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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한국의 핵발전과 사고사회
홍성태 洪性泰
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저서로 『개발주의를 비판한다』 『대한민국 위험사회』 『민주화의 민주화』 『생명의 강을 위하여』 『토건국가를 개혁하라』 등이 있음.
hongst3@sangji.ac.kr
1. 후꾸시마의 위기
2011년 3월 일본의 후꾸시마(福島) 핵발전소에서 연료봉의 용융(鎔融)과 폭발이 일어났다. 핵발전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의 최악의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또다시 세계가 핵발전소의 위험에 경악하게 되었고, 독일과 이딸리아 등의 나라에서는 핵발전 정책의 폐기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핵발전을 중단하라는 탈핵(脫核) 요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계속해서 핵발전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해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우리는 조만간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될 수도 있다.
흔히 극히 위험한 방사성 폐기물인 핵폐기물의 발생 때문에 핵발전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핵발전은 굳이 핵폐기물이 아니더라도 지속될 수 없다. 무엇보다 인류는 핵발전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고온을 결코 완전히 안전하게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핵발전소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키는 절대적인 위험시설이다. 이제 겨우 57년에 이른 핵발전의 역사에서 이미 이 점은 명확히 드러났다.
세계 최초의 핵발전은 소련에서 이루어졌다. 1954년 6월 27일에 운전을 시작한 오브닌스끄(Obninsk) 핵발전소(흑연감속형원자로)가 인류 최초의 핵발전소다. 소련은 이 시설을 내세우며 자본주의 미국과 달리 자기들은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한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핵발전소의 위험성은 사실상 핵폭탄과 다르지 않다. 소련은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해 위험을 은폐했던 것이다. 세계 최초의 상업용 핵발전은 영국에서 이루어졌다. 1956년 10월 17일부터 가동된 영국의 콜더 홀(Calder Hall) 핵발전소(기체냉각형원자로)가 그것이다. 당시 영국도 핵폭탄이 터지면 책상 밑에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괜찮다고 국민에게 홍보하는 수준이었다. 소련과 영국 두 나라에서 모두 핵발전은 현대 과학기술의 최고봉이라고 선전되었다.
그러나 핵발전은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폭발과 오염으로 요약된다. 핵발전은 방사성 물질인 우라늄을 연료로 이용해 높은 열을 발생시키고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항상 방사능 오염이 일어난다. 나아가 연료봉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엄청난 고온의 연료봉이 녹아서 원자로를 녹이고 발전소를 폭발시킬 수 있다. 이 폭발 자체로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강력한 방사성 물질의 다량 유출에 따른 오염이다. 그 오염의 범위는 사실상 지구 전역에 이른다. 우리 몸이 방사능에 오염되면 살이 녹고, 세포가 죽고, 유전자가 변형되고, 암이 발병되며, 기형아를 출산할 수 있다. 방사능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영원한 지옥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찬핵파는 핵발전소의 폭발이란 100만년에 한번 일어날 사고, 즉 사실상 발생하지 않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는 찬핵파의 주장이 거짓임을 명백히 입증한다. 인류는 불과 57년밖에 되지 않는 핵발전의 역사에서 이미 세차례의 연료봉 용융을 경험했고, 그중에서 두차례는 핵발전소 폭발로 이어져 엄청난 피해와 문제를 일으켰다. 우리는 역사의 교훈에 눈과 귀를 열어야 한다. 현재의 풍요에 영혼을 팔고 미래를 저버려서는 안된다.
최초의 용융 사고는 1979년 3월 2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스리마일 섬에 있는 핵발전소에서 일어났다. 상업운전을 한 지 불과 넉달 만에 기술자의 실수로 연료봉이 녹고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누출된 것이다. 이 사고는 다행히 폭발을 막아 큰 피해가 발생하진 않았다. 그러나 두번째는 달랐다. 1986년 4월 26일 소련(현재의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 있는 핵발전소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이 발전소 역시 1978년 가동을 시작한 곳으로, 여기서도 기술자의 실수로 연료봉이 녹고 급기야 발전소가 폭발해버려 엄청난 양의 방사성 물질이 대기중으로 누출되고 전세계로 퍼졌다. 세번째는 최근에 발생한 일본 후꾸시마 핵발전소 사고다. 여기서는 지진에 의해 핵발전소에 전기공급이 끊긴 것이 일차적인 원인이었다. 이어서 연료봉 용융과 핵발전소 폭발이 일어났으며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대기와 바다로 흘러들어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로 확산됐다.
