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이서령 李舒怜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1학년. 1991년생.
ls3221@hanmail.net
수달의 집
모음으로 미끄러지는 동그란 것들은 금세 빠져나가요
미꾸라지의 매끈한 언어 속에 담긴 촉감을 사냥하기엔 나는
너무 몸집이 커요 차라리 나를 수증기처럼 가볍게 혹은
푸른 물결무늬로 만들어주지 그랬나요?
나는 물속에서도 젖지 않는 촉촉한 책
두껍고 작은 소리들을 책갈피 삼아 적들의 습격을 감지하죠
나를 스치는 모래알들의 평온함을 따라
밤새도록 여행하는 것을 좋아해요
내 머리 위로 드리우는 달의 반짝임을 도도하게 쓰고요
내 수염을 튕겨낼 때 나는 열대과일처럼 달아오르죠
사람들은 내가 물속에만 있는 은둔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비오는 날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좋아해요
온 세상이 숨구멍을 열어놓은 밤에 평온하게 익어가는
바람의 숨소리로 나의 영역을 표시하는 거죠
나는 물을 좋아하지만 잎사귀를 갉아먹는 여우비,
혹은 나무 밑에 자라는 식물의 꿈을 꾸는 수달입니다
창백한 세상, 어지럽게 굴러가는 눈동자들을 떠올려요
한데 헤엄치며 구르다가 앞발 뒷발 서로에게 내밀다보면
내 작은 수달의 집에 나무 하나 심을 자리 생기지 않겠어요?
나무의 방
나는 나이테가 달팽이관으로 꿈틀대는 이곳에서 소리를 키우지
내 안에는 발성연습을 하는 성악가가 있어 여름을 핑그르르 돌리지
동그란 알맹이로 삼켰을 때의 간지러움이랄까
비 오는 날 온몸은 피아노 줄이 되어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해
개구리와의 싸움은 생각보다 치열하거든
나는 소리를 데굴데굴 굴려 하나의 줄로 노래하는 걸 연습중이야
내 안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바람의 통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지 이 길 위에서 만난 호탕한 개미는 번개를 흉내내고 있잖아
그때마다 천장이 무너질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어
내 속눈썹 위에서 파르르 떨어지는 노을은 곱게 개여
감잎으로 물드는 중이야 유리병에 어둠이 담기듯
공기가 새어나오는 저녁이 되어도 나는 잠들지 않아
늘어지는 오페라는 지루하다며 빨리
가을을 몰고 온 옥수수수염의 지시에 따라
차곡차곡 쌓여 있는 푸른 수염을 허무는 중이거든
당분간 휴업을 선언한 매미를 감시할 예정이야
나무의 방에
볼일이 있으신 분은 발밑에 떨어진 잎사귀에 메모를 남겨주세요
카프카의 도서관
구름이 뱉어내는 우레소리가 심상치 않다
나는 오늘도 내 영혼이 깃든 도서관으로 간다
오래 묵은 책의 첫 페이지를 열자
누군가 밑줄 그어놓은 연필심냄새가 아찔하게 좋다
예쁘고 화려한 책 속에 나를 가두고
부패한 하루를 구겨넣는다
창밖으로 비의 그림자가 바람을 몰고 나올 때
나는 책의 오솔길을 따라 산책을 나선다
책갈피에서 나는 소멸의 냄새들,
나는 이곳에 꿈과 설렘을 코끼리 발자국처럼 묻는다
밤이면 책들이 울울창창한 관목숲이 되는지도 몰라
내 몸에는 햇살과 바람 그리고 여우비의 숨결이 있다
보름달이 풍경을 갉는 나비의 애벌레가 되고
박쥐들이 햇볕의 젖이 좋아 꿈을 꾸는 이곳은
카프카의 도서관, 언제나 고독의 그림자만 가득하다
그러나 내 안에는 식물성과 육식성의 욕망들이
뿔을 맞대고 있는지 그것들이 힘을 불끈 쓸 때마다
나는 변신의 그레고리의 삶을 떠올리는 것이다
창밖에는 다시 햇살이 잠자리 날개처럼 날카롭다
나는 푸른빛 어스름의 글자들을 배불리 갉아먹고
책을 덮듯이 내 얼굴을 도서관에 처박고 낮잠에 든다
시 | 심사평
신인응모작들을 포함한 새로운 세대의 시를 읽는 건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거기에는 한국 시의 다양한 미래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하여, 기대를 뛰어넘는 좋은 시를 만났을 땐 기쁨도 배가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아쉬움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예심과 본심을 거쳐 선자들의 손에 최종적으로 5인의 작품이 남게 되었다. 다시 여러번 돌려가며 읽은 결과, 먼저 「그늘의 깊이」 외, 「눈의 여왕」 외, 이들 2인의 작품들을 제외했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자기고백적 읊조림에 머물러 있을 뿐, 시의 울림이 개인의 창을 넘어 세계로 건너가지 못했다. 고립된 언어와 소통의 부재를 극복할 방법과 새로운 언어에 자기 목소리를 담으려는 도전 의지가 부족해 보였다. 대산대학문학상은 일반 신인응모제도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대학시절의 문예활동과 습작으로 단련된 더욱 빛나는 상상력과 실험정신을 요구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계의 시제」 외, 「붉은 혀가 비릿하다」 외, 「수달의 집」 외, 이상 3인의 작품에 이르러 긴 논의가 이어졌다. 먼저 「시계의 시제」 외는, 건조하지만 단단한 어조의 직관이 돋보였다. 시의 형식과 언어의 운용에 있어서도 오랜 습작의 흔적이 엿보였다. 하지만 시편 곳곳에 돌출하는 잠언투의 말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인지, 시의 흐름을 방해하는 모호한 습관인지 다시 생각해보기 바란다. 덧붙이자면 「시간의 시제」에서 “그이의 시간에 세 들기로 결심하고/시계바늘 돌려 보증금 5분을 지불했다//시계를 두고 간 건 시제(時制)를 두고 간 것”이라고 말할 때, 그렇게 직관과 객관의 경계를 긴장하며 아슬하게 건널 때, 빛난다.
