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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문재인 『문재인의 운명』, 가교 2011
진정성 정치의 부활을 알리는 ‘정치기획’
박창식 朴昌植
『한겨레』 논설위원 cspcsp@hani.co.kr
『문재인의 운명』은 ‘정치기획’ 성격이 강하게 느껴진다. 『성공과 좌절』 『진보의 미래』 같은 노무현 대통령 유고집들이 참여정부 국정기록 성격이 강한 것에 견줘서 하는 말이다.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관계없이 독자 눈높이에서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책의 판매량과 함께 대선주자로서 저자 문재인(文在寅)의 지지율이 의미심장하게 상승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범야권에서 내년 총선·대선 전열정비를 목적으로 꾸린 원탁회의에 저자가 주요 인사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저자가 전국을 돌며 북콘서트를 열어 민감한 정치적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점들이 이 책을 정치기획으로 보도록 하는 정황이다. 그렇다면 『문재인의 운명』은 잘된 정치기획인가 잘못된 정치기획인가?
결론부터 밝힌다면 이 책은 괜찮은 정치기획이다. 이 책은 저자와 노대통령의 순수하고 따뜻한 인간 됨됨이, 대의와 가치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기질 등을 잘 담아내고 있다. 두 사람의 ‘동행의 기록’을 표방한 것도 이를 위해 매우 효율적인 형식이다.
“그분은 내가 살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따뜻하고 가장 치열한 사람이었다. 그분도, 나도 어렵게 컸다.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려 했고,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함께 세상을 바꿔보고 싶었고, 함께 희망을 만들어보고자 애썼다. 그 열망을 안고 참여정부가 출범했다.”(6면) “어릴 적 가난의 기억은 살아가면서 그대로 인생의 교훈이 됐다. 더이상 가난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혼자 잘살고 싶지도 않았다. 어려운 시기에 우리가 받았던 도움처럼 나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었다. 자라서 학생운동을 하게 된 것도, 인권변호사가 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466~67면)
두 사람이 공적 활동에 참여한 동기를 유형화한다면, ‘양심이 가리키는 바’에 따르겠다는 실존주의적 결단이라 할 수 있다. 정치권에서는 그리 흔하지 않은 유형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대개 권력적 지위를 목표로 삼는다. 중학생 때부터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였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욕심 없는 정치’라는 측면에서도 두 사람은 비슷한 매력을 뿜어낸다. 저자는 참여정부의 첫 민정수석을 제의받고 “민정수석으로 끝내겠습니다” “정치하라고 하지 마십시오”라는 두가지 조건을 걸었다(201면). 1년 뒤에는 건강을 핑계로 수석직을 벗어던지고 훌쩍 네팔로 트래킹을 떠났다. ‘자유인’의 모습이었다. 노대통령도 재임중 수시로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했다. 빈말로 하는 게 아니었다. 측근인 최도술 총무비서관의 비리가 불거지자 실제로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많은 정치평론가들은 그것을 노대통령의 벼랑끝 전술이나 승부사 기질로 해석했다. 그와 달리 나는 지위에 대한 집착이 적은 까닭에 내던지는 데도 어려울 게 없다는 이치로 풀고 싶다.
권력의지가 부족한 게 대선주자로서 저자의 결정적인 약점이라는 이야기를 요즘 많이 한다. 가령 김창균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정치에서 다른 스펙은 다 좋은데 권력의지가 없다는 말은 결혼 문제에서 혼숫감은 다 마련됐는데 신붓감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조선일보』 2011.8.3. A34면). 그러나 나는 한 사람의 정치행보를 비평하는 데 권력의지 유무가 그렇게 중요한 잣대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에 나는 저자가 이미 나름의 스타일로 정치행보를 하고 있음을 주목하고 그 문화적 코드를 읽어내는 게 훨씬 쓸모있다고 본다. 사실 권력의지 문제는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가령 금연의 의지가 충만하면 담배를 끊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정치 영역에선 권력의지가 강렬하다고 성공 확률이 반드시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만약 저자가 지금 권력의지가 넘쳐서 총선 출마나 대권 도전을 천명한다면, 되레 인기가 주춤하고 이 책도 잘 안 팔릴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가 제기한 논점에 흥미가 끌린다. 안교수는 유권자가 자신의 이익과 정책을 대표하는 ‘이익 정치’를 추구하는 시기와, 유권자 자신과 공감하고 존재감을 표현하는 ‘진정성 정치’를 추구하는 시기로 구분하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투로 큰소리를 치고 유권자의 지지를 받은 이명박 후보는 ‘이익 정치’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반면 2002년의 노무현 후보는 문화적 정체성을 갖고 유권자를 대변한 후자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안교수는 유권자가 이익 정치를 추구하다가 피로감을 느끼면 진정성 정치로 돌아오곤 한다면서 “정치에 주기가 있다”고 했다(『박근혜 현상』 68~69면). 『문재인의 운명』이 발매 두달도 안돼 15만권이 팔리고 저자의 대선후보 지지율이 야권 1위를 넘보는 최근의 흐름은 진정성 정치의 부활로 설명하는 게 좋을 듯하다. 이건 당연히 ‘노무현 정서’의 부활과 맥락을 같이한다. 촌평을 시작하면서 이 책의 성격을 정치기획으로 보고 싶다고 했다. 『문재인의 운명』은 진정성 정치의 부활 흐름을 타고 있고, 그 불꽃을 새롭게 지펴나가기도 한다는 점에서 완성도 높은 정치기획이다.
