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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11522

김진희 金珍希

서울예대 극작과 2학년. 1984년생.

j-11@hanmail.net

 

 

 

초록별의 전설

 

씨놉시스

작은 단칸방에 아빠와 어린 딸이 살고 있다. 아빠는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요리를 하고 소박한 밥상을 마주한 채 딸과 대화를 나눈다. 딸이 학교에서 국회의원에게 받았다며 봉투를 내밀자 아빠는 정치인들의 가식적인 선행을 비웃는다. 아빠는 가난하고 무능력하지만 어린 시절의 꿈과 풍경을 잊지 않고 있을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하기도 하다.

집 근처에는 작은 기차역이 있어 가끔 기차가 지나간다. 항상 조용히 하라고 신경질 내는 주인집 아줌마 때문에 크게 웃지도 못하는 두 사람은 기차가 지나갈 때에 맞춰 입이 찢어져라 웃는다.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아빠는 몸이 좋지 않다며 매일 술을 먹고 딸은 그런 아빠를 걱정한다. 돈이 다 떨어지자 아빠는 어쩔 수 없이 일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갈 용기를 낸다. 그러나 도움을 청하러 간 형에게 욕만 먹고 쓸쓸히 돌아온다. 집에서 쥐를 기르던 딸은 주인집에 그 사실을 들키게 되고, 덕분에 쫓겨날 처지에 놓이자 아빠는 자신의 무능력을 슬퍼한다.

결국 아빠는 딸에게 당분간 큰아빠네 집에 가 있으라고 말한다. 떨어져 살게 된 그들은 절망의 밑바닥을 느끼지만, 딸은 끝까지 아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평화롭지 않은 이 초록별에서 살아가려면 때때로 거짓말도 필요하다는 아빠의 말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다시 기차가 지나가고,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하며 큰 소리로 웃는다.

 

 

* 지면사정으로 작품의 일부만 싣습니다. 희곡 전문은 대산문화재단 홈페이지(www.daesan.or.kr)의 자료마당에서 보실 수 있습편집자.

 

인물

아빠(40대 초반), 딸(12살), 배달원(목소리만)

 

무대

작고 허름한 방. 가구는 거의 없고, 한쪽에 씽크대와 소형 냉장고가 있다. 벽에는 협소한 창이 하나 나 있고, 바퀴 달린 접이식 간이침대가 접힌 채 세워져 있다. 무대 중앙에 조촐한 밥상이 차려져 있다. 아빠, 앞치마 두른 모습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요리중이다.

 

딸  (가방을 메고 등장하며) 다녀왔습니다.

아빠 오~ 우리 딸. 잘 다녀왔어? 배고프지?

딸 응. 밖에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나.

아빠 아빠가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했지. (냄비 뚜껑을 열어 보이며) 짜잔! 오늘의 메뉴는 김치찌개다!

딸 우와! 맛있겠다.

아빠 어서 밥 먹자. 손 씻고 와. (상에 냄비 놓는다.)

딸 (씽크대 쪽으로 갔다가 뭔가를 보고 놀란다.) 아빠! 비누가 이상해.

아빠 비누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라.

딸 이것 봐. (비누를 가져와 보여준다.)

아빠 아니, 포크로 긁어낸 것처럼 홈이 패었구나. 징그러워! 왜 이런 짓을 했니?

딸 내가 한 거 아니야.

아빠 아빠도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누구지? (자세히 보며) 이건… 누구 짓인지 알 것 같구나. 이 집에 우리 말고 누군가 있다.

딸 누구?

아빠 나중에 알려주마. 일단 밥부터 먹자. (마주보고 앉는다.)

딸 (한입 먹고 한껏 과장되게) 음~ 맛있다!

아빠 맛있어?

딸 응, 짱이야! 난 아빠가 만든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아빠 당연하지. 아빠는 어디서 배운 적도 없는데 만들었다 하면 예술이 된다니까. 아빠 어릴 때 꿈이 뭐였는지 얘기한 적 있니? 아빠는 말이다, 요리사가 되고 싶었단다.

딸 아빠가 요리사가 됐으면 좋았을 텐데. 아빠 음식은 정말 최고니까.

아빠 (갑자기 눈치 보며) 쉿! 그렇게 숟가락 소리를 내면 안돼. 조용히 먹어야지.

딸 (덩달아 작은 목소리로) 알겠어, 아빠.

아빠 오늘은 학교에서 재미있는 일 없었어?

딸 학교에 어떤 유명한 사람들이 왔어.

아빠 유명한 사람들?

