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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윤예영 尹艾碤
1977년 서울 출생.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yatanabe@hanmail.net
해바라기 연대기
‘정’은 음지에서 왔다.
5살,
어느 방 할 것 없이 어둠이었다
7살,
집의 반쪽은 양지, 반쪽은 음지였다
아파트는 그랬다
크고 넓은 안방은 세대주 ‘갑’과 배우자 ‘을’의 차지였고
볕이 잘 드는 마루는 쓸모가 없었다
부엌과 작은 방은 음지였다
물론 ‘정’은 음지였다
8살, 9살, 10살,
내내 음지였다
11살, 12살, 13살,
역시 음지였다
14살,
‘정’의 방에서 멋진 노을을 볼 수 있었다
동향집의 비극
15살, 16살, 17살,
노을 속에서 가끔 소쩍새가 울었다
18살,
가끔 노을에 밧줄을 걸고 줄타기를 했다
그러다가 그 줄에 거꾸로 매달리기도 했다
19살,
난생처음 하루 종일 빛이 드는 방에 살았다
노란 물탱크를 머리에 인 옥탑방이었다
노을 대신 스모그 속을 헤맸다
20살, 21살, 22살,
찜통더위에 해가 뜨면 기어나와야 했다
양지의 설움
23살,
‘갑’의 퇴직금으로 또다른 ‘갑’에게 보증금 3000에 월 30짜리 양지를 구했다
보증금을 낸 ‘정’은 공평하게 가장 크고 밝은 방을 차지했다
두명의 음지가 ‘정’에게 기생했다
24살,
눈을 뜨면 해가 졌다
양지의 뿌듯함은 ‘정’의 것이 아니었다
25살,
임대인 ‘갑’은 임차인 ‘정’에게 불법 기생하는 두명의 어둠에게 퇴거명령을 내렸다
빛이 생기라 하니 빛이 생기고
나가라 하니 나갔다
27살,
오전 나절, 손바닥만큼 비치는 해를 따라 몸을 돌렸다
주몽을 잉태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대신 평생 양지에서 자라서 양기가 충천한 ‘갑’이 나타났다
28살,
‘정’은 세대주 ‘갑’의 배우자가 되었다
‘정’, ‘을’로 승격
집의 반쪽은 양지, 반쪽은 음지였다
29살,
집을 나서면 해가 뜨고, 집에 들어오면 달이 떴다
빈집에서도 양지는 혼자 따뜻했다
29살,
‘갑’과 ‘을’의 직계비속이 태어났다
그를 ‘정’이라 이름 붙였다
‘정’은 음지에서 왔다
난·生
늙은 여자가 있다.
흰머리 한움큼이 머리가마 주위에 솟아났다.
배꽃 한송이가 떨어진다.
그 여자 안에서
누구 엄마가 나온다.
유행이 지난 정장을 입고 부지런히 걸어간다.
왼손에 든 검은 비닐봉지 입구에 걸린 흙 묻은 파뿌리.
배꽃 한송이가 떨어진다.
그 여자 안에서
새댁이 나온다.
여자는 오지 않을 무언가를 기다리며 어두운 모서리를 쳐다본다.
등에 매달린 아기가 목이 늘어진 내복을 자꾸 잡아당긴다.
배꽃 한송이 또 떨어진다.
그 안에서
처녀애가 걸어나온다.
깨질 듯이 차가운 댓돌 위에 한쪽 발을 내딛는다.
티눈 하나 안 박인 깨끗한 발.
배꽃 한송이가 떨어진다.
그 안에
여학생이 앉아 있다.
가로등 아래 서서 들창을 올려다본다.
깡똥한 단발머리 아래
소름이 돋는다.
그 안에서
여자애가 달려나온다.
싸리비를 들고 할머니가 뒤쫓는다.
아이는 고무 슬리퍼를 개울에 던져버린다, 휘익.
그 안에
갓난쟁이가 앉아 있다.
아랫도리를 벗고 마당에 앉아 개미를 집어 먹는다.
아기 정수리에 배꽃이 떨어진다.
그 안에
단단한 알이 잠을 잔다.
배꽃 한잎이 떨어진다.
그 안에
늙은 여자가 있다.
흰머리 한움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