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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박인환전집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예옥 2006
편견은 가고 진실은 남는 것
한명희 韓明希
시인, 강원대 교수 happycactus@naver.com
타계 50주년을 맞아 세상에 나온 박인환(朴寅煥)전집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이 전집은 박인환을 더이상 1950년대의 시인으로만 한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또 김수영(金洙暎)과 따로 떼어서 한사람의 독보적인 시인으로 다루어도 좋다는 신호탄처럼 여겨진다. 여기서 김수영을 표나게 내세우는 이유는 박인환에 대해 사람들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된 데 김수영이 한몫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다”고 마음껏 멸시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1980, 90년대에 불어닥친 ‘김수영현상’ ‘김수영신화’가 박인환에 대한 이러한 폄하를 더욱더 확정적인 것으로 만들어놓지 않았던가.
최근 들어 박인환의 해방기 시에 나타나는 식민지와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에 주목하면서 그를 리얼리스트로 부각시키려는 연구자들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박인환을 ‘1950년대’ ‘모더니즘’ ‘후반기 동인’이라는 키워드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박인환을 1950년대의 모더니스트 시인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염세적인 낭만주의 시인으로 단정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박인환 문학의 진정한 매력은 1950년대 이전과 이후의 글들을 아울러 읽을 때 더 많이 드러난다.
박인환이 더이상 1950년대에 박제된 시인이 아닌 이유는 그가 시와 산문을 통해 문학과 다른 예술장르를 넘나드는 너무나 문화적인 면모를 보여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념 대립의 시대를 넘어 다원화, 다문화화되어가는 현재의 사회상황을 볼 때 박인환이 폭넓게 수용될 가능성은 앞으로도 무궁무진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전집이 의미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편자 문승묵(文承默)이 이 책에 쏟아부은 열정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수집가’라고 밝히고 있거니와, 이 전집은 문학연구의 와중에 혹은 문학연구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박인환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 쌓아올린 것이다. 그간 출간된 전집과 선집에는 누락됐던 시 7편을 찾아 실은 것도 그렇지만, 박인환의 산문을 한자리에 모은 것은 이 책이 보여주는 최대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지금껏 그의 산문은 목록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이 첫 박인환전집이 된다고 생각하는 바”라는 편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전집을 통해 박인환의 면모가 새롭게 밝혀지기를 기대하는 것에는 이 전집이 보여준 자료 수집·정리의 우수함 외에 다른 까닭도 있다. 박인환이 1940년대 후반에 쓴 「인천항」 「남풍」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등에서 보이는 현실인식의 탁월함이 그간 간과된 것은 그의 첫시집이자 유일한 시집인 『선시집』(산호장 1955)에 이들 시가 실리지 않았던 데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더 큰 이유는 박인환 시가 보여준 페씨미즘의 세계, ‘죽음의식’ 등이 이러한 현실주의적 면모를 가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어떤 이유로 박인환이 첫시집에서 이 시들을 빼버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박인환에 대한 그간의 ‘편견’을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이 전집의 서지자료 정리사항에 대해서도 얘기해보자. 이 전집은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현대맞춤법 규정에 따르고 있지만, 단행본과 잡지나 일간지 발표본을 일일이 대조해 표기상의 차이가 있는 것은 각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다. 시어에 대한 편집자의 해설도 풍부해서 오늘날에는 낯선 한자어, 외래어는 거의 모두 풀이를 달아놓았다. 편자의 각주가 난해한 박인환 시를 이해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꼼꼼한 단어풀이가 시에 대한 접근을 한결 쉽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이 전집에서 일독을 권하고 싶은 것은 ‘아메리카 시초(詩抄)’라는 이름으로 실린 11편의 시이다. 이 시들은 그가 1955년 대한해운공사의 상선 남해호를 타고 미국여행을 다녀와서 쓴 것으로 미국이라는 ‘문명세계’를 맞대한 약소국민의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19일간의 짧은 일정이어서 미국을 피상적으로밖에는 관찰할 수 없었겠지만 이 시들은 분명 기행시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 산문도 박인환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일조하리라고 생각한다. 박인환의 산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70편이 넘는 양과 내용의 다채로움에 놀랄 것이다. 이 책은 그의 산문을 문학, 영화, 연극, 사진, 기행, 서간, 시사·전쟁, 여성·생활의 여덟 장으로 나누고 있는데, 해설을 쓴 방민호의 적절한 지적처럼 박인환의 산문은 “문화비평가이자 문명비평가”(581면)로서의 그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의 산문 중 단연 눈에 뜨이는 것은 21편에 이르는 영화에 대한 글들이다. 이 글들을 읽고 있으면 그가 장 꼭또를 “둘도 없는 정신의 친구”라고 말하고 다녔던 것이 그저 겉멋만은 아니었으리라고 믿게 된다.
이 전집은 잘 정리된 산문을 읽는 재미뿐만 아니라 작품연보에서 박인환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기쁨도 제공한다. 작품연보는 박인환이 여러편의 소설을 번역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시와 산문 중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이 있음도 알려주고 있다. 번역작업이 그의 문학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직은 확언할 수 없지만 이들 번역물들을 읽어보는 것도 박인환 이해에 도움을 줄 것이다. 미확인으로 남아 있는 작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전집에 수록되지 않은 다른 작품이 있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진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새롭게 조명받기에 앞서 우선 제대로 읽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박인환을 정당하게 평가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