찬핵파는 핵발전소 자체는 안전한데 인재(人災)나 천재(天災)가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결국 안전한 핵발전소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핵발전소는 자연 속에 건설되며, 그것을 운전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악의 폭발과 오염을 일으킬 수 있으며, 인류의 절멸로 이어질지도 모르는다. 결국 진정한 안전을 원한다면 우리는 즉각 핵발전을 중단해야 한다.
2. 활화산 위의 한국
우리는 핵발전의 위험에서 벗어나 있는가? 그렇지 않다. 한국은 이미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핵발전 의존국이며, 따라서 핵발전소 폭발사고의 가능성이 매우 높은 나라다. 미국, 소련,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 대형사고가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이는 한국이 세계적인 핵발전 대국이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국내 핵발전 관리가 독점과 비밀을 핵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험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으니 우려가 더욱 커지는 것이다.
국내의 핵발전소 현황은 <그림 1>과 같다. 2011년 7월 현재 총 21기를 운영하고 있으며, 총 7기를 건설중이고, 총 2기를 건설할 예정이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한국의 핵발전소는 30기로 늘어나게 된다.
한국은 1978년 4월 경상남도 고리에서 처음으로 핵발전소 상업운전을 시작한 이래 33년 만에 21기의 핵발전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국토의 크기에 비추어봤을 때, 한국은 세계 최고의 핵발전소 밀집국이다. 그만큼 사고가 발생했을 때 피해가 빠르게 확산될 공산이 크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의 핵발전소는 모두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도에 있지만, 생산 전력의 50% 이상을 서울 및 수도권에서 소비한다. 이렇게 전력의 생산지와 소비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핵발전소에 의한 1차파괴에 이어 거대한 송전탑・송전선 건설에 따른 2차파괴의 문제도 심각한 상황이다.
핵발전의 위험은 잘 알려져 있기에 국내에서도 핵발전의 축소와 폐기 요구는 오래전부터 끊이지 않았다. 특히 설계수명이 만료된 고리 1호기와 월성 1호기(경북 경주 소재)에 대한 폐기 요구가 높지만, 정부는 이마저도 연장운전을 하면서 핵발전 확대책을 계속 강행하고 있다.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의 일환으로 2010년 12월말 발표된 <제5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는 다음과 같이 핵발전 확대책을 확정했다. <표 1>에 따르면, 2010년에 전체 발전량에서 31.4%를 차지했던 핵발전은 2024년엔 무려 48.5%로 확대될 것이다. 이에 따라 사고의 위험도 커질 수밖에 없다. 경상도든 전라도든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일어난다면, 서울 및 수도권도 금방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지역의 인구과밀 상황을 고려한다면, 핵발전소의 폭발사고에 따른 혼란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정부의 핵발전 확대책에 필요한 비용은 얼마나 될까? <제5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는 <표 2>와 같이 발전설비 투자비 전망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전체 49조원의 비용 중에서 핵발전이 33조 2218억원으로 무려 68%를 차지한다. 또한 물을 인위적으로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서 하는 양수(揚水)발전은 사실 핵발전의 야간 유휴전력을 이용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역시 핵발전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렇게 보면 핵발전 비용은 33조 4754억원에 이른다. 이에 비해 에너지원별 발전량 전망에서 제시된 신재생 분야는 발전설비 투자비 전망의 표에서 아예 빠져 있다. 정부는 친환경적 전력수급을 추구한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핵발전은 자연에 대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반환경 발전이다. 이런 점에서 <제5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명백히 시대착오적인 핵발전 확대책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 한국의 핵발전소에서도 사고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찬핵파가 후진적이었다고 폄하하는 소련을 차치하더라도, 그들이 숭앙하는 미국과 일본에서 일어난 대형사고가 한국에서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핵발전의 기술이나 관리,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한국은 미국과 일본보다 분명히 뒤떨어져 있다. 두 나라의 사례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자명하다. 그것은 안전한 핵발전소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무서운 활화산 위에 있는데, 현 정부는 아예 그 속으로 뛰어들려는 격이다. 핵발전은 가장 비싸고, 가장 더럽고, 가장 불안한 발전이다. 안전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절대적 위험시설인 핵발전소를 서둘러 폐기해야 한다.