하지만 미흡한 구석도 보인다. 무엇보다 참여정부의 한계에 대한 성찰이 약하다는 점이다. 저자가 성찰의 필요성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차분하게 성찰하고 복기할 필요가 있다.”(447면) 하지만 문제는 누가 어떤 수준에서 성찰할 것인가다.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길을 돌아보다’ 꼭지에서 저자는 국가보안법 폐지, 검경 수사권 조정, 이라크 파병, 한미FTA 체결, 교육행정정보씨스템(NEIS) 도입, 양극화와 비정규직 등 여러 갈등과 논란을 죽 되돌아본다. 그러고는 주로 진보개혁진영에서 성찰할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 “우리 진영의 근본주의가 그런 타협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울러 “진보진영이 참여정부에게 신자유주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반대쪽에서 참여정부에 ‘친북좌파’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과 그 속성에서는 매한가지다”라며 경직된 자세를 비판한다. 이어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들이 바라는 개혁을 위해 좀더 전략적인 접근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것이다”라고 덧붙인다.(451, 454, 456면)
정권 담당자 쪽에서 반성할 대목도 언급은 한다. 하지만 진보개혁진영에 요구하는 것과 비교해 그 표현이 추상적이다. “다들 뜻과 의지는 가상했지만 능력 면에서 우리가 최고의 보좌진이었나 생각하면 대통령께 항상 송구할 따름이다. 우리 역량의 부족함과 서투름,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걸 부인하거나 회피할 수는 없다.”(448면)
참여정부의 공과를 성찰할 때는 거기에 어울리는 문법을 택하는 게 좋다. 상대방의 책임은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정권 담당자’ 자신들의 책임은 추상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공평한 접근이 아니다. 정권과 진보개혁진영 사이에서 책임의 무게를 달아본다면 정권 쪽의 책임을 크게 치거나 최소한 쌍방과실로 보는 게 온당할 터다. 역시 참여정부 수뇌의 한사람이던 이해찬 전 총리가 말하는 방식이 차라리 알기 쉽다. “열린우리당이 145석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153석이 되는 바람에 민노당이 소중한지를 전혀 몰랐던 것 같습니다. 민노당도 153석 정당 근처에 가봐야 들러리가 되고 자신의 고유한 역할이 확보가 안되니까, 한나라당보다 더 야당을 하는 것으로 위상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지나고 나서 보니까 그 시절이 대단히 중요했던 때인데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간 잘못이 있습니다. 지나고 나서 반성을 많이 합니다. 약자의 연대라고 하는 것이 얼마만큼 겸허하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어야 합니다.”(유시민・이정희・이해찬・정세균・조승수 좌담 「2011년 복지국가를 말한다」, 『광장』 2011년 신년호, 65면).
노대통령과 가깝게 동행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 시절에 대한 회한’이 아직 덜 정리된 탓일지 모르겠다. 갈등 사안을 놓고 다투던 와중에 맺힌 마음의 응어리가 덜 풀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또는 노대통령 서거 2주기에 맞춰서 책을 낼 일정에 쫓기거나, 책 한권에 모든 것을 담기 어렵다는 실무적인 사정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독자들이 그런 사정을 헤아려주긴 어려운 법이다. 더욱이 저자는 야권 통합과 연대를 위한 범시민사회 원탁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범야권과 시민사회진영 모두가 열린 자세로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위해 뜻을 모아보자고 촉구해야 할 처지다. 책을 증보할 기회가 있다면 이런 대목을 다듬어보는 것도 좋겠다.