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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항·이혜령 기획 『인터뷰: 한국 인문학 지각변동』, 그린비 2011 

소실된 ‘근대성’과 왜곡된 ‘한국학’을 넘어서

 

 

류준필 柳浚弼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교수, 국문학 kk0047@empas.com

 

 

12263이혜령・김항 두 사람이 2년간 작업한 보고서를 앞에 들고서 한동안 아득했다. 무엇보다 책의 두께가 전하는 무게감 때문이었다. ‘인터뷰’ 작업에 드는 고충과 정력을 약간은 아는 처지라 특히 그랬다. 그러다가 이내 설레었다. 이 보고서 한권이면 지난 20년 인문학의 지각변동을 가늠할 수 있다는 기대감 탓이었다.

15명의 대표선수 한명 한명씩은 그 명성만큼이나 흥미롭고 매혹적이었다. 좌담회의 4명을 보태도 그랬다. 이력도 다양하고 전공도 달랐다. ‘지방・일상・구술・시장・문화・가족・동아시아・파시즘・미시・식민성・페미니즘・비평’ 등 다양한 담론의 키워드들이 연신 등장했다. 그 발원지 혹은 맥락은 한층 더 분명해졌다.

나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의 한국(문)학자의 인터뷰에 오래 머물렀다. 1989년 이후를 ‘민주화’가 아니라 ‘자유화’(liberalization)로 파악하는 입장(황종연)과 ‘문명사의 변환’이라는 관점에서 조선시대와 식민지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이영훈)이 흥미로웠다. 입장의 동조 여부를 떠나서, 전자에서는 지난 20여년의 한국을 이해하는 시각이 가장 명징하게 제시되었다. 아울러 후자의 경우는 아주 드물게도 전근대와 근대의 상호관계라는 문제를 다뤘기 때문이다.

자유화는 ‘경제(자본)에 의한 문화의 복속’을 낳는데, 여기서 “언어의 창조적 활용”(황종연) 아니면 “문화사회”와 같은 대안문화 창출(강내희)이라는 갈림길도 보인다. 민주화(혹은 자유화)의 시대는 소비문화의 급속한 확산과 결합되었다. 경직된 리더십이 해체되고 여성・청소년 등 다양한 주체의 활동영역이 넓어졌다(조한혜정). 페미니즘의 발흥은 자연스럽게 보이고(김영옥) 호주제도의 위헌판결도 이러한 시대의 성취라 할 수 있겠다.

위와 같은 현실적 감각이 역사와 만나 ‘식민지’와 ‘근대(성)’의 복잡한 함수식이 다양한 판본으로 등장한다. ‘식민지적 근대’의 규율권력(정근식), ‘식민지근대와 공공성’(윤해동), 법과 관습의 ‘식민지근대성’(양현아), ‘식민지근대’와 현재 사이의 불가역성(천정환) 등이 그러한 사례들이다. 그 대척에 앞서 말한 ‘식민지근대화론’이 있다. 이와 깊은 관련을 이루며 ‘문학 속’과 ‘우리 안’의 파시즘, ‘대중독재’ 등이 도열한다(김임지현). 지난 20여년간 진행된 한국 인문학의 지각변동은 대체로 이런 지형도처럼 이해된다.

15명이 할 말이 있는 것은 당연히 자기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야 자기정당화의 논리겠지만, 이른바 근대성 논의로부터 다기(多岐)하게 분화된 15명의 회고에는 분명 반성적 재인식의 흔적들이 적지않다. 포스트모더니즘 수용의 한계(145~47; 193~202면), 포스트담론 수용에 나타난 문제(458~66면)에 대한 지적은 경청했다. 때로 인터뷰어의 진단과 반문에서도 현상황에 대한 반성 요청이 읽혀졌다. 근대성 논의가 한국학 영역으로 축소되는 경향에 대한 비판적 질문(202; 206~7면)은 특히 새겨들었다. 지각변동의 부정적 양상을 환기하려는 두 편저자의 핵심적 문제의식인 듯하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중요한 지적들이다.

