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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 작품론

 

우리가 선택한 고통

박민규 소설집 『더블』

 
 

조연정 曺淵正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순진함의 유혹을 넘어서」 「멜랑꼴리 쏠리다리떼」 등이 있음. yeon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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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신작 소설집 『더블』(창비 2010)에는 모두 열여덟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의 지난 5년의 발자취가 담긴 이 소설집에서 우리는 무협소설의 코믹한 패러디나 작정하고 쓴 SF도 만나고, 게임이나 영화가 소설로 옮겨진 듯한 장면도 목도하며, 오늘날의 빈곤한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나 삶과 죽음에 관한 쓸쓸한 이야기도 접한다. 이처럼 다양한 분위기의 소설들은 시기적 구분과도 무관하게 5년간 동시다발적으로 씌어졌다. 관심이나 태도의 변화를 발견했다고 말하기가 무색하게 박민규는 그간 여러개의 마스크를 번갈아 쓰며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니 박민규가 써낸 다채로운 이야기들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저 그가 소설가라는 당연한 사실만이 남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의 소설에서 우리는 대개 심각한 사유의 고통보다 읽는 재미를 얻는다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블』은 박민규가 쓴 두권의 소설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물론 모두가 박민규를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넘쳐나는 욕망과 만성적 낭패감뿐인 우리는 위안을 위해서라면 더 즐거운 무언가를, 각성을 위해서라면 더 진지한 무언가를 찾으면 된다. 박민규의 종횡무진 상상력에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지는 누군가는 탐독하던 다른 장르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지구의 모든 해악은 냉장고에 넣으면 되고(「카스테라」, 『카스테라』 문학동네 2005) 차가 안 팔리면 화성에 가서 쎄일즈를 하면 된다는(「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식의 간편한 한마디가 도무지 의심스러운 누군가는 다른 곳에서 실질적 대안을 구하면 될 일이다. 이처럼 모두가 박민규를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21세기의 첫 10년간 그가 우리 문단에 부려놓은 일은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단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에 대해서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비극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서나, 그가 자신도 모르게 해놓은 일들은 분명 우리 문단에 중요한 화두를 던졌기 때문이다. 그가 한 일이 얼마나 보람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학의 종언’ 운운하는 말들에 기죽고 그래서 오히려 자족적이 되어갔던 문단에 생산적 활력을 불어넣고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2000년대 우리 문단은 박민규에게 적지 않은 빚을 졌다 하겠다.

 

