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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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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金惠利

『씨네21』 기자. 저서로 『영화야 미안해』 『그녀에게 말하다』 『영화를 멈추다』 『진심의 탐닉』 등이 있음. vermeer@cine21.com

 

 

 

줄거리를 묻지 마세요

 

 

“어쩌면 내가 말하려는 이야기는 언어와는 양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야기가 언어에 맞서면 맞설수록 그것은 내가 어떤 중요한 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 지점에 가까워졌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가령 그런 것이 있다고 치고) 해야 할 순간이 되었을 때 나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폴 오스터 『고독의 발명』

 

0.

매주 토요일 밤이면 라디오 스튜디오에 나가 영화 속 캐릭터를 이야기한다. 그날의 인물은 알 파치노(Al Pacino)가 연기한 마이클 코를레오네였다. “「대부」는 줄거리가 어떻게 되죠?” 청취자를 배려한 당연한 질문을 DJ가 던졌을 때 나는 급작스러운 무력감에 얼어버렸다. 「대부」를 모르는 세대도 라디오를 들을 수 있겠다는 뒤늦은 깨달음 탓만은 아니었다. 물론 나는 3부작 영화로부터 코를레오네 가문의 스토리를 어떻게든 얽어낼 수 있다. 그건 십수년간 영화잡지 직원으로 일하며 끼니를 짓듯 해온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야기의 형태로 변환된 「대부」가 내가 아는 영화 「대부」와 화학적으로 전혀 다른 물체처럼 느껴진다는 점에 있었다. 프랜씨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의 「대부」는 (적어도 내겐)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교차와 충돌이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형언한단 말인가? 정원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열리는 동안 블라인드가 내려진 내실에서 성사되는 은밀한 거래. 경건한 세례식이 치러지는 바로 그 시간, 도시 곳곳에서 불을 뿜는 기관총 총구들. 미국에 당도하기까지 입을 떼지 않았던 어린 비토가 검역소의 작은 방에서 뉴욕을 바라보는 순간, 후속장면으로부터 앞질러 당도한 선행 싸운드로 인해 소년이 불현듯 입을 열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던 황홀한 착오. 교차와 충돌은 「대부 2」에 이르면 영화 전체의 구성원리로 확장된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마지못해 대부의 의자로 걸어간 1세대 비토 코를레오네의 행로와 패밀리의 수성(守成)을 위해 가족을 이반하고 심지어 살해하고 마는 2대 마이클 코를레오네의 길을, 코폴라는 시계추처럼 냉혹한 교차편집으로 제시한다. 그리하여 영화가 끝나면 남는 것은, 두 시간대의 거친 모서리가 서로를 문질러낸 상흔이다. 요컨대 「대부」 1, 2편을 장르의 수명을 초월한 작품으로 밀어올린 숭고한 회한의 정서는 이 영화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그것을 다시 오름차순으로 줄세워 평평하게 다림질한 줄거리를 마이크 앞에서 더듬더듬 말하는 동안 내가 느낀 불편함은, 배신자의 부끄러움과 비슷했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대부」는, 그게 아닌데.

 

1.

관대한 당신은, 그날의 곤경은 「대부」가 일직선의 서사로 번역될 때 유독 손실이 큰 형식의 영화라서일 거라고 위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영화를 소개하는 글의 서두에 몇줄의 씨놉시스를 쓸 때마다 나는 영화의 정체로부터 독자를 오도하고 있다는 석연치 않은 느낌을 떨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장 가능한 대안이 없다 해도 얼룩은 얼룩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는 보편적 현상이다. 영화과 학생들을 오랫동안 가르쳐온 한 평론가는 동일한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정리해오라는 과제를 내곤 하는데 학생들이 제출한 스토리가 일치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는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영국의 영화전문지 『싸이트 앤드 싸운드』(Sight & Sound)는 리뷰 지면에 영화 한편의 줄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아마도 자료 가치를 위해—자세히 쓰도록 하는데, 이 과제가 영화에 몰입하는 데 심각한 장애를 초래한다는 필자들의 불평을 읽은 적도 있다. (같은 잡지 최신호에서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극도로 반서사적인 신작 「필름 쏘셜리즘」의 줄거리를 상술하는 과업을 완수한 평론가는 내게 인간승리의 최근 사례로 기억될 참이다.)

