결속력(cohesion)을 높이는 접속사가 강박적으로 빈발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르지 않고 갇혀 있는 물은 비극적이다. 왜냐하면 ‘가도가도 메마른 바다 삶은 언제나 죽음의 나선형 주머니’(「수족관 밖의 바다」) 안에서만 맴돌기 때문이다. 김혜순의 시에서 물을 가두어두는 수족관이나 어항은 우리를 강퍅하고 메마르게 한다 (…) 그래서 이 불쌍한 사랑 기계는 ‘전화기를 붙잡고 혼자 짖’는다. 그러나 소통의 도구인 전화기는 ‘붉은 낙태아처럼 말이 없’다(「비에 갇힌 불쌍한 사랑 기계」).”(192면, 강조는 인용자) 대상텍스트로 하여금 직접 말하게 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비평적 언어는 그것을 연결하는 데 자족하기도 한다. 동일성의 세계에 머무르는 김애란 소설을 읽을 때는 유려하고 설득력있던 분석이 여기에 오면 강박적으로 흔들리는 것이다. 자꾸만 산포하고 흘러내리는 시를 조각내어 선후와 인과관계를 내장하는 서사로 만드는 비평적 번역, 다시 말해 지향점과 접근방식의 거리를 재고해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