그런데 핵발전소 폐기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핵발전소는 그 자체가 거대한 핵폐기물이므로 완전밀폐 방식으로 폐기된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무려 10만년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핵발전소의 수명은 대체로 30년 정도다. 즉 30년 사용하고는 완전밀폐한 뒤 10만년이나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일이다. 인류의 문명은 길게 보아 1만년 정도 되었고, 그중 공업문명은 25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핵발전소를 10만년이나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겠는가? 그사이에 거대한 지질학적 변동이 일어날 가능성도 대단히 높지 않은가? 우리가 할 일은 핵발전을 하루빨리 중단하는 것이다.
또한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은 문제를 악화시킨다. 핵폐기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을수록 핵발전의 위험은 커지기 때문이다. 이명박정부가 아랍에미리트에 이상한 조건으로 수출한 핵발전소에서 핵폐기물을 반입하게 된다면 위험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런데 이 핵폐기물 처리장 정책이 참여정부에서 강행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참여정부는 탈핵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참여정부는 부안의 격렬한 반대투쟁을 겪은 뒤 주민투표를 통해 경주가 핵폐기물 처리장을 유치하도록 했다. 민주적 선택의 형식을 취하기는 했으나 정책적으로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당시 필자는 이를 비판하며 ‘생태민주주의 없이 참여민주주의 없다’는 제목의 칼럼을 참여연대 홈페이지에 실었다. 요지는 참여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절대적 위험을 안고 있는 핵발전소의 문제를 직시하고 적극적인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핵발전 반대를 핵심으로 하는 생태민주주의의 요구가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에서 핵발전을 강화하면서 참여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막대한 보상을 내걸고 유치경쟁을 촉발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민주화는 생태적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시대의 요구다. 참여정부는 이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해서 실패했음을 지금의 민주세력은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민주주의와 핵발전은 양립할 수 없다. 핵발전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인류에게도 너무나 큰 위험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핵발전의 위험을 제대로 알리고 그 폐지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요구다. 핵발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풍요를 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타락이다. 민주화는 항상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는 영속적 과정이며, 이 점에서 그것은 언제나 ‘민주화의 민주화’로 전개되어야 한다. 생태위기의 시대에 여러 환경문제들에 적극 대응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그중에서도 핵발전 중단은 핵심적인 사안이다.
3. 사고사회의 문제
핵발전은 현대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다. 한때 그것은 현대사회의 위력과 풍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현대사회의 무력(無力)과 위험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찬핵파가 득세하고 있지만 독일은 물론 미국과 일본에서도 핵발전은 더이상 칭송되지 않는다. 몇차례 발생한 심각한 핵발전소 사고가 이런 변화를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에 대한 사회학계의 연구는 핵발전의 위험에 관한 인식을 넘어서 사회를 보는 시각 자체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핵발전이 널리 행해지는 한, 우리는 ‘위험’을 핵심 개념으로 두고 현대사회를 파악해야 한다.
