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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5034조광희 趙光熙

1967년 서울 출생. 민변 사무차장과 여러 영화사의 고문변호사로 일했고, 현재 영화제작사 ‘봄’ 대표이자 변호사로 활동중이다. hehasnoid@gmail.com

 

 

 

그래봐야 영화, 그래도 영화!

 

 

리버풀의 전설적 축구감독 빌 샹클리는 축구가 ‘삶과 죽음의 문제’라고 믿는 사람들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축구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나는 무언가를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열정에 놀랐지만, 그게 과연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레토릭에 불과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살다 보면 무엇인가에 몰입해 그것을 생사의 문제보다 우위에 놓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내가 보기에 삶의 부분집합에 불과한 어떤 것이 모든 경험의 총체인 삶과 그것을 무화시키는 죽음의 문제가 가지는 중요성을 넘어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주 감성적이 되기도 하지만, 논리적인 것에 어긋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나는 인생의 어느 한순간에도 그러지 못했다.

고백하건대, 나에게 삶은 축구보다는 물론, 예술보다 그리고 사랑보다도 우선한다. 어쩌면 진리보다 우선하며, 역사보다 우선할지 모른다. 어떤 무엇도 내 삶 안에 배치되는 것이지 삶을 넘어서지 않는다. 성정이 그런 까닭에 나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과잉을 기피한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잔에 물을 가득 채우려면 잔을 넘치게 하는 수밖에 없으므로 절대로 물을 흘리고 싶어하는 않는 자는 잔을 가득 채울 방법이 없다. 극한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질도 부족했지만, 그 기질 때문에 예술가가 되지 못한 채 딜레땅뜨가 되었고, 운동가가 되지 못한 채 변호사가 되어, 극한까지 가본 사람들에게는 은근한 경멸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어떤 별종들에게는 그들의 삶에서 그것을 제거해버리면 삶이 성립되지 못하는 무엇이 있다. 그것이 누구에게는 축구이며, 누구에게는 예술이고, 누구에게는 사랑이다. 누구에게는 진리이며, 누구에게는 역사다. 그들은 도리어 삶이야말로 그것을 위해 종사하는 것처럼 그것에 삶의 모든 것을 건다. 마치 그가 그것을 선택했다기보다는 그것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삼켜버린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러한 태도에 경외감을 갖기는 하나,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 무언가를 삶과 죽음의 문제보다 우위에 놓을 때 비로소 그 삶이 온전해진다는 역설을. 그 삶이 아우라를 얻게 된다는 진실을. 나는 살면서 삶보다 영화를 우위에 두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한 표현이 지나치다면 그들의 삶과 영화가 구별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영화사 대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간혹 묻는다. 예전부터 영화를 좋아했느냐고. 거듭되는 질문이지만 나는 매번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고민에 빠진다. 물론 좋아했다. 그렇지만 전업은 고사하고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좋아서 자주 보고, 관련된 책을 뒤적거리며, 씨네마떼끄를 드나든 것이 전부라면 전부다. 내 개인사를 샅샅이 뒤져보아도 영화광의 기미는 없다. 내가 영화에 대한 취미를 넘어서 영화에 연루된 데는 우연한 계기가 있다.

이제는 유토피아도 인류종말도 아닌 것으로 판명된 밀레니엄을 눈앞에 두고 있던 1999년의 어느 밤이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선배가 봉천동의 집으로 초대를 했다. 거기에는 소설가 조경란씨와 그 무렵 「처녀들의 저녁식사」라는 멋진 데뷔작을 연출한 임상수 감독이 있었다. 소설가 조경란은 매우 인상적인 미인이었기 때문에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명분도 없고 기회도 없었다. 다만, 나중에 출간된 그녀의 단편소설에서 그날의 자리가 짧게 묘사된 것을 발견하고, 작가들과 교류하면 언제든지 작품의 등장인물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무렵 나는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두번이나 보았던 터였고, 임감독은 자기 영화를 두번이나 보았다는 사람을 싫어할 까닭이 없었다. 당시 임감독은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한 씨나리오를 쓰고 있던 때이기도 하여 몇차례 더 만났는데, 그러다가 사흘이 멀다 하고 의기투합하는 술친구가 되었다. 임감독은 직설적이고 다혈질이라서 나와는 성향이 달랐지만, 나는 그의 재담과 열정 그리고 독설 너머에 있는 마음 깊은 곳의 순수한 기질을 좋아했다.