망설였던 질문. 영화는 과연 서사에 유능한 매체이긴 한 걸까? 극장용 영화의 99.9%가 내러티브 영화, 그중 대다수는 극영화인 현실에서 이 물음은 “치타는 달리기에 능한가?”만큼 아둔하게 들린다. 줄거리는 저널리즘 비평의 불가결한 구색이며 대중영화의 재미와 의미에 매겨지는 평점은 내막을 들춰보면 주로 이야기의 재미와 의미를 저울질한 결과다. 현대인이 이야기를 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갈증을 문학 대신 영화로 채우고 있다는 가설도 정설로 통한 지 오래다. 비단 소설, 연극, 영화뿐 아니라 음악, 무용, 미술도 각기 다른 수준으로 내러티브-텍스트의 조직을 구현한다고 넓게 본다면, 영화와 서사의 연관은 상대적으로 매우 견고한 고리임에 분명하다.

 

2.1.

그러니 고쳐 묻는 편이 좋겠다. 영화는 서사에 최적화된 예술인가? 외견상 영화만큼 끊임없이 떠드는 것처럼 보이는 예술도 달리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속임수가 있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임의로 책장을 덮었다가 독서를 재개하거나 앞으로 되돌아가기도 하면서 디제씨스 (diegesis, 스토리 안의 허구세계) 내부의 시간을 지배하고 정렬한다. 시간의 주도권이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온전한 상태로 왕복하는 것이다. 미술은 어떠한가? 전시회장에 들어선 조각과 회화의 감상자는 원하는 만큼 작품 앞에 머무를 수 있다. 반면 영화의 시간은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기는 운명이다. 영화는 멈추어 세울 수 없기에 관객은 관람하는 동안 미래와 과거를 향해 동시에 움직이는 괴상한 심리적 처지에 빠진다. 영화 속 현재시제를 살면서도 끊임없이 현재를 향한 향수를 품게 되는 것이다. 즉시 전망하고 반성하는 상반된 인력(引力)에 의해 영화의 서사에는 필연적으로 오차와 단층이 생기는데, 이에 대해 영화의 관객은 책의 독자와 달리 얼마간의 관용을 내면화한다. 프레임 안에서 보이고 들리는 이미지와 음향의 임팩트는 번져나가면서 그 구멍들을 메운다. 거꾸로 말하자면 한편의 영화가 내포한 서사적 구멍의 형태와 배치가 바로 그 영화의 스토리텔링 전략이다. 왜 영화의 서사는 소설보다 성글어 보이는가? 서사의 원형을 세계와 맞서는 영웅의 모험이라고 볼 때, 소설의 본령은 캐릭터의 여정을 줄곧 좇는 인간성의 천착인 데 비해 영화의 특기는 시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2.2.

묘사와 시점. 영화와 여타 서사매체의 이야기 전달과정에서 두드러지는 두 차별점이다. 영화의 숏은 제시일 뿐 묘사가 되기는 어렵다. 즉 스크린에 권총이 보이면 관객은 총신을 뜯어보기보다 누가 언제 저 방아쇠를 당길 것인가 기대하기 시작한다. 그때 권총은 명사가 아닌 동사인 셈이다. 현실에 카메라를 갖다대는 실사영화의 경우 온갖 잡스러운 요소와 우연을 포함하기 마련인데, 이야기 진행의 압력에 떠밀린 관객은 주어진 정보 가운데 심리적 인과관계와 관련된 부분부터 걸러내 이야기를 추출한다. (이 지점에서 관객 개인의 영상 독해력visual literacy에 따라 해석의 편차가 발생한다.) 영화에서 묘사의 대상인 미장쎈은 관람이 끝나고 사후적으로 반추되는 경향이 있다. 현대소설의 시점도 변동이 자유로운 편이지만 영화의 시점은 그야말로 가뭇없이 변화한다. 그것은 거추장스러운, 반드시 설치할 물리적 장소가 필요한 카메라와 조명장비가 감독들로 하여금 발명하게 만든 예술적 해결책이다. 소설의 화자는 제자리에서 빙 둘러보면 그만이지만, 카메라는 프레임 밖을 유추하게 하는 다중시점의 모자이크를 통해서만 한 장면을 완결할 수 있다. 특정시점 숏을 고집하는 몇몇 실험적 시도를 제외하면 보통 영화의 시점은 잘게 부서진 주관의 조각으로 조립된 가상의 객관성을 띤다. 관객의 시야는 한없이 공중그네를 갈아타는 곡예사의 그것처럼 흔들린다. 우리는 타 장르에 비해 방금 끝난 한편의 영화가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객관적 단일시점으로 포괄되거나 뚜렷한 복수의 주관적 시점이 충돌하는 소설과 다른 대목이다. 우리는 영화의 요소를 품사로 치환하려는 기호학의 노력이 부질없음을 확인한 오늘날에도 습관적으로 묻곤 한다. 영화는 산문인가, 운문인가? 나더러 답하라면 영화는 삶의 산문성을 표현하는 운문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또한 연극이나 TV 드라마와도 달리 영화는 부분으로 전체를 암시할 수 있는 제유법이 썩 어울리는 매체다. 영화는 일일이 이야기하지 않기에, 매우 미덥지 못한 동시에 고혹적인 화자다.