핵발전의 위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79년 스리마일 섬 핵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시작됐다. 그중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페로우(Charles Perrow)의 연구를 주목할 만하다. 그는 연구 결과를 정리해서 1984년에 정상적인 사고(Normal Accidents)라는 책을 출간했다. 본래 사고(事故)란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기술을 이용하면서 그 결과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사고를 늘 겪고 있다. 이런 사고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정상적인 상태의 결과기 때문에 페로우는 이것을 ‘정상적인 사고’라고 한 것이다. 그는 대표적인 예로 핵발전소 사고를 꼽는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핵발전소는 너무나 위험한 기술이며 이것을 다루는 체계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따라서 핵발전소에서는 엄청난 사고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스리마일 섬이나 체르노빌의 사고를 통해 핵발전소를 완전히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었다. 이를 통해 페로우는 핵발전소의 위험을 회피할 방법은 발전소 폐기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페로우의 책보다 조금 뒤에 발표되었지만 훨씬 유명해진 책이 바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의 위험사회(Risikogesellschaft)다. 벡은 페로우를 따라서 오늘날 각종 기술로 인한 사고는 체계에 의해 정상적으로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런 사고를 더이상 기술문명의 부산물이나 비정상적인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되며, 그 기술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사회 자체의 한계에 주목해서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현대사회를 아예 ‘위험사회’라고 부른다. 고도의 위험을 일으킬 기술을 일상적으로 개발하고 사용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현대사회를 파악하는 관점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사회의 개념은 ‘풍요사회’에서 ‘위험사회’로 급속히 바뀌었다.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였다. 벡은 핵발전소 같은 절대적인 위험을 안고 있는 기술을 사용하지 않을 것과 기술의 개발과 사용에 대한 시민 감시의 필요성을 크게 강조했다.
벡의 위험사회에서 핵심적인 기준은 핵발전소다. 그런데 독일과 한국 모두 핵발전소를 갖고 있다고 해서 두 나라를 똑같은 위험사회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벡의 위험사회 개념은 분석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다. 필자는 기술의 위험도와 체계의 정비도를 기준으로 위험사회 개념을 분석적으로 진척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는 <표 3>과 같다.
이 기준에 따라 우리는 현대사회를 4개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독일은 ①에 속한다. 핵발전소 같은 위험한 기술을 사용하지만 그 기술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체계는 잘 정비된 사회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도 핵발전소 폭발사고 같은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가장 나쁜 경우는 위험한 기술을 사용하며 체계가 잘 정비되지 않은 ③이다. 한국은 ③에 속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핵발전소 폭발사고 같은 문제가 더 쉽게 일어날 수 있으며, 또한 그런 경우 대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공산이 크다.
필자는 ③유형은 악성 위험사회로서 ‘사고사회’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기술의 문제가 수시로 전면화되어 대형사고가 빈발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이런 사고사회가 된 것은 무엇보다 박정희의 개발독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경제학자 유인호(兪仁浩)가 지적했듯이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GNP교’를 널리 퍼뜨렸다(「경제성장과 환경파괴」, 『창작과비평』 1973년 가을호). 그것은 다름아닌 성장지상주의였으며, 그 수단이 바로 개발제일주의였다.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성장주의와 개발주의의 화신으로 핵발전을 추구했으며, 나아가 핵발전에 과학주의를 덧씌워 이를 신화화했다. 그 결과 핵발전의 위험을 도외시하면서 막무가내로 핵발전을 추구하는 사고사회가 형성되었다. 이 점에서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강한 위력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핵발전의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지 않고 박정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사고사회 한국을 단순히 성장주의와 개발주의의 산물로만 볼 수는 없다.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더욱 일상적인 차원에서 국민 다수가 무조건 성장주의와 개발주의를 추구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토건국가다. 한국의 핵발전은 막대한 혈세의 탕진과 소중한 국토의 파괴를 구조화한 기형적인 개발국가, 즉 ‘토건국가’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다. 핵발전소와 송전설비의 건설은 그 자체로 엄청난 규모의 토건사업이다. 따라서 이를 주도하는 재벌은 핵발전소 건설을 적극 추구한다. 토건국가의 정경유착 구조가 핵발전 확대책을 이끄는 핵심 동력인 것이다. 한국에서 이른바 ‘핵 마피아’는 단지 핵공학 전문가의 모임이 아니라 이러한 구조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핵발전을 핵공학의 차원에서만 파악한다면 판단 착오인 것이다.