나는 임감독을 통해 그리고 그로 인해 알게 된 사람들을 통해, 당시 도약기에 있던 한국영화계의 주요한 인물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후에 「로드무비」로 데뷔한 김인식, 당시에는 씨나리오 작가이던 「방자전」의 김대우, 「스캔들」의 이재용,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등 문제적 감독들과 친분이 생겼고, 그밖에도 대부분의 뛰어난 감독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대표로 있는 영화사 봄의 제작자 오정완, 명필름의 이은, 심재명, 영화제작가협회 회장 차승재, 최근에 「시」를 제작한 나우필름 이준동 대표 등과도 인연을 맺었다.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던 영화계도 지속적인 법률자문을 필요로 하는 시점이었기에 그중 상당수는 내 의뢰인이 되었고, 몇몇은 남다른 친구로 남았다.

요즘은 새로운 사람들과 술마시는 것을 꺼리게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사람이 그리울 시절이라 앞뒤 안 가리고 어울렸는데, 술자리를 마치는 시간이 새벽 두세시는 예사였다. 나는 무엇에 홀렸는지 밤을 새워가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마법 같은 세계에 빨려들어갔다. 그 세계는 낮의 명징한 세계와는 사뭇 달랐다. 어느 밤에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몇달 뒤에는 영화가 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이 되었다. 어제 마신 술이 내일의 예술이 되고 미래의 화폐가 되었으며, 그것이 다시 예술이 되고 술이 되었다.

그곳은 신비한 동화와 날선 승부가 교차하는 세계였다. 그중에서도 내가 늘 경이롭게 생각했던 것은 그들이 낮에도 밤에도 쉬지 않고 영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본격적으로 법률논쟁을 하는 변호사는 드물었기에 그 풍경은 내게 낯설게 느껴졌다. 적어도 변호사들은 공장을 나오면 공장 이야기를 어느정도 접어두는 것이 통례인데, 이들의 삶에는 그런 경계가 불분명했다. 세상이 공장이고, 공장이 세상이었다. 삶이 영화였고, 영화가 삶이었다. 도대체 영화의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사로잡았을까. 영화는 과연 그런 정도로 의미있는 일일까.

 