그간의 박민규 소설에서 독자들은 소소한 재미와 함께 예기치 못한 감동마저 얻었다. 맞대응이 불가능한 이 세계에 가장 덜 굴욕적인 방식으로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그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유쾌한 상상에 의해 작중인물들은 자신이 발디딘 세계를 제법 살 만한 곳으로 뒤바꿔보는 호사를 누렸는데, 고통의 세계를 횡단하는 이같은 박민규식 유머와 ‘편집증적 서사’에 대해 김영찬은 “개인용 쾌락을 통한 자기배려 의식”(「개복치 우주(소설)론과 일인용 너구리 소설 사용법」, 『비평극장의 유령들』, 창비 2006, 145면)이라는 적극적인 평가를 내렸고 이같은 독법은 많은 공감을 얻었다. 현실의 비참함을 간편하게 “외계인의 습격”(「코리언 스텐더즈」, 『카스테라』) 탓으로 돌린 망상적 사유와, 우주적 시선으로 지구의 불행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숭고한 유머가 버무려진 박민규식 ‘편집증적 서사’가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고달픈 현실의 초라한 인간들에게 얼마나 통쾌한 보상이 되었는지는 물론 알 수 없다. 세계를 단순화했다는 비판이나 소설 속 전능한 사유에 비례해 “부정적 현실의 전능함”이 더욱 공고해지지 않겠냐는 우려가(차미령 「환상은 어떻게 현실을 넘어서는가」, 『창작과비평』 2006 여름호 268면) 없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의 소설이 이 세계를 구원할 어떤 실천적인 전망을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이미 지난 세기의 독법인지도 모른다. 박민규의 소설은 우주만이 살길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설파하고자 의도한 적도 없을뿐더러,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박민규의 자유로운 사유나 숭고한 유머에 동참하며 기적 같은 구원을 바란 것도 아니다. 박민규는 그저 이런저런 상상력을 발휘하며 결국에는 구원이 시급히 요청되는 세계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내비게이션을 달고 화성을 오가는 자동차 쎄일즈맨을 등장시키든, “중국 중원을 떨게 했던 동방 사룡(四龍)”과 인기 걸그룹 ‘소녀시대’를 함께 등장시키든, 혹은 우리의 머리 위에 UFO 같은 아스피린을 띄우든, 박민규가 보여준 것은 “우리는 혹시 서민도 아니고 빈민… 그런 거 아닐까?”라는 누군가의 절망이고, “부패를 못 막으면 발효라도 시켜야 할 거 아닌가”라는 다른 누군가의 한탄이며, “대응할 수 없을 때 인류는 적응한다”는 우리 모두의 체념뿐인지도 모른다.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나 「(절)」 「아스피린」 같은 소설이 재미를 곁들여 말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일까. 오로지 죽음만이 생의 유일한 사건으로 남은 노년의 일상을 다룬 「누런 강 배 한 척」이나 「낮잠」, 또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남자의 남은 삶을 그린 「근처」는 이번 소설집에서 유독 정이 가는 작품들이다. 놀랄 만한 통찰이나 획기적인 전망을 애써 기대하지 않고도 공감하며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질문과 마주했다는 점에서, 박민규의 세계인식이 그 어느 때보다도 추상적이고도 염세적으로 드러난 작품들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인물의 내면을 섬세히 들여다보려는 작은 배려가 엿보이며, “그 어떤 죽음도 비루한 일상(日常)일 뿐”(「낮잠」)이라는 비관적 목소리의 배면으로는 “삶도 죽음도 간단하고 식상하다”(「근처」)라는 간명한 문장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질긴 일상의 힘이 도드라지기까지 한다. 먹고 자고 배설하기를 반복하는 육체를 지닌 인간의 일상 말이다.