딸 응. 수업시간이었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나를 부르는 거야. 그래서 나갔더니 내 이름이 써진 이름표를 주면서 가슴에 달라지 않겠어? 그걸 달고 교무실로 갔더니 양복 입은 사람들이 잔뜩 있었어. 그 사람들이 내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면서 떡볶이와 케이크를 먹으라고 줬어.

아빠 우리 딸 정말 대단한데? 그런데 왜 너한테만 그런 걸 줬을까?

딸 아니야, 3반 은선이랑 모르는 남자애도 한명 있었어. 하지만 걔네는 하나도 먹지 않아서 나도 많이 먹진 못했어. 그런데 아빠, 그 사람들이 갑자기 다같이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거야.

아빠 그럴 땐 당당하게 말해야지. 이깟 떡볶이 몇조각에 제 얼굴을 팔지는 않겠습니다!

딸 돈도 줬어.

아빠 (꾸벅 인사하며) 감사합니다.

딸 그 아저씨한테서 봉투 받는 모습을 찍느라 그걸 도로 줬다 받았다 하는 행동을 두번씩 해야 했어. 우리 셋 다 말이야. 정말 웃기지?

아빠 그 사람들은 아마도 동네 국회의원쯤 되는 것 같구나. 그놈들이 사진을 찍는 건, 좋은 일을 했다는 걸 어떻게든 알리고 싶어서야. 요즘 정치인들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만 모르게 한다니까.

딸 그런데 왜 나한테 돈을 주지?

아빠 우리 집이 가난하니까. (크게 웃는다.)

딸 그렇구나! (따라서 크게 웃는다.)

아빠 쉿. 그렇게 크게 웃으면 안돼.

딸 (작은 소리로) 알겠어, 아빠.

아빠 봉투는 받아왔니?

딸 (가방에서 봉투 꺼내 내민다.) 여기.

아빠 (봉투 열어보고) 이건 그 사람들이 똥 싸고 닦는 휴지 칸 수만큼이나 적은 액수구나. 수업시간에 널 마음대로 불러낸 댓가가 겨우 이 정도라니 아빠는 몹시 화가 난다. 하지만 이 정도면 당분간은 살 수 있겠지. (일어나더니 찬장에서 투명한 병을 꺼내와 잔에 따라 마신다.)

딸 아빠, 아빠는 왜 매일 약을 먹어?

아빠 아빠는 몸이 좋지 않아. 몹시 좋지 않단다.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서 잠을 잘 자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래서 약을 먹을 수밖에 없어.

딸 얼마 전에 아빠 아플 때 주인아줌마가 찾아왔는데 한번만 더 아빠가 집에서 약을 먹으면 쫓아내겠다고 했어.

아빠 그 여편네는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야.

딸 아빠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아 그래. 아빠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 (약병을 가슴에 대고 엄숙하게 말한다.)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 나의 행복을 쌓지 않겠습니다.’ 난 항상 이것만은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거든.

딸 (아빠가 먹는 약을 보며) 아빠, 내가 그걸 먹으면 어떨까. 사실 나도 잠을 잘 못 자는데.

아빠 넌 아직 어려서 안돼. 하지만 잠을 못 잔다는 건 아주 심각한 일이지. 그건 세상에서 제일 괴로운 일이니까. 그럼 조금만 먹어보겠니?

딸 (받아서 한모금 마시고) 으~ 너무 써.

아빠 (유쾌하게 웃는다.) 그러게 내 뭐랬니. 넌 너무 어리다니까.

 

바닥에서 거칠게 툭툭 치는 소리가 들린다.

 

딸 이게 무슨 소리지?

아빠 밑에서 장대로 천장을 치고 있는 거야. 조용히 하라는 뜻이지.

딸 아줌마는 이상해. 우린 항상 조용히 살고 있는데 계속 조용히 하라고만 하잖아.

아빠 우리를 숨막혀 죽게 하려는 거야. 고3 아들이 있다는 건 다 핑계일 뿐이지. 그렇지 않니?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며) 자, 저길 봐라. 여기 바로 옆에는 기차역이 있어.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기차가 지나가는 순간이 오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럽단 말이야. 기차 소리에 비하면 우리가 떠드는 소리는 파리가 다리 비비는 소리만큼이나 미미한 거 아니겠니. 나라면 애꿎은 우리한테 꽥꽥거릴 시간에 그 장대를 가지고 나가서 기차를 쫑쫑 꿰어버리겠다.

딸 기차가 없으면 안돼. 그럼 우린 웃을 수 없잖아.