예술적 창조와 체험의 본질에 대하여 깊게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영화’라는 매혹의 정체가 궁금했다. 물론 ‘영화’라는 말은 ‘책’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전달하는 텅 빈 그릇에 불과하다. 그릇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너무나 다른 결과를 낳기 때문에 그저 ‘영화’라거나 단지 ‘책’이라고 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 만일 누군가 한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인데 늘 읽는 것이 이제는 B급문화의 전설이 되어버린 『썬데이 서울』 류의 선정적인 잡지뿐이라면, 우리는 그를 과연 독서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수백만 자리까지 적어놓은 책을 강박적으로 반복해 읽는 것이 취미인 사람이라면, 일단 정신과의사와 면담해볼 것을 권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영화감상에 몰두하는 어떤 사람이 두문불출하며 심취하는 것이 ‘하드코어 포르노’라면 그를 영화광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다행히 우리가 ‘영화를 만든다’ ‘영화를 즐긴다’라고 말할 때 염두에 두는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공감대가 있다. 차승재 회장의 지론은 그 핵심에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공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것이 다큐멘터리건 극영화건, 실사영화든 애니메이션이든, 사람들이 영화에서 관심을 갖는 것의 본질은 ‘이야기’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이야기’를 가장 실감나게 전달하는 형식이 영화라는 견해에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을 매혹하는 그 ‘이야기’란 무엇일까. 그것은 ‘마사이족이 어떻게 살고 있다더라’ ‘고래가 어떤 이유로 멸종위기에 처했다더라’라는 인류학적・생태학적 지식에 관한 것을 넘어서는 무엇인데, 사람마다 관심을 보이는 ‘이야기’는 천차만별이라서 어떤 ‘이야기’라고 꼭 집어 말하기는 곤란하다. 나는 공포물에 관심이 없지만, 어떤 사람은 호러영화에 빠져든다. 어떤 이는 SF에 심취하지만, 어떤 이는 로맨틱 코미디를 찾는다. 누구는 사회비판적인 영화에 공명하고 누구는 영웅서사에 기절한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인간이 즐기는 ‘이야기’의 유형을 집요하게 정리해내기도 했고, 심지어 모든 이야기의 원형은 ‘길을 떠난 영웅’의 이야기라고 제시하기도 했다. 천차만별인 ‘이야기’들을 하나의 공통된 틀로 묶는 것은 무리겠지만 아무튼 대부분의 사람이 빠져드는 것은 그저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는 아니며 적어도 ‘어떤 존재가 마주친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이 지상에서 그 비슷한 일이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치킨 런」처럼 닭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아바타」같이 외계인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이야기’들은 이렇게 말을 걸며 우리를 유혹한다. “혹시 이런 삶이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어떤 의미에서든 실재 그 자체는 아닌 어떤 ‘이야기’를 즐기고 만들어내는 일이 우리가 직면한 삶의 문제만큼, 그리고 인생을 걸 만큼 중요한 것인가. 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그 무엇도 삶에 우선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삶에 우선하고 있다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전제하고 살아가는 것은 어쩐지 미덥지 않다. 그 무엇이 예술이든 공동체의 운명이든 간에 나는 거기에는 일종의 거대한 사기가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자. 만들어진 ‘이야기’에 비해 우리 삶은 그렇게 견고한가.

내가 어디에 가든 나를 따라다니는 삶은 내가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자 기회다. 그리고 나는 지구에서의 삶처럼 신비로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소설이자 영화인 「쏠라리스」에서 우리의 기존 관념으로 도저히 설명할 길 없는 현상이 벌어지는 ‘쏠라리스’ 행성을 지켜보며 신비감에 빠져든다. 그런데 지구에서의 삶이 쏠라리스 행성에서나 있을 법한 신비로운 일에 못 미치는가. 아니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일이 덜 신비롭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단지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여기야말로 이야기 속 쏠라리스 행성보다 더한 진짜 쏠라리스 행성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신비로운 행성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그 신비를 만끽하기는커녕 자신의 삶을 변변치 않고 흔해빠진 무엇으로 느끼기 십상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부르주아 문예비평가 시절의 루카치도 어디선가 비슷한 말을 했지만,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삶은 우리가 소망하는 그리고 가능성으로 주어진 삶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가장 비현실적인 무엇이다. 삶다운 삶은 언제나 미래로 유예된다. 삶은 전혀 ‘레알’하지 않다. 모든 삶은 ‘그렇게 살고 싶었으나 끝내 그렇게 살지 못한 삶’으로 귀착된다. 우리는 가장 삶다운 삶을 어제도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열망하지만 그 삶은 결코 오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실존을 등에 업고, 평생에 걸쳐 온 세상을 주유하지만, 그 삶은 과연 얼마나 충만한가. 이루지 못한 꿈과 줄이지 못하는 체중과 끊지 못하는 담배에 시달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버거운 애욕과 어제의 과음은 늘 당신의 뒷덜미를 잡지 않는가. 삶은 무엇보다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 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마는 부스러기와 다름없다. 삶은 쉼없이 전개되어 나가지만, 그것은 ‘가능한 무엇에서 2% 부족한 무엇’으로 점철된 지리멸렬하고도 가장 허황된 것이다.

이처럼 창백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우리의 삶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묵묵히 견딘다. 간혹 이 세상이 너무나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그저 살아간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를 원한다. 우리가 살고는 있지만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기에 ‘제대로 된 삶’을 보고 싶어한다. ‘이야기’는 우리가 ‘진정한 삶’이라는 위대한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고 결백하다는 반어적인 의미에서 ‘현장부재증명’이다.