 

3.

오해가 없어야겠다. 예술영화와 대중영화를 막론하고, 픽션과 논픽션을 불문하고 씨네마에서 이야기는 중요하다. 다만 영화의 서사를 말할 때 우리는 통상적 의미의 스토리텔링과는 다른 종류의 운동과 의미작용에 관해 말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편의 영화를 훌륭하게 만드는 힘이 스토리의 우수성인 경우는 통념과 달리 드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비평가로부터 낮은 평점을 받는 액션 블록버스터의 서사는 예술영화에 비해 빈약하다기보다 너무 복잡하고 또렷해서 탈인 경우가 많다. 씨나리오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가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를 지시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요컨대 어떤 영화의 내레이션(보이스 오버가 아닌 넓은 의미의 내레이션. 서사의 전달)이 얼마나 유려한가는, 영화를 글로 꼼꼼히 옮겨놓은 스토리와 플롯의 완성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로서 영화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한편의 영화가 여타 서사장르와 동일한 기표와 상징, 음성언어를 쓰면서도 다른 이야기체와 경쟁하기를 멈추고 독자적인 통사론을 발명하는 광경에 크게 고무된다. 개별 작품의 아름다움과 별도로 영화의 역사에서 장-뤽 고다르가, 크리스 마커(Chris Marker)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가, 허우 샤오셴(侯孝賢)이, 홍상수(洪尙秀)가 결정적인 감독인 이유가 거기 있다.

 

4.1.

다시 직업적 넋두리로 돌아오자. 나는 왜 영화의 줄거리를 간추리는 작업의 보람을 잃게 되었나? 역사는 나의 곤경이 당연지사라고 답한다. 영화의 스토리텔링을 단선적 전개로부터 탈선시키려는 노력은 어제오늘의 일도, 실험적인 감독들만의 업무도 아니었다. 고전적 주류 필름메이킹의 대명사인 할리우드의 역사조차 이른바 정연한 ‘씨놉시스’의 그물망을 빠져나오는 방법에 대한 모색이었다. 1940년대 중반 스튜디오 영화에는 이미 플래시백(flashback, 과거 회상) 속 플래시백이 등장한다. 그 무렵 1인칭시점으로만 찍은 「호수의 여인」이 나왔고, 「썬 대로」에는 죽은 자가 화자로 등장했다. (모두 그것을 잊었을 무렵 M. 나이트 샤말란M. Night Shyamalan의 「씩스 쎈스」가 세상을 다시 뒤집는다.) 영화 속 공간을 망망대해 위 구명보트로 제한한다거나 주인공으로 내세운 인물을 초반에 죽여버린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은 이 분야의 태두다.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에는 페데리꼬 펠리니(Federico Fellini), 알랭 레네(Alain Resnais), 장-뤽 고다르 등 유럽 예술영화의 영향이 할리우드로 하여금 내러티브 공식 비틀기에 도전하게 만들었다. 다음 파도는 미국 인디영화가 주류에 대거 수혈된 1990년대에 밀려왔다. 「펄프 픽션」은 플롯의 모험이 박스오피스에 해롭지 않음을 입증했고, 젊은 감독 지망생들은 이야기를 생각하기 전에 구조적 트릭부터 고안하게 됐다. 이는 튀어보려는 저예산영화의 전략에 그치지 않았다. 내러티브 실험의 백화점 같았던 TV 판타지 씨리즈 「트와일라이트 존」과 비디오게임, 코믹스가 스튜디오의 소재 파이프라인으로 흘러들고, 비디오와 DVD의 보급으로 관객의 복습과 분석이 가능한 환경이 형성되면서 다중플롯, 평행우주, 시간여행, 화자의 진술 뒤엎기 등의 서사퍼즐은 주류 할리우드의 일상적 비즈니스가 됐다. 「메멘토」의 관객은 앞으로 가는 액션과 뒤로 가는 액션을 분리해가며 관람한 다음 DVD로 추리를 검산하는 재미를 누렸고, 「나비효과」는 대안적 결말을 DVD 부록에 넣었다. 한때 인물의 주관적 회상과 꿈에 전속돼 있던 플래시백과 플래시포워드(flashforward, 미래로 건너뛰기)는 캐릭터의 심리에 아랑곳없이 단지 구조의 묘미를 위해 영화의 챕터들을 뒤섞게 되었다.

