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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조희연 『동원된 근대화』, 후마니타스 2010

지구화시대의 박정희 읽기

 

 

김원 金元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 labor2003@naver.com

 

 

근대화, 개발주의. 이 두 단어는 박정희 집권기를 앞 시기와 구분짓는 키워드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의 한가운데에 놓였던 과제는 빈곤이었다. 4월항쟁 직후 각종 민주화시위에서 터져나온 구호의 행간에는 ‘가난으로부터의 탈피’가 스며 있었다. ‘남북통일로 가난 해결’ ‘실업자 구제’ 등의 구호만 봐도 통일과 민주화의 이면에 대중의 빈곤탈출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50여년이 지난 지금, 근대로부터 거리두기라거나 근대화의 모순과 한계 등이 언급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박정희씬드롬, 개발주의, 경제성장률 등 근대화시기를 지배한 상징과 언어들은 한국사회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조희연(曺喜昖)의 『동원된 근대화』는 ‘개발동원체제’ ‘모순적 복합성’ ‘헤게모니 균열’ ‘복합적 진보’를 중심개념으로 박정희체제의 정치사회적 동학의 이중성을 분석한다. 독재를 둘러싼 선악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독재 형성 및 재생산과정에서 대중 합의(혹은 동의)를 강조한 ‘대중독재론’은 이미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대중독재론과의 논쟁 과정에서 박정희체제를 헤게모니가 부재한 억압 일변도로 해석한 기존 진보학계를 자기비판하면서 박정희체제의 헤게모니적 성격과 더불어, 그 안에 내장된 ‘헤게모니의 균열’-이른바 “성공에 내재한 위기”(25면)-을 동시에 주목한다. 박정희체제를 둘러싼 ‘모순적 복합성’을 방법론적 테제로 채택함으로써 동원된 근대화의 이중성과 복합적 진보의 분석틀을 구상하고자 한 것이다(12, 23면).

저자는 대중독재론의 비판을 전유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시각과 방법론을 제시하려 노력한다. 이 점에서 『동원된 근대화』는 80~90년대에 나온 박정희체제 연구의 성과를 개념과 방법론 측면에서 극복하고자 한 노작임에 분명하다. 다만 평자는 몇가지 방법과 시각에서 넘어야 할 지점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그는 ‘우리 안의 보편성’을 언급하면서 한국을 특수한 대상이 아닌 일반적 특성을 지닌 대상으로 파악한다. 서구 현실을 과도하게 보편화하지 않고 한국 현실에서 일반적 요소를 추출해내는 ‘보편적 독해’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14면). 또한 비교사회학적 관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적극적 측면을 긍정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 역사를 서구 사례에 맞춰 부정하는 종속적 태도를 버리고 우리 자신을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공동체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330, 410~11면). 그런데 평자는 한국 사회과학의 서구중심주의라는 종속성 비판에는 동의하지만, 서구적인 것에의 종속이 ‘한국적 사회현상’의 일반성으로 곧바로 대체될 수는 없다고 본다. 또한 아이러니한 점은 서구중심주의에 비판적인 조희연 자신도 글의 곳곳에서 근대적 지배로서 서구 민중의 개인·개별화와 구분되는 제3세계의 국민·민족통합(197면), 다양한 자원을 동의기반으로 동원했던 서구 파시즘과 달리 한국 파시즘은 후반으로 갈수록 효과를 상실했다는 점, 동의의 측면뿐 아니라 동의의 균열이라는 측면이 드러나는 사례(302면) 등 ‘서구’라는 준거틀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중심/주변이라는 위치를 전위(displacement)하려는 욕망, 다시 말해 주변의 중심화는 또다른 주변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으로 종결될 수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한국의 보편화에 앞서 중심/주변을 구분짓는 개념과 언어 자체를 지속적으로 문제시하는 동시에, 한국 등 비서구사회가 왜 서구와의 비교 속에서 그 발전 정도가 측정되어야 하며, 왜 근대역사학의 개념과 범주를 통해 분석되어야 했는지를 근본적으로 묻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한편 ‘복합적 진보’라는 틀은 절충적이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저자는 강압과 동의의 통일적 파악에 근거해 박정희 지배체제의 동의 기반을 과잉 인식하거나, 기존 진보적 분석을 강압 일변도의 분석으로 일면화하는 것 또는 전면적 동의를 가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275, 278면). 또한 결론에서 보수/진보 시각을 해체하지 않으면서 각자 시각을 견지하며 반대 시각의 역사적 사실을 해석적으로 내재화함으로써 풍부화되어야 한다고 논하고 있다(420면). 하지만 민중의 ‘영웅적’ 과정에 주목하고(303면) 70년대를 거치며 민주화운동이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근거해 대안적 인식 기반을 확장함에 따라 ‘헤게모니의 균열’ 내지 ‘적극적인 진통의 역사’(353, 409면)와 ‘주체화’를 이루어냈음을 재론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대중독재론과의 쟁점인 탈근대성, 국민국가라는 범위, 아래로부터의 동의 메커니즘 같은 이론적 쟁점과 정면대결을 피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즉 이 문제틀은 (저자의 언어를 빌리자면) ‘복합적’이거나 ‘중층적’이라기보다는 일시적 동원과 동의·동원의 임계점 발생에 따른 헤게모니 균열과 민중의 주체화라는 구도에 충실하지 않은가 싶다.