소설이든 연극이든 영화든 어떤 ‘이야기’는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데도 기어이 현존하고 마는 이 불완전한 세계에 대한 야유며, 현실의 완고한 관성에 언제나 복종하고 마는 무력한 자신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소망이다. 우리는 어두운 공간에 들어앉아 꿈을 꾼다. 그 꿈은 의도된 작업이고,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꾸고 있는 집단적인 자각몽이며, 그 속에서 울고 웃는 실재 같은 환영이다.

‘이야기’는 삶에 우선하지 않고, 영화는 스크린에 비추어진 빛의 일렁거림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의 삶은 우리의 삶보다 더 문법적이다. 별처럼 빛나는 순간도, 애타게 기다리는 반전도 없는 삶의 퍼즐은 너무도 많은 조각이 비어 있어 우리는 끝내 삶 자체만으로는 온전한 그림을 맞추지 못한다. 영화는 가상으로 복원해낸 우리의 완전한 삶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삶의 생기가 필요할 때, 자신의 삶이 문법에 어긋난 비문이라고 느껴질 때 ‘이야기’를 찾는다.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를 보고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어이 우리의 삶이 거짓이자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증명하고 싶어한다. “이런 삶이 있다는 것을, 저런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라고 우리를 심문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배우들이고 영화감독들이다.

 

명색이 영화사 대표지만, 그 이전에 변호사인 나는 어떤 영화를 만들지, 어떤 영화가 되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보다 내가 눈이 밝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화사로 보내오거나 영화사 안에서 만들어지는 씨나리오들은 거의 읽어본다. 나는 새로운 세계의 설계도를 훔쳐보는 느낌으로 그 ‘이야기’들을 숨죽이고 살펴본다. 간혹 그 ‘이야기’들은 씨나리오가 아니라 일상에서 불쑥 던져지는 몇마디 말인 경우도 있다. 어느 감독이 대화 중에 슬쩍 ‘이야기’를 던져놓고 나의 반응을 살핀다. 내가 무슨 ‘이야기’의 권위자라서가 아니라 삶에 지친 이 중년남자를 그 ‘이야기’가 매혹시킬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것이다. 그때 내가 ‘그래서요?’를 연발하면 감독은 만족스러워져 “이 이야기로 한번 씨나리오를 써볼까요”라고 말한다.

나는 이상하게도 문장을 만들어낼 수는 있었지만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는 없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건다. 그들을 십여년 동안 보아오면서 이젠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생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가끔 그들의 꿈이 지쳐 보여 안쓰러울 때도 많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야기’에 도전한다.

오오에 켄자부로오의 자전적 소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에 이런 표현이 있다. “Its only movies, but movies it is!” “그래봐야 영화, 그래도 영화!”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문장은 단순하면서도 아이러니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영화’라는 단어를 다른 어떤 장르로, 아니 인간이 욕망하는 그 어떤 것으로 대체해도 뜻이 생겨난다. “그래봐야 소설, 그래도 소설!” “그래봐야 여자, 그래도 여자!”

나는 이 문장을 ‘영화는 삶에 우선하지 못하지만, 삶의 불완전성을 채워줌으로써 삶을 완전하게 해줄지도 모른다’라는 의미로 읽는다. 장미는 자기가 장미인 줄 모르기에 스스로 또다른 장미를 꿈꾸지 않는다.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매우 성숙한 인간은 그저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장엄한 것인가를 터득하기도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미처 살아내지 못한 다른 삶들을 생각하며 밤새 뒤척인다. 영화는 자연의 장미에 인공적으로 파란색을 입힌 ‘파란 장미’이고, 삶이라는 재료에 빛을 입힌 쎌룰로이드다. 영화는, ‘이야기’는, 그리고 예술은 파편화된 삶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노력이고, 잃어버린 삶의 조각을 찾아 삶을 완전하게 하려는 시도이다. 나는 ‘파란 장미’가 과연 가치있는 것인지, 그것을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의미있는 작업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래봐야 인생, 그래도 인생!”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가 그게 아니라면 무엇을 무기로 도저한 현실의 중력에 저항할 수 있는지는 가늠조차 못하겠다.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파란 장미’가 피어난다.

여기가 바로 신비로운 행성 ‘쏠라리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