「붉은 혀가 비릿하다」 외는, 투고한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고 작품의 완성도도 높았다. 「붉은 혀가 비릿하다」에서 ‘비리게 야위어가는’ 늙은 개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응시의 능력은 이미 예비된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짐작하게 했다. 간결하지만 그림같이 선명한 「우산꽃」의 상상력이나, 고래의 역동적인 이미지를 포착하여 삶의 극적 형식으로 풀어내는 「고래방송국」의 솜씨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중 어느 한 작품에서, 기성의 시에서 가져온 듯한 싯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다른 시에 있는 구절이라면 그 출처를 밝히는 것이 옳고 이를 소홀히한 책임은 응모자에게 있다는 데 선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오랜 논의 끝에 「수달의 집」 외를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수달의 집」은 어느 수풀 짙은 물가에 있음직한 수달의 일상을 통해 시와 생태적 상상력이 어떻게 적절하게 만날 수 있는지를 잘 드러내는 시편이었다. 함께 응모한 「나무의 방」도 마찬가지여서, 어느 숲속 나무 한그루의 몽상을 통해 식물적 상상력에 깃든 언어의 울림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 시에서도 아쉬움이 있었다. 치열한 언어의 자각 없이 점점 산문화되는 신세대 시의 유행이 부분적으로 엿보이는 것이 그것이었다. 「카프카의 도서관」에서 “책갈피에서 나는 소멸의 냄새들”이나 “나는 『변신』의 고레고리의 삶을 떠올리는 것이다” 같은 진부하고 관념적인 표현들도 눈에 거슬렸다. 그럼에도 「수달의 집」 외를 당선작으로 정한 것은, 분명하게 자기만의 시를 담아가려는 개성적인 목소리와 사물을 해석하는 독특하고 발랄한 상상력에 끌렸기 때문이다. 최종심까지 올라 아쉽게 밀려난 낙선자에게 보내는 격려와 함께, 당선자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앞으로 더 크게 다가올 시의 파도, 더 큰 시의 관문을 넘어 대성하길 바란다.
도종환 황인숙 송찬호
시 | 당선소감
연락을 받고 몇초간 얼떨떨했습니다. 기쁨에 앞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언어에게 또 한번 빚을 졌습니다. 제가 감히 빌려다 쓴 나무와 산과 들판과 강에게 미안하고 또 고맙습니다. 빈 종이에 집을 짓는 기분으로 시를 썼습니다. 창문에 낯설고 새로운 풍경들을 들이고 수달이 놀러오는 정원을 가꾸고 능소화가 활짝 피는 담벼락을 짓습니다. 언어를 쌓아올리는 일은 행복하지만 괴롭습니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빈 구멍들로 싯구가 가벼워진 적도, 어설픈 시인의 이름으로 문장들을 상처입힌 적도 많습니다. 저 자신과 타협하고 주저앉으려 할 때마다 항상 저 대신 손에 흙을 묻히는 부모님을 생각합니다. ‘평범’이라는 단어를 가장 싫어하시는, 지금은 높은 위치에서 더욱 부지런한 최고의 아빠, 날마다 가족을 위해 기도를 올리는 보석보다 빛나는 엄마, 수상소식보다 제 몸과 마음을 더 걱정하시는 할머니, 그리고 가족만큼 소중한 친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겠습니다.
얼음 송곳처럼 차갑고 청량한 상상력을 갈고닦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서울예대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어리고 부족한 작품 속에서 단점보다 장점을 꺼내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맑고 올곧게 시를 쓰는 가슴 뛰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서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