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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다채로운 인생편력, 물음표와 느낌표

남재희 『아주 사적인 정치 비망록』, 민음사 2006

 

 

김효순 金孝淳

한겨레신문 편집인, 주필 hyoskim@hani.co.kr

 

 

정치-비망록신문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몇차례 사양을 한 전과가 있어 원고 청탁에 동의했다가 마음에 걸렸다. 저자와의 관계로 볼 때 제척사유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하다가 청탁서에 적혀 있는‘촌평’이란 말에 마음의 부담을 덜기로 했다.

언론계 출신으로는 대선배 격인 남재희(南載熙)씨-사석에서는 선배로 부르는 사이다-와 의미있는 대화를 시작하게 된 것은 한겨레신문사 사옥이 영등포 양평동 공장지대에 있던 80년대 말이다. 당시 한겨레신문은 정권 핵심부에는 눈엣가시였다. 상당기간 청와대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고 민정당 담당기자들은 출입처에서 냉대를 받거나 두터운 취재벽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한겨레 기자들과 술자리를 하며 비교적 솔직한 대화를 나눴던 민정당 의원은 다섯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데 남재희는 그중 하나였다.

그후 저자하고는 술자리가 띄엄띄엄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 나온 『아주 사적인 정치 비망록』이나 그밖의 저서에 실린 내용은 그런 모임에서 육성으로 들었던 이야기와 상당부분 겹쳐 있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반영하듯 술자리의 화제는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엄청난 서고를 갖고 있다는 소문을 입증하려는 듯 이따금 두꺼운 영어 원서를 들고 나와, 여분의 책이 있어 정리를 한다는 설명과 함께 나눠주기도 했다. 국내의 잡다한 정기간행물에 나온 글들은 물론이고 외국 잡지에 실린 한국 관련 기사를 곧잘 화제에 올리는 입심은 요즘도 여전하다. 때로는 외신보도에 관한 사대주의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묘한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책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보통 마당발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유신 말기에 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4기에 걸쳐 의원활동을 하면서 민정당 창당, 노태우정권 태동, 김영삼 문민정권 출현 등 정치적 격변기에 자의든 타의든 반반이든 중심부에 있었다. 그가 사귀는 대상은 한국정치의 숨은 주역이라는 역대 주한미대사,‘밤의 대통령’이라는 별칭의 족벌언론 사주에서 재야와 옛 혁신계 인사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아주 다양하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으나 정치인치고는 드물게 외국 특파원들과도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이런 폭넓은 교류는 그저 노력한다고 되지는 않는다. 다양한 현장에서 축적된 경험·관찰·인상이 이 책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언론인·정치인을 대하는 방식이나 윤보선(尹潽善) 장면(張勉) 김병로(金炳魯) 유진산(柳珍山) 등 옛 보수야당 지도자들의 일화는 흥미롭다. 옛 보수야당은 저택의 사랑방이나 한정식집에서 회의를 여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암묵적으로 정해진 서열에 따라 방석을 차지해 앉았다. 정성태(鄭成太)씨의 증언에 따르면 상석 쪽으로 방석 하나를 옮겨앉는데 삼사년이 걸렸다고 하니 그만큼 위계질서가 엄격했다는 얘기다.

저자가 14대 총선에 낙선한 뒤 김영삼정부의 노동부장관으로 입각했다 물러나는 과정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입각 전날 YS에게서 함께 일하자는 전화를 받았지만, 정작 어느 부처를 맡게 될지는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고 처음 알았다. 해임 때도 미리 귀띔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YS도 너무했다”는 표현(182면) 속에 문민대통령 때만 해도 권위주의적 통치의 잔재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 요즘 노무현대통령이 동네북이 돼버렸는데, 탈권위 측면에서 그때와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은 저자가 대학교 때 이념써클에서 활동하고 4·19 후 민국일보에서 혁신계를 취재하던 시기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강석(李康石)의 부정 편입학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했던 그는 다른 대학 써클과 연합쎄미나를 조직하고 졸업 후에도 모임을 지속했다. 남북에서 다양한 정치세력을 모두 도려내고 양극단만 남겨놓은 6·25가 끝난 지 2년쯤 지난 시기에 영국의 페이비언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학생동아리가 대학가에서 태동한 배경에 대해 좀더 충분히 설명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 그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부분의 경우 어떻게 그 이념을 포기하고 체제에 편입됐는지) 추적해보면 흥미있는 현대사의 한 단면이 될 것 같다. 자유당 때 진보당 추진세력과 4·19 뒤 확 타올랐던 혁신계 진영에 대한 취재 후일담도 진보세력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저자가 『국회보』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서 책으로 낸 의도는 아마도 자신의 마음 심연에 굳게 박혀 있던 콤플렉스를 고해성사를 통해 해소하려는 게 아닌가 짐작한다. 그것은 “이쯤 해서 나의 반성문을 써야 할 단계에 온 것 같다”고 서술한 대목(76면)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준(準)군사 통치세력과 그 반대세력, 유신세력과 반유신세력이 대치하고 있을 때 명색이 지식인이라고 사회의 평가를 받고 있는 나로서는 의당 반유신세력에 가담했어야 옳았다”(77면)라고 자기비판한다. 민정당 창당에 관여한 부분에 대해서도 “일제 때 교육을 받은 구군부보다는 해방후 4년제 정규육사의 교육을 받은 신군부가 수준에서는 훨씬 더 나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완전 오판”이었다고 쓴다(81면). 사석에서 대놓고 물어보지 못했던 대목을 본인이 고희를 넘긴 나이에 만천하에 공표한 셈이니 어쨌든 반갑다.

저자가 집권당 안에서 학원안정법, 임수경 방북파동 등 현안이 있을 때마다 파국을 막기 위해 이성적 대응을 촉구했다고 해도 결국 독재권력에 빌붙어 이중적 처신을 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에는 나름의 근거가 충분히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의 다채로운 인생편력에 붙일 수 있는 몇가지 의문부호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런 비판에 선뜻 동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리영희(李泳禧) 전 한겨레 논설고문(당시 한양대 해직교수)이 유신시절 필화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언론계에서 돌았다. 언론사 간부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가장 앞줄에 서명을 한 사람이 남재희이다. 당시 그의 직위는 서울신문 주필이었다. 서슬 시퍼렇던 유신시절 정부기관지에서 밥을 먹던 고위간부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