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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주 『변영만 전집』 성균관대출판부 2006

동서고금을 넘나든 박학

 

 

송재소 宋載卲

성균관대 교수, 한문학 skjisan@hanmail.net

 

 

변영만-전집

변영만(卞榮晩), 변영태(卞榮泰), 변영로(卞榮魯) 삼형제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특이한 인물들이다. 변영태는 1951년 외무부장관 자격으로 파키스탄의 라호르에서 개최된 에카페(ECAFE,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후 여행경비를 남겨 반납한 일로 유명하다. 그만큼 청렴하고 강직한 인물이었다. 변영로는 『명정 40년』(서울신문사 1953)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오상순, 이관구, 염상섭과 함께 술에 만취한 채 성균관 뒷산에서 알몸으로 소를 타고 공자를 모신 성균관 앞을 유유히 지나간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또한 그는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로 시작하는 절창 「논개」를 쓴 시인이기도 하다. 맏형 변영만은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문하에서 수학한 한학자이다. 이들 삼형제는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기질 외에도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외무부장관 시절 변영태의 유창한 영어는 세인이 인정한 바이고, 변영로는 1919년 독립선언서를 영역했고 1953년에는 영문일간지 Korean Republic의 주간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 고려대와 성균관대의 영문과 교수를 지냈다. 반면에 변영만은 독학으로 영어를 익혔다.

 

나는 일찍이 스승이 없이 스스로 영문을 익혔다. 영문을 통해 널리 서양서적을 읽으면서, 읊조리고 반복하여 그만두지 않은 지가 이미 십년을 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또한 지대한 즐거움을 그 사이에서 얻게 되었다. 대개 동양의 성인(聖人)과 서양의 성인은 그 심성과 술지(術志)가 일찍이 일치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동양의 문장과 서양의 문장은 그 성광(聲光)과 신미(神味)가 일찍이 서로에게 발명될 수 있지 않음이 없다.(「사사로운 기록」, 상권 568면)

 

그는 전통적인 한학으로 출발했다. 그러면서도 한학에 매몰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그가 남긴 글은 대부분 한문 저작이지만 국한문체의 글도 적지않다. 그리고 신구문명의 교체기에서, 한학을 하는 자가 서양을 무시하고 신학문을 하는 자가 한학을 무시하는 편향적 사고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영문서적을 읽으면서 “지대한 즐거움”을 얻는다는 그의 학문성향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약관 19세부터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여 국한문으로 계몽적 성격의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중년 이후로는 문학, 특히 한문학 쪽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의 본령은 역시 한문학이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전통 한학자의 눈에 곱게 보였을 리 없다. 그는 1923~24년에 영남의 한학자 조긍섭(曺兢燮) 및 그 제자들과 이른바 ‘문학논쟁’을 벌였는데 조긍섭은 그의 문장을 “기문(奇文)”으로 평가했다. 그가 서양문장에 오랫동안 마음을 두어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동화되어버렸거나 동서와 고금을 함께 아우르고자 한 결과 그의 글이 상궤(常軌)를 벗어난 기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그는 “타고난 성품이 남의 것을 베끼기 좋아하지 않아, 말은 반드시 자기가 창작한 것이고, 뜻은 매양 홀로 걸어간 것”(상권 269면)이라 변명했다. 또 “영만은 다만 영만의 문장을 창작하고자 할 뿐입니다”(상권 274면)라고 단호하게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이렇게 그는 인습적인 옛글의 모방을 반대했다. 그는 “언어문자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주색잡기에 갇혀 있을 일이다. 후자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지만 전자에서는 혹 어렵기 때문이다”(상권 114면)라 말했는데, 이는 옛글의 모방과 답습이 창조적인 개성을 얼마나 억압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따라서 그는 ‘도본문말(道本文末)’이라는 전통적 문학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조긍섭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록 스스로 도덕을 끊어버리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또한 감히 도덕을 자임하지도 않았습니다”(상권 273면)라고 말했다. 그는 문학의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했다. 그는 도덕에 종속되지 않는 문학을 “영세의 국외중립”이란 말로 표현하고, 일류문인이 되려면 “부유한 無家者”(wealthy vagabond)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도 있다.(하권 242면)

기존 도덕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그의 사고는 매우 활달하다. 종교에 대해서도 유가와 묵가와 불교와 기독교와 도교의 장단점을 밝히고 이 모두를 아울러 가지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상권 109면). 또 한국인이 가난한 이유로 논농사, 쌀밥 편중, 흰옷 착용, 온돌 생활 등을 들기도 하고(하권 209~10면), 아동들에게 왼손과 오른손을 함께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하권 213면). 그는 한글에도 관심을 가져 ‘학교’를 ‘배움집’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최현배 유의 한글전용을 비판하여 “학교 2자를 仍用(잉용)한다고 우리가 멸망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다(하권 186면). 또한 “세계 何國(하국)을 물론하고 절대적의 純土語(순토어)로만 조직된 국어는 없는 법이다”(하권 208면)라 하여 편협한 국수주의를 비판했다. 이밖에도 삐까소, 빠스깔, 괴테 등에 대하여 도도한 논설을 펼치기도 했고, 예이츠, 블레이크 등의 시를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잊혀져온 변영만의 업적은 한국 근대문학사 또는 근대문명사에서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징검다리로 평가되어야 한다. 『변영만 전집』은 상·중·하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에는 한문 저작의 번역문, 중권에는 한문 원문, 하권에는 국문 저작들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하권에는 논설, 단평 외에 시조 100여 수와 소설 3편, 기타 창작시가 들어 있어 그의 문학적 경향을 살피는 데에 좋은 자료가 된다. 번역은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선생의 엄밀한 손길을 거쳤기 때문에 더이상 좋을 수는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