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심사경위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2010611일 회의를 열어 백낙청 이선영(문학평론가), 황지우(시인), 윤영수(소설가)를 제25회 만해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위촉했다(황지우는 건강상의 이유로 중도에 심사를 그만두었다). 심사위원회는 지난 3년 동안 출간된 문학서・인문서 가운데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하는 만해문학상의 규정에 따라 추천위원(창비의 시와 소설 분야 기획위원)들이 추천한 아래 11권의 저서를 놓고 심사를 진행했다.

고형렬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김기택 『껌』, 김명인 『꽃차례』, 이정록 『정말』, 조연호 『천문』, 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시), 김인숙 『안녕, 엘레나』, 배수아 『올빼미의 없음』, 전성태 『늑대』(소설), 강만길 『역사가의 시간』, 박형규 신홍범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인문).

713일의 첫번째 모임에서는 시부문의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정말』 『쓸쓸해서 머나먼』, 소설부문의 『안녕, 엘레나』 『올빼미의 없음』 그리고 인문부문의 『역사가의 시간』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로 주요 심사대상이 압축되었다.

719일의 두번째 모임에서는 심사위원 각자가 솔직한 견해를 주고받으면서 소설과 인문 분야 추천작이 경합하였으나 점차 인문 분야로 화제가 집중되었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격동기의 역사와 개인사를 아우르는 두 저서의 문학적 성과에 대해 우열을 가릴 수 없음을 확인하고 강만길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과 박형규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신홍범 정리)를 제25회 만해문학상의 공동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심사평

 

백낙청(白樂晴) 문학평론가

후보작 중 김기택 시집 『껌』과 전성태 소설집 『늑대』는 작년에도 마지막까지 수상작과 겨루던 작품이다. 당시 심사위원들 모두가 그 미덕을 높이 사주면서도 한층 진전된 업적을 기다리며 아껴두자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아쉽지만 작년의 판단을 굳이 뒤집지는 않았다.

그러고 나니 올해의 수상작 뽑기가 무척 까다로워졌다. 이들 두권을 분명히 앞지르는 성취를 과연 찾을 수 있을지? 물론 2차심사의 대상으로 남은 고형렬 이정록 최승자 시집, 김인숙 배수아 소설집은 다들 어엿한 후보들이다. 게다가 각기 개성이 아주 다른 문학이어서 읽기에 풍성한 만큼이나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사실 그 점에서는 2차심사에서 제외된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만해문학상 심사가 어려운 또 한가지 이유는 ‘만해정신’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해정신을 특정한 경향이나 양식을 배제하는 식으로 해석할 일이 아님은 물론이다. 하지만 예컨대 한국소설의 독특한 새 경지를 개척하고 있고 「무종」 「올빼미의 없음」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같은 빼어난 단편을 여럿 포함한 『올빼미의 없음』이나, 왕년의 치열함이 다소 덜해진 대신 한결 정돈된 모습을 보이는 『쓸쓸해서 머나먼』 같은 작품집을 두고 ‘그래도 만해문학상 감은 아니다’라고 판단하는 것이 반드시 ‘문학외적’ 잣대를 들이대는 일일까.

내가 생각하기로 만해정신은 무엇보다 대승불교의 ‘성불제중(成佛濟衆)’ 정신이다. 문학에서라면 작가 고유의 수련과 언어연마에 골몰하면서도 중생과 부처를 둘로 보지 않고 소통에 걸림이 없기를 지향하는 자세일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불교적 색채가 한결 짙은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도 독자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는 경계를 아직 훌쩍 벗어나지 못한 면이 있으며, 『정말』은 한결 소통에 능하고 약간 헐렁한 인상을 주는 시들이 실제로 더 매력적이지만 어떤 것은 너무 풀어져버린 느낌이다. 다른 한편 『안녕, 엘레나』는 표제작이나 「숨-악몽」 「어느 찬란한 오후」 「조동옥, 파비안느」 같은 감동적인 작품에 비해 나머지가 너무 처지고 개중에는 창작의도를 납득하기 힘든 것도 있다.