아빠 그래, 그러니까 기차는 계속 달리는 거야. 웃지 않으면 사람은 산다고 할 수 없단다. 사람들이 사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다 그거 하나 아니겠니. 웃으며 사는 거, 계속 웃으며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거 말이다. 아빠 어릴 때 꿈이 뭐였는지 얘기한 적 있니? 아빠는 말이다, 화가가 되고 싶었단다.

딸 정말?

아빠 그래. 아빠는 그림을 잘 그렸거든. 아빠가 살던 곳엔 작은 강이 있었는데 학교가 끝나면 매일 그곳에 앉아서 해가 지는 걸 봤어. 사람들은 바쁘게 지나가는데 강은 고요하고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게 어찌나 예쁘던지. 종일 봐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어. 가끔 돈이 생기면 사이다를 한병 사가지고 아껴가면서 마셨지. 그 시절에는 사이다가 제일 맛있었거든. 해가 지면 강 너머 집들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잖니? 그러면 왠지 이상하게 그 안의 사람들은 모두 행복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저녁이면 다같이 모여서 과일을 깎아먹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 같은 거. 그걸 보면서 아빠는 화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었지. (약을 벌컥벌컥 마시고) 그런데 요즘은 말이다. 사람이 직업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직업으로 사람이 결정되는 사회 같아. 네가 처음 만난 사람한테 “안녕하세요, 저는 선생님입니다”라고 말하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너를 교육적이고 바른 일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거다. 하지만 만약에 “안녕하세요, 저는 맹수 조련사입니다. 매일 아침 악어에게 생닭을 주고 훈련을 시켜요”라고 말하면, 넌 아주 활동적이고 무서움을 모르는 여자가 될지도 몰라.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네 본래 성격 같은 건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는 거야. “안녕하세요, 저는 나이트클럽 댄서입니다”라고 말하면 또 어떻겠니? “안녕하세요, 저는 백수입니다”라고 말하면 상황은 더 심각해지지. 바로 그게 가장 큰 문제야. 다들 그렇게 선을 딱딱 그어놓고 그 기준에만 맞추려고 하니까! 사실 다들 나는 뭐가 되고 싶다, 뭐가 될 거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들한테 가서 너 돈 많은 백수 될래? 아니면 그거 계속 할래? 물어보면 돈 많은 백수 마다하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느냔 말이야. 그렇게 따지면 그들이 정말 그 일을 좋아서 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거지. 아빠가 바보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딸 아니, 아빠.

아빠 공부는 또 왜 그렇게 열심히들 하는 거야, 어차피 취직 못할 텐데. 그러니 넌 너무 열심히 공부하지 마라.

딸 응, 아빠.

아빠 가만, 이게 무슨 소리지? (창가로 가서 귀를 기울인다.) 기차다. 기차가 오고 있어. (딸 옆으로 와서 앉는다.) 자, 준비해. 숨 들이쉬고.

 

기차 지나가는 소리 가까이 들려온다.

기차 소리가 점점 커지고 아빠와 딸이 크게 웃기 시작한다. 정말 웃겨 죽겠다는 듯이 과장되게 웃는다.

기차가 완전히 지나가자, 두 사람도 웃음을 그친다.

 

아빠 아 정말 배 찢어지게 웃었네.

딸 응, 정말 웃다 죽을 뻔했어.

아빠 자, 이제 그만 자자. (밥상을 한쪽으로 치우고, 간이식 접이침대를 무대 가운데로 끌고 와 침대를 만든다.) 여기 누워라. (자신은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눕는다.)

 

조명 어두워진다.

 

딸 (침대에 누워서) 아빠, 거긴 어때?

아빠 좋다. 그런데 좀… 춥구나.

딸 아빠도 올라와서 같이 자는 건 어떨까?

아빠 거긴 너무 좁아. 둘이 같이 눕기엔 너무 작단다.

딸 그럼 아빠가 여기서 자.

아빠 그럴 수야 없지. 아빠 걱정은 말고 어서 자.

딸 아빠, 엄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빠 엄마는 좋은 곳에 있을 거다.

딸 집에는 언제 와?

아빠 글쎄, 지금쯤은 아마 ‘핑카 벨라비스타’ 정도 되는 곳에 가 있지 않을까. 돌아오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거야.

딸 핑카? 거기가 어디야?

아빠 그곳은 말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가고 싶어하는 곳이란다. 모든 집이 나무 위에 있어서 타잔처럼 줄을 타고 친구 집에 놀러갈 수 있는 그런 곳이지. 아침에는 새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깨고 나무에는 항상 맛있는 과일이 잔뜩 달려 있어서 먹을 것도 걱정 없고, 심심하면 원숭이랑 놀다가 강에 가서 물놀이 하면 되는 거야.

