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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21세기민족주의포럼 엮음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 통일뉴스 2010

민족주의의 새로운 호소, 공감과 비공감

 

 

장문석 張文碩

영남대 사학과 교수 storico@ynu.ac.kr

 

 

9986민족주의는 진부해 보여도 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논제다. 최근 출간된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도 그런 열정으로 가득하다. 공저자로 참여한 이는 열명에 달하지만, 한사람이 썼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문제의식이나 사용하는 표현 등이 수미일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글을 다루는 대신에 전체적인 문제의식을 대상으로 촌평해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1부에서는 민족과 민족주의에 관한 이론적인 문제가 주로 검토된다. 쟁점은 크게 세가지인데, 민족의 구성요소, 출현시기, 존재방식이 그것이다. 구성요소에 대해서는 혈통과 언어 등의 지표를 강조하는 객관주의와 감정과 의지 등의 지표를 강조하는 주관주의가 대립한다. 출현시기에 대해서는 근대에 출현했다고 보는 근대주의와 근대 이전에 출현했다고 보는 영속주의가 대립한다.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민족이 상상되고 만들어졌다고 보는 허상론과 민족의 엄존을 믿는 실재론이 대립한다. 이런 논쟁구도에서 이 책은 객관주의에 착근하여 주관주의를 수용하고 근대주의를 배격하여 영속주의를 지지하며 허상론의 허구성을 폭로하여 실재론을 견지하고자 한다.

이 책은 혈통 등의 자연적 요소를 부각시키는 객관주의에 바탕을 두고는 있지만 실제 민족구성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취한다. 특히 고려 초기에 귀화인의 수가 전체 인구의 14%에 달했다고 지적하면서 우리나라가 “다민족, 다문화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단일민족을 이루고야 만 실례”(37면), 즉 “복합적 단일민족”(309면)의 사례라고 주장하는 대목은 자못 흥미롭다. 또한 귀속의식이나 일체감이 성숙했을 때 비로소 민족 형성을 말할 수 있다고 보는 대목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민족은 존재조건과 집단의식의 결합체로서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인 실체이니 말이다. 또한 근대주의를 비판하며 영속주의를 옹호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공감할 수 있다. 최근 서양학계에서도 민족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돋보이는데, 일부 논자들은 민족의 고대 기원설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기도 한다.

다만, 민족의 존재방식에 대해 허상론과 실재론을 대립시키는 구도에는 다소 공감하기 힘들다. 아마도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로 보는 근대주의를 허상론으로 표현한 듯한데, 이는 다소 무리한 동일시가 아닌가 한다. 민족이 상상된 것에 불과하며 유구한 민족전통이 실은 발명품일 따름이라는 견해가 곧 민족이 허구적이라는 주장으로 읽힐 이유는 없다. 민족이 상상되든 전통이 발명되든, 일단 상상된 민족과 발명된 전통은 자신의 존재성을 발휘하며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체질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만큼 민족과 전통은 실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처럼 민족을 둘러싼 쟁점들에 대한 견해는 여러모로 공감할 만하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개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책에서 민족주의는 “민족 구성원 간의 연대의식과 민족 수호 의지 및 발전지향을 추구하는 민족의 이념적 표상으로서 민족 구성원 개개인의 삶에 체화된 의식구조이며 구체적 생활모습”(65면)으로 정의된다. 요컨대 민족주의는 이데올로기이자 정체성이며 일상적 태도라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포괄적인 정의인데, 핵심을 전달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사실 민족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오랫동안 공전한 것도 바로 민족주의의 정의에 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민족주의’를 말하면서도 어떤 이는 민족주의를 정체성으로 본 반면에 다른 이는 이데올로기로 보았으니, 양자 사이의 논쟁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혼란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이 둘을 구분해야 한다. 많은 연구자들도 이 점을 의식하여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애써 민족주의(nationalism)로 표기하며 민족적 정체성의 정치와 준별하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는 여전히 민족주의를 둔탁하게 정의함으로써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탈민족주의자들이 부당하게 민족주의의 폐해만 내세운다고 비난하는데, 사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역사에 폐를 끼친 적이 적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공동의 생활과 역사, 그 기억에 바탕을 둔 민족적 정체성마저 부정할 이유는 없다. 정체성의 정치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뿐더러 ‘우리는 하나’라는 강한 평등주의로 민주주의의 진전에도 기여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질감과 소속감은 그 자체 민족주의라기보다는 민족의 구성요소다. 일상적 의식과 감정을 구태여 민족주의로 지칭하여 정치이데올로기와 혼동할 필요는 없다. 그렇기에 미국의 민족주의 연구자 그로스비(Steven Grosby)는 많은 연구자들이 ‘민족주의’라는 말을 ‘민족’의 동의어로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꼬집으면서 이런 오용을 민족주의의 이해를 둘러싼 혼란의 주범으로 지목했던 것이다.

한편, 제2부는 이론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문제를 천착한다. 주된 논지는 우리나라의 우파와 좌파가 공히 빠져 있는 탈민족주의 및 반민족주의와 대결하면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해석하고 현재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정확히 진단함으로써 21세기형 민족주의의 실천적 좌표를 정립하는 것이다. 과연 곳곳에서 흥미로운 주장들이 눈에 띈다. 가령 우리나라의 주류 엘리뜨와 비주류 식자층이 공히 빠져 있는 탈민족론을 언급하면서 전자의 탈민족론은 미국 사대주의에, 후자의 탈민족론은 유럽 사대주의에 경도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부분(221~22면) 등이 그렇다. 이는 틀림없이 우리의 민족주의 이해에 깊이 스며든 서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중요한 비판(102면)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제2부를 읽으면서 공감하기 힘들었던 것은 끊임없이 진짜 민족주의와 가짜 민족주의를 구분하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구분은 다음과 같은 논리에 근거해 있다. 남을 배척하는 것은 사이비 민족주의다, 진정한 민족주의는 남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이러저러한 경향은 진정한 민족주의가 아니다 등등. 그러나 진짜 민족주의가 따로 있고, 가짜 민족주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진짜와 가짜가 있다면, 이들은 공히 민족주의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 더욱 공감할 수 없는 것은 계속 입증될 수 없는 주장을 펼친다는 점이다. 가령 엘리뜨층과 식자층의 반민족성을 지적하면서 “대중은 의연히 민족주의적이었다”(201면)라고 말하는 부분이 그렇다. 다음 글에서는 “서민대중은 조국통일보다는 구체적인 경제적 삶에 관심을 두었다”(212면)라고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이 두 진술의 저자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도, 서로 상반돼 보이기 때문에 그 관계가 설명되어야 할 두 진술을 하나의 책에서 대하는 것은 불편하다. 나아가 제2부의 저자들은 상황 인식의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참된 대중은 본성상 민족주의적이라고 믿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는 전제되기보다는 증명되어야 할 명제이다.

무릇 하나의 주장은 선명해야 하지만 늘 소통이 가능해야 한다. 합리적인 설득력을 갖추어야 하며 수정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그런데 논제가 민족주의일 때에는 잘 그렇게 되지 않는 것 같다. 항상 민족주의에 대한 찬반, 선악의 이분법이 팽팽하게 대립한다. 결국 이 책도 그런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듯하다. 이 책에 담긴 주장은 같은 입장에 선 소수에게는 명쾌하고 후련하게 들리지만, 다른 입장에 선 소수를 설득하거나 분명한 입장이 없는 다수에 호소하기엔 너무 선험적이고 단정적이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권유함으로써 오히려 학문적으로 경청할 만한 논의들도 빛이 바래는 것 같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