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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전자책, 출판의 미래인가

 

서정호 徐廷虎

창비 디지털사업팀장 sfcrazy@changbi.com

 

 

4412며칠 전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미국 최대 인터넷서점 아마존이 전자책을 팔기 시작한 지 3년도 못되어 지난 4~6월간의 “전자책 판매량이 종이책을 넘어섰다”고 발표한 것이다. 물론 미국의 온라인서점에 한정된 얘기지만 무척 흥미로운 현상임에 틀림없다. 종이책이 누려온 절대 권좌가 2000여년 만에 흔들리게 된 것이다. 전자책이 세상에 나온 지 벌써 10여년이 지났다. 디지털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혁신 가운데 하나로 칭송받는 전자책은 정말 책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10여년전 전자책이 처음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종이책의 시대는 갔다고 선언하며 열광했다. 수만권의 책이 손톱보다 작은 반도체 메모리에 들어가고, 네트워크를 통해 순식간에 지구 반대편으로 전달됐다. 인류의 수많은 지적 자산이 앞다퉈 디지털화되었고, 그 작업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전자책의 등장은 근대 활판인쇄술을 발명해 지식의 전달을 급속도로 확장시킨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업적에 비견된다는 평가도 있었다(실제로 인터넷상에서는 서구의 고전문헌을 전자문서로 만들어 무상배포하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다). 국내에서도 1990년대 중반부터 여러 IT업체들이 등장해 종이책 콘텐츠를 PC통신・인터넷을 통해 제공하거나 PDA용 버전을 출시했다. 바야흐로 새롭게 열릴 전자책 시장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부풀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예상과 달리 전자책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디지털기술은 책의 저장과 전파 방식에서는 혁신적이었지만, 표현의 측면에서는 기존의 종이책을 따라잡지 못했다. 종이 인쇄물의 뛰어난 가독성, 미려한 타이포그라피가 주는 몰입의 경험은 전자책이 결코 전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단말기의 경제성과 기능 면의 한계도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면서 전자책은 조금씩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웹문서와 PDF 전자문서가 널리 자리잡은 것과 달리, 전자책은 좀처럼 독자들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사람들은 뒤늦게 문제를 깨달았다. 종이든 휴대전화 화면이든 컴퓨터 모니터든 다양한 ‘플랫폼’에서 책을 읽는다 해도 그 행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서란 텍스트를 읽고 사유하는 행위다. 인류가 문자의 발명 이래 지속해온 독서행위의 본질적 기반은 바로 텍스트에 있다. 전자책에는 바로 이 텍스트와 인간의 소통방식에 대한 통찰이 빠져 있던 것이다.

디지털기술이 아무리 편리성을 높여주어도 텍스트를 인식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눈을 통해서다. 종이책이 그토록 강력한 가독성과 전달력을 갖춘 것은 아날로그적 질감을 가진 인쇄라는 수단에 의해서다. 우리 눈이 가장 쉽고 편하게 인식하는 매체는 여전히 종이고, 그 위에 정보를 표현하는 기술이 인쇄다. 현대의 기술자들은 디지털기술로써 종이책의 인쇄 품질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해서 새로 나온 것이 바로 전자잉크(E-ink)를 활용한 전자책 단말기다. 10년 만에 다시 전자책이 회자되기 시작한 건 이같은 새로운 디스플레이의 출현 덕분이다. 쏘니 등 전자회사는 물론 아마존 같은 온라인서점들도 경쟁적으로 전자잉크를 사용한 단말기를 내놓았다. 전자잉크는 확실히 기존 단말기에 사용되던 CRT(음극선관)나 LCD(액정화면)보다 텍스트의 표현력 면에서 월등했다. 때마침 불기 시작한 모바일 열풍이 전자책 단말기에 획기적인 이동성과 독립성을 부여하면서, 이제 데스크탑이나 노트북이 없어도 전자책 단말기만 이용해 직접 책을 구매하고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상황이 급변하자 수그러들었던 전자책의 기세가 부활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새롭게 열릴 시장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여러 업체의 기싸움이 매체에 자주 등장한다. 전통적인 전자기기 업체는 물론 애플 같은 컴퓨터 제조업체에다 구글 같은 온라인 검색업체까지 가릴 것이 없다.

하지만 아직 전자책은 종이책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전체적인 판매량을 봐도 그렇고 사람들의 인식도 그렇다. 여전히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만 분분할 뿐, 전자책으로 크게 성공한 기업은 지금까지 없다. 출판사와 저작권자 들도 서두르지 않는다. 한국의 사정은 더 조용하다. 외국에서 불어오는 ‘훈풍’은 아직 우리 출판시장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전자책 단말기도 많이 팔리지 않을 뿐더러 볼 만한 콘텐츠도 드물다. 관련 기술은 물론 법규와 제도도 미비해 제대로 된 전자책을 사용하기 위한 제반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다.

대중의 기본적인 인식도 여전하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진짜 책’을 더 선호한다. 종이책을 읽으면서 얻는 즐거움과 경험을 여전히 전자책에서도 찾으려 한다. 즉 종이책이 ‘책’의 기준인 것이다. 전자책이 제공하는 여러 편리함도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출판사가 수십년의 노하우를 가지고 온갖 정성을 들여 펴내는 종이책과 달리 전자책은 종이책의 부산물로 대충 만들 수 있다는 전자책 업계의 시각도 문제다. 그러다보니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전자책에 확 빠져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저작권에 관한 낮은 인식까지 더해져, 종이에서 보든 화면으로 보든 텍스트의 가치는 변하지 않음에도 전자책은 무조건 저렴해야 한다거나 심지어 공짜로 봐도 된다는 식의 오해도 퍼져 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전자책이 조만간 독서시장을 뒤흔들 것이라고 예상되지는 않는다. 전자잉크를 사용하는 컬러 단말기가 개발돼도, 태블릿PC의 대표격인 ‘아이패드’가 출시돼도 대다수의 종이책 독자는 여전히 기존의 독서습관을 유지할 것이다.

전자책은 대충 만들 수 있다는 잘못된 관념하에 양산되는, 오자투성이에 읽기 불편한 6천원짜리 전자소설책을 읽으려고 30만원이나 하는 단말기를 사야 하는 한국의 현실에서 섣불리 전자책 시장의 활성화를 내다보는 건 지나친 낙관론이다. 물론 기술이 계속 발전됨에 따라 더 싼 가격에 더 좋은 성능을 갖춘 단말기가 만들어지겠지만, 기술적 진보를 넘어서 독서행위와 출판시장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지금의 전자책 열풍은 자칫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전자책 써비스업체와 서체디자인업체 그리고 단말기 제조사들도 각자의 이익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콘텐츠 구현의 완성도를 높이고 독자 선택의 폭을 넓히며 가격 면에서도 합리성을 갖춘 제대로 된 전자책 환경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전자책은 종이책의 대체수단이 아니라 그 단점을 보완하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기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전자책은 어느 수준까지는 종이책의 영역으로 들어가 좀더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독서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에게는 더 윤택한 독서환경을, 책을 멀리하는 사람에게는 손쉽게 책을 접하고 읽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둘의 장점이 어우러진다면 ‘책’의 무한한 능력은 더 널리 활용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한 만남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섣부른 낙관론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다 건너 들려오는 ‘성공사례’에 대한 열광이 아니라 차분히 우리의 문화적・제도적 환경을 고민하고 개선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