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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필립 마이어 『아메리칸 러스트』, 올 2010
녹슬어버린 미국의 꿈을 묻다
신현욱
한국방송통신대 영문학과 교수 hester@knou.ac.kr
지난해 필립 마이어(Philipp Meyer)의 첫 장편소설 『아메리칸 러스트』(American Rust, 최용준 옮김)가 출간되자 미 언론 서평들은 앞다투어 뜨거운 반응을 내놓았다. 이들은 마이어를 마크 트웨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잭 케루액, 존 스타인벡, J. D. 쌜린저, 코먹 매카시 등 고전적 반열에 오른 미국 작가들과 비교하면서, 대부분의 작가들이 평생 걸작 한편을 쓰기 힘든 판에 그는 첫 소설로 그 위업을 이뤘다고 극찬했다. 마이어의 책을 원고상태에서 접한 유명 대중작가 퍼트리셔 콘웰은 그의 책이 출간되기도 전에 자신의 베스트쎌러 범죄소설에서 광고를 해주기까지 했다.
실제로 『아메리칸 러스트』를 읽다보면 미국 고전문학들을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무수하다. 예컨대 제임스 쿠퍼의 가죽각반 이야기들에서 문명과 자연의 대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개척자들의 우정과 갈등, 에머슨의 자연에서 엿보이는 거대한 자연의 흐름 앞에 선 인간의 미미함, 너새니얼 호손의 죄와 구원 등도 떠오른다. 여기에다 개인과 사회, 자유의지와 결정론, 미국의 꿈과 악몽 등이 추가된 이 작품은 독자들의 다양한 입맛에 맞춰진 미국적 주제들의 종합쎄트라고 할 만하다.
『아메리칸 러스트』가 폭발적인 주목을 받은 데는 출간 시기가 꽤나 시의적절했던 점도 있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은 피츠버그는 1970년대 이후 중공업의 퇴조와 함께 사양길에 접어든 미국 북동부의 산업도시인데, 미국에서 책이 출간된 바로 그해 봄에 백악관이 G20 정상회의 개최지로 발표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작품 제목이 가리키는 ‘녹슨 벨트’(rust belt)는 철강산지를 중심으로 번성했다가 사양길로 접어든 산업지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오바마의 당선에 큰 영향을 미친 미국 금융위기와 중산층 몰락 속에서 ‘녹슨 벨트’가 다시금 주목받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 소설은 피츠버그 인근의 작은 도시를 무대로 하고 있으나 ‘녹슨 벨트’에 속한 수많은 지역들의 ‘나’와 ‘우리’의 이야기로 읽히면서 세대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경험과 직결된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메리칸 러스트』는 쇠락과 파괴의 일로에 놓인 사회를 여실히 묘사하는 동시에 개인의 내면풍경과 정서의 흐름을 잘 포착한다. 아이큐 167의 천재이자 체구가 작은 아이작과 고교 미식축구 스타이며 거구인 빌리가 어울릴 법하지 않게 단짝친구로 설정된 것이며, 이 둘이 엮여들게 된 우발적 살인사건, 그리고 둘의 운명에 직결된 그들의 아버지 헨리와 버질의 상반된 가장으로서의 모습도 흥미롭다. 그밖에도 결혼 실패와 가족 해체를 겪으며 갈등을 빚는 주변인물들의 내면도 실감나게 그려진다.
아이작의 누나 리(Lee)처럼 누추한 과거의 삶에 냉정하게 선을 긋고 이미 떠나버린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하면, 이 작품은 떠나려는 마음만 있을 뿐 정작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막 떠나려던 순간에 커다란 난관에 부딪혀 꺾이고 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이작은 홀로 남겨진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그 책임감을 가까스로 벗어나려던 참에 휘말리게 된 우발적 사건 때문에, 빌리의 어머니 그레이스는 가망 없는 사람에 대한 미련과 뒤늦은 자책 때문에, 또 빌리의 아버지 버질은 그냥 남을 등쳐먹고 살면서 세상일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심정으로 떠나지 못한 채 붙박여 살아가는 것이다.
