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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우리가 정말 인간일까?』, 아카넷 2006

인간의 경계를 둘러싼 과학과 역사의 조우

 

 

홍성욱 洪性旭

서울대 교수, 과학기술학 comenius@snu.ac.kr

 

 

우리가 정말 인간일까

20년 전 분자생물학자들은 인간의 귀를 등에 붙이고 태어난 ‘앙코마우스’를 만들어 특허를 냈다. 지난 몇년간 우리나라에서는 인간 체세포에서 추출한 핵을 동물의 난자에 넣어서 배아를 만드는 실험도 이루어졌다. 이제는 별로 뉴스거리도 안되는 이러한 ‘잡종’ 실험이 최근 다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과학자들이 유전자조작을 통해 인간의 뇌를 가진 동물을 만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이성(理性)이고 이성이 거의 전적으로 인간의 뇌의 기능에서 기인한다면, 인간의 뇌를 가지고 태어난 동물을 실험대상으로 쓰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

인간의 뇌를 가진 동물이 인간의 경계를 혼란스럽게 한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 신체에 깊숙이 침투하는 기계가 인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의 뇌에 컴퓨터칩을 이식해서 뇌와 컴퓨터가 직접 소통하게 하는 초보적인 실험이 성공했으며, 인공망막과 인공달팽이관 같은 인공장기가 ‘6백만불의 사나이’를 가능케 하고 있다. 2004년 영국에서는 유전자조작을 통해 암 유전자를 제거한 맞춤아기가 태어났다. 이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기술과 생명공학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바꾸고, 그 결과 인간이라는 범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동물보호론자 중에는 유인원 일부가 인간과 흡사한 권리를 가진 생물종으로 취급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유인원과 인간의 차이를 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라고 본다. 유인원 연구자 중 많은 이들이 도구와 언어, 불의 사용, 문화와 사회의 발달, 종교와 의례, 이성같이 인간만이 가졌다고 여겨지던 특성들이 이제 더이상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고 간주한다. 분자생물학만이 아니라 영장류 동물학도 인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인간일까?』(So You Think You’re Human? 정주연 옮김)의 저자인 역사학자 페르난데스—아르메스또(Felipe Fernández-Armesto)는 영장류 동물학, 동물보호운동, 고고인류학, 생물학, 인공지능, 유전학의 성과가 인간과 동물, 특히 인간과 영장류의 경계를 허물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인문학이 이러한 과학의 도전을 심각히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인간에 대한 자신들의 연구와 성찰에 진지하게 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최근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과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국내 인문학계의 자기반성에도 잘 부합한다.

이러한 과학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저자는 역사로 돌아가 지금 논란중인 인간의 경계가 과거에는 어땠는가를 살펴본다.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저자는 오늘날 우리만이 인간의 경계 때문에 고민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인간의 경계를 그리는 작업은 동서양을 통틀어 지난 몇백년 동안 끊임없이 논란이 돼왔고, 그 과정은 배제와 포용의 역사였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이 역사를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동서양 모두에서 기원전 8세기 이전에는 인간은 동물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었다. 이 시기가 지나고 기원전 2세기까지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 지배권, 신탁통치권을 주장하는 사상이 범세계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다가 17세기 서양에서 개코원숭이에 대한 관찰을 필두로 영장류와 유인원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인간의 우위가 도전받기 시작했다. 18세기 인류학자 몬보도(J. B. Monboddo)는 오랑우탄 같은 유인원을 사람처럼 취급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런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서 고안된 해결책은 유인원을 ‘퇴화한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인원이 인간의 경계에서 배제되면서 유인원과 흡사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집단들도 인간의 범주에서 배제되었다. 아프리카 흑인, 피그미족,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인간보다는 유인원이나 원숭이에 더 가깝다고 간주되었고, 이런 근거에서 이들에 대한 노예매매, 살육, 학대가 정당화되었다. 두개골학, 라마르끄의 이론, 다윈의 진화론 등 당대의 과학이 이같은 배제와 서열화를 위해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흑인이나 원주민이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유전학과 영장류학의 발전은 유인원의 일부에게 자기 영토에서 쫓겨나지 않을 권리나 잡히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권리처럼, 인권과 흡사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불과 2%만이 다르고, 유인원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문화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저자는 20세기 후반 이후에 태아가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되었음을 비판한다. 저자에 따르면 태아를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한 것은 인간을 과학적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인간의 범주에 포함시킬지에 대한 판단은 “장기적으로 과학, 이성, 태아 발달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논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저자는 본다(179면).

과거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저자의 판단과 부합하지 않는다. 과거 인간범주 논쟁에 대한 역사적 분석은 배제와 포함의 과정에 당시의 ‘과학적’ 관념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정치적 신념, 문화적 태도, 철학적·종교적 이념도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유전자의 98%가 같기 때문에 침팬지와 인간이 거의 같다고 주장하는 과학자가 있는 반면에, 2%가 거대한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해석하는 과학자도 있다. 태아를 인간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하는가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경계를 그리는 작업은 과학의 발전에 의해서 조건지어지지만, 그 과학은 당대의 사회문화적 믿음과 가치관에 의해 다시 영향을 받는다. 이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인간이라는 범주를 둘러싼 바람직한 논의는 과학과 역사 모두를 성찰하고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성찰은 당분간 인공지능이나 유인원이 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