주목할 점은 토건국가가 강화되면서 정민(政民)유착의 구조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민주화 이후에는 정민유착이 거의 과거의 정경유착만큼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정민유착은 정치와 국민이 이권을 매개로 야합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정치는 국민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고 국민은 그 댓가로 정권에 정치적 지지를 주는 것이다. 토건국가에서 그 매개는 물론 대규모 토건사업이다. 토건국가는 토건정치에 의해 작동한다. 절대적인 위험을 안고 있는 핵발전조차 이러한 토건정치의 대상이 되었다. 수천억원에서 수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보상비를 노리고 각지에서 많은 주민들이 핵발전소 건설을 열렬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사고사회 한국의 문제는 그럴싸한 민주적 선택을 통해 전국에서 더욱 깊어지고 있다. 토건국가가 빚어내는 민주주의의 역설을 우리는 핵발전 확대책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경유착과 정민유착의 토건국가가 작동하면서 핵발전 확대책이 강력히 추진되고, 그 결과 개발독재의 무서운 유산인 사고사회의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보통의 위험사회에서도 핵발전소 폭발사고의 위험은 상존한다. 바로 이 때문에 독일은 핵발전소 전면 폐기를 결정한 것이다. 그러니 악성 위험사회에서는 그 위험이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은 핵발전소 전면 폐기를 독일보다 더 서둘러야 할 처지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아울러 한국의 핵발전소들은 지리적으로 대단히 밀집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핵발전소 폭발사고는 다른 나라보다 훨씬 심각한 사고로 순식간에 번질 수 있다. 핵발전의 위험성을 널리, 좀더 정확하게 알려서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을 한시바삐 열어야 한다.
핵발전의 위험은 실로 무서우며 다양하다. 가장 큰 문제는 방사능이다.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어 신체가 그것에 오염되면 사망하거나 병에 걸릴 수 있고 유전자가 변형되기도 한다. 방사성 물질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힘이 줄어든다. 후꾸시마 사고로 갑자기 유명해진 세슘(Cs)은 자연 세슘인 세슘-133이 아니라 핵분열 생성물인 세슘-137이다. 이것이 공기, 물, 식품을 통해 체내로 들어오면 생물체는 세슘-133와 세슘-137을 구별하지 못하고 체내로 흡수한다. 반감기가 30년인 세슘-137은 강한 방사선을 방출해서 암을 유발하기 쉽다. 핵발전소는 이런 방사성 물질의 누출과 오염으로 생태계를 교란하고 파괴한다. 이런 핵발전소나 핵폐기물 처리장을 유치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벼랑 끝에 세우는 일이다.
사실 토건국가 한국의 문제는 참여정부의 대대적인 신도시 정책으로 전국화되었고, 이제 이명박-한나라당 정권의 ‘강 죽이기’로 말미암아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생명의 원천인 소중한 강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는, 그야말로 ‘나라 죽이기’이자 ‘생명 죽이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해 막대한 보상비를 내걸고 핵발전 확대책을 강행한다면 토건국가의 폐해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점차 극심한 사고사회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소중한 생명의 강이 죽어가고 위험천만한 핵발전소가 빠르게 늘어간다. 이 무서운 현실을 직시하고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생태복지국가를 향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4. 생태복지국가의 전망
핵발전에 대한 논의는 단지 현재의 만족이 아니라 미래의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추구할 것인가? 절멸의 위험을 무시하고 풍요를 추구하는 맹목적인 미래인가, 절멸의 위험을 직시하고 풍요를 추구하는 계몽적인 미래인가? 당연히 우리는 계몽적인 미래를 추구해야 한다. 필자는 그것을 ‘생태복지국가’로 제시한다. 복지국가는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사회경제적 성과지만 고전적인 복지국가는 더이상 유지될 수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 생태위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는 생태위기에 올바로 대응하는 복지국가를 이룩해야 한다. 그 한가운데 핵발전 폐기가 자리잡고 있다. 물리적인 면에서 탈핵은 생태복지국가의 출발점이다.