산업의 쇠퇴로 인해 곳곳에서 허물어져가는 건물들에 내걸린 ‘닫혀 있음’ 표지는 이곳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당한 것을 상징한다. 오랜 기간 누적된 단절과 폐쇄의 경험은 이들의 내면에 습관적인 포기, 나아가 거의 의지적인 것에 가까운 자포자기의 심정을 낳았다. 고교시절 잘나가는 미식축구 선수이던 빌리는 추천장까지 받아놓고도 대학 진학의 길을 포기한 채 빈둥거리며 기회와 시간을 탕진한다. 남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보장된 앞날을 당연시하며 밀어붙이는 게 싫어서, 그것이 아무리 탄탄대로일지라도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은 일종의 울릉대기(bully)일 터이므로. 이렇게 대학 진학을 거부하고 동네 전체를 ‘엿먹이듯’ 철물점에 취직해버린 빌리는 얼핏 ‘멋지고 통쾌한’ 순간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순간 가장 크게 망가진 것은 바로 빌리 자신이다. ‘못한 게 아냐, 안한 거지’라는 오만함, 일종의 반사회성과 반생명성에 자학적으로 탐닉하는 모습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능력만 있다면 어디에서라도 남 못지않게 잘살 수 있다는 낙관뿐 아니라, ‘도덕적인’ 성숙을 위해 그 가능성들을 ‘멋지게’ 팽개칠 줄 안다는 젊은 주인공들의 자의식 역시 미국의 꿈에 깃든 개인주의적 측면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 힘이 자기 삶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문제를 자신을 포함한 특정 개인 탓으로 돌리는 것이 미국의 꿈의 이면임을 작가는 지적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두 주인공은 비록 개인주의의 양상에서 훌쩍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녹슨’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좁은 길을 힘겹게 열고 있기도 하다. 이들이 마음속의 어둑하고 아뜩한 벼랑길을 걸어가면서 더이상 누구 탓, 무엇 때문이라는 변명 대신 사태의 진정한 책임을 깨달아가려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쏟아진 찬사에 비추어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 우선 어떤 사건이 언제쯤의 일인지 파악하는 것이 종종 혼란스럽다. 예를 들어 1987년을 20년 전으로 언급하는 한 대목을 보면, 작품 속에서의 현재는 2007년쯤인데 2003년에 일어난 이라크전쟁을 ‘이번 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아이작의 살인은 딱히 정당방위라고 할 수는 없어도 도덕적으로 심판하기 어려운 모호성을 띠고 있어 어느정도 긴장이 유지되는 데 비해, 이 우발적 살인을 덮기 위해 추가적으로 저질러지는 보안관 해리스의 다분히 계획적인 살해와 사건 종결방식은 의아하게 느껴진다. 해리스의 말대로 ‘법보다는 옳은 일이 먼저’이므로 범죄를 저질러 손해날 것 없으면 그만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죽은 부랑자들과 이 지역의 해고노동자들 사이의 거리는 과연 얼마나 먼가? 한가지 더 언급하자면, 이 작품에서 아이작의 아버지 헨리는 ‘녹슨 벨트’의 변천과 작업현장에서의 개인적·집단적 경험을 생생하게 들려줄 유일한 증언자이며 누구 못지않게 내면이 복잡한 인물인데, 그에게 할애된 지면이 너무 적다는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마이어는 긴 여정을 에둘러 대학을 졸업하고 진입한 월스트리트에서 느꼈던 당혹스러움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수많은 노동자가족들에게는 참담한 비극인 교외의 공장폐쇄가 월스트리트에서는 역설적으로 더 많은 재산축적의 기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아메리칸 러스트』는 이런 역설적 현실에 맞서, 지난 세기 내내 위대한 도시 건설을 떠받치며 번성했지만 이제는 벗어나야 할 곳이 된 ‘녹슨 벨트’를 전면에 내세우며 ‘미국의 꿈’의 정체를 다시금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