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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청소부와 신 사이에서
이지영 李智映
창비 청소년출판팀장 quinn@changbi.com
유진 오닐과 윌리엄 포크너의 편집자로 유명한 싹스 커밍스(Saxe Commins)는 어느 출간 파티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청소하고 수리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떠들썩한 자리를 싫어했던 커밍스가 농담조로 던진 말이지만, 뼈가 느껴지는 대답이다. 한편 스티븐 킹은 “편집자는 언제나 옳다”며, “글쓰기는 인간의 일이고 편집은 신의 일”이라고 편집자를 한껏 추어준 바 있다. 과연 편집자는 작가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청소부와 작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사이 어디쯤에 위치하는 걸까.
이처럼 아리송한 편집일을 시작한 지도 10년이 되었다. 10년차 편집자라면 눈감고도 책을 만들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원고를 처음 읽어내려갈 때의 긴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간혹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을라치면 어김없이 문제가 터지곤 한다. 그나마 반성하고 정신 차리면 수습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였으니 그 정도는 어쩌면 편집자로서 계속 일해보라는 하늘의 격려였는지도 모르겠다.
편집에서 가장 기본이랄 수 있는 교정작업은 근래 기획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역으로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많은 편집자가 교정은 외주로 돌리고 기획에 전념할 것을 요구받으며, 스스로 그래야 한다고 믿는 편집자도 많다. 그러나 원고를 읽고 가다듬는 과정은 작가와 편집자만이 나눌 수 있는 가장 내밀한 소통이기에 결코 소홀히할 수 없다. 처음 들어간 출판사에서 상태가 좋지 않은 번역원고를 맡아 매끄럽게 고치는 일부터 시작한 나는 읽기 편하게 원고를 고치는 ‘나쁜’ 습관이 들었었다. 작가 혹은 역자에 따라 의도와 개성을 살리기보다는 내 감각에 맞게 손보기에 바빴던 셈이다. 이런 나를 편집부 선배들은 교정 잘 본다며 추어주고, 경험 없는 역자들은 문장을 잘 고쳐주어 고맙다고 하니 그렇게 일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다 여러 작가들의 에쎄이 모음을 교정보면서 일이 터졌다. 교정지를 살피기 위해 사무실에 들른 중견 시인이 진노한 것. 몇년차냐는 질문에 아직 일년이 되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그는 그제야 조금 풀어진 얼굴로 작가의 의도가 있을진대 단순히 사전에 나와 있지 않은 말이라거나 자신과 읽는 호흡이 다르다고 해서 원고를 펜으로 마구 고쳐서는 안되며, 명백한 오류가 아니면 연필로 교정보아야 한다고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내 얼굴은 활화산처럼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같은 상황에서도 그는 그렇게 교정본 이유를 묻고 초보 편집자가 펜으로 휘갈긴 몇가지 표현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여주었다.
이후로는 아무래도 교정작업에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데 있다. 몇개월 후 문단의 원로로 꼽히는 다른 시인의 원고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시에 “깃빨 펄럭일”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혹여 수고(手稿)를 옮기는 과정에서 실수했나 싶어 다시 살펴봐도 ‘깃빨’이 틀림없었고, 교정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도 시인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의미를 강조하려는 의도라 생각해 그대로 두었으나 삼교(三校)에 이르고 보니 시집 전체에서 맞춤법에 어긋나는 표현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휴대전화도 이메일도 쓰지 않는 분이기에 망설이다 결국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너무나 명쾌했다. “아, ‘깃발’이 맞는 표현입니까? 그럼 고치세요.”
소소한 에피쏘드지만 편집이 고정되지 않고 늘 변화하는 작업임을 말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원칙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편집의 매력이자 고난이다. 그렇기에 편집자와 작가 사이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신뢰다. 개인의 기록이었던 원고를 공공의 자산이 될 책으로 만드는 일에서 파트너를 믿지 못한다면 그 과정은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일전에 어느 강의에서 만난 어린이책 작가는 편집자란 참으로 쓸모없는 존재라며 독설을 퍼부었다. 불만의 요지는 편집자들이 자꾸 자신의 원고에 손을 댄다는 것이었는데, 심지어는 디자이너마저 이러쿵저러쿵 참견한다며 개탄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앞서 든 나의 사례처럼 경험이 부족하거나 의욕이 앞서 무례를 범한 편집자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이 편집자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결론으로 이어져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글에 대해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기 싫다면 일기장에 쓰고 혼자 읽으면 될 일이지 책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스티븐 킹의 말처럼 편집자의 의견이 늘 옳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 출판 씨스템이 전문적인 역량을 갖춘 편집자를 장기적으로 키워낼 여건이 되지 못하고, 실무를 들여다보자면 한꺼번에 여러권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든 책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편집자는 작가가 만날 수 있는 최선의 선의를 가진 독자다. 편집자는 어떻게든 담당한 원고를 끝까지 읽으며 완성된 책으로 만들어내지만, 그 책을 선택한 독자는 내키지 않으면 던져버리면 그만이므로. 작가는 이처럼 성실한 첫 독자의 의견을 일단 경청할 필요가 있다. 설사 편집자의 의견이 작가의 의도와는 맞지 않는다 해도 그렇게 읽어내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결국 단 한번도 마음에 드는 편집자를 만나지 못한 그 작가는 대개 자신의 책을 직접 편집한다고 했다. 좋은 파트너십이 가져올 수 있는 씨너지효과를 한번도 맛보지 못하고 나홀로 작업을 택한 그를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앞선다.
반대로 편집자에게 지나치게 기대는 작가도 있다. 최소한의 씨놉시스만 들고 와 가부를 결정해주길 바라거나, 편집자의 수정 제안에는 동의하지만 본인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으니 알아서 채워넣으라는 식이다.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고 버티는 것보다 더 난감한 경우다. 편집자의 임무는 작가의 의도를 최대한 실현하는 것인데, 그 의도가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편집자의 존재 이유도 없어지고 만다.
편집자로 일하면서 가장 뿌듯한 순간은 좋은 작가에게 다음에도 당신과 같이 일하고 싶다는 말을 듣는 순간일 것이다. 윌리엄 포크너는 커밍스에게 전하는 증정본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우리는 항상 의견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작가와 편집자가 서로를 신뢰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작업은 슬프게도 드물다. 그렇기에 오늘도 나는 나의 유진 오닐을, 나의 포크너를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들은 커밍스를 기다리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