또한 이미 몇차례 논쟁이 있었지만 과거청산에서의 제도화와 국가주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듯하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성찰적 과거청산은 제도적 청산과 함께 가야 하며, 이를 전제로 한 현실적인 대안 모색 등을 언급한다(314, 316면). 하지만 국가를 통한 제도화의 현실성 외에 과거청산을 위한 다른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유보적으로 보인다. 과거청산의 정치학 역시 법적 청산이나 제도화라는 맥락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기보다 여전히 기득권층의 반발 혹은 방어적 위기의식으로 인해 최소주의적 과거청산조차 실패한 점을 언급하는 데서도(317면) 그의 입장이 드러난다.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 제기한 문제는 과거청산에 따르는 국가주의로의 소환, 과거청산의 어려움을 이른바 ‘적들’에게만 돌리는 논리 등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 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내재된 국가주의적 심성과 실천에 대한 근본적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조희연도 국가주의의 상대화를 언급하지만, 국가가 이들을 ‘국가의 이름’으로 유공자화하고 기념화하는 흐름은 과도기적인 것으로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보는 듯하다(316면). 이렇게 과거청산의 정치를 사유한다면 결국 정치의 장소는 의회, 정부, 법 기관으로 고착화된 이른바 통합의 상태로서 ‘정치의 소멸’로 귀결될 수도 있다. 자끄 랑씨에르의 말을 빌리면 정치라고 불리는 사회적 몫의 분배절차는 정치가 아닌 치안에 불과할 수 있으며, 이는 사회의 한 부분으로 ‘인정을 받은’ 이들에 대한 몫의 분배이다. 과거청산의 정치학 역시 ‘인정받은 자들의 몫의 배분’이라고 평가한다면 과도한 것일까?

끝으로 대안에서 조희연은 국민국가 지형 내 보수/진보 구도가 지구화라는 맥락에서 탈국가주의, 탈민족주의 지향을 지니면서도 근대성의 틀 안에서 작동하는 진보의 잠재력을 급진적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으며(407면), 아마도 이는 민주적이고 투명하지만 지구화로 인해 균열된 시민성을 복원할 공적주체로서의 시민의 몫이 아닐까 추측해본다(373면). 물론 이 책에서 지적한 논쟁 지형의 확장적 재구성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 지형이 ‘개방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숙고가 필요하다. 질문을 바꾼다면 과연 개방적이며 복합적인 민주-진보 담론이라는 근대적 틀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설정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강요하는 전지구화를 거부하고 타자성과 차이 혹은 혼성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근대 자본주의체제의 자기통합적 단일성의 구조를 내파하는 대항적 전지구성(counter-globality)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그것은 예측하건대 이 책에서 제시한 민주-진보 담론 지형과는 전혀 다른 형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