딸 멋지다, 아빠. 그런 곳이 있다니.

아빠 눈을 감아봐라. 눈 감으면 볼 수 있을 거야.* 아빠 어릴 때 꿈이 뭐였는지 얘기한 적 있니? 아빠는 말이다, 비행사가 되고 싶었단다. 나중에 내가 비행기로 데려다주마. 사람들은 아빠 말을 믿지 않겠지만 지구 어딘가에 정말로 그런 곳이 있어.

 

두 사람, 잠시 침묵을 지킨다.

 

아빠 조용하니까 소리가 더 잘 들리지 않니? 그동안 몰랐던 소리 같은 것 말이야. 먼 곳에 있는 기차 소리가 들린다.

딸 지붕 위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

아빠 강이 흐르는 소리.

딸 벌레 우는 소리.

 

어디선가 듣기 싫은 느낌의 서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딸 아빠, 이건 무슨 소리야?

아빠 쥐다. 쥐가 비누를 갉아먹고 있는 거야.

딸 (벌떡 일어나며) 집에 쥐가 있었어! 쥐는 왜 비누를 먹지?

아빠 배고프니까 먹겠지.

딸 배고프면 다른 걸 먹으면 되잖아.

아빠 글쎄, 쥐도 그렇게 썩 먹고 싶어서 먹은 건 아닐 거야. 배고픈데 먹을 게 없으니 비누라도 먹는 거겠지. 뭔들 안 먹고 싶겠어.

딸 비누 먹고 죽으면 어떡하지?

아빠 쥐는 그 정도론 끄떡도 안해. 사람과 비슷한 데가 있어서 목숨이 엄청 질기거든. 가만, 생각해보니 쥐가 비누 먹고 죽어도 괜찮을 것 같구나. 그럼 사람도 죽고 싶을 때 비누를 먹으면 되지 않겠니. 그것 참 편하겠는데.

딸 (다시 자리에 눕는다.) 아빠, 나 결심했어. 난 약사가 될 거야.

아빠 약사?

딸 응. 그럼 아빠도 아프지 않을 거야.

아빠 그래. 그렇지만 너무 열심히 하진 마.

딸 응.

 

조용해지자 다시 서걱서걱 소리가 들린다.

 

딸 쥐 소리가 들려 아빠. 정말 좋다.

아빠 그래, 적막하지 않아서 좋구나.

딸 오늘은 쥐가 배고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 자, 아빠. 좋은 꿈 꿔.

아빠 그래. 잘 자라, 우리 딸.

 

암전.

무대 밝아지면, 아빠가 침대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다. 딸은 보이지 않는다.

 

딸 (가방 메고 등장한다.) 다녀왔습니다.

아빠 (천천히 고개 들어 바라본다.) ………

딸 (아빠가 변한 걸 눈치채고) 아빠…… 또 아픈 거야?

아빠 약을 가져와.

딸 (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약병을 들어 보이며) 아빠, 약이 없어. 아빠가 다 먹어버렸잖아.

아빠 그럼 가서 사와.

딸 하지만 돈이 없어.

아빠 봉투는? 오늘 받은 봉투를 꺼내봐.

딸 그건 매일 주는 게 아니야.

아빠 그럼 어떻게든 가서 구해와야지. 넌 아빠를 위해 그 정도도 못한단 말이냐.

딸……아빠는 약을 먹으면 더 아파.

아빠 약을 먹어도 아프고 안 먹어도 아파. 하지만 약이 없으면 아빠는 잠을 못 자. 그래서 그런 거야.

딸 하지만, 아빠. 나도 아빠가 약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생각해.

아빠 오늘만 먹을게. 오늘까지만.

딸 ……알았어.

 

딸, 씽크대 쪽으로 가더니 의자를 밟고 올라가 위에 숨겨놨던 약을 한병 꺼낸다. 그때 뭔가를 발견하는 딸.

 

딸 아빠, 여기 쥐가 있어! 엄청 빨라. (씽크대 문을 쾅 닫았다가 조심스럽게 열고 신중하게 쥐를 사로잡는다.) 잡았어! 이것 봐. 아빠가 말했던 그 쥐 맞지? (두 손으로 꽉 잡고 아빠에게 보여준다.)

아빠 잘했다. 아주 작구나. (딸이 꺼낸 약을 들이켠다.)

