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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앤젤러 카터 장편소설 『매직 토이숍』, 창비 2010

잔혹과 매혹의 상상력

 

 

김영주 金瑛株

서강대 영문과 교수 youngjoo@sogang.ac.kr

 

 

영국 여성작가 앤젤러 카터(Angela Carter, 1940~1992)는 사실주의와 환상적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다양한 장르의 혼종을 통한 대담한 글쓰기로 성정치학 및 문화정치학의 주제들을 주로 다뤄왔다. 1966년 첫 소설 『그림자 춤』(Shadow Dance)으로 등단한 이래 9권의 장편을 포함해 24편이 넘는 다양한 작품을 남긴 카터는 환상과 고딕소설, 포르노그래피, 신화 및 동화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차용하여 젠더와 兒슈얼리티, 문화와 권력, 폭력과 성애 같은 문제들을 도발적으로 작품화했다. 이러한 작품세계로 그녀는 사실주의 양식을 중심으로 하는 전후 영국소설계에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으며 꾸준히 평단과 독자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1979년 유럽 전래동화와 민담 등을 현대적인 시각에서 다시 쓰고자 시도한 단편집 『피로 물든 방』(The Bloody Chamber)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80년대 이후로 점차 넓은 독자층을 형성하는 동시에 영문학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가 중 하나로 떠올랐다.

카터의 두번째 장편 『매직 토이숍』(이영아 옮김)은 소녀의 성장담이라는 익숙한 사실주의 소설의 틀에 고딕소설의 모티프, 성서와 신화 및 고전 영문학에서 가져온 요소들을 접목해 독특한 서사를 구현한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던 열다섯살 소녀 멜러니는 어느 여름밤 엄마의 웨딩드레스를 몰래 꺼내 입고 환한 달빛 아래 펼쳐진 신비로운 정원으로 발을 내딛는다. 달콤하고 촉촉한 풀내음 어린 밤공기 속에서 태곳적 미지의 땅에 선 듯한 황홀경에 사로잡혀 있던 멜러니는 깊은 어둠을 품은 광대한 하늘을 보며 제어할 수 없는 두려움에 빠져든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부모의 비행기 사고로 멜러니는 고아가 되고, 안락했던 집을 떠나 외삼촌의 집에 얹혀살기 시작한다. 목각인형, 가면, 박제새 따위를 만들어 파는 필립 외삼촌의 기괴한 장난감 가게를 배경으로 그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멜러니의 새로운 생활이 펼쳐진다.

작품 속의 기괴하고 음산한 마술 장난감 가게는 ‘푸른 수염의 사나이’가 아내를 가두고 살해하는 유럽 전래동화의 성, 또는 영국 고딕소설의 효시 『오틀란토 성』에 나오는 근친상간의 욕망과 지배욕으로 얼룩진 오틀란토 성 등 낯익은 고딕문학적 공간을 변주한 것이다. 필립의 폭군적 면모는 가게일을 거들며 그의 도제로 일하는 열아홉살 핀에게 가하는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결혼식 날부터 말을 잃고 수척해진 마거릿 외숙모, 가족식사 때마다 무겁게 흐르는 위압감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외숙모를 도와 부엌을 정리하던 멜러니가 칼이 든 서랍에서 피가 낭자한 잘린 손목의 환영을 보는 장면은 금기를 어긴 아내를 차례로 살해하여 매달아놓았다는 ‘푸른 수염’의 잔인성과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공포를 효과적으로 환기한다. 전래동화 및 민담에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 신화에서 기원하는 원형적 욕망과 폭력이 소설 속의 일상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카터 소설세계의 특징을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은 필립의 인형극 공연이다. 가게 지하에 극장까지 꾸며놓은 필립은 꼭두각시 제작과 공연에 애착을 갖고 있다. 주변 인물, 특히 여성을 인형으로 만들어 볼거리로 전환하는 동시에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한 서커스의 장을 주도하는 인형극 단장은 카터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기도 하다. 『매직 토이숍』에서도 인형극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에 내재한 욕망을 극화하는 동시에 거칠고 점잖치 못한 웃음과 아이러니로 그 폭력성을 희화화한다. 필립의 인형극에서 멜러니는 여자 꼭두각시를 대신해 고무와 목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백조를 상대하는 레다 역을 맡게 된다. 제우스가 백조의 몸을 빌려 레다를 겁탈하는 그리스신화를 재현하는 이 인형극은 필립의 근친상간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한편, 그가 만든 백조의 “볼품없고 추하고 괴상”한 외양은 그 욕망과 폭력을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서구문화사에서 거장들에 의해 빚어지고 그려져온 수많은 ‘레다와 백조’ 조각과 그림들, 혹은 예이츠가 시 속에서 문명의 전환점으로 찬미한 남성신의 욕망과 폭력, 그 매혹과 잔혹은 이제 조잡한 인형극에 넘치게 담겨 우스꽝스럽고도 공포스러운 신화, 일상 속의 신화가 된다.

『매직 토이숍』은 필립이 수립한 가부장제 질서의 와해, 은밀하고 억압적인 ‘푸른 수염’의 성, 오틀란토 성의 해체를 상상한다. 필립의 욕망을 대리수행한 백조인형은 결국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가 열렸던 곳, 이제는 폐허가 된 공원에 조각난 채 버려진다. 화재로 소실된 수정궁 터에는 대영제국의 위용은 간 데 없고 빅토리아 여왕의 조각상 역시 이제는 “황무지의 여왕”이 되어 허리가 꺾인 채 버려져 있을 뿐이다. 두 동강 난 빅토리아 여왕 조각상 아래 묻힌 백조인형은 필립으로 대변되는 빅토리아조의 질서, 제국주의적 가부장제의 몰락을 상징한다. 아일랜드 여인을 아내로 들여 집안에 가두고 아일랜드 청년들을 착취하고 억압했던 필립은 가부장제 사회규범을 거스르는 마거릿과 그 남동생 프랜씨의 관계로 인해 오쟁이진 남편이 된다. 필립의 분노와 그에 맞서는 마거릿과 프랜씨의 저항 속에 마술 장난감 가게는 불길에 휩싸여 무너져내린다. 불길을 피해 지붕 위로 올라가 핀과 마주선 멜러니는 밤의 정원에서 다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매직 토이숍』에서 그려지는 멜러니의 성장담은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여성의 주체성 회복을 희구하는 여성주의 입장에서 볼 때 미진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익숙하고 상투적인 모티프들에 차용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카터의 소설은 낯익은 모티프들에 기발하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불어넣어 낯설게 만들고 재치있고 열정적인 언어로 생동감을 부여한다. 그녀의 서사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를 벗어난 개인 여성주체의 회복이라는 근대적 이슈를 소설적으로 실천한다기보다는 성과 권력, 욕망과 폭력을 둘러싼 문화담론의 허구성 및 신화성을 비판적으로 또 유희적으로 해체하며, 여성의 성과 욕망 발현의 가능성을 그 신화에 개입함으로써 모색한다. 『매직 토이숍』에서 발견하게 되는 여러 특징들, 즉 감각적인 직접성과 비판적 사유, 환상성이 부여하는 현실로부터의 자유로움과 역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현실의 불가피성, 기괴하고 음울한 욕망의 구도에 대한 이해와 이를 희화화하는 유머,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희망과 유토피아적인 비전에 대한 비판적 자의식 등은 이후의 작품들에서 튼실한 씨줄과 날줄로 짜여 고유의 긴장과 풍요로움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