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작가조명 | 인터뷰
불길한 데깔꼬마니의 아름다움
편혜영과의 만남
윤고은
소설가. 장편소설 『무중력증후군』, 소설집 『1인용 식탁』이 있음. shellmaker@naver.com
몇권의 책을 통과해 『저녁의 구애』(문학과지성사 2011)에 이르자, 내게도 직업과 이름이 생겼다. 나는 ‘김’으로 불리며, 화원을 운영하고 있다. 직업과 이름을 얻은 것이 나만은 아니다. ‘케이’나 ‘에스’, ‘진’이나 ‘서’ 같은 인물들이 있고, 공장부터 복사실까지 다양한 일터가 등장한다. 조금씩 달라도 소설 속 인물 전부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닮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 내내 열심히 일한다. 자루를 배달하라면 배달하고, 그 자루가 수상해도 절대 열어보지 않으며(「관광버스를 타실래요?」), 이사를 가라면 이사를 가고, 개와 동거하라면 동거하고(「산책」), 여행을 가라면 여행을 간다(「정글짐」). 나는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늘 지령처럼 문장들이 쏟아지고 그 문장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삶은 출장의 연속이다.
작가 편혜영을 만나면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만약 그가 「관광버스를 타실래요?」에서 그랬듯이 자루를 운반하라는 지시를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아마도 나는 내가 들고 있는 자루가 어디서 온 것인지, 그 명령의 출처를 그에게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다. 언젠가 「정글짐」의 ‘백’이 우리의 고용주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을 때 그 대답은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나는 막연히 작가 편혜영을 떠올렸던 것이다. 분명 나를 길 위에 세우는 것은 매번 작가였다. 내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파견근무—을 한 최초의 사람도 작가일 테니까.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저는 성실히 업무를 수행했을 거예요. 지시에 따라 열지 말라고 하니 열지 않고, 자루를 지켜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을지도 모르죠. 다만 소설 속 인물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케이와 에스는 관광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저는 어서 일을 끝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어했을 것 같아요. 원래 자리로.”
그 대답은 나를 다시 묵묵한 자루 배달원으로 만든다. 면접 보듯 장례식에 가고, 숙제하듯 데이트를 하며, 출장 가듯 관광을 하는 나를 두고 그는 ‘소심하지만 성실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애틋해 보이기도 하고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고도 한다. 위로가 된다면 나만 이렇지는 않다는 것이며, 이렇게 살아야 궤도 안에 머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나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자꾸 길 위에 세운다.
“그들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낯선 곳으로 이동시켜요. 일은 동일하게 하되 환경을 바꾸는 식으로. 일상 안에 숨겨져 있던 자신의 모습과 마주치도록. 특히 제가 자주 등장시키는 고속도로의 이미지는 일상에 대한 선명한 은유지요. 한번 진입하면 나오기 힘들고, 달리지만 속도감을 느낄 수 없는 그 길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형태와 닮아 있어요.”
그와 내가 처음 마주친 곳은 광화문 한복판이었다. 주로 광화문 근처에서 일하는 그는 산책 삼아 한적한 효자동으로 길을 내기도 하고, 사무원들이 많은 시청 쪽으로 길을 내기도 한다. 그러다 그는 나를 발견했다. 발견했다고 말하기에 민망할 만큼 내 외양은 흔했고 어쩌면 그가 본 뒷모습이 내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것을 내 뒷모습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닮았다면, 문제없지 않은가. 겨울날, 어두운 색 코트를 입고 퇴근하는 한 사람의 뒷모습, 그것이 바로 나였고, 소설집 『저녁의 구애』를 이루는 기조가 되었다.
“첫 소설집 『아오이가든』 때는 핏빛, 피꽃과 같은 적색 이미지가 이야기의 실마리가 되었어요. 그때는 개인보다는 익명화된 세계, 개인을 둘러싼 공간에 관심이 더 많았죠. 한 사람보다는 그 사람이 사는 을씨년스러운 아파트 자체가 중요했고요. 그렇지만 이제 『저녁의 구애』에 오면 세계보다는 그 세계를 살아내는 개인이 더 보이기 시작했어요.”
편혜영을 사로잡았던 핏빛이 이제 잿빛으로 바뀌었다. 핏빛이 휘발되고 남은 책장 위에는 이상한 긴장감이 도사린다. 기시감과 낯섦이 뒤섞인 데서 오는 공포다. 핏빛에서 잿빛으로 작가의 시선이 옮겨갔다고 해서 섬뜩한 공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공포에 대해 내가 좀더 무기력해졌을 뿐이다. 소설집 여기저기에 짝을 맞추고 있는 몇몇 데깔꼬마니 때문이다.
