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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박석무 『풀어 쓰는 다산 이야기』1·2, 문학수첩 2005, 2006
세상사를 헤아리는 다산의 지혜
도종환 都鍾煥
시인 djhpoem@hanmail.net
조선후기 역사에서 가장 가능성있던 시기를 꼽으라면 나는 정조의 강력한 리더십과 다산(茶山) 같은 엘리뜨 학자들의 개혁마인드가 결합해서 사회의 변화를 추동해가던 시기를 든다. 정조 자신이 문무를 겸비한 학자군주로서 학문적 깊이를 지녔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포용력을 겸비한 임금이었지만 다산 같은 인재를 일찍이 발견한 것 또한 역사의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다산은 5백권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남겼으나 모두 한문으로 기록된 책이라서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근래에 번역이 얼마간 이루어져서 다행이긴 하지만 우리가 접하는 다산의 저술이란 대개의 경우 일표이서, 즉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와 한시, 산문 등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런데 박석무(朴錫武)의 『풀어 쓰는 다산 이야기』가 출간되어 다산의 총체적인 면모를 속속들이 흥미롭게 전해준다.
다산은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의 축조를 위해 설계도를 작성하고 축조기술을 설파한 「성설(城說)」을 저술하여 가장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을 쌓는 데 공헌한 토목공학자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목화를 앗는 씨아를 개발했고, 수레나 배를 이용한 곡식 운반 등 농업의 기계화를 주장했으며, 「군기론(軍器論)」을 통해 병기개발을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다산은 정조임금에게 바치는 「지리책(地理策)」을 통해 역대 나라의 영토와 경계에 대하여 소상하게 밝혔고, 온갖 자료를 동원하여 최대한 정확한 국토와 물산에 대한 설명을 올렸다. 다산은 문학가이고 철학자이며 경세가였지만 의학연구에서도 최고 수준의 업적을 쌓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마과회통(麻科會通)』 등 많은 의학서적을 저술했고, 「종두설(種痘設)」 등을 통해 두질의 예방과 치료에 획기적인 의료시술의 길을 연 의학자였음을 이 책은 조목조목 밝혀준다.
다산과 교유하였거나 다산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다. 다산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키워준 정조,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을 이어받아 다산에게 연결해준 성호 이익, 신유교옥으로 옥사한 권철신과 이가환, 연암 박지원과 매천 황현, 당파가 다른 노론 출신이면서 치열한 학술논쟁을 벌였던 문산 이재의, 소론계 학자이면서도 교류하며 돈독하게 지낸 석천 신작, 진주목사를 지낸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 다산의 형 정약전, 서제(庶弟) 정약횡, 그리고 최근에 일본에서 시집이 발견된 큰아들 정학연,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와 동갑내기로 「농가월령가」를 지은 둘째아들 정학유, 하피첩(霞怙帖)에 매조도(梅鳥圖)를 그려 보내준 다산의 외동딸, 다산을 해배해달라고 상소를 올린 이태순, 다산의 석방을 반대하고 유배길에 오르게 하였으며, 해배 반대와 귀양지에서 돌아온 다산의 재등용까지를 평생 반대해온 영의정 서용보 등 다산과 관련된 인물 대부분에 관한 자료를 이 책에서 접할 수 있다. 인물뿐만 아니라 다산과 관련된 장소, 예컨대 다산과 성호가 만났던 봉곡사, 과거공부를 했던 봉은사, 노년에 자주 찾아 시를 지었던 수종사, 천진암 등 다산과 관련있는 곳은 모두 찾아내어 소상하게 일러주고 있다.
저자는 다산에 대해 해박하고 방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크고 작은 세상사를 다산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다산의 목소리를 빌려 판단의 준거를 제공해준다.
공무원들이 정도에서 일탈하고 요령을 부려 문제가 되면 「간리론(奸吏論)」에 나오는 “무릇 직책이 하찮은데도 재주가 넘치면 간사하게 되고, 지위는 낮은데도 지식이 많으면 간사하게 되고, 나는 한자리에 오래 있는데도 나를 감독하는 사람이 자주 바뀌면 간사하게 되고” 같은 구절을 빌려 법과 제도의 올바른 운영의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고관들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일이 생길 때는 『목민심서』의 ‘해관(解官)’ 조항을 읽어보길 권하고, 선거에서 참패한 사람들에게는 다산의 논문 「원정(原政)」을 읽어보라고 한다. 하인즈 워드 이야기로 떠들썩할 때는 다산이 말했던 ‘천연동류(天然同類)’를 들어 애초에 인간은 같은 종류로 태어날 뿐 차등있게 태어날 수 없다고 전해준다. 장맛비가 내릴 때는 귀양살이하며 장마에 대해 쓴 한시를 소개하고, 조류독감이 번질 때면 『목민심서』에 나오는 유행병 예방법을 소개한다.
심지어 피서철에는 다산이 63세에 지은 「소서팔사(消暑八事)」, 즉 더위를 식힐 여덟가지 방법이라는 시를 소개한다. 송단호시(松壇弧矢), 괴음추천(槐陰翦韆), 허각투호(虛閣投壺), 청점혁기(淸堗奕棋), 서지상하(西池賞荷), 동림청선(東林聽蟬), 우일사운(雨日射韻), 월야탁족(月夜濯足). 이런 다산의 피서방법은 학자의 피서법이어서 그런지 운치있고 정감이 넘친다. 비오는 날에 시를 지으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우일사운인데, 시를 지어놓고 어떤 운자가 어려웠나를 따지다보면 저절로 더위가 식혀진다는 것이다. 다산 아니면 이런 고난도의 피서법을 선택할까 싶기도 한데, 세상사 전반을 다산의 눈으로 보고 다산의 목소리로 풀어가는 저자의 해박한 다산학에 탄복하게 된다. 책 제목을 ‘풀어 쓰는 다산 이야기’라고 했지만 책을 읽다보면 ‘다산의 목소리로 풀어가는 세상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글들이 연재됐던 싸이버공간의 내용적·형식적 제약 때문인지 좀더 전개되었으면 하는 부분에서 멈춘 점이 간혹 아쉬웠다. 하피첩 이야기의 경우 부인이 보낸 치마를 오려 아들과 딸에게 보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는 대목까지가 이 책에 실려 있는데, 다음에는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유배지에 있는 남편에게 보내는 아내의 심정의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정서적인 면도 짚어주는 다산 이야기가 되길 기대한다. 정조대왕이 붕어(崩御)하면서 조선왕조가 본격적인 쇠퇴기에 접어드는 것과 지금 개혁과 보수의 대결국면이 갖는 유사성,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점을 짚어주는 깊이있는 분석 등도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특히 다산의 232권에 이르는 경학관계 저술의 심도있는 재해석을 통해 오늘 우리의 현실을 진단하는 글들을 더 많이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 책은 ‘폭넓은 다산학’에서 ‘깊이있는 다산학’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