찬핵파는 핵발전이 가장 싸고, 가장 깨끗하고, 가장 안전한 발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핵발전은 폐기물 처리를 감안하면 가장 비싸고, 폭발과 오염을 감안하면 가장 불안하고, 열 오염과 방사능 오염을 감안하면 가장 더러운 발전이다. 흔히 핵발전을 ‘끌 수 없는 불’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불이 아니라 초고온의 열을 내뿜는 강력한 방사성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다. 또 핵발전을 ‘화장실 없는 아파트’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폐기물이 아닌 강력한 방사성 물질을 계속 생산하는 과정이다. 이 물질을 우리가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물론 모든 핵발전소를 일시에 없앨 수는 없다. 이는 엄청난 혼란과 사고를 불러올 것이다. 핵발전소 폐기는 신축 중단과 단계적 폐로(廢爐)로 진행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설계수명을 다한 고리 1호기와 월성 1호기를 폐기하는 것이다. 설계수명을 다한 핵발전소의 연장운영은 극히 심각한 사안이다. 후꾸시마에서 폭발한 핵발전소도 설계수명을 다했으나 연장해서 운영한 것이었다.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일어날 경우 우리가 입을 피해는 너무나 크다. 후꾸시마에서는 21만명이 넘는 주민이 대피했다. 만일 고리 1호기나 월성 1호기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난다면 한국에서는 210만명도 넘는 사람들이 대피해야 할 것이다. 위험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불필요한 비용 지출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투자다.
생태복지국가는 먼 나라나 미래의 전망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과제다. 무엇보다 그것은 재정구조와 정부조직의 개혁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토건국가와 핵발전 확대책의 문제를 개혁해서 복지를 확충하면, 그 자체로 우리는 생태적인 복지국가를 향해 성큼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토건국가와 핵발전 확대책을 강화해서 이득을 얻으려는 세력, 즉 사고사회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 일환으로 우리는 강 죽이기에 맞선 싸움에서처럼 핵발전 확대책을 강행하는 이들의 명단을 기록해서 널리 퍼뜨리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핵발전이 무해한 최상의 발전방식인 것처럼 선전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 원자력문화재단에 주목해야 한다. 원자력문화재단은 매년 100억원이 훌쩍 넘는 막대한 혈세를 지출해 핵발전을 무해한 최상의 발전으로 선전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독일과 일본의 탈핵정책은 완전히 오류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바로 핵발전 선전이다. 지금의 원자력문화재단은 하루빨리 ‘자연력문화재단’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사실 절대적인 위험을 안고 있는 핵발전을 일방적으로 칭송하는 것은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도 원자력문화재단의 활동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정부는 위험한 핵발전이 아니라 안전한 자연력을 널리 홍보하고 지원해야 한다. 핵발전을 폐기하면 새로운 생태적 발전의 길이 활짝 열릴 것이다. 그것이 지금 독일이 선도하고 있는 길이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는 존재다. 근대의 근원적인 문제는 이 엄중한 사실을 잊고 자연의 파괴적 이용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자연에는 한계가 있다. 자연의 파괴적 이용은 자연의 한계를 넘어선 이용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자연은 항상성을 잃게 되고, 결국 자연 속의 존재인 우리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생태위기가 갈수록 심화되는 오늘날, 우리는 유한한 자연이 무한히 존속할 수 있도록 자연의 생태적 이용을 추구해야 한다. 절멸의 위험을 안고 있는 핵발전의 폐기는 그 핵심 조건이다. 눈을 들어 미래를 보고 후손을 보자. 지속 불가능한 핵발전은 속히 폐기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 박사는 과감한 개발을 추진해서 사람들에게 풍요를 선사했다. 만족한 파우스트는 ‘지금 이 순간이여 영원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순간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의 영혼을 가져가기로 계약돼 있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계약을 이행하려는 순간 신이 개입해서 메피스토펠레스를 저지한다. 파우스트가 세상에 이로운 일을 많이 했으니 천국으로 데려가겠다는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근대가 태동하던 무렵의 개발주의에 대한 극적 칭송이다. 그 극단에 핵발전이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태적인 파우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