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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강 2010
세속비평의 즐거움
김영찬 金永贊
문학평론가, 계명대 교수 youngcritic@kmu.ac.kr
평소 영화주간지 『씨네 21』에 실리던 허문영의 영화비평을 기다리며 찾아읽었던 독자라면, 또 우리가 그냥 보고 지나쳤던 영화들의 갈피갈피에 의미의 숨결을 불어넣어 그 영화들을 우리 앞에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불러세워주던 그의 비평의 마술에 매혹되었던 독자라면, 그 글들이 묶여나왔다는 소식은 반가운 일일 수밖에 없다. 허문영의 영화비평집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은 그렇게 우리 앞에 왔다. 이 책은 말하자면, ‘진귀한’ 책이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책을 그토록 진귀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짧은 지면에 다 담기도 힘든, 능력 밖의 수다한 어사(語辭)가 필요할 터, 이 자리에서는 다만 이 책의 특징과 더불어 우리가 허문영의 비평에 어쩔 수 없이 매혹되고 기어코 설복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려 한다.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을 통독하다보면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책에는 「괴물」에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까지 동서를 막론한 다양한 주제와 장르의 영화에 대한 비평들이 묶여 있고, 그 하나하나가 모두 각각의 영화들의 결을 살리면서 그 숨겨진 의미와 맥락을 오롯이 밝혀주는 충실한 (현장)비평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다 읽고나면, 비평의 대상이 된 개별 영화들의 특수성에 갇히거나 제한되지 않는,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고 통섭하는 어떤 일관된 지적 흐름의 실체가 육중한 실재감으로 안겨온다. 영화는 비평의 눈을 빌려 제자리에 놓여지고, 비평은 영화를 정신의 힘으로 물들인다. 모든 훌륭한 비평이 무릇 그러한 것일 테지만, 그것이 지극히 오락적인 대중적 장르(라고 생각하는)인 영화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에서 이 사태는 더욱 특별하다. 여기서 물어보자. 허문영의 비평에서 영화를 대하는 모종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기도 한 그것, 그 지적 흐름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이와 겉으로는 언뜻 아무 관련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그가 서문에서 에둘러 밝혀놓았듯이 그에게 영화란 곧 서부극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 물음에 대한 답에 절반은 다가간 셈이 된다. 그에게 영화는 서부극이다.
어째서 서부극인가? 허문영에게 서부극은 “서부라는 랜드스케이프” 혹은 “존 포드의 모뉴먼트 밸리”로 기억된다. 그가 “왜 서부사나이는 저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그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라는 통증 가득한 물음을 던져야 했던 곳, 그곳이 바로 서부라는 랜드스케이프다. 그에 따르면 응시 주체가 지각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그곳은, 서부 공동체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서사를 상대화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비지(非知)와 무시간성의 심연”이며 “죽음/타자의 장소”다. 서부극(특히 존 포드의 영화)에는 랜드스케이프라는 저 초월적 공간의 시각적 형상과 그와의 거리로 인해 발생하는 분열의 고통을 감내하는 아득한 비애감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서부극이 품고 있던 그 초월적 거리는 지금은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생활공간에서, 또는 우리의 내부에서 불안과 혼란, 공포의 증상으로 살아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허문영이 모던 씨네마에서 보았던 것이 바로 그것이고, 우리 시대의 영화에서 기어코 보고야 마는 것이 또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영화들은 (약간의 비약을 무릅쓰고 비유하건대) 서부극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에 서부의 부재를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앓고 있는, 서부 없는 서부극이다.
주체 안으로 회수되지 않는 그 초월적 거리를 온몸으로 앓고 있는 영화들, 그 안에서 빛과 소리로 명멸하며 지속되는 타자의 형상들, 침묵과 여백의 한가운데서 속으로 들끓는 불안과 혼돈, 그러면서 자신의 전존재를 던지는 필사적인 지속의 안간힘. 허문영의 비평은 (그 자신이 언급한 바 그대로) 시종 그것을 영화의 증상 속에서 건져내고 그와 대면하려는 윤리적 의지로 충만하다. 저 지속하는 타자의 형상과 대면하고, 그 안간힘에 깊이 공감하고, 그 타자의 우울을 함께 앓음으로써 가까스로 스스로를 지속하려는 정신의 운동. 우리 시대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세속적 타자”의 지속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그것을 이 가혹한 시대를 어떻게든 버텨내려는 ‘나’의 지속의 힘으로 전이시키고 그 비루한 세속성에 윤리적 위엄을 부여하는 비평. 그것이 허문영의 비평이다(제목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은 그런 의미에서 더없이 적절하다).