「누런 강 배 한 척」을 보자. 30년을 근속한 회사에서 퇴직한 뒤 치매에 걸린 아내와 단둘이 살아가는 예순의 남자가 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다행히도, 살아왔다 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았다. 그런 그가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데, 이런 하루하루를 보내며 삼십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순간보다도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들을 훨씬 더 두려워하지 않는가. 남자는 동반자살을 결심하고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모아온 수면제를 꺼내려는 찰나 호텔 방의 벨이 울리고 “부부 마사지”를 한다는 마사지사가 ‘잘못’ 도착한다. 마싸지사는 그의 아내에게 성적 서비스가 아닌 “평범한 안마”를 해주지만 잠들어 있던 아내는 “아…” 하고 낮은 신음을 토한다. 수십년 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신음 앞에서 남자의 마음은 “역력히” 어지럽다. 죽음에 이르는 삶에 관한 쓸쓸한 이야기로 내내 적막한 분위기를 유지하다 결국 이같은 반전으로 울지도 웃지도 못할 난감함을 유발하고야 마는 「누런 강 배 한 척」은 역시나 박민규스러운 작품이다. 이 소설은 죽음만을 앞에 둔 비관적 상황에서도 얄궂게 지속되는 일상의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청아한 얼굴로 “별 헤는 밤”을 낭송하던 첫사랑과 요양원에서 재회한 60대 남자가 여자 앞에서 소변을 지린 자신에게 절망하고 치매 걸린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대변 냄새에 또 한번 절망하는 「낮잠」의 마지막 장면도 그렇거니와, 우리 모두는 죽음에 이르는 삶을 살아내고 있기에 고단하고도 허망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듯한 박민규의 어떤 소설들은 실상 먹고사는 일로 추해질 수밖에 없는 비애를 적고 있다. 그러니, 이 지구에 단단히 발 묶여 죽음만을 생각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몇몇 소설들을 읽었다고 해서, 그의 세계인식이 점차 절망적으로 되어간다 확신할 필요는 없다. 그는 삶과 죽음에 관한 인간의 실존을 심각히 탐구하고 있다기보다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생존 문제를 여전히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별」과 「아치」 같은 소설이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도 우리의 불안한 생존에 관한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은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서야 비로소 진지하게 탐구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실을 일러주는 소설은 「깊」이다. 이 소설에서 해저 2만미터의 “심연의 유혹”을 향해 두려움 없이 직행하는 이들은 “인간이기보다는 디퍼(deeper)”, 즉 대체체액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종이다. 인간의 노역을 기계가 대신하고 자살이 합법화되었으며 “인류의 60퍼센트가 과학과 공학을, 나머지 30퍼센트가 철학을 전공하는” 25세기의 새로운 개체 말이다. 누군가는 “심연의 유혹”에 충실한 디퍼들에게서 죽음을 향한 인간의 근원적 충동과 더불어 염세적인 세계관을 읽어내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2011년 지금 여기의 인간들은 대체로 죽지 못해 살거나 먹고살 수 없어 죽기까지 한다는 점을 상기하자.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육체를 이미 벗어던진 디퍼가 아닌 이상 지구 위 인간들에게는 “심연의 유혹”에 관한 사치스러운 고뇌가 쉽게 허락될 수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먹고사는 일을 초월해 실존을 고민할 수 있는 선택받은 극소수의 인간들이 있는 반면 대다수는 그럴 여유가 없다. 「깊」은 이러한 사실을 환기하는 소설로도 기능한다. 이처럼 박민규의 염세적 소설들은 그 비관의 기원을 인간의 보편적 죽음에 두기보다는 여기의 특수한 삶에 둔다. 여전히, 문제는 고달픈 육체인 것이다. 무릎이 꺾이는 가부장의 고통이 결코 비유일 수 없었던 기원전 17,000년으로부터(「슬(膝)」)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영생을 바라고 냉동인간이 되기로 결심한 인간들이 결국 냉동고기로 전락해버리는 29세기에도(「굿모닝 존 웨인」) 어쩌면 이같은 일상의 힘과 약육강식의 원리는 변하지 않을지 모른다.

 

『더블』에서 여성인물이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연으로 등장하는 그녀들은 보호가 필요한 치매 노인이거나, 딜도로 남편을 좌절시키는 부인, 혹은 “그런데 오빠, 그런데 오빠”라고 새처럼 지저귀며 순진한 남자를 회생불능의 신용불량자로 만들어버리는 악녀다(「별」). 혹은 새로운 종의 인간을 창조하려는 “어머니 인류”(「깊」)이거나. 여성인물에 관해서라면 박민규의 상상력은 조금 뻔한 편이다. 세계의 고통에 직접 연루되지 않은 듯 무심한 태도로 “아…” 하는 신음을 내뱉거나 순진한 얼굴로 웃고 있는 할머니들, 그리고 연약한 남성들 사이에서 콧소리를 일삼는 그녀들이 남성적 세계의 관념성을 깨뜨리는 “부인의 메커니즘”(신수정 해설 「뒤죽박죽, 얼렁뚱땅, 장애물 넘어서기」, 『카스테라』 320면)을 작동시킨다 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작가가 여성들의 내밀한 삶에 무심한 편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를 등장시킨 장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예담 2009)가 독자들의 이런 아쉬움을 어느정도 달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에서부터 「끝까지 이럴래?」 「루디」에 이르는 근작 단편들은 아예 남성 짝패들을 투톱으로 내세운다. 작중인물들이 외부세계를 박해의 구조로 확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들은 박민규식의 편집증적 서사가 부정적인 방식으로 강화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어딘가에서 잠이 들었다가 탑처럼 솟은 12미터의 망루 위에서 깨어난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의 ‘고’와 ‘도’는 극한의 상황에 처한 피해자들이다. 그들은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채워져 있는 음식을 소비하며 싸이렌 소리와 함께 매일 반복되는 총격에 맞선다. 자신들이 왜 이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총을 쏘는 자들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고와 도는 두려움에 떨며 서로를 향해 “내가 미치지 않았다고 말해줘”라고 중얼거린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처럼 부조리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말이다. 도를 죽인 고가 마침내 망루를 내려와 발견한 것은 총을 들고 있는 적들이 아닌 그저 “메에” 하는 양떼뿐이다. 피해망상의 심리구조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읽히는 이 소설은 “참기 위해서는, 그 모두가 꿈이란 믿음이 필요했다”라는 말만이 가능한 우리 시대의 비정함을 극도로 추상한 작품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이 세계의 피해자일까. 과연 우리의 박해자, 즉 우리를 희생양으로 만든 것은 누구일까.

