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목소리
포기할 수 없는 한국문학, 그 희망을 찾아서
●지난호 특집 ‘2010년대 한국문학을 위하여’에서 무엇보다 눈에 띈 글은 한기욱의 「한국문학에 열린 미래를」이었다. 한기욱은 내외적으로 고조되는 한국문학 위기론에 대항하여 희망의 근거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비관론적 비평을 제시했던 김영찬 김형중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한국문학의 희망을 발견해내는 이 글은 논리의 타당성과 함께 그 방법이 흥미로웠다. 다만 필자가 말했듯이, 한국문학이 바라마지않는 근사한 장편소설이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다른 문제들에 치여 논점의 주변으로 밀려버린 것 같아 아쉬웠다. 장편소설이 과연 문학의 미래를 조건짓는 주요한 변수라면 마땅히 이 논의가 먼저 제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은 역사와 별거할 수는 있어도 이혼할 수는 없다는 대목이 인상깊었다. 잠시 별거중인 혹은 별거 위기에 놓인 우리 사회와 문학이 과연 얼마간의 조정기간을 통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조정과정이 다시 이 땅에 우리 사회와 문학이 돈독한 부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길임을 잘 알기에 창비와 비평가의 노력이 매우 값지다고 생각한다.
곽은지 babu101@hanmail.net
시인의 고뇌, 그리고 시와 평론의 사이에서
●여름호 특집의 여러 글들은 오래도록 생각을 머물게 했다. 그중에서도 심보선의 「‘천사-되기’에서 ‘무식한 시인-되기’로」를 주의깊게 읽었다. 문학과 정치를 둘러싼 평론가들의 논의에 대해 시인이 느끼는 고뇌를 언급하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 고뇌는 시인의 내면에 귀속되는가? 시인의 삶에 귀속되는가? 시쓰기라는 행위에 귀속되는가? 혹은 그 모든 것에 동시에 귀속되는가?”라는 문장에서 필자가 시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그가 말하는 고뇌라는 것이 정체불명이긴 하지만 텍스트 안에 분명히 살아 있는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학적인 것의 문을 열면 그 안에 사회학적인 것의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다시 정치학적인 것의 문이 있다”라는 구절은 의미심장했다. 시인의 숨은 운동을 밝혀내는 평론가의 작업을 단적으로 잘 드러내는 듯한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학적인 것의 문을 여는 일이 가장 처음이라는 사실이다. 그 순서가 부디 틀리지 않기를 바란다.
최양윤 llollipop22@naver.com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몇년 전부터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역사를 공부하는 인문학도로서 이 말을 ‘온몸’으로 체감하고는 있지만, 대체 저 ‘위기’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확하게 언어로 풀어낼 수 없었다. 기업에서 인문학 전공자를 열렬히 원하고, 인문대학의 교수직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인문서적을 늘 끼고 사는 등 이 사회가 인문학을 잘 대접해주면 과연 위기가 해소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있던 차에 김영식의 「과학기술과 인문학」을 꽤 재미있게 읽었다. 원래 동서양 어디에서도 과학기술과 인문학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학문의 본질적 목적이란 인간을 둘러싼 이 세계의 원리를 이해하고 탐구하는 것이니,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기술적으로만 지나치게 전문화되어 있는 지금 현실은 사실상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균형이 깨져 있는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찾는 인문학은 ‘학’이라기보다는 ‘방법’ ‘정신’에 가깝다는” 김영식의 말에 크게 공감이 간다. 인문학은 자기 분야의 전문성을 무기로 이 위기를 타개할 것이 아니라, 인간 세계를 아우르는 “인문적” 정신과 방법을 고민함으로써 본래성을 회복해야 한다. 물론 이를 실현시키는 방법은 여전히 모호하기만 하고 그래서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이 상시적인 ‘인문학의 위기’가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어떻게 해결해갈지 최소한의 학문적・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할 듯하다.
김진한 gold8383@hanmail.net
에너지 문제의 출구는 어디에
●평소 에너지 문제에 관심이 많은 터라 이것저것 관련 글들을 찾아 읽어보는 편이다. 지금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전하고 안정적인 에너지원은 딱히 없어 보였다. 친환경에너지는 효율이 낮은 데다 아직 미완성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고, 화석연료를 대체할 깨끗한 에너지로 각광받던 원자력도 일본 핵발전소 사고로 실체가 드러났다. 그러던 차에 여름호 대화 「일본 원전사고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읽고 창비에서 개최한 강연에도 참석했다(독자모임 ‘원자력 없는 에너지 미래 만들기’ 2011.6.9). 핵발전 방식 자체의 근원적 한계점인 방사성 폐기물 발생과 해수온도 상승, 노동자 생명 위협 등에 대해 이필렬 교수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나니 핵발전 반대의 입장에 꽤 공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전을 어떻게 포기할 것인가. 성공적인 에너지전환 사례로 소개된 독일은 우리와 정치적 상황 등이 너무 달라 빠른 시일 내에 우리가 독일처럼 되는 일은 힘들어 보였다. 또 대표적인 대체에너지로 알려진 태양광발전과 조력발전이 숲과 갯벌의 생태를 상당히 해친다는 대목에서는, 에너지 문제 해결이 역시 단순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원전에 대한 확실한 대안을 당장 찾을 수 없다는 점이 답답하지만, 나의 전력소비 습관이 조금은 변화되었다는 점은 희망적인 징조가 아닐까.
선혜화 queror@naver.com
이집트의 사회/문학에 대한 흥미진진한 분석
●어린시절부터 고대 이집트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관련 만화를 찾아보기도 하고 이집트 유물전이 열리면 부모님을 졸라 꼬박꼬박 보러다니곤 했다. 그들의 찬란했던 고대문화에 매혹되어 그 세계를 동경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이집트는 급격한 서구화에 밀려 부정부패와 빈곤으로 가득한 ‘제3세계’로 남아 있을 뿐이다. 여름호에 실린 싸브리 하피즈의 「이집트의 새로운 소설」은 내게 더없이 흥미진진한 문학평론이었다. 이 글은 과거 찬란한 문명과는 정반대의 현실에 갇혀버린 현대 이집트사회의 실상을 잘 보여주며, 최근 이집트 작가들의 독특한 서사방식을 도시변화와 관련해 상당히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이집트의 부조리한 현실을 대담하지만 담담하게, 파편적인 언어로 그려내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상세히 소개돼 인상적이었다. 압축적 근대화와 급격한 경제성장이라는 비슷한 경험을 겪은 한국 사회와 문학을 견주어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김수연 redkissue@naver.com
두 소설가의 데깔꼬마니 같은 만남
●여름호 목차를 펼쳐 소설가 윤고은이 선배작가 편혜영을 인터뷰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외된 현대인의 삶의 단면을 풍자하는 윤고은과 반복되는 일상에 도사린 불길한 미궁을 포착하는 편혜영의 작품이, 인터뷰의 제목대로 ‘데깔꼬마니’처럼 닿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직접 작가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인터뷰 형식이 신선하고 독특했다.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편혜영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반가웠고, 소설의 바탕을 이루는 기조에 대해 알 수 있어 궁금증이 많이 해소되었다. 핏빛과 잿빛을, 일상과 낯선 곳을, 시궁창의 냄새와 화원의 악취를 넘나들었던 인터뷰는 편혜영 소설에 깔린 빛깔을 잘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다양한 작품들을 공들여 다루고 깊이있게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둔 나머지 두 작가의 대화를 엿듣는 듯한 현장감이 부족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박노성 uncle@hanurib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