이혜령・김항 두 사람 덕에 긴 세월의 논란과 변동을 조망하는 기회를 얻었다. 이 점은 거듭 감사할 만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언어를 엿듣고 싶은 욕심 또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누구보다 두 사람의 편저자에게서 듣고 싶은 언어이기도 했다. 책 서문에서 “자기성찰”(8~10면)이라고 밝힌 묘한 단어의 지시대상이 이런 내용인가 반문했다. “다양한 빛의 난반사”(10면)를 의도했다는 겸양의 수사 이면을 자꾸 들추고 싶었다. 정작 궁금했던 건 두 사람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극단적인 가능성을 떠올린다. 두 사람의 기획에 잠재된 철저한 단절에의 욕망이다. 마지막 4(김영이현우) 좌담은 이미 ‘80년대의 386세대’와 구분되는 ‘세대적 욕망’을 환기한다. 마흔 전후한 편저자들이 속한 세대들의 그것. 여기가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두 사람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두 편저자와 연배가 가장 가까운 인터뷰이가 제기한 ‘불가역적인 현재의 현재성’이라는 시간의식을 여기에 슬며시 겹쳐본다. 이런 시각에서라면 지난 20년이란, 그 이전의 과거로 회수 혹은 환원되는 시간대가 아니다. 오히려 아직 그에 합당한 언어를 지니지 못한 채로, 미래를 배태하는 시간대가 된다.

주객관적인 조건상 미래의 언어를 마음껏 부릴 처지가 아니라면, 긴 호흡으로 선배 학자들의 위치를 학술사 나아가 지성사적으로 ‘역사화’하는 작업에 나서는 건 어떨까. 지난 20년을 규정하는 15명의 언어를 과거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겠다. 우리 학계에 축적의 구조를 만드는 작업을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명분도 있다. 그러나 끝내 이러한 의식은 문면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았다. ‘토론’보다는 ‘경청’의 분량이 압도적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편저자들이 자기 목소리로 본문 내용을 ‘간접화법화’했다면 사정은 훨씬 달라지지 않았을까.

책을 덮고 시간이 흐를수록 불만이 커져갔다. 두 사람의 편저자가 아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 탓이었다. ‘당신들에게 우리의 인터뷰가 왜 필요한가’ ‘무엇이 불안해서인가, 무슨 욕망이 있어서인가’ ‘당신들의 그 욕망을 위해서 내가 (안)할 일은 무엇인가’, 이런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의 궁극적 독후감은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자리에 이들 15명을 모두 모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책의 의의는 충분하다. 이로부터 역설적이게도, 두 사람의 편저자 세대에 학계라는 공적인 무대가 마련된 적이 없어서 이런 작업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반문하게 된다. 학술단체와 학술회의는 난립하고 학술지는 부지기수(不知其數)지만, 학계의 공론장이 사라진 지는 꽤 오래다. 비대해지는 것은 대학과 학술기구들뿐이다. ‘학진’ 제도를 비난하지만 학진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학술지는 왜 없는가. 있다면, 도대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만들 수 있고, 거기에 누구의 어떤 글이 실려야 하겠는가.

끊임없이 소비되어 곧 고갈될 것 같은 편저자 또래를 보면서 자꾸 묻게 된다. 그들은 모두 ‘학업겸수(學業兼修)’의 삶을 산다. 학자와 업자의 “이중생활”(155면)이다. 600면이 넘는 책을 읽는 동안, 제도의 비판만 있고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활동에 대해서는 들어보기 힘들었다. ‘미래의 언어’가 자라날 토양이 없으면, 아마 머지않아 선배 학자들에 대한 인터뷰는 사라질 것이다. 그럼 이런 촌평이 씌어질 자리도 차츰 줄어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