다행히 올해는 비소설 산문 분야에서 두권의 뛰어난 저술이 추천되었다. 이들로 눈을 돌리는 것이 해당 저서에 대한 당연한 대접일 뿐 아니라 ‘문학’을 ‘순문예’로 좁혀 생각하는 한국문단의 폐해를 불식하는 데 일조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두권 중 어느 것을 취할지를 결정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강만길 자서전은 역사가이자 역사창조의 현장에서 남달리 너른 행보를 보여온 저자가 친근감을 주는 필치로 직접 저술했다는 장점이 돋보이는데, 굳이 문학평론가로서의 토를 달자면 저자의 사론(史論)에 해당하는 대목들이 이야기의 서술과 교차하는 형식이 매력적이긴 해도 비슷한 주장이 너무 자주 나온다는 점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박형규 회고록은 그 또한 역사의 현장에서 다양하고 치열하게 활동해온 신앙인의 기록으로서 구술자의 솔직하고 쾌활한 성격과 정리자의 담백 단아한 문체가 행복하게 어울렸는데, 대면문답을 통해 산출된 문헌으로서의 한계를 지적할 대목들이 없지 않다.

아무튼 이렇듯 소중한 기록이며 문학적 향기를 담은 책을 두권이나 만나서 행복했고, 창비사측에서 공동수상을 위한 추가 출연에 동의해줘서 더욱 기뻤다.

 

이선영(李善榮) 문학평론가

심사는 상당히 힘든 과정을 거친 셈이다. 2차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꼼꼼히 살피고 신중히 평가해야 할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11권의 대상작품들 가운데 돋보이는 4권의 당선권 탈락은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고형렬 시집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에서는 이를테면 있고 없고 하는 삶의 부자유를 해탈하려는 이 시인의 형이상학이 높이 떠오르지만 그 속에 가끔 그것을 저해하는 요소가 산견(散見)되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정록 시집 『정말』은 익살과 능청, 수다와 일탈로 힘든 세상살이를 낙천(樂天)하느라고 시적 절제를 다소 풀어놓지 않았나 싶다. 인물의 의식을 그 흐름에 따라 추구하는 김인숙의 섬세하고 개성적인 내면주의는 소설집 『안녕, 엘레나』에서 또렷이 확인되지만 그 내면이 외면과, 부분이 전체와 이어지는 관계 아래 그려지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이다. 배수아의 모더니즘 소설집 『올빼미의 없음』은 언제나 작가의 당면과제인 ‘글쓰기의 문제’나 인간의 근본과제인 ‘죽음의 문제’ 같은 것을 무의식의 입장에서 탁월한 예술적 솜씨로 다루고 있다. 다만 그것이 만해문학상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들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여기서 본회의 심사규정에 따라 심사대상은 자연히 순문학과는 다른 인문 및 평론으로 확대하게 된다. 확대된 대상 가운데 강만길의 『역사가의 시간』은 저자 개인의 생애와 서사가 바로 민족의 당대사에 이어져나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한 자서전이다. 특히 역사가로서의 귀중한 학문연구와 지도자로서의 빛나는 사회활동을 통해서 민족사의 진전에 끊임없이 작용하고 기여해온 수많은 사실들, 바로 그것들을 소상하게 기록한 이 자서전은 따라서 단순한 개인사 이상의 큰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자서전은 ‘역사가의 참된 시간’이 어떤 것이고 ‘민족사의 올바른 진로’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내밀한 목소리가 아닌 공적인 목소리로 당당하게 천명하고 있다.

박형규의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는 신실한 목사(저자)의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현대사의 흐름을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회고록이다. 겸허하면서도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서는 추호의 후퇴도 용납하지 않는 저자의 일관된 자세와 행동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강력한 메씨지를 전해준다. 이러한 목사 내지 지식인의 진실한 삶의 실상을 엄정성과 내밀함을 함께 유지하는 목소리로 밝힌 점 역시 이 회고록의 놓칠 수 없는 미덕이다. 한편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이 나오기까지 필요한 자료 수집과 그 정리 그리고 글의 구성 및 표현 등에 솜씨와 정성을 다한 신홍범의 노고와 업적은 당연히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윤영수(尹英秀) 소설가

