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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하성란 소설집 『웨하스』, 문학동네 2006

보이지 않는 것과 웃음의 통찰

 

 

박성란 朴盛蘭

문학평론가 opp21c@hanmail.net

 

 

웨하스

하성란(河成蘭)의 소설은 덧없이 흘러가는 일상의 한 장면을 일순, 특권화된 순간으로 만든다. 무심한 듯하나 집요한 시선으로 사물화된 세계를 응시하고 재현하는 밀도 높은 문장은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불편하고 난해하다. 하성란 소설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려면 롱테이크 기법의 영화를 보듯, 시간을 견뎌야 한다. 아니, 견딜 뿐 아니라 시간을 타고 함께 흘러야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익숙한 장면들도 낯설고 새삼스러워지는 새로운 소설적 차원이 열리고, 불현듯 작가는 그 틈새에서 생의 비의(秘意)를 꺼내 보인다.

““바닷바람은 가전제품을 못쓰게 망쳐버려. (…) 안개처럼 가는 모래알들이 기계 속으로 들어가 고장을 내. 염분도 한몫을 하지.” (…) 바닷바람은 가전제품만 망치는 것이 아니었다.”(「극지호텔」, 266~67면) 하성란의 소설에서 인간 존재와 운명이 얼마나 허약한지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배경과 인물을 보더라도 이 점은 더욱 분명하다. 웨하스로 만든 집이나 모래톱 위에 지어진 땅끝의 호텔, 최대 6개월의 단발 계약을 맺고 한물간 극장쇼를 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아슬아슬한 삶의 조건을 상징한다. ‘안개처럼 가는 모래알들’이 기계 속으로 스며들어 가전제품을 망가뜨리듯, 보이지 않는 시간은 서서히 우리의 삶을 부식시킬 것이라고 소설은 말한다. 그러고 보니 저 ‘바닷바람’은 시간의 비유가 아니겠는가.

소설집 『웨하스』에는 이처럼 시간 속에 명멸하는 인간 존재와 운명에 대해, 한층 깊고 여유로워진 작가의 통찰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하성란 소설이 사물과 현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성찰로 나아간 점이다. 가령 ‘시간’에 대한 의식이 그것이다.

현대인의 비극적 실존과 운명을 어렴풋하게 환기시키며 전작들의 배면에 흐르던 시간의 정체는 이번 작품집에서 좀더 상징적으로 부각되어 표면화된다. 작가에 따르면 시간은 견고해 보이는 우리의 생을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굴절시키고 끝내는 소멸과 죽음으로 실어나른다. 또한 시간은 인간의 삶과 진실을 모호함으로 이끌기도 한다. 소설에서 ‘기억’을 늘 엉키게 하고 의심스럽게 만드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은 기억 자체를 불분명하게 만들면서 현실과 비현실, 진실과 오해,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지워나간다. 따라서 기억상실증 환자에게 과거의 자신이 착한 아이였는지 아니었는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듯(「그림자 아이」), 진실이 무엇인지 공방을 벌이는 짓은 하성란의 소설에선 별 의미가 없다. 결말에서 재구성된 기억의 진위 여부를 말해주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진실에 대한 작가의 답변은 모호성 속에 늘 유보된다. 그 해답은 오직 시간만이 쥐고 있다.

하지만 이 시간인식이 암울하고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성란 소설은 시간의 가차없음, 운명적으로 드리워진 소멸과 죽음의 그림자를 겸허히 수용하는 데서 역설적으로 생의 희망과 긍정을 발견한다. “사람의 육신을 움직이는 혼이라는 것이 한마리 나비처럼 아주 가볍고 작은 것”(「낮과 낮」, 130면)이라거나 “죽음이 베란다만큼 와 있다”(「임종」, 188면)는 전언처럼, 삶과 죽음의 거리를 멀지 않게 인식한다. 그의 소설에서 죽음은 시간의 도도한 흐름 어딘가 생의 이면에 늘 존재하는 것쯤이다.

순간적인 삶에 대한 허무나 슬픔보다도 하성란 소설이 정작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이를테면 손바닥에서 “생명선과 운명선들이 교차하는 그곳”(「그림자 아이」, 93면)이다. 무수히 흩어지고 만나는 손바닥의 잔금들은, 생과 운명의 다양한 무늬와 갈래 들을 연상시킨다. 삶을 이루는 무수한 결들과, 그 사소하고 작은 갈피들에서 빚어지는 의외성과 우연성에 시선을 모으면서 하성란 소설은 ‘백일몽’ 같은 삶의 덧없음을 견디면서 즐긴다.

『웨하스』의 진정한 미덕과 듬직함은 바로 이런 데서 나온다. 인생무상식의 고루하고 대책없는 허무주의나, 세상 이치를 터득한 초월자의 시선으로 흐를 위험을 노련하게 비켜 간다. 그것은 쉼없이 삶의 미세한 갈피들을 더듬으며 고통과 인내 속에 숨어 있는 희열을 발견해내는 작가의 끈질긴 노력 덕분일 것이다.

그런 노력이 가닿은 곳이 바로 「무심결」의 세계가 아닐까. 아무 생각 없이 방심한 사이, 그야말로 ‘무심결’에 벌어진 실수담을 그린 이 소설은, 비유적 의미를 본래의 의미로 이해한 척 가장할 때 희극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베르그쏭의 웃음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자식을 앞세우고 홀로 걸어가는 산책길에서 자꾸만 현기증이 인다”(203면)라는 문장의 본래 의미(자식을 앞에 세우고 걸었다)를 비유적(자식이 먼저 죽었다)으로 해석하여 빚어진 해프닝은, 베르그쏭의 이론을 반대로 적용하여 재미를 얻는다. 말의 본래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를 혼동케 하기는 「강의 백일몽」 또한 마찬가지다. “물고 물리는 것이 인생”(34면)이라는 결말 부분의 명제가 그것인데, 이 소설에는 개에 물린 적이 있고 어떤 남자를 이빨로 물고 늘어진 적이 있는 여자가 등장한다.

“당신의 갈피에 숨어들어 불현듯 당신을 씩, 한번 웃게 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처럼, 이번 소설집에서 은근히 돋보이는 대목이 바로 이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들이다. 눈치 못 채도 그만이라는 듯, 작가는 ‘무심결’에 재미있는 장면들을 슬쩍 끼워넣는다. 직원이 습관적으로 쓴 게 틀림없는 ‘祝’자가 근조화환의 검은색 리본에 붙어 있듯이(「임종」). 너무나 습관적인 일상도 가만히 따져보면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희극과 비극은 얼마나 가까운가를, 삶과 죽음, 고통과 희열이 어떻게 손바닥의 미세한 교차로에서 만나는가를, 하성란의 소설은 유머로써 성찰한다. 삶의 덧없음 속에서 또다른 삶의 차원을 열고, 그 틈새에서 샘물처럼 무심한 웃음의 흐름을 발견하는 『웨하스』의 통찰은 분명 이전 작품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미적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