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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정경모 자서전 『시대의 불침번』, 한겨레출판 2011

치열한 삶과 단호한 역사인식의 만남

 

안병욱 安秉旭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ahn@catholic.ac.kr

 

 

12495세가지 측면에서 정경모(鄭敬謨) 선생의 자서전을 살펴볼 수 있겠다. 첫째로 격변의 역사 가운데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떠안고 치열하게 살아온 한 지성인의 일대기라는 면이다. 저자 스스로 “나는 한번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소이다”라고 책 표지에 밝힐 정도로 소신대로 꿋꿋하게 살아온 삶이다. 모두가 영달과 출세를 향한 야욕에 눈멀어 있을 때 그는 시대의 불침번으로 형형하게 깨어 있었다. 그리하여 망명객으로서 40년 이상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 일생에 대한 감회가 왜 없을 것인가. “대한민국 국민치고 출세나 영달을 위해 나 정경모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또 있었겠소이까”(42면) “떵떵거리고 살 길도 있었을 테지만 후회 같은 것은 없다”(72면)라고 자문자답하고 있다. 그렇게 지나온 한평생을 되돌아보는 회한이 곳곳에 묻어나는 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 인간적 솔직함이 더욱 정감있게 읽힌다. 이 시대 그런 분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다.

둘째로 우리 현대사의 주요 고비에 직접 관여했거나 혹은 파란의 역사현장을 목격했던 인물의 생생한 증언이다. 저자는 휴전회담에 통역관으로 참여해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뉘는 작업현장을 목격하면서 그 아픔을 “조국의 땅덩어리가 둘로 갈라지는 그 광경은 마치 자기 혈육의 누군가가 생체 해부를 당하는 장면을 목도하는 듯하였다”(138면)고 표현했다. 그는 한편으로 당랑거철(螳螂拒轍) 같은 상황일지라도 이를 무릅쓰면서 저항했고 또 흔히 회피하거나 비겁하게 감추려는 진실을 과감하게 들추어냈다. 그의 행적은 그대로 역사의 한 부분이 되고 또 그의 증언은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고 역사서술을 수정하게 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는 일본과 미국의 간섭과 농간으로 민족사의 수레바퀴가 뒤틀려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운명을 걸고 이를 바로잡는 일에 나섰다. 무엇보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을 전격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갖고 민족통일의 초석으로서 선구적 의미를 갖는 42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앞으로 남북통일 역사를 서술할 때 늘 언급되고 활용될 것이다. 특히 “정선생, 나는 물론 공산주의자이지만 실상은 민족주의를 하기 위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 아닙니까”(395면)라는 김일성 주석의 고백을 직접 듣고 증언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주요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에 대해 무척 날카로운 포폄(褒貶)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낯선 인물의 숨겨진 훌륭한 헌신성을 새롭게 확인하는 즐거움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의 예리한 필봉에 의해 낯익은 분들의 기회주의적이거나 위선적인 진면목이 일거에 폭로되기도 한다. 그의 주관이 뚜렷한 거침없는 인물평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드러난 여러 인사들의 추접스런 면모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공동체 사회의 일원으로서 어떤 처신이 필요한지를 명징하게 깨닫게 된다.

한편 그가 언급하고 있는 여러 인물 가운데 중학 동기생인 이혁기(李赫基)는 마침 평자인 나도 행적을 찾던 중이었다. 그에 따르면 동급생 중에서도 수재였던 이혁기는 해방을 맞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더불어 6만명에 이르는 ‘국군준비대’를 창설했다. 하지만 그 조직은 미군정청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었고, 이혁기는 포로가 되어 군정재판에서 3년 징역을 언도받은 것으로 알려져왔으나 실제로는 비밀 지시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들었다고 했다. 이혁기에 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면 해방정국의 자주적 건국운동이 어떻게 미군정에 의해 와해되었는지를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종횡무진의 한국현대사이다. 그는 타고난 역사가이다. “늙은이가 옛날이야기를 한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고 있을 뿐, 뭐 틀이 꽉 짜인 역사강의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44면)고 했지만 강단의 교과서 같은 역사서로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살아 있는 역사 그대로를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그는 오직 겨레를 위해 은폐된 역사를 파헤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를 가려내는 일에 성직처럼 매진해온 것에서 더 큰 보람을 찾았다고 했다.

정경모의 역사서에는 남다른 미덕이 꽉 차 있다. 먼저 여느 직업연구자 못지않은 다양하고 폭넓은 자료 수집이다. 관련되는 핵심 사료를 종횡무진으로 섭렵해 활용하고 있다. 다음으로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정확한 판단력이다. 그는 많은 현장에 직접 관계해왔기 때문에 목격한 사실들을 숨김없이 토해내고 이면의 감춰진 맥락을 놓치지 않고 들추어냈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정확한 인식에 도달하게 하는 매우 뛰어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우물거림이 없는 분명한 시각은 역사적 사건의 본질을 누구보다도 올바르게 전달해준다.

한반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모든 사태에는 언제나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가지 상수(常數)가 작용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역사인식이다. 그는 우리 현대사의 납득할 수 없는 뒤틀린 현상의 배경과 경과를 수수께끼 풀 듯이 명쾌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정리한다. 그리하여 “한국전쟁의 기원을 깊이 캐내러가면서 느낀 것은 미국이 625를 아무 준비 없이 맞이했다는 것은 말짱한 거짓말이라는 사실이었소”(36면)라고 확신있게 풀이했다. 하지만 그는 “그 참혹한 전쟁이 무슨 까닭으로 일어났을까, 김일성이가 또는 이승만이가 제1발을 쐈기 때문이라는 단세포적인 사고를 벗어나 좀더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소이다”라고 깊은 의도를 밝힌다(513면). 우리 역사에 대한 그의 설명과 해석은 한가지 명확한 교훈을 향해 매진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의 한반도 지배전략에 관한 인식이다. 오늘날에도 일본인 전체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는 지난날 메이지시대에 대한 향수와 집착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정경모의 일생은 시대조류를 역행함으로써 자초한 고달픈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시대 흐름을 예견하고 겨레를 향해 외치는 깨어 있는 파수꾼으로 일관했다. 그런 행적은 그 자체로 곧 하나의 의미있는 역사가 될 수 있다. 사족을 붙인다면, 나는 우연스럽게도 김대중 납치 사건, 장준하 의문사 사건, 그리고 김현희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 등에 관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에 관여한 바 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미국 항공기 출몰 여부, 장준하 의문사 당시 김용환의 역할, 김현희의 신분 등에 관한 조사내용과 이 책에서 그가 주장하는 바가 꼭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