2차심사에 올라온 세권의 시집과 두권의 소설집의 성과 역시 만만치 않았다. 고형렬 시집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표제작뿐 아니라 「백척간두의 까치낯짝」 「바늘구멍 속의 낙타」 등 시인의 삶과 시작에 대한 진지함이, 이정록 시집 『정말』에서는 「갈대국밥 한 그릇」 「보리앵두 먹는 법」 등의 훈훈한 넉살과 정겨움이 그대로 피부에 닿는 듯했다. 최승자 시집 『쓸쓸하고 머나먼』의 단정하고 침착한 품위 역시 중견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귀한 덕목임이 분명해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집에 더 애착이 갔다. 배수아의 독특하고 힘있는 문체, 꿈과 현실의 경계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험난하고 용감한 글쓰기는 「무종」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등에서 제대로 된 열매를 얻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인숙의 균형 잡힌 구성미도 빼놓을 수 없다. 표제작과 「조동옥, 파비안느」 등은 작가 특유의 서정미를 잘 풀어낸 수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2차에 걸친 심사과정을 거치면서 작품집들의 성과가 이른바 ‘만해정신’에 부합하느냐 하는 문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런 점에서 강만길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과 박형규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는 두분의 개인사뿐 아니라 인문학 분야의 훌륭한 사회사로서 평가받아 마땅하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에는 한국사회에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성장한 기록뿐 아니라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 목회자의 진실하면서도 겸손한 삶이 담겨 있다. 정리를 맡은 신홍범의 유려하면서도 강한 문체 또한 인상적이다. 그의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력에 힘입어 후대에도 남을 훌륭한 증언록이 만들어졌다.

강만길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 역시 현대사의 격동기를 몸으로 겪은 역사가로서 한국의 정치사회상과 그간의 사정을 낱낱이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가치를 지닌다. 사회활동가로서 또 냉철한 역사가로서 그는 우리 모두를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세운다. 개개인의 생애와 업적이 모여 한 사회와 세계의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책은 사람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속한 사회를 변화시킨다. 만해문학상의 수상작으로 결정된 두권의 책이 후대의 독자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리라 믿는다.

 

 

 

수상소감

 

해방후 우리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일

 

강만길 姜萬吉

1933년 마산 출생. 고려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 졸업.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역임. 저서로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한국민족운동사론』 『조선시대 상공업사 연구』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 『고쳐 쓴 한국근대사』 『고쳐 쓴 한국현대사』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 등이 있음.

 

 

어쩐 일인지 상복은 있는 편이어서 몇몇 상을 받아봤습니다. 그러나 자서전이란 것으로 문학상, 그것도 만해선생 이름으로 주는 문학상을 타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학술상이나 평화상도 부담스러웠는데 이제 문학상까지 받게 되었으니 염치없는 인간이 되는 것 아닌가 걱정되기조차 합니다.

지난날 문민독재와 군사독재시기를 살 때의 일입니다. 시사성 높은 소설이나 시를 읽으면서 엄혹한 시기인데도 문학 쪽은 작품을 통해서 해야 할 말을 웬만큼은 하고 사는데 역사학 쪽은 왜 그것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문학 쪽을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타고난 재주가 없어서 그런 작품을 흉내라도 낼 생각은 못해봤지만 배운 재주만으로라도 세상을 바꾸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자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서전이란 것을 쓰는 데도 그런 생각이 조금은 깃들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야만 역사학 전공자로서 만해문학상을 받는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돌아보면 해방후의 우리 땅에 살면서 나름대로 문필활동이나 학문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만해선생이나 단재선생같이 일제강점기의 어렵고도 어려운 상황 아래서 민족사회의 최대과제인 국권회복을 위해 몸바치는 문필활동이나 학문생활을 했던 분들 앞에 서면 죄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해방후에 당연히 자랑스러운 하나의 조국이 건설되리라 믿었지 두개의 분단국가가 만들어져 서로 대립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남북을 막론하고 해방후의 우리 땅에 사는 사람들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국권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 앞에서는 모두 죄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해선생이나 단재선생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분들의 이름으로 무슨 사업을 하거나 또 그 사업과 관련을 맺게 되는 사람들은 그 삶이 유지되고 있는 한 남북 전체 우리 땅과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역사가의 시간』 속에 이런 생각이 조금은 담겼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만해문학상은 너무 부담됩니다. 늙은 몸이긴 하나 살아 있는 한 그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하려 합니다. 만해문학상 심사위원 여러분과 관계자들에게 감사해 마지않습니다.