「크림색 소파의 방」에서 주유소 청년이 ‘진’ 의 멱살을 잡을 때, 그것은 「정글짐」의 ‘그’ 가 자신도 이유를 모르는 채 사내의 멱살을 잡는 장면과 겹쳐진다. 「통조림 공장」과 「관광버스를 타실래요?」에는 위협적인 짐승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두려움은 비슷하다. 새로 공장장이 된 ‘박’이 전임자의 비밀스러운 통조림들을 하나씩 개봉할 때, 그 두려움은 ‘케이’와 ‘에스’에게 예고편이 된다. 자루를 열어보려는 욕구는 애초에 거세되었다. 업무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자루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상상하기 시작하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색과 모양이 조금씩 다른데도 분명 한장으로 겹쳐졌다가 떨어진 것처럼 같은 무늬를 보여주는 이런 장면들은 공포를 배가시킨다. 이편에서 느꼈던 하나의 두려움이 저편에 올 다른 두려움의 예고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어쩌면 삶은 수많은 예고편의 조합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게 하루란 미로에서 또다른 미로로 퇴근하는 것이며, 한달이란 그런 날들의 여러 묶음이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미로에 빠진 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품는 순간, 진짜 미로가 나타난다.
『저녁의 구애』에서는 편혜영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던 빛깔과 냄새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짐승의 이미지도 변화했다. 예전에는 짐승이 일상으로 뛰어나와 나를 위협했지만, 이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개가 내게 달려들긴 하지만 그 개는 꼬리를 흔들고 있다(「산책」). 공원에 버려진 토끼는 그저 짐스러울 뿐이다(「토끼의 묘」). 그러나 바로 그 짐스러움 때문에 주인 없는 토끼나 잘 따르는 개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익숙한 도시를 떠나 다른 도시로 옮겨가는 길, 어딘지 모를 국도에서는 시야를 가로지른 것이 노루인지 아닌지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며(「크림색 소파의 방」), 불타는 트럭이 도로 위를 미끄러질 때 그것은 그 어떤 짐승보다도 낯선 공포로 다가온다(「저녁의 구애」).
이런 상황들은 위험한 짐승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물들이 ‘짐승화’되었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안전망은 사라졌다. 전작에 비해 공포의 강도가 약해진 것이 아니라, 공포의 출처가 달라진 것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이 막연한 공포의 세계보다 더 무거워져서 감각이 무뎌진 것이다. 이제 나는 무언가의 반복에 반복적으로 시달린 나머지, 공포조차 무디어진 세상을 걷고 있다. 책 속의 어느 문장처럼, 악취의 형태가 변한 것이다. 시궁창의 악취가 아니라 ‘아무리 좋은 향기라도 몇가지 종류가 한데 뒤섞이면 만들어지는’ 화원의 악취로. 나는 그 틈에서 표정을 잃었다. 내가 표정을 지으려고 하는 순간, 길은 엉키고, 지표는 사라지며, 미로가 시작될 것이다.
도로에는 끝이 없다. 고속도로나 국도를 끝내는 것은 도시, 아니면 풀숲, 그리고 또다른 길뿐이다. 그중에서도 작가에게 가장 두렵게 다가오는 것은 풀숲의 이미지다. 도시에서 자란 그에게 숲은 낯선 공간, 미로와 같은 곳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산책」에서 나는 지사 근무를 발령받아 낯선 도시로 온다. 내가 머물 111번지는 출구가 애매모호하며, 겨우 찾은 출구 앞에는 한마리 개가 엎드려 있다. 그 개의 주인은 지사장의 모친이다. 개와 잘 지내는 것은 내 업무가 아니었으나, 그 개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따져볼 때 개 역시 업무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내게는 임신한 아내가 있었고, 아내는 개 때문에, 또 소문의 멧돼지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결국 내가 개를 죽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할 때,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은 길이 아니라 풀숲이다. 타지에서 온 내게 풀숲은 그 자체로 미로가 된다. 아무 지표가 없기 때문이다. 간판도 도로명도 신호도 없는 그 녹지대는 복병과 같다. 동화 속에서 두 아이를 인도했던 과자 부스러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불길한 데깔꼬마니들만 아른거릴 뿐이다.
「크림색 소파의 방」에서 노루 아닌 노루가 운전중인 내 시야를 가로막는 것 역시 미로의 시작이다. 자동차는 고장나고, 길이 못 미더운 것은 이미 마음이 미로 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작가의 말처럼, ‘숲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숲을 통과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고, 내키지 않지만 발을 디뎌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이기 때문이다. 도로 위에서 어느 순간 불타는 트럭과 같은 이미지가 달려들어 내 무의식을 부추기는 그런 상황을 만나는 것 또한 삶이다(「저녁의 구애」).