딸 쪼그만 게 아주 귀여워. (감격스럽게 보다가) 아빠, 나 이거 기를 거야.

아빠 너 하나 키우는 것도 힘들다.

딸 내가 키울게. 매일매일 같이 놀 거야. 비누도 먹이고.

아빠 노는 건 상관없지만 아줌마한텐 말하지 마라. 알면 기절할 테니.

딸 응. 그런데 왜 자꾸 도망가려고 하지? (쥐를 놓치지 않으려고 끙끙댄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

 

아빠 쉿. 누가 왔다. 그 여편네가 벌써 알고 온 모양이야.

딸 어떡하지.

아빠 숨어 있어. (후략)

 

* 서영은의 노래 「초록별의 전설」 부분.

 

 

 

희곡 | 심사평

 

응모작들은 전반적으로 등장인물이 적었고, 주변에서 소재와 주제를 취한 일상극이 많았다. 극 전개는 사실적인 구성과 우화적인 발상의 작품들이 비슷하게 섞여 있었는데, 학생 작가에게 기대한 좀 거칠어도 날것인 세상읽기나 개성은 잘 보이지 않았고, 미흡한 구조를 뛰어넘는 참신한 주제의 희곡도 알찬 구조의 희곡도 만나기 어려웠다. 심사위원들은 현실에 대한 관찰의 깊이가 크고 주제를 풀어내는 구조의 완결성을 갖춘 작품을 선택하려 했으며, 거친 언어와 자극적인 상황들, 말장난들이 여과 없이 대사로 쓰인 글은 심사에서 제외했다. 무대언어는 욕설조차도 미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응모작들 중 일차로 선정된 작품은 「점바기 설화」 「곯다 곯은」 「신에게 가는 길」 「자유로울 수는 없나요」 「계단」 「초록별의 전설」 「TV쇼」이다. 「점바기 설화」는 극 진행이 깔끔했지만 고부갈등을 바라보는 시선과 해결책이 구태의연했다. 「곯다 곯은」은 소재와 극 전개가 신선하고 진중하나 너무 큰 이야기를 짧은 희곡에 담는 무리함이 있었다. 「신에게 가는 길」은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엿보였다. 「자유로울 수는 없나요」는 낱말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상기시키는 언어에 대한 사유가 있었다. 그러나 감옥이라는 설정은 극적이면서도 인위적인 쉬운 것이었다. 「계단」은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를 대사만이 아닌 상황과 사건을 통해 잘 전달하고 있었다. 계단을 뛰어내리는 게임을 설정하여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그 의미를 가중시켰다. 이 작가들이 더 나은 개성있는 희곡을 써내길 바란다.

최종 지지를 받은 작품은 「초록별의 전설」과 「TV 쇼」다. 이중 한 작품을 고르는 데 심사위원들은 고심했다. 「TV 쇼」는 현실을 차갑게 바라보는 힘이 있다. 무력하고 할 일을 갖지 못한 인물들의 폐인 된 모습이 희극적으로 재밌게 묘사돼 그들의 풍경을 다각도에서 바라볼 여지를 준다. 그러나 대사들이 주변에서 나누는 농담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해 그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울 수 있었다. 「초록별의 전설」은 간결한 문장과 은유들로 연극적인 상상력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자칫 우화라는 설정 안에 현실이 외면당하고 은유에 그칠지 모른다. 인물들의 적응방식이 절망이자 희망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띠고 있으나 소외된 자들의 깊은 절망감에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초록별의 전설」을 선택한 것은, 상황 설정이 매력있고 대사를 고민하고 다듬은 작가의 진득함이 엿보여서다. 앞으로 정진하여 대사의 힘과 주제의 치열함이 더해지기를 바란다.

최진아 배삼식

 

 

 

희곡 | 당선소감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말이라는 건 참 이상합니다. 수상소감 쓰는 데에도 이렇게 단어 하나 고르기가 힘들 줄 정말 몰랐습니다.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일은 역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모두 글로 옮기기가 힘든 이유는 잘 써야 한다는 욕심이 앞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무엇을 그리느냐보다 어떤 것을 그리지 않느냐가 더 중요하다는데, 글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밖으로 내보낼 좋은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기쁨이 일회성 축제로 끝나지 않기 위해 이제 정말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희곡의 재미를 알게 해주신 이강백 선생님과 부족한 글을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과 고마운 분들과 기쁜 소식을 나누면서 주변 사람들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고된 길을 같이 걷고 있는 동기들과 어다상, 앙상블 만시, 모두 고맙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가족들이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