혜성과의 충돌로 인한 지구 종말일을 하루 앞두고 마주앉아 술을 나누는 「끝까지 이럴래?」의 ‘애덤스’와 ‘창’의 서사도 유사하게 읽힌다. 혜성으로 인한 지구 종말은 인류가 손쓸 수 없는 재앙에 가깝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라고 묘사되는 종말 직전의 지구의 모습은, 그러니까 “대규모의 파산자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어버린 지구의 모습은 현실의 우리가 당면한 위기를 정확하게 반영하며 인류 재앙의 인위적 기원을 분명히 환기한다. 층간소음의 고통에 시달리던 애덤스가 결국 층간소음의 유발자였다는 결말과 더불어, 「끝까지 이럴래?」는 전지구적 인류의 재앙 앞에서 피해자임을 확신하고 절망하는 우리의 인식구조가 어쩌면 정말 망상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듯도 하다. 편집증적 사유의 자기배려는 책임회피와 동전의 양면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끔찍한 악당 ‘루디’와 조우한 ‘보그먼’의 불행이 우연 아닌 필연일지 모른다는 「루디」의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금융회사 부사장인 보그먼과 그 회사에서 12년간 용역 청소부로 일한 루디는 뉴욕에서라면 얼굴 한번 마주할 일 없는 관계지만 인간의 손이 쉽게 미치지 않는 “알래스카의 팍스 하이웨이”에서라면 사정이 다르다. 상징적 구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보그먼은 그곳에서 총에 맞아 순식간에 한쪽 귀를 잃고 루디의 명령에 한무더기 똥을 싸놓으며 극한의 고통과 수치를 겪는다. 총 한자루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그곳에서 루디는 보그먼에게 자신이 경험했던 “선택받은 고통”을 돌려주는 셈이다. 「루디」는 우리가 겪는 고통이 신의 선택이 아닌 인간의 선택 탓이라는 사실을 경악할 만한 사태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박민규의 근작 중 특히 주목할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불행 앞에서 누구나 꿈쩍하지 않는 구조를 탓하지만 그러한 구조를 만든 것이 결국 우리 인간이라는 사실, 그러니 스스로 해결책을 찾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무시무시한 “루디와 함께”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루디」의 전언이다.

우리의 박해자는 또다른 우리(double)일 뿐이다. 죽음이라는 숙명적 비극이나 누군가의 황당한 불행을 주로 다루는 박민규의 『더블』은 부정적 현실의 전능함을 강조하면서 불가피한 낙담을 강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더블』은 인류의 비극에 인간적 원인이 있음을, 결국 문제는 우리의 이기적 욕심일지 모른다는 그 식상한 사실을 전혀 식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러주는 듯하다. 물론 이같은 메씨지와 무관하게 이 두권의 책은 충분히 즐길 만하지만, ‘선택받은 고통’을 ‘선택한 고통’으로 뒤바꿔 생각할 능력을 누군가 얻기까지 했다면 『더블』은 두배로 보람된 일을 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