“「저녁의 구애」는 초고에서 많이 달라진 경우예요. 낯선 장소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는 한 사람, 이게 처음 설정한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타인의 죽음을 기다리면서 그 사람이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를 생각하다보니 ‘구애’의 이미지를 찾게 되었죠.”
예고편이라 할 만한 것이 많았다. 낯선 도시의 장례식부터 낯선 이의 교통사고까지, 모두 내 삶의 불길한 예고편처럼 저만치서 깜박거렸다. 불타는 트럭이 누군가의 인생을 삼키면서 미끄러지는 것을 볼 때, 나는 먹히지 않기 위해 토해냈다. 사랑의 말을, 설령 그것이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휴대폰을 들고 시큰둥하게 대했던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짐승이 울듯이 다급하게 고백했다. 먹히지 않기 위해서. 그 구애가 갑작스러웠던 것은 나뿐 아니라 작가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결과였으나, 불타는 트럭 같은 것을 직면하면 무의식이 폭발해서 새로운 우주가 태어나기도 한다. 갑작스러웠던 그 고백이, 그 구애가 얼마나 유효한지는 알 수 없지만, 순간은 그렇게 봉합되었다. 마치 「통조림공장」의 직원들이 반지나 집문서를 캔 속에 넣고 밀봉했던 것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통조림공장」 이후 나는 세상의 통조림들을 세 부류로 나누게 되었다. 정상적으로 유통되는 통조림이 있고, 비밀이 들어간 통조림이 있고, 이물질이 들어간 통조림이 있다. 비밀과 이물질은 그 출처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겉포장과 맞지 않는 내용물이 들어갔을 때, 그것을 봉한 사람의 의도 여부에 따라 의도한 것은 비밀이 되고 의도하지 않은 것은 이물질이 된다.
통조림이 된 나는 내 선임자가 그러했듯이, 또 후임자가 그러할 것처럼, 컨베이어벨트 위로 흘러간다. 이곳은 작가의 책상이기도 하다. ‘소설 쓴다’는 말보다 ‘일한다’는 말에 더 익숙한, 치밀한 작가 편혜영은 초고를 빠르게 쓰고 여러번 퇴고한다. 그 퇴고의 과정에서 나는 하나씩 지워진다. 그는 나를 의심한다. 문장 하나, 표정 하나가 모두 부정과 의심의 대상이 된다. 나는 그렇게 그가 몇번이나 부정하고 의심한 후 남아 있는 최소한의 살점이다. 그는 나를 이렇게 정의한다.
“비밀이 되고 싶어하지만, 그리고 정상적으로 유통되는 것 같지만, 뜯어보면 이물질이 들어 있는 통조림이죠. 유통기한이 임박한 것과 조금 오래 남은 것으로 분류해본다면, 비교적 유통기한이 임박한 통조림 축에 속하지 않을까요.”
소설 속 인물들도 이 사실을 아는지 묻자 그는 “스스로 곧 폐기될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공장장의 공백을 박이 채우고(「통조림공장」), 선배의 대사를 후배가 동일하게 읊고(「토끼의 묘」), 백의 동선을 그대로 밟아가는 것처럼(「정글짐」), 나의 과거와 미래는 데깔꼬마니로 책장 곳곳에 남아 있다. 내 안에 품은 것이 비밀인지 이물질인지, 아니면 혹여나 의도와 일치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무언가 기한이 임박하다는 것만 내 앞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유통기한이 임박하지만 여전히 유통되고 있는, 그런 통조림이다.
곧 닥쳐올 폐기를 기다리는 내 모습은 「저녁의 구애」에서 타인의 죽음을 기다리던 그 하루의 연장이다. 지인에게 선물 받았던 어묵 통조림은 보존기한이 8년이나 되었다. 재난시에 긴요할 것이 분명한 그 통조림을 개봉했을 때 어묵은 테니스공처럼 불어 있었다. 국물은 짰다. 일상과 재난의 경계가 모호한 지금, 내게는 또 하나의 통조림이 필요하다. 장례식이 있던 도시에서 그 통조림을 찾아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어쩌면 어떤 도시에서도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재난에 대비할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이 불타는 트럭만큼 나를 부추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폐기될 통조림이 애틋한 이유는 유통기한이 지나면 영영 개봉의 기회를 놓치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을 열어보려 하는 사람은 드물다. 편혜영은 이것을 열어 그 내부를 읽어내는 작가이기에 잔인하고, 두렵고, 아름답다. 가끔 그의 소설에서 나는 이런 위안을 받기도 한다. 유통기한이 이미 지나버린 통조림들도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고. 개봉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