이 책에서 그런 비평적 태도는 각각의 영화들에 대한 해석과 논평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스며 있는데, 그것이 대부분 개별 영화의 가치와 감동의 근거에 대한 논리적이고 적확한 판단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래서 예컨대 허문영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버지의 깃발」의 서사 한가운데서 “멈춰세워질 수 없는 운명의 심연”을 들춰내며 아득해할 때, 지아장커의 위대한 영화 「스틸 라이프」에서 괴물 같은 세계를 필사적으로 순응하며 걸어가는 왜소한 노동자의 육체의 형상을 두고 “이 광경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라고 경탄할 때, 우리는 그의 정서적 반응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참할 수밖에 없다. 과연 그러니 말이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지만, 임권택의 「천년학」에서 송화가 현전해 춘향가를 부르는 환상적인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죽음 이후를 상상하는 노예술가(감독)의 쓰라린 자기연민을 읽어내는 멋진 해석도 여기에 하나 첨가해두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허문영 비평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은 홍상수론에서다. 그가 홍상수의 영화에서 보는 것은 “낯선 타자의 형상들과 소리들과 움직임들”, 체계 없이 떠도는 기표들의 물질성, 침묵과 여백, 머뭇거림 속에 스며 있는 일상의 불안과 혼돈, 그것을 통해 전해져오는, “의미도 명분도 없는 부조리한 삶의 육중한 실재감” 같은 것들이다. 그는 지옥 같은 세속도시의 사소한 일상에 잠복한 파편화된 삶의 불안을 이상한 유머와 의미 없는 비논리의 연쇄, 냉소와 마조히즘에 얹어 묘사하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 괴물 같은 삶의 한가운데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지속하려는 타자의 힘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을 드러낸다. 어떤 이데올로기나 환상도 거절하고 이 괴물 같은 세계를 기꺼이 제 몸으로 앓으면서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가까스로 버텨내는 것. 허문영이 홍상수의 영화에서 보는 것은 아마도 그런 것일 터, 짐작건대 (카메라가 아닌 만년필이 그의 도구이긴 하나) 그의 비평의 태도가 또한 어느 면 그와 방불한 것이겠다.
이와 관련해 누군가는 아마도 허문영의 비평이 주관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느낀다” 같은 표현이 많은 것이나, “눈물을 멈추고 이 장면을 볼 도리가 없다”는 식으로 때때로 주관적 감상을 숨김없이 노출하는 것도 그 징후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외면상의 주관성이 영화의 발언과 형식을 쉽고 명징한 언어로 차근차근 짚어가며 해석해내는 논리의 객관성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 또한 허문영 비평의 특성이다. 특히 홍상수, 이창동, 봉준호, 박찬욱 등의 영화를 비롯한 한국영화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이 책의 1부와 2부에 실린 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영화에서 보았으되 보지 못한 것, 혹은 영화에서 돌출되는 한치의 이상한 어긋남과 머뭇거림 안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영화 전체의 진짜 비밀을 드러내 보여주는 흥미로운 솜씨는 바로 그에 뒷받침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겉보기에 허문영의 비평이 주관적이라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의 비평이 우리 시대의 삶에 대한 주관적 감각을 영화 읽기에 개입시켜 그것을 영화의 중요한 의미의 한 부분으로 통합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단지 그가 영화 바깥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고 있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에게 영화란 “온전히 그 자신이 기원인 하나의 세계”다. 따라서 그것은 외부를 갖지 않으며, 가져서도 안된다(서부극이 과연 그렇지 않은가). 그가 정치적 관념을 관습적인 서사를 통해 전달하는 켄 로치의 영화나 다큐멘터리 장르의 약속을 깨버리고 극영화적인 카메라 조작을 통해 감동을 이끌어내는 「워낭소리」에 동의하지 않는 것도 그런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는 오히려 거꾸로 그 자신만의 빛과 소리의 소우주에 깊이 충실함으로써만 그 바깥과 의미있게 교통한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그 안의 과잉과 침묵을 통해 우리시대의 증상을 드러내고 삶에 대한 이해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허문영의 비평은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비평이다.
허문영은 이 책의 서문에 이런 물음을 적어놓았다. “왜 영화를 필요로 하는가.” 그는 그에 대해 영화란 “길들여지지도 않고 배제될 수도 없는 지속하는 타자의 감각적 힘이 우리의 지속의 힘으로 마술적으로 전이되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의 비평은 (정성일의 표현대로) 그 ‘장소’와 나누는 사려 깊고 열정 어린 “우정의 대화”다. 이제 그의 물음을 이 자리에서 다시 바꿔 묻는다면 그것은 이런 것이다. “왜 영화비평을 필요로 하는가.”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은 그 자체 이 물음에 대한 설득력있는 답변이다. 그러니 아마도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그리고 필시 허문영 비평언어의 지속이 우리의 지속의 힘으로 마술적으로 전이되는 듯한 환상을 경험해본 독자라면, 그가 「하나 그리고 둘」의 감독 에드워드 양에게 하고 싶어했던 말(“당신은 좋은 감독입니다”)을 그에게 그대로 돌려주고픈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감독’을 ‘비평가’로 바꿔 읽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