 

4.2.

설상가상(?)으로 어제, 오늘 일도 보태졌다.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영화예술의 지형이 변동했다. 오랜 세월 할리우드라는 이름이 대변해온 영화—이음새 없이 시공을 봉합해 매끈한 환영을 창조하고 심리적 리얼리즘과 복잡한 플롯 맞추기로 쾌감을 제공하는 대중장르 영화 만들기 기술의 첨단이 TV로 이동했다. 스토리텔링의 재미로 승부하는 극장용 장르영화가 「로스트」 「24」 「위기의 여자들」 같은 획기적인 TV 씨리즈를 뛰어넘는 만족을 자아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편, 극장에 가지 않고 영화를 소비할 수 있는 개인용 단말기가 다양해지고 레퍼토리 영화관이 줄어들면서 내러티브가 가장 헐거운 예술 및 실험영화의 한쪽 극단은 인스톨레이션(installation)으로 미술 전시장에 흡수되거나 공공 공간(public space)에 게릴라식으로 출몰하는 팝업 씨네마에 수용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와중에 해가 갈수록 두드러지는 세계영화의 경향은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혼성과 상호관입(相互貫入)이다. 훌륭한 픽션영화는 다큐멘터리를 지향하고 좋은 다큐멘터리는 픽션을 지향한다는 격언은 오랜 금과옥조다. 다큐멘터리 거장 로버트 플래허티(Robert Flaherty)마저 기록영화를 기획하려면 관찰하는 인물을 캐릭터로 인식하고 가상의 스토리 궤적을 그려보는 게 좋다는 충고를 남겼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가 유동적이라는 인식은 그토록 유서깊다. 그러나 21세기 영화가 통과하고 있는 허구와 리얼리티의 혼융 경향에는, 픽션이나 다큐멘터리 어느 한쪽의 장치만으로는 현대적 삶의 복잡함을 장악하기에 중과부적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아니, 진짜 문제는 고갈과 권태감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탄생 2세기에 접어든 지 15년이다. 다큐멘터리는 중립적 관찰과 기록에, 극영화는 더이상 갈데없는 드라마투르기와 매끈하게 정련된 연기에 식상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점이다. 그리고 돈과 철저히 계획된 프로덕션의 제약을 벗어나 우연을 흡수할 기회를 열어주는 디지털 테크놀러지는 이미 영화인들의 손에 들어왔다.

 

4.3.1.