 

 

 

수상소감

 

사랑의 향기 넘치는 꽃다발을 안고

 

박형규 朴炯圭

1923년 경남 창원군(현 마산시) 출생. 부산대 철학과를 거쳐 일본 토오꾜오신학대학과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각각 석사학위를 받음. 『기독교사상』 주간, 기독교방송(CBS) 상무를 거쳐 서울제일교회 목사로 봉직하면서 기독교갱신운동에 헌신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교회와 사회위원회 및 인권위원회 위원장,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 1992년 목회활동에서 은퇴한 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지금은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으로 재직중.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가 강만길 교수의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과 함께 만해문학상을 받게 됐다는 전화를 받고 나는 잠시 얼떨해져 고맙다는 인사조차 할 수 없었다.

다음날 회고록의 공동저자인 신홍범 선생으로부터 축하전화를 받았는데 그분의 목소리는 매우 명랑했다. 두 사람이 만든 책이라 두 사람에게 상을 수여한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나는 약간의 자괴감을 느꼈다. 언제나 묻는 말에 대답만 하고 원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수정과 보충작업을 했을 뿐인 내가 공동수상자의 자격이 있는 것인가?

만해께서 자기의 거처인 심우장(尋牛莊)을 굳이 북향으로 짓기를 고집하셨다는 이야기는 당시의 뜻있는 젊은이들의 저항의식을 자극했고, 나 또한 그분의 삶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분의 삶과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못한 내가 만해문학상을 받다니, 이게 가당한 일인가?

나는 꼭 한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어진 에드워드 브라우닝(Edward Browning)상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중에 있을 때 미국의 선교단체가 보낸 상이었다. 아마도 내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주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김영삼정권 이후에 국가보훈처에서 훈장을 수여하겠다며 경력을 써보내라는 공문을 받은 적이 있었으나 거절했다. 목사가 선교의 일환으로 한 일에 대해 국가가 주는 훈장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만해문학상은 나의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포상이 되는 셈이다. 나는 이 상을 나의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포장하는 사랑의 향기 넘치는 꽃다발로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을 것이다.

 

 

 

수상소감

 

오늘 다시 돌아보게 되는 과거

 

신홍범 愼洪範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중 박정희정권 아래서 언론자유수호운동을 벌이다가 해직되었고 전두환정권하에서는 『말』지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한겨레신문 논설주간으로 일했다.

 

 

박형규 목사님의 회고담을 당시의 시대상황에 맞추어 정리한 것뿐인데, 저에게까지 귀한 상을 주시어 분에 넘치는 영광을 입게 되었습니다. 큰 그릇은 작은 그릇을 담을 수 있어도 작은 그릇이 큰 그릇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저의 작은 그릇에 담긴 박형규 목사님을 보여드리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던 터에 상까지 받고 보니 더욱 송구합니다. 만해문학상의 빛나는 이름에 누가 되지는 않을지 두렵습니다.

만해 선생님의 높은 뜻을 기리자는 취지의 상이니만큼, 고난 속에서 나라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온 삶을 바치신 박형규 목사님의 생애에 대해 주시는 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상은 박형규 목사님과 같은 삶을 사신 여러 분들에게 주시는 상이면서 또한 그런 삶을 살아가라고 격려해주시는 상이기도 하겠습니다.

훌륭한 사색과 문학의 향기를 담은 뛰어난 작품들이 많을 터인데도 이 책을 선정해 주신 데에는 오늘의 현실이 울려주는 경보음이 적지 않은 작용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어두웠던 지난날의 역사를 돌아보고 그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다짐해야 할 때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박형규 목사님의 회고담을 들으면서, 그리고 당시의 기록들을 읽으면서 나라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기까지 약 30년에 걸쳐 참으로 끔찍한 세상을 살아왔다는 것을 거듭 실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피를 흘렸습니다. 걸핏하면 잡혀가 두들겨 맞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갔습니다. 사찰, 감시, 미행, 도청이 일상화되었고 맘 놓고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캄캄한 터널 속에서 빛을 갈망하며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 끝에 얻어낸 민주화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한때 그 어두웠던 시대는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독재시대의 음산한 망령들이 여기저기 다시 출몰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항상 깨어 있지 못하고 과거를 잊고 지냈기 때문일까요? 많은 유대인들이 죽어간 독일의 다하우 수용소 기념관 입구에는 미국의 철학자 조지 싼타야나(George Santayana)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 “과거를 잊어버리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