2010년 깐느 영화제에서 나는 이상의 가설을 현실로 마주쳤다. 황금종려상을 차지한 아삐찻뽕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의 「엉클 분미」는 타이 북동부에서 감독이 우연히 주운 팸플릿에서 시작된, 역사의 잔해를 한데 그러모으기 위해 내러티브를 보자기처럼 펼친 형상의 영화였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이분법에 식상한 집단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마이크 리(Mike Leigh)의 진중하고 아름다운 드라마 「세상의 모든 계절」은 기자들에게 결코 「엉클 분미」만한 흥분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자 장커(賈樟柯)의 「상해전기」(I wish I knew)는 전작 「무용」과 「24씨티」에 이어 구술된 역사와 픽션의 섬세한 교직을 보여주었고, 경쟁부문 밖에서 최대 쎈세이션을 몰고 온 미란젤로 프라마르띠노(Michelangelo Frammartino) 감독의 「네번」(Le Quattro Volte)은 “네오리얼리즘과 애니미즘의 조우”라는 수사를 얻었으나, 그렇게 쓴 저널리스트들도 그 영화에서 허구적 서사와 다큐멘테이션을 나누는 시도가 무의미함을 알고 있었다. “오늘날 페이소스는 비극이나 서정시가 아니라 수기(手記)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문학연구자 마조리 가버(Marjorie Garber)의 선언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다. 상업영화 진영에서 이 흐름은 논픽션, 또는 가장된 리얼리티에 기초한 극영화의 기획으로 나타났다. 극장에서 금기시됐던 저해상도 DV(digital video) 이미지가 유튜브와 SNS의 생활화로 대중에게 리얼리티의 물증으로 통용되면서 이를 활용한 「클로버필드」 「파라노말 액티비티」 같은 스릴러가 성공했다.

 

4.3.2.

다큐멘터리스트들은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디지털카메라로 쉽게 일기를 쓸 수 있게 된 그들은 서정성과 주관성, 픽션, 인위적 표현양식에 다큐멘터리를 개방하고 있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집중조명된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라는 새로운 하위장르는, 보이지 않는 진실과 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환영성을 도입한 기록영화의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소식으로만 접했지만, 클리오 바너드(Clio Barnard) 감독은 사건을 재연하면서 실제 인물의 인터뷰를 배우가 립씽크하는 다큐멘터리 「아르보」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사자의 진술을 절대시하는 기록영화의 전통을 흔든 셈이다. 한편 질리언 웨어링(Gillian Wearing) 감독은 자기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고 싶어하는 일반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의 은밀한 꿈을 영화로 찍는 프로젝트 「쎌프 메이드」를 완수했다. 그때 영화 속에 들어온 남녀는 배우일까, 다큐멘터리의 인터뷰이일까? 뤼미에르(Lumière) 형제의 리얼리즘과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éliès)의 표현주의 전통이 밀고 당기는 변증법으로 영화사를 개관한 기존 교과서는 조만간 다시 증보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뤼미에르의 허구성과 멜리에스의 기록성을 기어코 캐내는 방향으로.

 

5.1.

상상해본다.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이 관람의 맥락을 지시하는 표식 이상의 의의를 상실하는 시절이 온다면, 그때 서사적 관점에서 영화와 비견되는 문학장르는 소설도 시도 아닌 에쎄이가 아닐까? 다큐멘터리적 방법론으로 채집한 영상을 주관적인 코멘터리와 어우러지게 하는 ‘에쎄이 필름’은 이미 아녜스 바르다(Agnés Varda), 테런스 데이비스(Terence Davies), 에롤 모리스(Errol Morris), 크리스 마커 같은 씨네아스트들에 의해 가늘고 푸른 지류를 이루며 형식의 벽에 부딪힌 주류영화에 이따금 개안(開眼)의 체험을 선사해왔다. 에쎄이 필름의 입지가 중심부로 이동한다면 영화는 서사의 전횡으로 벗어나 그간 봉인됐던 미지의 예술적 잠재력을 발현하게 될까? 또는 동시대 사회의 집단심성과 유지해온 밀접하다 못해 구속적인 유대를 끊고 미술이나 연극이 앞서 걸어간 길을 뒤따르게 될까? 영화의 영토는 아직 국경을 확정하지 못한 프론티어다. 잠정적으로나마 그 지도의 구획이 그려지는 날, 우리는 21세기 인간사회에서 예술이 점유할 자리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5.2.

영화의 미래는 오리무중이라 치더라도, 에쎄이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이 어느모로 보아도 우스꽝스럽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하리라. 다시 호소하건대 영화의 씨놉시스를 간추리는 작업은 미필적 고의로 인한 오역을 넘어서기 어렵다. 그건 흡사 연애에 대한 상투적 문답을 연상시킨다. 이상형이 어떤 남자예요? 어떤 점이 좋았어요? 언제부터 사랑하는 사이가 됐어요? 열심히 대답을 주워섬기지만 말이 길어질수록 진실과 멀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좌절의 부피만 늘어가는 슬픈 문답들. 결국 나는 다음의 한마디를 호소하기 위해 여기까지 쓴 셈이다. 제게 부디 영화의 줄거리를 묻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